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4. 2.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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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주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는 팔복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가득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매주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회자들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설교가 얼마나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통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일평생을 목회하면서 설교를 준비하고, 매주 설교를 선포하였는데 그것이 성도들의 삶에 영향력을 펼치지 못한다면 얼마나 절망스럽겠습니까? 수십 년 동안 깊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자신의 설교를 지난 수 십 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매주 자신의 설교를 들었던 성도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 그 목사님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절망감이란 감히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것이죠. 

저 역시 교회에서 매주 설교하는 목사로서 그와 같은 고민이 있습니다. 매주 제가 전하는 설교가 얼마나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여러분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며,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통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가 저의 관심이죠. 그런데 최근에는 그와 같은 고민에 조금 변화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설교하면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 세 가지에 대해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세 번의 설교를 다 마친 후, 우리 교회 청년 가운데 한명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요. 제가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 세 가지를 설교하는 동안 바로 자신에게 설교의 내용과 동일한 시험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 제가 하나님께 감사하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청년에게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제 안에 뜨끔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저는 한 주 동안 설교를 준비해서 최선을 다해 설교합니다. 그리고는 그 내용을 많이 잊어버리거든요. 한 주 동안 저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말씀은 주로 내가 이미 설교한 말씀보다는, 내가 다음 주에 설교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저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서 저의 고민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과거에 나의 설교가 어떻게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킬 것인가를 가장 먼저 고민했다면, 이제는 그에 앞서 나의 설교가 어떻게 나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제 안에 기도제목이 생겨요. 저의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삶에 저의 설교를 적용하며 실천하는 것은 저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저도 저의 설교를 제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이 더욱더 풍성해지기를 바란다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무리를 넘어 제자의 삶으로 

마태복음을 순차적으로 설교하다보니 설교를 하기에도, 그리고 설교를 듣기에도 참 부담스러운 산상보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면 곧 살인한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산상수훈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나는 너무도 큰 죄인이 됩니다. 수시로 살인죄를 저지르잖아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게 이런 말씀도 하시죠?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을 듣고도 어떻게 마음에 무거운 짐이 생기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시거든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산상보훈의 말씀을 실천하는 겁니다. 과연 내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가,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옳은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이렇듯 산상보훈의 말씀은 한 구절 한 구절이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여러분들의 심령은 얼마나 가난한지 모르겠지만, 저의 마음은 이것저것 욕심이 많아요. 가난하지 않거든요. 어떻게 나의 심령이 가난해 질 수 있을까요? 고민하게 되죠.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데, 저의 마음은 애통하는 것도 아니고 온유하지도 않거든요. 굉장히 부담스러운 말씀이지요. 설교하기에도 부담스럽고, 설교를 듣기에도 부담스러운 본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상보훈의 말씀과 정면으로 부딪치려 하지 않고 피하고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합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산상보훈의 말씀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삶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뜻 들으면 매우 옳은 이야기인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산상보훈이야 말로 우리가 따라야할 삶의 지침이 맞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산상보훈이 우리가 따라야 할 이상적인 삶이라고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그 저의는 무엇일까요? 산상보훈의 말씀은 현실적으로 실천하기에는 불가능한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어차피 이상적인 말씀이니 우리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산상보훈의 기준이 아닌, 그 보다 조금 더 낮은 기준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마귀의 함정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디에도 산상보훈의 말씀이 저 하늘나라에서만 지킬 수 있는 교훈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이 말씀을 지키는 자라야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보훈의 교훈을 피해가는 두 번째 방법은 산상보훈이 인간의 죄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말씀이라는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라고요. 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도 하시죠.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을 행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미워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남자들 가운데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서 건전하지 못한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며, 여성들 가운데 멋진 남자를 보며 건전하지 못한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산상보훈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살인자요, 모든 사람이 간음을 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산상보훈의 말씀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한지를 보여준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설명 역시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할 말씀이 아닌, 그저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는 구절로만 이해한다는 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은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구약에는 율법이 있지요. 바울은 율법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옳습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더러운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었다면, 이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삶의 지침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합니다. 산상보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산상보훈의 말씀은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이 시작되는 오늘 본문 1절과 2절이 그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 다 함께 마태복음 5장 1절과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마태복음 4장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마태복음 4장 25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의 모든 병과 모든 연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4장 25절의 말씀과 같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사람들이 큰 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5장 1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를 보시고 그들에게 산상보훈의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산에 올라가 앉으십니다. 그러니 누가 예수님께 나아오지요? 예수님을 따르겠다던 모든 백성이 지금 산으로 다 올라오나요? 아닙니다. 수많은 무리가 아니지요. 제자들, 12명의 제자들만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그 제자들을 향해서 입을 열어 산상보훈을 가르치십니다. 

저는 산상보훈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그 열쇠가 바로 마태복음 5장 1절과 2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 곁에는 수많은 무리가 몰려듭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에 감격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 가운데 임했다는 거죠. 지금 고난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에 감격했던 사람들이에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잔치 자리에 포도주를 만들어 주시고, 배가 고픈 백성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풍성히 나눠주십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갑니다. 

