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0. 6. 3. 14:24

우리가 믿음의 표준으로 삼는 성경은 다른 책과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이 갖는 독특한 특징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예언과 성취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예언이 기록되어 있고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도 보여줍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 12: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처음 말씀하실 때부터 예언의 말씀을 주셨던 겁니다. ‘내가 너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만들 거야’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이르렀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을 때, 이미 75세 되었던 아브라함에게는 자녀들도 많고 그들이 낳은 자손들도 많이 있었나요?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나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단 한 사람의 아들도 없었고, 단 한 평의 땅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들었고, 그 예언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떤 분은 젊은 시절 최선을 다해 살아왔어요. 그래서 이제는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가정적으로도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그만 그 자신의 몸에 못쓸 병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절망하죠. 바로 그때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50:15) 

또 어떤 분은 모든 것이 평안하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 사랑하는 자녀가 방황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꾸 그릇된 길로 가요. 바로 그때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듣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 22:6) 

또 어떤 분은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마음에는 큰 근심과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바로 가족의 구원을 위한 기도이지요. 자기 자신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지만 남편과 자녀들에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그 마음을 닫아버려요. 바로 그때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처럼 성경은 예언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위대한 점은 성경이 하나님의 놀라운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예언을 기록하고 있지만, 더불어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장면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참으로 위대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놀라운 예언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놀라운 예언이 이루어지는 위대한 성취의 사건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자손을 통해 큰 민족을 만드시겠다는 예언이요,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굳게 믿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의 기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자신의 예언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여금 큰 민족 이스라엘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내용이 구약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예언과 성취의 책’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귓가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들려주신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위대하게 성취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민수기의 말씀은 이렇게 선언하시죠.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민 23:19) 


