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19. 7. 2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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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쁘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바쁜 일상을 살아갑니다.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가보고 싶은 곳을 가지도 못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아가지도 못합니다. 심지어 현대인들은 바쁘다는 것을 자신이 능력이 있고 성실하다는 증거로 제시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아무게는 무척 바쁜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능력이 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하루의 일과가 그렇게 바쁘게 흘러가다 보니 어느새 우리의 마음도 분주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14장 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분주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우리의 삶이 바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마음까지도 분주하여, 우리의 마음까지도 조급해진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판단과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여러분의 삶이 제 아무리 치열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할 때 여러분에게 조급한 마음이나 분주한 마음이 다 사라지고 그 대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강, 마음의 평안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님께서 하루는 마르다가 살고 있던 마을에 들어가셨고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였던 마르다의 마음은 매우 순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을에 오셨을 때 식사 한끼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 곧 마르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우리가 마르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마르다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사람들은 대략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마르다는 예수님 한 사람만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38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그들이 길 갈 때에” 여기에 등장하는 그들은 예수님을 비롯하여 제자들까지 포함하는 사람들이었겠지요. 그러면 대략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 두 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최소한 예수님을 포함한 남성 열세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38절에 등장하는 “그들”의 숫자를 그저 열 셋 정도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두 명씩 나누어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파송하신 제자들은 열 두 명이 아니라 칠십 명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칠십인 전도대를 두 명씩 파송하였고 그들이 돌아온 이후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누가복음 10장의 흐름입니다. 그러니 지금 마르다의 집에 들어간 성인 남성의 수는 최소한 열 세 명이요 많게는 약 칠십명에 이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주부 여러분 한번 대답해 보시겠습니까? 성인 남성 칠십명이 지금 당장 여러분의 집에 방문하였고 여러분이 그들에게 식사 한끼를 대접해야 한다면 여러분 가운데 마음이 조급하거자 분주해지지 않으실 분이 과연 몇 분이나 계실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 40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그럼요,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방문했으니 당연히 준비하는 일이 많을 수 밖에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40절을 계속 보십시오. 해야 할 일이 많아 그녀의 마음이 “분주한지라”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것은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일이 많아 그만 그녀의 마음이 분주해졌습니다. 이제 조급해진 마음에 주변 사람들을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오늘 본문 40절 말씀을 다시 한번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마르다는 그 마음이 분주해지기 시작하자, 먼저 자신의 동생 마리아를 향한 불평합니다. 마르다 자신은 수십명의 식사를 갑자기 준비하느라 너무 바쁜데 자기 동생 마리아는 한가하게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자신을 돕지 않는 동생을 향해 분노를 터트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40절에 등장하는 마르다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는 지금 동생에게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40절에 마르다가 하는 이야기를 다시 보십시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고 있는데,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왜 주님께서는 그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도와 주라 말씀하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마르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 보면 그는 지금 누구에게 화가 났습니까? 물론, 동생 마리아에게도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예수님께 화를 내고 있어요. 

예수님이 너무도 좋아서 그 주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셨는데, 정작 마음이 분주해지자 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생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나아가 자신이 초대한 예수님을 향해 분노를 터트리는 마르다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안에서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으시나요? 
처음에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선택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식구들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였고 많은 것을 헌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흐르며 매일의 바쁜 일과가 늘 지속되는 일상이 되자 어느덧 나의 마음까지도 분주해져 자신의 진심과 자신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가족들에게 오히려 분노의 화살을 날리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으십니까? 
처음에는 나의 직장과 나의 일터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였고 그 안에서 보람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자 매일의 바쁜 일과는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고 어느덧 나의 마음까지도 분주해져서 나의 모든 수고와 열심이 충분히 인정받고 보상받지 못한다 여기며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으십니까?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을 느꼈고 그러한 내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감사의 이유가 되었건만, 점차 교회에서 감당해야 하는 봉사의 종류와 양이 늘어나면서 어느덧 나의 마음까지도 분주하여 교회에서 만나는 주변 성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나아가 예수님을 향해서도 불평과 불만을 쏟아놓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분주해지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이 조급해지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내 곁에 있는 이웃을 향한 배려도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르다는 자신의 마음이 분주해지자 먼저 동생 마리아를 향해 불평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도 공격적인 언어를 사용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마르다의 마음이 분주했던 그때 마르다의 초대를 받아 그곳에 계셨던 예수님의 마음에는 여전히 여유가 넘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다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시며 그녀의 마음에 분주함이 사라지고 다시금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위한 배려의 마음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본문 41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이름을 따뜻하게 두 번 불러주시네요. “마르다야 마르다야”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하여 주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구나.’ ‘마르다야 너가 일이 많아서 걱정도 되고 참 힘들겠구나.’ 그렇게 마르다의 입장을 이해해 주신 뒤 이제 그녀의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도록 처방을 내려 주십니다. 42절입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예수님의 해법이 무엇입니까? 지금 수십명의 장정들을 먹이는데 잔칫상 차리지 않아도 되니 그저 몇 가지 – 김치에 된장국 – 이면 족하고, 그것도 준비하기에 힘들면 그저 한 가지 – 컵라면에 뜨거운 물만 – 부어주어도 충분하다, 이것이 예수님의 처방입니다. 