그런데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무리가 아니라 제자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와요, 예수님은 그들 모두에게 산상보훈의 말씀을 전해주시지 않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에게 산상보훈의 교훈을 실천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 제자들, 예수님을 참으로 따르는 12명의 제자들에게만 산상보훈을 전하십니다. 그러니 산상보훈의 말씀은 그저 이상적인 말씀도 아니고,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말씀도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무리 가운데 제자의 삶을 살기 원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주시는 삶의 지침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는 제자의 자리에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가운데 속해도 좋습니다. 행복해요.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려요.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기뻐요? 그러나 그것이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수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로, 크리스천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시작하면 설교자로서 저의 고민이 조금 바뀌었다는 말씀을 드렸잖아요. 여러분, 제가 산상보훈을 설교하면서 이 말씀을 실천하는 제자의 무리에 들기를 소원합니다. 아직은 아니에요. 솔직히 이야기해서, 매주 설교를 하는 목사이지만 산상보훈의 말씀을 실천하는 크리스천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마음으로 소원을 품어볼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크리스천의 삶, 제자의 삶, 곧 산상보훈을 실천하는 삶을 소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클로드 로랭의 <산상보훈> 

클로드 로랭의 그림 가운데 <산상보훈>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1절과 2절을 기초로 한 그림입니다. 잠시 그 그림을 보시겠습니까? 

 

클로드 로랭, <산상보훈>


지금 중앙에 높이 서 있는 산이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바로 그 산입니다. 그 산 위에 예수님께서 앉아계시고, 그 주위에 12명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전체적으로 자세히 보면, 12명의 제자들 그룹을 비롯해서 5가지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여기, 나무와 잔디 속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에 관심 정도만 표명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여기, 아이를 안고 있다거나 양을 돌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그룹은 예수님의 말씀에 단순한 관심을 넘어서 열광하는 사람들입니다. 손을 모으고 산 위에서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을 향해서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로랭은 매우 재미있는 그림을 첨가했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말씀에 단순한 관심만을 표명하는 사람들과 여기 예수님의 말씀에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계곡이 있습니다. 쉽게 건너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계곡 위로 아주 작은 나무로 만든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이 다리를 통과해야 관심정도만 보이는 무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열광하는 무리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열광하는 세번째 부류에 속한 사람들과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 사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 이 절벽이 얼마나 크게만 느껴지는 지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차이는 이와 같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물론 관심만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 다리를 건너 예수님께 열광하는 단계로 이른 것도 대단하죠, 훌륭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절벽을 오르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로랭은 이 절벽을 오르는 사람도 그려 넣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절벽이나, 자세히 보면 그 안에 계단이 있습니다. 물론 산이 높아요. 그러나 계단이 있어서 얼마든지 오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직접 들고 실천하는 크리스천의 삶,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단계까지 오리시기를 바랍니다. 그 단계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복 되도다 

저는 로랭이 그린 <산상보훈>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본문이 팔복에 대한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팔복의 말씀에 의하면 이 그림에서 제자들의 얼굴이 어떠해야 합니까? 기뻐야 합니다. 행복해서 거의 실신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높은 산을 오른다는 것이 힘들죠. 그러나 그 길은 행복한 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에서 제 마음에 가장 들지 않은 부분은 예수님께서 계신 산 위로 올라가다가 지쳐서 쓰러져 있는 바로 이 사람입니다. 너무 힘든 표정으로 계단에 쓰러져 있어요.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산상보훈을 실천하는 크리스천은 복됩니다. 행복합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십시오. 
3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4절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10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제가 지금 이 말씀을 읽으면서 복이 있다는 부분을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바르게 읽으려면 복이 있다는 부분에 강조점을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어 원문의 형태가 강조구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부분을 강조하지 않아요. 온유한자가 땅을 차지하게 된다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복되다’는 것입니다. 

물론 팔복의 각 항목들이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복되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다시 말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제자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어때요? 복됩니다. 행복합니다. 기뻐요. 즐겁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산상보훈을 주신 이유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산상보훈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행을 하고, 자신의 괴롭게 하고, 스스로를 힘들게 하여서 결국에는 그저 초라하게 살아야 할 것처럼 생각해요. 아닙니다. 산상보훈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참된 행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의 은혜를 받고, 예수님께서 나눠주시는 포도주와 떡과 물고기를 받아먹는 것도 행복하고 즐겁지만,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 곧 산상보훈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이 그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행복을 주고 싶은 것이에요. 

저는 우리 모두가 그 놀라운 행복에 그냥 폭 빠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제자의 삶을 살아갈수록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갈수록 우리의 삶이 더욱 행복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면 금식 기도를 할 때 얼굴을 흉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얼굴을 깨끗이 씻고 기름을 바르라고 말씀하시죠. 그러면 예수님, 나의 몸은 너무 힘들고 나의 마음은 너무 슬픈데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안 그런 척 다중인격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까? 아니죠.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그 하나님, 나의 금식 가운데 임하시는 그 하나님, 그분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기쁘고 몸이 새 힘을 얻는 겁니다. 그러니 안 그런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이 기쁘고 얼굴이 밝아지는 겁니다. 
저는 우리가 제자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산상보훈이 알려주는 그 길을 가기를 바랍니다. 크리스천다운 우리의 생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예수님께서도 복되다고 감탄할 만한 행복이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시간 함께 부를 찬양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누가 축복의 사람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은 사람, 예수님으로부터 포도주와 떡을 얻어먹은 사람,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로운 말씀을 들은 사람도 물론 복된 사람이죠. 축복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복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신 산상보훈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찬양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 
“주의 집에 거하기를 사모하고 주를 항상 찬송하는 사람” 
그들이 축복의 사람입니다. 

팔복의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죠. 
마음이 가난하여서 우리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 우리 주님을 간절치 찾는 사람들, 그 주님을 찾아 만나기 위해 아무리 높은 산도 결국에는 올라가고 마는 사람들, 그들이 축복의 사람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축복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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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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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