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4. 4. 07:11

하나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심령을 가득 채워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의 착한 행실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우리의 착하지 않은 행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짠맛을 간직하고 있는 소금일 수도 있고, 짠맛을 다 잃어버린 소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선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이 세상에 짠 맛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좋든 싫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이유로 이미 세상의 빛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빛을 인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안에 켜놓은 빛이 모든 사람에게 비춘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사실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빛이 밝은 지, 어두운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착한행실로 밝은 빛을 비추면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인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요, 우리가 악한 행실로 어두운 빛을 비추면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또한 인식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지게 됩니다. 


율법의 요구 

이제 예수님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요구를 충실하게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18절의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판 한글성경의 번역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실제 원문의 구조를 있는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 이루어지기 전에는’ 여러분, 차이를 아시겠죠? 그러나 제가 지금 읽어드린 문장 그대로 번역을 한다면, 우리말 어법에 맞지가 않지요. 그래서 개역개정 한글판 성경을 번역하신 분들이 ‘다 이루어지 전에는’아라는 표현대신 ‘다 이루리라’라고 번역하신 것 같습니다. 

어찌됐든, 이제 우리는 19절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그리고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천지가 없어지는 때는 언제이냐고,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지는 때는 언제이냐고 질문하는 것은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이것은 강조하려는 표현이지요. 이 세상이 쉽게 없어지겠어요? 그리고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것도 강조하는 표현이죠. 중요한 건 뭡니까? 율법의 요구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제자들,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팔복의 그 은혜와 그 행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누리겠다는 바로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여전히 율법의 말씀을 순종할 것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9절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여기서 계명이란 일차적으로 구약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다음 주부터 묵상하게 되는 예수님의 다섯 가지 새로운 계명을 의미합니다. 제가 지금 새롭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이죠. 구약의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제를 미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율법에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성을 바라보면서 정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간음을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죠. 이러한 계명들을 지키고 가르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큰 사람이 됩니다. 

저는 18절과 19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의 한국 교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19절에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첫째는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입니다. 한국의 교회는 구약의 율법이든,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새로운 계명이든 실천하면서 성도들에게 그러한 율법과 계명을 실천하라고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게 되는 은혜와 축복만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007년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기념하는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 대회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대회에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설교하셨습니다. 그 설교에서 옥 목사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지요. 그 가운데 일부를 제가 발췌해서 읽어 보겠습니다. 

목회자는 믿음과 순종을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고 가르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로마서를 설교했으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는 야고보서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도 받고 땅의 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면 ‘할렐루야!’ 하고 열광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져 버립니다. 듣기가 싫고 몹시 거북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는 비슷한 반응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중의 반응에 예민해지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 죄라든지 회개라든지 순종이라든지 거룩이라든지 하는 듣기 피곤한 말씀은 할 수 있으면 피하거나 꼭 말을 해야 할 때에는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하고 싶어 하는 유혹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절대로 바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절대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이 강단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 결과 저도 모르게 복음을 조금씩 조금씩 변질시키는 설교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자꾸만 늘어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평양대부흥 100주년 대회에서 이와 같은 설교를 했던 옥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서울의 강남에서 사랑의교회를 개척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몇몇 초대형교회로 부흥시켰던 장본인이 자신의 평생의 목회를 돌아보면서 청중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하다 보니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그 용기가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이 한국의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예레미야 5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무섭고 놀라운 일이 뭘까요? 예레미야의 말씀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30-31절) 여러분,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왜냐구요? 백성들이 그것을 좋아하거든요. 

미가서 2장을 보면 이런 말씀도 있어요. 제가 읽어드립니다.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말하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11절) 무슨 말씀이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 백성들의 귀만 즐겁게 해주는 이야기, 예를 들면 포도주 이야기, 독주 이야기를 아주 재밌게 이야기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유쾌하게 해주면 그 사람이 백성들 사이에서 선지자로 인정받는 다는 겁니다. 우리 시대의 용어로 말하면 이렇게 되겠죠. 세상의 끝 날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의 말씀은 변함이 없는데, 그렇게 부담스러운 말씀은 감추고 사람들이 듣고 싶은 축복 이야기, 복 받는 이야기만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면 설교 잘하는 목사로 인정받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만큼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작은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크다고 인정받는 그 놀라운 축복을 포기하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계명을 다 준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부담스럽지요. 그러나 산상보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마음에 한 가지 소원이 있었잖아요. 팔복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며 제자로 살아가는 그 놀라운 행복, 여러분, 율법의 말씀을 준행하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운 계명을 실천함으로 그 놀라운 행복의 자리에 우리 모두가 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넘어서는 의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을 우리 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율법을 강조하셨죠. 그러면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생각할 때,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누구를 떠올렸을까요? 바로 20절에 등장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유대인이라는 이름은 있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수많은 무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율법의 실천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은 역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신들과 같이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직접 들었던 제자들은 아마 두 가지 이유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첫째는 그들의 의로움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움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날까지 단 한 번도 도전하지 않았던 기준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정말 큰 충격은 두 번째입니다.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은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고, 그 다음에 또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인가를 생각했거든요. 