놀라운 예언: 주의 은혜의 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바로 “예언과 성취”의 관점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사역을 ‘예언과 성취’로 설명하시는 장면이지요. 자, 이 이야기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시면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16절과 17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는 사람이 성경을 드리는데 이사야서의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우연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그다음을 주목하세요.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예수님께서 의도를 갖고 찾아서 읽으셨어요. 예수님께서 찾아서 읽은 구절은 구약성경에서 참으로 손에 꼽을 만큼 놀라운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서 읽으신 놀라운 예언의 말씀이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먼저 18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18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사역의 목적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가난한 자는 상대적인 빈곤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가난한 자’는 오늘 하루의 식사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굶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곧 절대적인 빈곤자를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가난한 자’는 ‘거지’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은 계속해서 가난한 자, 곧 거지들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3가지 모습으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그 다음에 가난한 자의 구체적인 모습, 그 첫 번째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그 어떤 것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육신에 질병이 찾아와요. 그러면 우리의 몸은 질병의 포로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에 탐심과 시기심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탐심과 시기심의 포로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의 영혼 역시 어둠과 죄의 세력이 점령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어둠의 세력, 죄의 세력의 포로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가난한 자의 구체적인 모습, 그 두 번째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육신의 눈이 어두워지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고단해집니다. 그런데 말씀드렸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가난한 자는 상대적인 빈곤자가 아니라 절대적인 빈곤자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눈이 어두워진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눈먼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의 눈에 빛이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고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 비참한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가난한 자의 구체적인 모습, 그 마지막 세 번째를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여기서 ‘눌렸다’는 것은 ‘상하고 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느 CEO가 인생을 다섯개의 공을 동시에 돌리는 저글링으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개의 공을 계속해서 공중에 던져서 그 하나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저글링이잖아요. 그런데 인생이란 다섯 개의 공을 계속해서 돌리는 저글링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섯 개의 공이란 직장, 가족, 건강, 친구, 그리고 영혼입니다. 인생을 저글링으로 비유하면서 그는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다섯 개의 공 가운데 직장이라는 단 하나의 공은 고무공이어서 바닥에 떨어지더라도 다시 튀어 오를 수 있지만, 나머지 4개의 공은 모두 유리로 만들어져서 바닥에 떨어트리는 순간 깨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 속에 가정이라는 공이 떨어져서 깨어지고 말아요. 때로는 건강이라는 공이 떨여져 깨어질 때도 있고요, 때로는 친구 관계가 그리고 어느 때는 나의 영혼이 상하고 깨어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놀라운 예언의 말씀이 간절히 필요하신 분들은 안 계십니까? 매주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참된 예배의 감격을 잃어버린 분이 우리 가운데는 안 계십니까? 여러 가지 교회의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있지만 나의 마음속에 참된 성령의 능력은 상실해버린 분은 이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한 지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새롭게 되는 참된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신 분들은 안 계시나요? 
아니, 오히려 포로된 자가 되어서 우리의 육신은 온갖 질병에 붙잡혀 있고, 우리의 마음은 온갖 탐심과 시기심에 붙잡혀 있으며, 우리의 영혼은 여전히 어두움의 세력에 붙잡혀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내가 육신의 눈을 열려 있어서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의 지혜는 잘 알고 있지만, 영적이고 신령한 일에는 나의 눈이 완전히 막혀 그 무엇도 바라보지 못하는 분들은 안 계시나요? 눌린 자, 곧 깨어진 자의 모습 - 가정이 깨어지고, 건강이 깨어지고, 친구 관계가 깨어지고, 나아가 나의 영혼도 깨어진 바로 그 모습 – 에 여러분 자신이 놓여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는 놀라운 예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은 가난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포로 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눈이 멀어버린 우리를 다시 보게 하시고, 상하고 깨어져버린 우리의 가정과 건강과 영혼을 새롭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위대한 성취 :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입니다. 19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여기 나오는 주의 은혜의 해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희년을 이야기합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안식일을 맞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모든 노동을 쉬도록 되어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7년에 한 번씩 안식년을 정하여 농사일을 쉬어야 합니다. 지나온 6년을 돌이켜보며 다시금 모든 것을 회복하는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7년이 7번 지난 후에는 50년에 한 번씩 희년을 맞이하는데, 이 때는 모든 것을 처음 상태로 되돌려 놓습니다. 만약 누군가 다른 사람의 종이 되었다면 희년을 맞이하여 다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어쩔 수 없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면 그는 희년이 되었을 때 그 땅을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 안식년, 그리고 희년을 제정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주기적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쉼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던 때에 아무리 매주 안식일을 맞이하더라도 참된 쉼과 회복을 경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7년에 한번씩 안식년은 주기적으로 돌아오지만 지나온 6년을 돌아보며 회복하는 역사가 일어나지를 않았어요. 시간이 흐르다 보면 50년에 한 번씩 희년이 돌아오기는 하지만 참으로 노예들을 해방하고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참된 회복의 과정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성령에 붙들린 한 사람을 세상에 보내주실 것인데, 그를 통해 다시금 회복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이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다시금 선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신 후, 회당에 모여 있던 모든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어떠한 말씀을 하시는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자신이 읽으셨던 이사야서의 예언보다 훨씬 더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21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사야의 말씀이 예언된 지 약 50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기까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읽으신 이 말씀은 예언이었습니다.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읽으시고는 이제부터는 이 말씀이 더 이상 예언이나, 약속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사야가 전했던 놀라운 예언의 말씀은 위대한 성취의 말씀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이 말씀은 단지 놀라운 예언의 말씀만이 아닙니다. 장래의 어느 순간 이루어질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여러분에게 이미 이르렀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죄하는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영적으로 앞을 못 보는 소경이 아니라 영적인 일과 신령한 일에 대해 밝히 아는 지혜가 생겼어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깨어진 관계들은 치유되고 회복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라” 

여러분, 설교의 초입에 말씀드렸던 아브라함의 예를 다시 한번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자녀로 말미암아 큰 민족이 되리라는 예언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의 생을 마감할 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자녀는 10명도 아니고, 5명도 아니고 ‘이삭’이라는 이름의 아들 단 한 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생을 마감할 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가나안 땅이라고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매장했던 막벨라 동굴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이삭이라는 아들 한 명은 큰 민족이라는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매장되어 있는 한두 평 남직의 막벨라 굴은 가나안 땅 전체를 주시겠다는 예언의 성취로 보기 어려워요.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삭 한 사람이 남겨진 것은 예언이 성취되는 첫걸음입니다. 한 두 평 남직한 막벨라 굴은 가나안 땅 전체를 주시겠다는 예언이 성취되는 첫 단추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게 자신의 예언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전히 포로된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눈 먼자를 보게 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보이지 않으시나요? 산산이 깨어진 나의 건강과, 나의 가정과, 나의 친구 관계와 나아가 나의 영혼이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 도저히 보이지 않으시나요?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남겨놓으신 이삭 한 사람을 바라보시고, 한 두 평 남직한 막벨라 굴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 놀라운 예언의 말씀에 대한 위대한 성취를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시마다 때마다 꼭 필요한 예언의 말씀을 들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고 의심이 많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는 예수님의 분명한 말씀을 확신하게 하시고, 이미 우리의 삶 속에서 시작하신 위대한 성취의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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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