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1. 1. 1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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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는 예수님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출생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이라며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 41-42절)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하며 마태는 이러한 오해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으로 불리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은 물론이요, 애굽을 거쳐 갈릴리로 정착하신 과정이 모두 구약의 성취라고 주장합니다. 열한 절에 불과한 오늘 본문에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그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주장이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2장 15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태복음 2장 17-18절)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복음 2장 23절) 

하나님은 예수님의 출생과 어린시절을 놀라운 섭리로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그때의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즉흥적으로 계획을 세워 인도하시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주실 때, 오래전 선지자들을 통해 전하셨던 말씀을 하나하나 성취하는 방식으로 모든 과정을 섭리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신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르죠.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데, 이미 오래전 신구약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신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나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진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성경의 말씀을 따라 섭리하시므로, 신구약 성경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편 34편 19절) 말씀하셨으니, 비록 나의 삶에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나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 말씀하셨으니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향한 중간 단계임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하셨으니,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섭리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의 삶 가운데 위대한 섭리를 펼쳐 보여 주실 것입니다.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 모든 과정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태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며, 그보다 더욱 중요한 메시지를 본문에 담아두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며 인용하는 구약의 성경구절을 다시 보십시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2장 15절) 

여기에서 ‘애굽으로부터 불렀다’는 것은 모세 시대에 있었던 출애굽을 연상시킵니다. 모세 시대에 애굽의 왕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히브리인이 아들을 낳으면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위협 속에서 태어난 모세는 기사회생하여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지요. 본문은 그와 유사한 사건이 예수님의 탄생 때에도 일어났다고 보도합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마태복음 2장 16절) 

본문은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이 사건을 서술하며 또 하나의 구약성경을 인용합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태복음 2장 17-18절) 

그러므로 본문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모세의 이야기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모든 남자아이를 죽이는 위협 속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죽음을 면하였던 것처럼, 예수님도 유사한 환경 속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위기를 벗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쓰임 받았던 것처럼, 예수님도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는 위대한 사역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였지만 예수님은 온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역설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하신, 그리고 완전하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온 땅에 통곡하는 소리가 가득하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고 고통의 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그 어디에서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오늘도 구원의 역사를 펼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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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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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2020. 5. 3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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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 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결심을 합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결단을 하죠. 올해는 기필코 성경을 한번 이상 읽어야 되겠다. 올해는 새벽기도를 열심히 참석해야 되겠다. 올해는 꼭 한 명 이상 전도를 하겠다. 그 외에도 다양한 신앙생활과 관련된 결심과 결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이 전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면, 그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시대에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신앙적인 열심은 있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충한 일꾼들이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 주제거든요.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종교적인 열심이 있다고, 교회에서 열심히 무엇인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대교의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하나님께 반역하는 불충한 일꾼들이 되게 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 3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예수님의 비유는 한 주인의 등장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주인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를 보여주지요. 33절을 다시 보십시오. 어느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포도원을 산울타리로 둘렀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즙 짜는 틀을 만들었고, ‘주인이’ 그곳에 망대를 만들었습니다. 포도원을 만들고 그곳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는 그 일을 누가 했습니까? 바로 주인이 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집주인이 이 모든 것을 모두 갖추는 동안 농부들이나 일꾼들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보십시오. 홀로 포도원을 만드시고, 홀로 산울타리를 두르고, 홀로 즙 짜는 틀을 만들고, 홀로 그곳에 망대를 세우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준비한 후 - 33절 후반부를 보시면 – 주인은 농부들을 불러 그 모든 것을 세로 주고 타국으로 떠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를 세우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를 공격하려는 수많은 적들로부터 우리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울타리를 쳐주신 분이 계시고, 우리 교회에 풍성한 은혜의 포도주가 넘쳐 흐릴 수 있도록 즙 짜는 틀을 만들어 주신 분이 따로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비전을 내다볼 수 있도록 망대도 세우시며 우리 교회에 필요한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다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준비해놓고 우리를 불러 그곳에서 일하게 하신 거지요.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한 것을 다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준비한 것 아니고, 우리가 돈으로 산 것도 아니고, 우리가 노력하고 수고해서 얻은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모두 다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그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불러주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 속에서 죄와 욕심과 어두움의 세력 아래에 살아가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구원하여 주셨다는 사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지극히 놀라운 은혜가 아닌가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를 충성스럽게 여겨 일꾼으로 삼아 주신 거에요. 제직으로 불러주시고, 항존직으로 불러주시고, 구역장으로 불러주시고, 찬양대원으로 불러주시고, 교회학교 교사로 불러주시고, 교회의 주차요원으로 불러주시고, 주방의 봉사자로 불러주시고, 다양한 사역의 사역자로 불러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친히 아름답게 가꾸어 오셨던 교회를 위해 지금까지 아무런 공로도 없는 나를 일꾼으로 불러주셨어요.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감격하고 또 감격할 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처음 직분을 받고 교회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봉사를 하게 되면,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라져요. 바로 그때 우리의 마음에 은혜에 대한 감격 대신 어떠한 마음이 들어오는지 아세요? 바로 보상 심리입니다. 