사람들은 일을 하다 보면 조금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예수님께서 여러 가정을 방문하셨지만 마르다의 집에 가셨을 때 최고의 식사를 대접받으셨다는 이런 이야기가 마르다는 듣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평가나 이러한 관심은 예수님의 평가나 예수님의 관심과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마르다야 음식 종류를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충분하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설마 여러 마을과 여러 가정을 돌아다니면서 어느 가정은 해산물로 전골을 내어 왔고, 어느 가정은 일등급 고기로 구이를 내어 왔고, 어느 가정은 식재료는 평범했지만 음식 솜씨가 뛰어나서 간이 내입에 딱 맞았다고 그렇게 평가하며 다니실까요? 수십명의 장정들을 먹이기에는 지금 준비된 것이 없어 마르다가 그저 컵라면에 뜨거운 물만 부어서 드린다고 예수님께서 무슨 식사 대접을 이렇게 하냐고 지적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의 실천이 어떠한 것인지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최고의 음식으로 대접하고 싶은 것이 비록 마르다의 마음이었지만 그렇게 욕심을 부리다 그만 마음까지 분주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불평을 발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쏳아낸다면 예수님은 그러한 섬김과 봉사를 기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비록 적은 것이라도, 아니 딱 하나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한다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섬김과 봉사를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이 분주해지지 않을 정도로 일을 줄이십시오. 우리의 손과 발은 열심히 움직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손과 발을 넘어서서 우리의 마음까지도 분주해지는 지점에 이르렀다면,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고 불평을 쏟아내어 오히려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친다면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 하더라도 충분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여러분의 일을 줄이십시오. 그리하여 단 한 가지 봉사만을 하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여유가 가득할 때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섬김과 봉사를 기쁘게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택하라

예수님은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에게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 하더라도 충분하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매우 중요한 권면을 마르다에게 주십니다. 42절 뒷부분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예수님께서 마리아는 칭찬하시고, 반면에 마르다는 꾸짖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마르다에 대한 책망이나 꾸짖음으로 이해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마르다를 위한 예수님의 권면입니다. ‘너도, 마르다 너도 좋은 것은 선택하여 그것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라는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좋은 것을 선택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좋은 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39절에 그 대답이 등장합니다. 우리 조금 위로 올라가서 39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랍비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장면을 묘사할 때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좋은 편’이라는 구절의 일차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지만, 보다 깊은 의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그분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마르다야, 너도 나와의 일대일로 대화하고 교제하는 이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마르다는 지금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였잖아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으니 예수님과 함께 식탁을 나누고, 예수님과 차도 마시며 그 주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를 가졌잖아요. 그러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누리라는 예수님의 권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읽은 39절의 모습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39절의 장면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 랍비나 율법교사들은 결코 여성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여성에게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거든요. 그러니 마리아라는 여성이 예수님이라는 스승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시대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39절이 묘사하듯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 장면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하나의 전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문화적 관습을 깨고 여성을 자신의 제자로 삼아 그 여성에게 조근 조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집에 들어가신 이유와 목적은 그저 식사 한끼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신 진짜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가정으로 초대한 여성 마르다와 그녀의 여동생 마리아에게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을 나누어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귀한 선물을 가지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정작 예수님을 초대한 마르다는 그 선물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니, 예수님은 그 장면을 안타깝게 느끼며 음식 준비는 벌써 충분하다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갚진 선물을 받아 누리라고 권면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무엇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도 분주하십니까? 과연 무엇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도 분주하여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계십니까? 과연 무엇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도 분주하여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지금도 여러분의 가정을 찾아가시며, 지금도 여러분의 직장을 찾아가시고, 지금도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찾아가시는 그 주님을 외면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분주한 마음을 잠시라도 내려 놓으십시오. 필요하다면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여러분이 지금 하시는 그 일을 잠시라도 멈추십시오. 그리고 지금도 여러분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아직 부족한 것이 많고 아직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아 보여도 이제는 여러분의 분주한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특권 중의 특권, 곧 주님을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일터로 모셔 그분과 깊이 교제하는 특권을 누리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오시면 여러분의 마음은 곧 천국으로 변하는 것이요,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에 임재하시면 여러분의 가정이 곧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것이요, 우리 주님을 여러분이 계신 삶의 자리로 모셔들이기만 한다면 바로 그곳이 천국의 잔치가 벌어지는 천국의 식탁이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여러분의 삶으로 체험하십시오, 이제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누리십시오.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우리 주님의 이 약속의 말씀이 여러분 모두의 삶 가운데 가득히 실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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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