요한복음 강해2017. 1. 1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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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37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여기에 등장하는 명절이란 유대인의 삼대 절기 가운데 하나인 장막절을 의미합니다. 장막절의 마지막날에 있었던 사건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 장막절의 마지막 날에는 매우 특별한 종교의식이 펼쳐지곤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모세의 율법에는 장막절 마지막 날에 어떠한 특별 행사를 가지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마지막 날에 특별한 의식을 치르고 있었지요. 그 이유는 구약 시대 히스기야가 남 유다의 왕으로 있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히스기야 터널


히스기야가 남 유다를 다스리던 시대, 북쪽에서 내려온 앗수르 제국의 군대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더 남쪽으로 내려와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였지요. 당시 앗수르 제국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랍사게 장군은 18만 5천 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만 하고 있어도 남 유다는 그들의 손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랍사게 장군이 그와 같은 전략을 세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높은 산 위에 세워진 도시로 천연 요세입니다. 아무리 거대한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하더라도 쉽게 무너트리기가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여호수아 시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지만, 가나안 땅 한 중심에 위치하였던 예루살렘은 이후 다윗이라고 하는 천재적인 군사 전문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점령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토록 예루살렘 성은 군대의 힘만을 가지고는 점령하기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약점이란 식수를 얻을 수 있는 강이나 하천이 예루살렘에는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식수를 비롯한 생활용수를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나와서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샘까지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니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는 예루살렘 성벽을 18만 5천 명의 군인들로 물샐틈 없이 포위만 하고 있으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식수를 얻을 수 없을 것이고 남 유다는 곧 앗수르 제국에 항복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랍사게 장군의 전략은 실패합니다. 물론, 예루살렘에는 식수를 공급할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 성벽 바깥 곧 기혼샘으로부터 지하를 통해 예루살렘 성전까지 물길이 들어올 수 있도록 터널을 만들었고, 그 끝에는 조그마한 연못을 만들어서 물이 고이게 하였습니다. 그 연못의 이름이 바로 실로암입니다. 사람들은 그 터널을 히스기야 왕이 만들었기에 ‘히스기야 터널’이라고 불렀고 유사시에 히스기야 터널이 시작되는 기혼샘의 그 입구를 적군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잘 막아놓기만 하면 예루살렘 성벽을 제 아무리 18만 5천 명의 대군이 층층이 에워싼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안에는 생수가 흘러 들어와 실로암에 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적군의 위협 속에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지켜주었던 것은 성벽의 튼튼함이나 강력한 군대라기보다는 기혼샘으로부터 히스기야 터널으로 통과하여 실로암 연못에 모이는 한 줄기의 생명수였습니다.


여러분은 긴박한 위기의 순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위기의 순간 우리에게 생명의 끈이 되어주는 것은 거대한 성벽이 아닙니다. 크고 화려한 집을 장만하고,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성공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것이 긴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와 우리 가정을 지켜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절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을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가정에 흐르는 조그마한 물줄기, 하나님의 은혜의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개인의 심령과 우리 가정에 머물러 고이게 되는 ‘실로암 연못.’ 바로 그 은혜의 물주기가 참된 위기의 순간 우리를 지켜 주는 생명의 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크고 화려한 장막을 허락하신다면 감사함으로 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재물과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높은 지위를 허락하신다면 감사함으로 그것을 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놀라운 성공의 길로 인도하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그 길을 걸으십시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가정을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도 지켜주리라는 헛된 기대는 버리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개인과 우리 가정에 흘러오는 한 줄기 물길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목마른 자들은 내게로 와서 마시라