최근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회 고위층들의 여러 가지 잘못된 행동들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이 ‘보상 심리’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서울대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는 인간이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우리의 뇌가 그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은 보상심리를 느낀다고 주장합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서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갔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의 고생에 대해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인간의 뇌는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졌다는 것으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인간의 뇌는 그동안의 노력에 대해 보상을 받기 위해 보다 즉각적인 쾌락을 요구하게 되고, 그것이 언어폭력이나 성추행과 같은 돌출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거지요. 

연세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황상민 교수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고생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나름대로 높은 자리에 올라 성공을 하면,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정도야…’ 하는 보상심리가 그 마음 내면에 자리를 잡는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황상민 교수는 타이거 우즈가 자신의 스캔들을 반성하는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을 인용합니다. 우즈가 이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열심히 살았으니 유혹을 즐겨도 된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깊이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입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리고, 그 마음에 보상심리가 찾아온 사람들의 내면을 참으로 정직하게 묘사해주는 문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열심히 살았으니 유혹을 즐겨도 된다고 생각했다” 

여러분, 교회에서의 모든 봉사는 내가 봉사할 수 있고, 섬길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교묘하게 점령하려는 보상심리를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포도원의 소유권은 언제나 주인게 있습니다

자,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그 안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을 불러 그 포도원을 세로 주었습니다. 주인의 호의요. 주인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소출의 얼마를 받기 위해 주인이 농부들에게 종들을 보내자, 이 농부들이 배은망덕하게도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돌로 치기도 합니다. 또다시 종들을 보내보았지만 농부들의 자세는 변함이 없습니다. 자, 이제 주인으로서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듭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는 것이죠. 바로 그 장면을 오늘 본문 37절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37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이 말씀에 의하면 주인이 자신의 아들을 보내며 농부들에게 요구하는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주인이 농부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아들을 존대하고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농부들이 자신의 아들을 존대하고 존경할 것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아들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의 반응은 주인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 38절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우리가 함께 읽은 38절의 말씀에는 농부들이 주인을 존대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38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합니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아들의 유산, 곧 포도원 자체를 자신들의 것을 소유하자는 제안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고 그 안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을 불러 포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때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원의 소유권을 넘겨 준 것이 아닙니다. 세를 받고 포도원의 사용권을 주었죠. 다시 말하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주어졌지만, 포도원에 대한 소유권은 여전히 주인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농부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사용권을 준 주인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용권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욕심을 냅니다. 주인의 소유권까지 차지하여 주인의 자리에 오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 결과 주인에 대한 존대, 주인에 대한 존경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어느 단체나 조직에서 회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을 대부분은 칭찬받고 박수 받을 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조금 다릅니다. 교회는 회원들이 주인의식을 갖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저만의 주장이 아니라 지구촌교회의 이동원 원로 목사님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이동원 목사님이 40대 후반 지구촌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 지구촌교회의 출석인원이 일만 명을 넘어섰어요. 그러자 어느 성도가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목사님께서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목사님의 왕국이 됐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이동원 목사님이 가슴을 치며 ‘내가 지금까지 목회를 잘못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동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우려할 만한 모든 일들은 청지기 의식에서 떠나 자신이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여러분, 성경은 단 한 번도 우리가 교회에서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우리를 청지기라고 말합니다. 청지기에게는 소유권이 없고 다만 사용권이 있습니다. 주인이 허락한 시간 동안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정한 시간이 지나면 내가 자기고 있던 것을 다른 사람에 넘겨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청지기 정신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지금 자리를 잡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지요. 지금은 여러분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고 우리 모두가 이곳을 떠나는 순간 그 자리는 더 이상 여러분의 자리가 아닙니다. 다음에 누가 앉든지 그 사람의 자리가 되는 거죠. 봉사하는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학교를 섬기고, 또 어떤 분들은 구역장으로 구역원들을 섬기시고, 또 다른 분들은 찬양대를 섬기시지요. 하나님께서 어떤 분들은 제직으로, 또 어떤 분들은 항존직으로, 그리고 또 어떤 분들은 목사와 장로로 교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자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의 주인이 언제나 여러분은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한 분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두 가지 모습의 심판

