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시간도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셨는지 열 두 명의 제자들을 여러 마을로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치유하게 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였던 사역을 제자들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전도와 그들의 치유 사역을 경험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소문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몰려듭니다. 그렇게 남자만 약 오천 명이 되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상태에서 또 다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자, 이제 날이 저물어가자 제자들에게 걱정이 찾아옵니다. 곧, 저녁 식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과 열두명의 제자들만 있다면 그것 역시 작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는 지금 큰 무리가 몰려와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을 따라온 이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에 대해 너무도 큰 부담을 느끼며 예수님께 이렇게 제안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먹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제자들의 이야기는 무리들로 하여금 마을과 촌으로 내려가서 각자가 저녁식사를 해결하도록 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조금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이들의 제안은 책임을 피하자는 뜻입니다. 무리들을 데리고 있으면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할 책임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흩으면 개인의 안전과 필요는 각자의 책임이 됩니다. 그러니 일단 제자들은 그 막중한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읽은 12절에서 제자들을 ‘제자’라고 부르지 않고 ‘사도’로 부르는 것이 특이합니다. 본문 12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말하였다’고 되어 있잖아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재하신 뒤에 제자들이 사도로서의 사명을 멋지게 감당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특이하게도 아직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예수님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있는 제자들을 벌써부터 ‘사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단지 배우는 학생이나 제자가 아니라 사도로서, 성도들을 돌보고 교회를 책임지는 사도로서 그들은 자신들을 찾아온 무리들에게 책임을 다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곧 사도들은 무리를 흩어 자신들의 책임을 벗어 버리자고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열 두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도 단호합니다.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제자들의 마음을 정확히 집어 내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을 듣는 순간 열 두 명의 제자들, 아니 열 두 명의 사도들은 그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말지요. 사도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고 여러 마을을 다니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병자를 고치기도 하였지만 남자만 약 오천 명이 되는 사람들을 먹인다는 것은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사명이요, 자신들의 한계를 월등히 뛰어넘는 예수님의 터무니 없는 요구사항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 두 명의 사도들은 변명이라도 하기 위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지요. 13절을 계속 보십시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그 다음이 핵심이지요. “할 수 없사옵나이다” 예수님의 명령, 곧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에 사도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할 수 없사옵나이다”
오늘 본문을 여러 가지로 묵상을 하면서 저는 13절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모습, 아니 사도들의 모습이 오늘날 이 땅의 교회와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그에 따르는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곧, 이 세상에 여전히 몸과 마음과 영혼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고, 이 세상에 여전히 참된 쉼과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땅에 있는 교회는 그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도 능력도 위상도 모두 잃어버린 것이 현실이 아닌가요? 그리하여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명령 앞에 이 땅의 교회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은 아닙니까?
저를 비롯한 이 땅의 모든 목회자들도 동일하게 부르짖으며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열 두 명의 제자들에게 사도라는 위대한 이름이 주어진 것처럼, 우리 목회자들에게도 ‘목사’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칭호에는 반드시 사명이 뒤따르는데 성도들을 말씀으로 먹이며 보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양육할 책임과 사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목사라는 이름을 가진 수많은 이들의 탈선적인 행태는 단지 그들만이 아니라 저를 비롯한 우리 시대의 모든 목회자들이 우리의 내면 안에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영성과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 목회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명령하시지만 우리는 주님께 “할 수 없사옵나이다”라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역장, 교회학교 교사, 일대일지도자 등과 같은 이름들을 가졌기에 교회에서 다른 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사명을 받으신 분들. 가정에서 부모라고 하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책임을 져야하는 그 이름을 가지신 분들. 직장에서 상관, 경영자, 혹은 책임자라는 이름을 가졌기에 조직이 요구하는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모든 분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명령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우리의 두 손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바라보며 “할 수 없사옵나이다”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뼈아픈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공급, 제자들의 나눔
사도의 사명, 곧 무리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명령에 절망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구체적인 행동의 지침을 주시지요. 1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1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 자리에 앉혔습니다. 남자만 오 천명이 되는 큰 무리가 한데 뒤섞여 있을 때에는 그 규모가 쉽게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약 50명씩 자리를 잡고 앉히니 비로소 대략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치자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축사하여 나누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6절이 묘사하는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지금 누구의 손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손에 있지요.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감사와 축복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떼어 누구에게 주시죠?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무리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를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받은 떡과 물고기를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무리들을 약 50명씩 그룹을 지어 앉혀 놓았으니 제자들은 무리들이 앉은 자리를 대략 열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자신이 맡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돌아다니며 예수님께 받은 음식을 계속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역할과 제자들, 곧 사도들의 역할이 너무도 명백하게 구분됩니다. 음식을 주시는 분, 우리 인간의 필요를 공급하여 주시는 분, 곧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원천은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보다 정확히 답한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 주시는 은혜의 원천이 되십니다. 그러면 제자들, 곧 사도들의 역할은 무엇이지요?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축사하여 많은 음식을 만드는 것은 제자들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역할입니다. 제자들, 곧 사도들의 역할은 예수님께서 주신 음식을 받아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받아서 그것을 무리들에게 열심히 나누어 주는 역할입니다.