히스기야 시대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 조그마한 생명의 물줄기를 통해 예루살렘 백성들이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제국의 군대 18만 5천 명을 하룻밤에 멸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펼쳐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을 보면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사건, 이사야 선지자가 목마른 자들에게 값없이 오라고 초대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을 잊을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장막절의 마지막날 특별한 행사를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막절의 마지막 날이 되면 히스기야 터널을 지나 실로암 연못에 모인 물을 금항아리에 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선두로 하여 물이 가득 찬 금항아리를 들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지요. 대제사장을 선두로 한 그 대열이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면 악기 소기가 들려오면서 시편 113편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시작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시편 113편, 114편, 115편, 116편, 117편, 그리고 드디어 시편 118편까지 찬양이 이어지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남성들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X3) 이렇게 세번 큰 소리로 외치는 그때 대제사장은 실로암 연못에서 가져온 물 항아리를 성전 제단에 쏟아 부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시대 장막절 마지막 날에 있었던 의식입니다.[1]


이러한 의식을 하면서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첫째는 오래 전 히스기야 시대에 임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기억이지요. 18만 5천명의 대군이 몰려오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의 강줄기가 되어 주셨고, 급기야 하루 아침에 모든 적군을 물리쳐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40년의 광야 생활 동안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나왔던 장면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인의 마음에는 또 하나의 마음이 찾아오지 않았을까요? 앗수르의 군대는 오래전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루살렘은 로마라는 새로운 이방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매년 장막절을 보내며 실로암의 물을 성전의 제단에 쏟아 놓으며 유대인의 마음에는 어제의 은혜가 아닌 오늘의 은혜를 향한 갈망. 어제의 구원이 아닌 오늘의 구원을 향한 갈망. 어제의 역사가 아닌 지금도 자신의 눈 앞에 생생하게 펼치지는 오늘의 역사에 대한 갈망. 그것이 유대인의 마음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오늘 우리의 마음과 비슷한 지도 모르지요. 우리 모두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의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 한 줄기 생명의 강줄기를 흘려보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그 모든 경험은 아득한 오래전의 기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은혜가 아니라 오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역사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구원이 아니라 오늘의 구원을 갈망하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기도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흘려보내시는 생명의 강줄기는 쉽게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매년 동일한 장막절 행사에 참여하며 오늘의 은혜를 간구하였던 예수님 시대 예루살렘 백성들의 공허한 마음은 오늘 우리의 마음을 비춰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장막절 행사가 마무리되고 있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비로서 예루살렘 성전 한 중앙에 일어서십니다. 오늘 본문 37절이지요.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히스기야 시대에는 히스기야 터널을 통해 생명의 물이 흘러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에게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여러분 한분 한분의 배에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마음에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심장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단 하나의 조건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 성령의 강줄기를 이야기할 때 여러 가지 조건을 이야기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고, 마음의 죄를 다 회개해야 한다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세상의 관심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을 받는 사람, 곧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사람의 조건을 단 한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38절입니다.


나[예수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39절도 보십시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기에서도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성령의 충만을 입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참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고, 그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아무리 열심히 전도를 해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덧붙이려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교회 출석을 열심히 해야 구원을 받을 것 같고, 예수님을 믿어도 헌금을 힘껏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고, 예수님을 믿어도 열심히 기도하며 종교적인 일에 최선을 다해야 구원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교정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오해는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믿음으로만 되지만, 성령의 충만을 입고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야 할 것처럼 생각해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단 하나의 기준만을 제시하십니다. 그 기준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또 기도한 들,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하여 ‘이제는 됐으니 너에게 성령의 강줄기를 허락하겠다’고 말씀하실까요? 우리가 얼마나 회개하고 또 회개를 해야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하여 ‘이제는 됐다. 너의 마음에 있는 모든 죄를 다 회개하였으니 이제 너에게 성령의 충만을 주겠다’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우리가 얼마나 성결한 삶을 살고 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께서 ‘이제는 됐다고, 너가 그토록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으니 이제는 너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실까요? 우리는 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할 만큼 기도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할 만큼 성결할 수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있는 단 한 가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성경의 충만을 성령의 강줄기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 그 안에서 생수를 마시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성경에서 약속하신 것과 같이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1]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1), 33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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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