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0. 3. 24. 14:05
반응형

독일의 화가 알브레쉬트 뒬러(Albrecht Durer)가 그린 <기도하는 손>(praying hands)이라는 작품을 여러분들도 한번쯤은 다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유례와 관련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뒬러의 가정은 모두 열 여덟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광부로서 열심히 일했지만 18명의 자녀들을 풍족하게 양육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18명의 자녀들 가운데 두 명의 아들이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 두 아들 가운데 형의 이름은 알버트(Albert)였고, 동생의 이름이 알브레쉬트였습니다. 이 두 명의 형제는 자신들의 재능을 살려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가정 형편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두 형제는 깊은 고민 끝에 하나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먼저 한 사람이 미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은 아버지와 함께 광산에서 일을 하며 경제적으로 돕자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한 사람이 미술 공부를 마치면 그 다음에는 순서를 바꾸어 다른 사람도 미술을 공부할 수 있도록 서로 돕기로 계획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동생이었던 알브레쉬트는 미술 학교에 입학하였고 동생의 공부를 뒷받침하기 위해 형 알버트는 광산에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약 4년 정도가 흐른 뒤 드디어 동생 알브레쉬트 뒬러는 점차 독일 전역에서 명성을 날리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자, 이제 알브레쉬트는 고향에 돌아와 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제는 형이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할 차례라고 내가 최대한 형을 뒷바라지해 주겠다고 이야기하자, 형 알버트는 지금까지 숨겨두었던 자신의 손을 내어 놓으며 말합니다. ‘아니야, 나는 너무 늦어버렸구나. 나의 손은 이미 너무도 상하여 지금 너를 위한 축배도 잘 들 수가 없단다.’ 그러면서 형 알버트 뒬러는 광산에서 일하며 이미 다 상해버린 자신의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손은 이미 다 망가졌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 저의 동생만큼은 저를 대신하여 위대한 화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장면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동생 알브레쉬트 뒬러는 뼈 마디마디마다 상해버린 형의 손을 그리기 시작했고 바로 그것이 약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기도의 영감을 불어넣는 위대한 작품 <기도하는 손>이 되었던 것입니다. 

훗날 동생 알브레쉬트 뒬러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손은 가장 깨끗하고
기도하는 손은 가장 아름답다. 
기도하는 자리야말로 가장 위대한 자리요 
기도하는 자리야말로 가장 고귀한 자리다. 


밤중에 찾아온 친구

하루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른바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는 어느 날 밤 예상치 못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6절입니다.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그런데 이 지점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본문에 등장하는 비유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알아 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자신을 방문한 친구를 대접하는 일을 자신의 체면과 연관시켜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친구관계라면 마땅히, 제 아무리 늦은 밤시간이라 하더라도 도움을 구하며 방문한 친구를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시되던 시대였습니다. 개인주의가 가득한 오늘날의 시대와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문화적 배경이지요. 그래서 예수님 시대 팔레스타인에서는 긴 여행 중에 하룻밤 머물 곳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당당하게 친구의 집에 찾아가기도 하였고, 친구의 방문을 받은 사람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를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친구를 대접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여기나면 자신의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다급한 마음에 친구를 찾아온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가? 이러한 생각이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두루 퍼져있던 공감대였습니다. 

자, 이러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이제 친구가 찾아왔으니 이제 그 친구를 맞이하여 극진히 대접할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지금은 한 밤 중입니다. 밤늦은 시간까지 여행을 했으니 그 친구는 분명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6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그 남자는 이미 저녁식사를 끝냈을 것입니다. 이미 가장으로서 식구들에게 음식을 다 먹이고, 그날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모두 마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온 가족이 평안하게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여유롭게 마무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느닷없이 찾아온 친구로 말미암아 그 남자에게는 또다시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 주워졌고 이제 평안할 것으로 기대했던 그날의 밤시간은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남자는 그 깊은 밤 시간에 음식을 구하기 위해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가 당하는 많은 어려움과 괴로움은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이 남자와 같이 예상치 못했던 시간,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느닷없이 우리에게 닥쳐오는 경우가 너무도 많지 않은가요? 물론, 우리가 실수를 하고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여 곤란을 당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정도면 이제 좀 쉴 수 있을 거라고, 이정도 열심히 일했으면 이제는 나에게 보상이 올 거라고, 이렇게 조금만 더 달리다 보면 곧 목표했던 바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제 목표했던 지점이 거의 눈 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이는 그때 느닷없이 찾아온 재난, 느닷없이 찾아온 질병, 느닷없이 찾아온 실직, 느닷없이 찾아온 사고, 느닷없이 찾아온 밤손님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발을 동동 굴리며 괴로움을 겪는 것이 우리의 삶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에는 한 남자를 밤 늦게 찾아와 그의 평안한 저녁을 망쳐버린 친구도 등장하지만, 그에게 있었던 또 한 사람의 친구 – 곧 그가 그 곤궁한 상황에서도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 또 한 사람의 친구가 곁에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너희에게 누가 있다고요? ‘벗이 있어요’, ‘친구가 있습니다!’ 말씀 드렸잖아요. 예수님 시대 친구란 다급한 처지에 처해있을 때 나에게 달려와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사람이었어요. 