예수님께서 비유의 내용을 다 말씀하신 뒤, 이렇게 질문합니다. 오늘 본문 40절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비참한 최후를 매우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오늘 본문 41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1절의 말씀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 대해 내리는 심판의 모습을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41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에 대한 감격도 없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도 없어 충성하기보다는 반역했던 악인들에 대해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이것이 포도원 주인이 내리는 심판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의인들에 대한 심판도 등장합니다.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드디어 ‘다른 농부’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다른 농부’들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시대의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이 처음부터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포도원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감격스러운 것인지 깊이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포도원의 주인을 경외할 줄 알고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기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주인에 베풀어준 은혜에 대한 감격과 주인에 대한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일할 사람들이었죠.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자신을 반역하는 농부들을 진멸하고 새로운 충성스러운 일꾼을 포도원에 불러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봅니다. 그래서 누군가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일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죠.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보상심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지, 아니면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는지 하나님은 정확하게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주인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지, 아니면 청지기 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지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보상심리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주인의식이 아니라 청지기 의식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을 포도원의 일꾼으로 써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떠한 역할이 주어졌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충성함으로 말미암아 ‘잘하였다’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으며, 더욱 많은 것으로 받아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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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2020. 5. 3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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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책임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에게는 그 누구도 중요한 책임을 맡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날수록 그에게 책임이라는 것이 주어지고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죠.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교회에 이제 막 등록하신 새신자에게는 그 누구도 교회의 중요한 역할이나 책임을 맡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경륜이 늘어날수록 교회 안에 다양한 봉사를 하게 되고 책임이 주어지기 시작합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계시지요? 가인과 아벨은 서로 형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고 결국 가인은 아벨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말지요. 바로 그때 하나님이 가인에게 질문하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러자 가인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반문하지요(창 4:9) 아벨과의 관계가 산산이 무너져버린 가인의 마음에는 형으로서 동생인 아벨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책임감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가인의 대답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대통령 버락 오바마입니다. 2004년 당시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버락 오바마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시카고 남부에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면, 그 아이가 제 아이가 아닐지라도 그 사실은 제게 중요합니다. 만일 어딘가에 약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노인이 의료비와 월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녀가 제 할머니가 아닐지라도 제 삶마저 가난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버락 오바마는 성경에 등장하는 가인의 대답을 이렇게 바꿉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제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저는 제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동생에 대해 ‘나는 동생을 지키는 책임을지지 않겠다’고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바로 그 이야기를 뒤집어서 버락 오바마는 ‘나는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나는 자메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선언했던 것이죠. 그리고 이 연설을 계기로 무명의 정치인이었던 버락 오바마는 일약에 스타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오바마가 선언했던 바로 그 말을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몸소 실천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날도 예수님은 자신에게 몰려오는 무리들에게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셨습니다. 당시 소망도 없고 미래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참 뜻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어요.