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18. 2. 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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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교회를 빗대어 설명하는 여러 가지 비유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 진리의 기둥과 터 등이지요. 오늘 본문은 교회를 비유로 설명하는 본문 가운데 하나로 베드로 사도는 교회를 신령한 집이라고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5a)

 

베드로가 신령한 집을 이야기할 때 그는 유대인들이 신앙 생활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전서가 60년대 초반이나 중반에 쓰여졌다면[1] 예루살렘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제 새롭게 시작된 기독교인들을 향해 예루살렘에 세워진 멋진 성전을 보여주며 그들이 주장하는 유대교를 더욱 힘있게 자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봐라,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한가? 이처럼 유대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반면, 건물도 없이 이번 주에는 이 집에서 다음 주에는 저 집에서 예배드리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볼 때마다 그 위엄과 웅장함에 주눅이 들었을지도 모르지요. 마치 상가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회자나 성도들이 대단한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를 보면 그 마음이 움츠러드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야말로 신령한 집, 곧 살아있는 성전이라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제 아무리 화려해도 그것은 생명력이 하나도 없는 돌과 바위로 쌓은 죽어 있는 건물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는 비록 외적인 화려함도 웅장한 건물도 없지만 그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살아있는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화려한 건물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풍부한 재정이나 성도들의 사회적인 위치나 교회가 소유한 건물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보다 우리들의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우리 가운데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자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Scene One. 성막

 

구약의 역사에서 성전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핵심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놓여 있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요.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백성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제사를 드렸던 성전이 그들의 신앙생활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때로는 그 성전이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역할도 하였다는 역설적인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경험하며 애굽 땅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전, 그들을 시내산으로 데려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약 1년 정도를 머무는데, 하나님은 그곳에서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일을 진행하시지요. 첫번째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고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장소, 곧 성막을 만들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 곧 성막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자 성막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장소가 되었고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자신들의 눈으로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얼마나 영광스러웠는지를 출애굽기가 묘사합니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40:34)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장소가 되었고, 그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교제하고 만나는 영광스러운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였던 성막도 시간이 지나자 그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그들의 눈 앞에 세워져있는 성막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잊어버렸고 성막만이 그들에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실한 믿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여러가지 이방인들의 우상을 함께 섬기고 있었지요. 이에 대한 징벌로 하나님은 블레셋을 통해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블레셋의 침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회개하는 것, 모든 우상 숭배를 벗어버리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 군대가 침공하는 그 위기의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기보다 그들의 손에 있었던 성막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며 기도하기보다 그들의 수중에 있었던 성막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아가기로 결정하지요.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 군대에 크게 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던 성막은 블레셋 군대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날의 패배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큰 슬픔의 소식이었고,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엘리 제사장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위기의 순간 눈에 보이는 성막만을 붙잡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Scene Two. 예루살렘 성전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왕의 시대를 지나며 주변의 그 어느 나라도 쉽게 넘볼 수 없는 매우 강력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 위에 오르자 이스라엘은 국가적인 건축사업을 진행합니다. , 수도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7년 동안의 대공사가 마치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아름다운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모시고 솔로몬 왕을 필두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안에 임재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역대하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 (대하 7:1)

 

처음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되었을 때, 그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은 눈에 보이는 성전만을 바라보았을 뿐, 그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조금씩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성전을 출입하는 것에 만족하며 이방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을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결국 사사시대 눈에 보이는 성막만을 바라보았던 이스라엘에게서 성막을 빼앗아 이방 나라 블레셋에게 넘겨 주셨던 하나님은 이제 이방 민족 바벨론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파괴해버립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고, 오직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죽어 버린 돌이나 흙으로 쌓은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우시는 신령한 집, 곧 살아있는 성전에 대한 비전을 선포하십니다. 바로 그 말씀이 오늘 본문 6절이 인용하는 구절이지요.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시온 산 예루살렘에 세워졌던 성전은 하나님께서 무너트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성전을 세워주실 것인데 그 중심에는 이미 죽어 버린 돌이나 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보배로운 모퉁잇돌, 곧 살아있는 돌이 놓여 있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Scene Three. 신령한 집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건축하실 살아있는 성전의 모퉁잇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4)

 

베드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에게는 버린 바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보배로운 살아있는 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살아있는 성전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그 기초가 살아있는 모퉁잇돌이신 예수님께 든든하게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구체적으로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4b)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5a). 예수님은 저 멀리 계신데 성도들만 많이 모여 있다고 살아있는 성전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살아있는 성전, 곧 신령한 집은 그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 위에 분명히 세워두는 것입니다.[2]

 

우리가 살아있는 돌이요,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는 순간 우리는 화려한 건물, 예산, 성도들의 구성 등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들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성전이, 그리고 교회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트려 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지요. 마치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어 주시고 성전을 만들어 주시니 이스라엘 백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성막과 성전에 더욱 집중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반드시 깨어 주의하라고 경고합니다.

 

또한 부딧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8)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위에 든든히 서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살아있는 성전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는 순간, 그분은 딛고 일어 설 수 있는 모퉁잇돌이 아니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부딧치는 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코 교회의 외형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교회의 외형을 자랑하지도 마십시오. 죽어 있는 돌과 죽어 있는 흙으로 쌓은 성전 건물은 결코 우리의 믿음을 바르게 세워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신령한 집이요, 살아있는 성전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이미 죽어버린 돌이나 흙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교회의 든든한 모퉁이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든든히 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교회의 기초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한 이야기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매우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하시죠.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아름다운 땅을 다스리며 가꾸며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인 인간이 죄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였고,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맙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그러지게 만들었고 그 결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도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 틈을 비집고 죄와 사망과 어둠의 권세가 인간들을 다스리기 시작하였지요.

이제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인간에게 새로운 소망과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 곧 복음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바로 이 복음 위에 든든히 서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 안에는 언제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고 복음이 들려야 합니다. 성도들의 만남 속에서 언제나 복음이 들려야 하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남선교회, 여전도회, 구역모임, 큐티나눔방. 그 외의 모든 모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가정으로 돌아가실 때 여러분의 마음에는 복음의 이야기가 다시금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위에 든든히 선다는 참된 의미입니다.

 

바로 그때,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이 비로서 우리의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교회 안에서 누구를 만나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언제나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들은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풍성한 삶을 살아게 되실 것입니다. 나아가 여러분을 어두운 곳에서 불러 내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바로 여러분을 통해 이 세상에 선포되는 것입니다.

 

 

 



[1] 베드로전서의 저술 시기는 저자에 대한 논의와 엮여 있다. 만일 베드로가 이 서신의 저자라면 저술시기는 주후 60~65년 사이가 될 것이지만, 베드로의 제자가 이 서신의 저자라면 저술 연대는 70년 이후가 된다. 최원준, “거룩한 나그네들을 위한 서신” <야고보서 베전후 유다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개정판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9), 203.

[2] 사도 바울도 베드로와 동일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다마 서로 연결하고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0b-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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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