여러분,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건을 기억하시죠? 그 청년은 부자였고, 또한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킨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결국 예수님을 떠나가지 않았습니까? 부자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시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그 부자 청년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겁니까, 못 들어간다는 겁니까? 못 들어간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그 부자 청년이 놀랜 것이 아니라, 누가 놀래죠? 예수님의 제자들이 놀랍니다. 성경에는 ‘제자들이 몹시 놀랐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 생각에는 그 부자 청년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사람입니다. 왜 그렇죠? 돈이 많기 때문입니까? 아니죠.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십계명을 빠짐없이 지켰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동일한 반응이 아마 마태복음 5장에서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아니,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서는 철저한 사람들,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과연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거죠. 사실은 그 대답이 오늘 본문 첫 구절에 이미 제시가 되어 있었어요.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을 뿐이죠. 

오늘 본문 17절 말씀 우리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이 곧 율법을 완성하는 사역이기도 하다는 거죠. 여기에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사이의 중요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율법이 무엇인지를 좀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을 중심으로 간단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신명기 5장을 찾아보시겠습니까? 신명기 5장 1절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모세가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2절부터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요. 제가 읽겠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베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여기 호렙산은 시내산을 말하는 것이고, 신명기 5장으로부터 40년 전, 곧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되는 그 언약의 관계를 말하는 거죠. 그로부터 광야 40년의 세월이 지났어요. 모세는 40년 전, 시내산에서의 언약이 너희 조상과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맞죠. 40년 전, 그들의 조상과 하나님 사이에 세운 언약이 맞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조상과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강조지요. 너희 조상들만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 것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과 하나님과의 언약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40년 전, 너희 부모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받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이고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맺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십계명을 지키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에요. 성경의 표현대로 하나님과의 언약 때문이지요. 

그리고 신명기 5장 6절부터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다 함께 6절 말씀만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이것이 십계명의 첫 서문입니다. 십계명은 성경 전체에서 두 번 나오거든요? 지금 우리가 살피는 신명기 5장에도 등장하지만, 출애굽기 20장에도 등장합니다. 두 개의 본문 사이에 미미한 차이점이 등장하는데, 십계명의 서문, 곧 신명기로 말하면 우리가 함께 읽은 6절 말씀은 출애굽기와 동일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1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외우고 있는데, 사실은 그 십계명 앞에 서문이 있어요. 그 내용을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잖아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거죠.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십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율법의 요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율법의 요구는 드러나는 모습이고, 그 기초가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방식이 율법의 요구인 거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율법의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세대가 지나더라도, 그래 하나님과 우리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의 관계는 우리 부모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이제는 나와 우리 세대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라는 그 인식을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사라진 거죠. 또 과거 우리 민족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될 때는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은 여전히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잖아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경험이 없는 거죠. 그러니 율법의 두 기초를 다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율법의 요구사항들만 남아 있는 거죠. 그러니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들 사이에는 율법이 무거운 짐이지요.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자신의 자랑거리입니다. 율법의 본질이 사라진 거예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그리고 온 갈릴리의 마을을 두루 다니십니다. 그들의 회당을 찾아가셔서 가르치십니다.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들의 모든 질병과 모든 연약함을 고치십니다.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요. 그들에게 하나님은 저 예루살렘 성, 저 사마리아 성 멀리에 계신 분이었는데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찾아오시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겁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죠. 율법의 두 기둥이 다시금 새워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구원을 완성하시는 그 사역은 동시에 율법을 완성하는 사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더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율법의 두 기초가 없었습니다. 단지 율법의 요구 사항들, 율법의 표면적인 항목들만 실천했지요. 율법의 기초가 없으니 그들이 율법을 실천하는 것은 자신의 의로움이었고, 자신의 의지였고, 자신의 성실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의는 그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율법의 두 기초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죄악 된 본성을 고치셨다는 구원의 감격입니다. 둘째는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곧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이 기초가 분명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율법과 계명을 우리는 지키는 거죠. 그러니 나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율법을 지키는 거지요. 때로는 우리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이 율법의 조항 하나하나를 지키는 일에는 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두 기초가 튼튼한 우리는 이미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를 훨씬 뛰어넘은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이것이 가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것이 가능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날마다 묵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 언약의 관계를 날마다 새롭게 하십시오. 그 튼튼한 뿌리 위에 하나님의 율법,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크다고 인정받는 그 놀라운 행복과 축복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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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