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직접 고쳐주셨어요. 그렇게 최선을 다해 예수님은 그날도 자신의 사역을 다 감당하셨어요.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제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입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이제 하루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무리들로 하여금 내일 다시 오도록 하자는 제안입니다. 한 마디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은 다 했다는 말이죠.  이제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오늘 본문 1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은 이만하면 오늘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 책임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무리들이 배가 고플 테니 음식도 나눠 주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설교하고 성경공부를 가르치면 교회의 역할이 끝난 것이 아닌가요?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이니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면 그것으로 교회의 역할을 다한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쳐주었지만, 그들이 배가 고플 수 있으니 그것까지도 제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책임을 지라고 말씀하시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우리 안에 서로에 대한 책임감이 너욱 넓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어떠한 형편에 있는지,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지 부지런히 살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격려가 되어주고 용기를 낼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주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자매를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 다 아시고, 예수님도 다 아시고, 제자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에게는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음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먹을 음식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지 않고, 그것과 상관없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먹을 것까지 챙겨주라고 명령하십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하면 마음을 먹으면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는 떡과 물고기가 부족합니다. 그러나 내 손에 있는 것을 살피기에 앞서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부터 들어보세요. “너희가 먹을 것을 줘라.”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지금 내게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떡도 부족하고 물고기도 부족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 하나님께 매어 달리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공동체 안에 오병이어의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내가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내가 자매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자쳐하며 서로에 대한 관심과 섬김의 범위를 넓혀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 오병이어와 같은 풍성한 은혜를 넘치도록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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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2020. 5. 30.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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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에 위치한 도시 샌프란시스코는 관광 도시답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Boudin이라는 이름의 빵집이지요. 언듯 보면, 특별할 것 없는 빵집이 그토록 유명한 데에는 그 빵이 맛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곳이 미국의 독특한 역사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1848년은 미국 역사에서 서부개척이 본격화된 연도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해에 미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켈리포니아 주에서 황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지요. 캘리포니아에서 황금이 발견되었던 1848년 직전까지만 해도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대략 1,000명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서부에 황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매년 수만 명의 서부 개척자들이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황금이 발견되고 바로 그 다음 해인 1849년 조금 전 말씀드린 Boudin이라는 이름의 빵집이 샌프란시스코 시내 한 중앙에 세워지게 된 것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금을 찾기 위해 일확천금을 노리고 그 머나먼 서부개척의 길에 합류하였습니다. 그러나 매년 수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서부로 넘어왔지만, 그 가운데 금광을 발견하고 큰 부자가 된 사람은 정말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토록 원하던 금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지요. 사람들이 금을 찾아 헤매고, 저 멀리 서부 어딘가 있을 법한 보석을 찾아 헤매고 있을 그때, 바로 그들의 옆에서 열심히 맛있는 빵을 구웠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리고 황금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그 어떤 것도 손에 얻지 못했을 때, 하루 세 번씩 매일 먹어야 하는 빵을 열심히 구원던 사람은 15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면 한 번쯤은 찾아가는 유명한 명소가 되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황금을 찾아 나섭니다. 아직 내 손에 없어요. 그래서 저 멀리 찾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귀한 것을 바로 우리 곁에 두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매일같이 나의 속을 박박 긇어대는 남편과 아내를 주셨다는 것.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사고를 쳐놓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주셨다는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 이것들이야 말로 우리의 삶에 가장 귀한 보물이 아니겠습니까? 