제자들의 손에는 남자만 오천 명이 되는 큰 무리를 먹일 수 있는 음식이 전혀 없었고, 사도들에게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영적인 풍성함이 전혀 없지만, 그들 곁에는 모든 것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원천,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곁에 계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고, 물고기를 나누어 주시니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무리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은혜의 원천이 되시는 주님께서 지금도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와 떡을 나누어 주시는 장면을 묘사하는 16절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몇 개의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들입니다.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를 어떻게 하셨어요? 첫째로 ‘가지사’ 둘째로 ‘축사하시고’ 셋째로 ‘떼어’ 넷째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 네 가지 동사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지 않으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탁을 나누시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던 바로 그날 밤, (먼저) 떡을 가지시고 (두번째로) 축사하시고 (세번째로) 떼어 (마지막 네번째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 또한 식후에 잔을 가지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 성만찬의 식탁에서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역할은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자신의 살과 피로 우리 인간에게 영혼의 양식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니 제자들은 그 주님으로부터 떡과 잔을 받아 – 제자들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 떡과 잔을 받아 은혜의 식탁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손에 풍성한 떡과 풍성한 물고기가 없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 부모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자녀들에게 나누어 줄 은혜와 사랑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요, 낙심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돌보고 양육해야 할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지만 나에게는 사랑도 부족하고 다른 사람을 선한 길로 인도할 역량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요,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세상이 여러분에게 지워주는 여러 가지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에 나에게는 능력도 없고 지혜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비록 여러분의 손이 텅 비어 있을지라도, 아니 여러분의 손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공급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양손을 내밀어 하늘의 양식을 받을 수 있는 것이요, 내가 마땅히 나누어 주어야 하는 바로 그들에게 우리는 양손을 내밀어 주님께서 주신 하늘의 은총을 베풀어 줄 수가 있습니다.
충만한 은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떼어 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받은 것으로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를 묘사하는 오늘 본문 마지막 17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17절 말씀에는 오병이어 사건의 결과를 두 가지로 묘사합니다. 먼저는 ‘먹고 다 배가 물렀습니다.’ 누가요? 남자만 오천 명 정도 되는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먹고 배불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7절은 또 한 가지 사실을 묘사합니다.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거두었더라’ 이번에는 누가 거두었다는 뜻입니까? 제자들이죠. 열 두 명의 제자들이 열 두 바구니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 모두가 각각 한 바구니씩 음식을 가득 거두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를 손에 잡고 축사하여 나누어 주시자, 먼저는 남자만 약 오천 명이 되는 사람들이 다 먹고 배가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떼어 주시는 떡과 물고기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제자들의 그 바구니도 모두 가득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예수님의 갚진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풍성,’ 곧 ‘충만한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의 선물은 그것을 누리는 사람들에게도 충만한 만족이 되지만, 또한 예수님의 그 선물을 나누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일꾼들에게도 그들의 바구니가 차고 넘치는 풍성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의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무거워져 그 옛날 벳새다의 빈 들에서 어떻게 해서 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하다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명령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할 수 없사옵나이다” 부르짖을 수밖에 없던 제자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현실이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여러분의 마음을 인색하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비어 있는 손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숨기지 마십시오. 그 대신 지금도 여러 가지 면에서 궁핍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 충만한 은혜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텅 비어 있는 여러분의 두 손을 주님께 벌려 주님께서 떼어 주시는 떡과 주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물고기와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잔을 받으십시오.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지만 지금도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를 부어 주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가정을 축복하고, 여러분은 직장을 축복하고, 여러분은 교회를 축복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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