5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말한다면, 7절을 계속보십시오. “그 친구가 집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그 다음 단어가 핵심입니다. “그렇게 말하겠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도 뻔합니다. “아니요.” 이 세상에 인간의 탈을 쓰고 친구가 다급한 마음으로 찾아와서 도움을 구하는데 밤늦게 좀 왔다는 거,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 잠궈두었던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 식구들이 좀 깬다는 것, 그런 사소한 이유로 친구의 요청을 거절할 친구가 도대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시대에 명확한 대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느닷없이 찾아온 재앙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삶에 느닷없이 찾아오는 좌절과 아픔이 있으시나요? 여러분의 삶에 느닷없이 찾아와 밤늦은 시간에 발을 동동거리게 만드는 삶의 문제가 있으십니까? 바로 그 순간, 여러분 곁에 좋은 친구가 있다는 사실 – 그분은 여러분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분은 사소한 번거러움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그분은 제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여러분의 요청을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주신다는 사실 – 곧, 여러분 곁에는 가장 좋은 친구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이 한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간청함을 인하여

예수님은 ‘밤늦게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친구가 계시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든 주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잘못 해석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합니다. 문제가 되는 표현은 바로 8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8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이 말씀은 당시의 문화에서는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벗됨으로 인하여 일어나 주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의도는 이것입니다. 설령, 당연히 친구이기에 일어나 줄 것이지만, 설령 친구라는 이유로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시죠?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주리라” 그런데 이 구절을 너무도 많은 분들이 잘못 해석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에 등장하는 ‘간청함’이라는 단어는 한글 번역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어요. 헬라어로 ‘아나이데이아’라는 단어인데, 성서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 지 논쟁이 참 많습니다. 자, 복잡한 문법적인 설명은 다 뒤로하고 최근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에 따른 결론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8절에 등장하는 ‘그 간청함’이라는 말의 뜻은 밤늦게 친구를 찾아와 지속적으로 간청하며 떼를 쓰는 그 행위 때문에 요구를 들어준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의 요구사항을 얻어내기 위해 떼를 쓰는 기도를 하라고 이 본문을 이해하면 잘못된 해석입니다. 8절에 등장하는 ‘그 간청함’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가 밤늦은 시간에 친구를 찾아와 간청할 수밖에 없는 그의 다급한 상황, 곧 그의 간절한 처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의도는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으로 말미암아 한밤중에 발을 동동거릴 수밖에 없는 그의 딱한 처지를 보아서라도 그 밤에 일어나 음식을 내어주지 않겠느냐는 말씀인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 본문 8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와 형편도 다 보고계시며 우리의 딱한 현실을 불쌍히 여겨 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라는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마치신 후 이 비유의 적용점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세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9절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그러므로 여러분,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저 당당하게 우리의 좋은 친구되시는 그분 앞에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손에 나를 찾아온 손님에게 먹일 양식이 없어도, 우리에게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처지와 형편을 아시는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이 계시니 그분께 나아가 구하십시오. 
도대체 어디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 알 수 없고, 도대체 어디로 가야 나의 인생길이 기쁨과 행복의 길이 될 수 있을지 알지 못하여도, 우리에게는 좋은 친구가 되시는 주님이 계시니 그 주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때로는 우리 인생의 문이 모두 굳게 닫혀 도저히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일 지라도. 이곳 저곳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우리에게는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도 없고 문을 밀어낼 힘도 없으니 좌절하고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가 있을 지라도, 여러분 곁에는 여전히 여러분의 처지와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 계시니 주님께 나아가 인생의 문을 두드리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10절)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서 이정도만 말씀하셔도 기도에 대해 충분히 가르쳐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에 대한 하나의 비유를 더 말씀해 주십니다. 친구의 비유에 덧붙여 이번에는 아버지의 비유를 들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네, 여기에 아버지가 등장하네요. 11절 말씀을 계속보십시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이번에는 문화적인 배경과 상관 없이 여러분도 그 대답을 쉽게 아시겠죠?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무슨 말씀이십니까?어느 아버지가 생선을 달라는 아들에게 뱀을 주겠습니까?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아버지는 당연히 생선을 줄뿐만 아니라 구하지 않은 돼지 고기도 구워주고, 소고기도 구워주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12절입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을 달라는 아들에게, 곧 계란을 달라는 아들에게 전갈을 주는 아버지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계란을 달라고 하면 당연히 계란도 주고 그 계란을 낳은 닭까지도 잡아서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요구대로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요구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해주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교훈을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절)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우리 곁에는 언제나 놓은 친구가 되시는 주님이 계신 것이요, 우리의 좋은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하였던 알브레쉬트 뒬러의 <기도하는 손>(praying hands)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저 손의 주인공 형 알버트 뒬러는 동생을 위하여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광산에서 일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손 마디 마디는 어그러지고 망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형 알버트 뒬러는 자신의 망가지는 손을 바라보며 더욱 간절히 동생 알브레쉬트를 위해 기도하였겠지요. ‘하나님, 저의 손은 점점 상하여 이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 저의 동생만큼은 저를 대신하여 위대한 화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알버트가 간절히 기도할 때 그의 좋은 친구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다 듣고 계셨습니다. 알버트가 간절히 기도할 대 그의 하늘 아버지가 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형 알버트가 기도하는 것처럼 그의 동생을 위대한 화가로 만들어 주셨지요. 그러나 형 알버트의 좋은 친구이며 그의 좋은 아버지가 되셨던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 정도 응답으로 만족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알버트 뒬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가 기도하는 대로 동생을 위대한 화가로 만들어주신 것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알버트에게 주십니다. 곧, 알버트의 두 손이 멋진 그림을 그리지는 못할지라도 그 대신 그의 기도하는 두 손을 화폭에 담아 약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작품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두 손은 지금 어떠한 모습이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손이 어떠한 모습이든 상관 없이 알버트의 손과 같이 여러분의 두 손을 기도하는 손으로 바꾸지 않으시겠습니까? 알버트의 손과 같이 여러분의 두 손을 모아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시는 주님께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알버트의 손과 같이 여러분의 두 손을 모아 우리의 좋은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손이 어떠한 모습이든 상관 없이 우리가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거룩한 기도의 손을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우리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여 주십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