천국, 가장 귀한 보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귀한 보화라고, 값진 진주라고 비유하십니다. 오늘 본문 44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 보화는 얼마나 귀한 것인지 나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살 정도로 귀한 보화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또 하나의 비유를 통해 다시 한 번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45절과 46절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천국은 마치 극히 값진 진주와 같습니다. 이 진주가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 이 진주 하나를 소유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이 진주를 삽니다. 

이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주제는 분명합니다. 천국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귀한 보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 최고의 선물, 가장 귀한 보물을 소유하신 분들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재물이 조금 궁핍할 수도 있겠지요, 이 세상을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이 세상을 살면서 내가 원하는 지위와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을 살면서 부족한 것이 많고 궁핍한 것이 많고 없는 것이 많을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천국의 시민이 되었다면 여러분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귀한 보물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벌써 오래된 찬양이지요. 뇌성마비로 한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송명희 시인이 <나>라는 찬양에서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으로 노래하였습니다. 그 가사의 내용이 이렇잖아요. ‘나는 가진 재물도 없고, 나는 가진 지식도 없고, 나는 가진 건강도 없어요.’ 그러나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주셔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셨고,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한 음성을 나는 듣게 되었고,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나는 받게 되었다’라고 내용입니다. 

그런데요, 저는 아무리 이 가사를 아무리 음미하고 또 음미해봐도, 이 가사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닌 것 같아요. 하나님은 너무나도 불공평하신 분 같아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도 주시고, 지식도 주시고, 건강도 주셨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모두 주셨어요. 그런데 그 마음에는 천국이 없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재물도 안 주시고, 건강도 안 주시고, 지식도 안 주셨어요.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그 마음에 하나님은 천국을 허락하셨어요.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아요, 아니 하나님은 불공평해 보여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을 주시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지식을 주시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보물인 천국을 선물로 주신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불공평하게 사랑하시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불공평하게 사랑하셔서 가장 귀한 보물, 곧 저 천국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예수님은 천국이야말로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똑같은 의미을 담고 있는 비유를 두 개나 연이어서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두 가지 비유를 가만히 관찰해보면, 이 말씀에는 천국의 가치 – 곧 천국이 얼마나 귀한 보물인지 – 깨달은 사람의 특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귀한 천국이라는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집중하면서 다 같이 오늘 본문 44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가장 귀한 보물입니다. 그래서 그 귀한 보물 – 곧 천국 – 을 발견한 사람은 제일 먼저 기뻐합니다. 그 마음에 기쁨이 가득해요. 그리고 둘째로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 귀한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고, 우리의 머리로, 우리의 마음으로 동의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 – 곧 천국이야말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귀한 보물이라는 – 이 말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증거는 단지 우리가 입술로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데 있지 않아요. 천국이 가장 귀한 보물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무엇보다 그 마음에 기쁨이 넘쳐요. 그리고 그 풍성한 감사와 감격으로 나의 모든 것을 저 천국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45절과 46절에도 동일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5절과 46절 말씀도 한번 더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45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좋은 진주”는 성경 원문에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45절에 등장하는 상인은 여러 가지의 좋은 진주들 – 한 개가 아니라 – 여러개의 좋은 진주들을 찾아다니는 사람이었어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진주를 사고파는 상인이 어떻게 단 하나의 진주만을 구하겠어요? 당연히 좋은 진주를 여기서도 구하고 저기서도 구해서 여러 개의 좋은 진주들을 구비해 놓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고객이 진주를 사기 위해 그를 찾아왔을 때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내어 놓지 않겠어요? 

그런데 4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렇게 여러 가지의 좋은 진주들을 찾고 구했던 그가 어느날 극히 값진 진주 몇 개를 발견하나요? 딱 한 개를 발견합니다. 그러자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 이 말씀에서 ‘자신의 소유’에는 그동안 그가 모아두었던 좋은 진주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극히 값진 진주, 곧 천국을 경험하고 나니 그동안 자신이 수집하고 있던 좋은 진주들은 전혀 값어치가 없어졌어요.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다 합치더라도 자신이 만난 극히 값진 진주 딱 하나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중에도, 그래서 천국의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들 중에도 그 귀한 천국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45절의 상인의 모습이 머물러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천국이 좋은 것이죠. 천국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나요? 그러나 그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이고 지금 당장은 이 땅에서 좋은 것도 많이 있으니 그것들도 좀 누리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논리를 펼치며 살아가는 분들이 매우 많이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그럴듯한 생각이에요. 설득력이 있어요. 그러나 그러한 모든 논리는 천국의 참된 가치를 아직 모르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마치, 좋은 진주들을 가능한 한 많이 수집하려고 돌아다니는 상인의 모습이지요. 천국도 그저 자신이 수집하는 좋은 진주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45절에 머물러 있는 장사꾼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극히 값진 보물, 곧 천국을 경험한 사람 – 곧 오늘 본문 45절에 머물러 있지 않고 46절을 경험한 사람 – 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자신이 지금까지 수집했던 모든 좋은 진주들을 다 팔아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가장 귀한 보물, 곧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것저것 너무 핑개를 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시간이 없을 수도 있지요. 물론,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천국이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극히 값진 진주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나 자신이 어떠한 상황과 처지에 놓이더라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한 일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보물과 보화를 다 합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기까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천국이야 말로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그 가치를 깨닫고 발견한 사람은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 팔아버립니다. 이 단순한 예수님의 비유를 가만히 묵상하고 묵상하다 보니,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매우 중요한 교훈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 가운데 어느 누군가를 하나님 앞에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세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일까요? 어떻게하면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주변의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신실한 일꾼으로 세울 수 있을까요? 물론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겠지요. 물론, 옆에서 권면하고 이끌어주는 과정도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누군가를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하는 신실한 일꾼으로 세우는 가장 확실한 길은 그에게 가장 귀한 천국의 가치를 경험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천국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지극히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바로 그 천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고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아직 천국의 그 귀한 가치를 한번도 헤아려보지 못했고 경험해보지 못한 분들이 계신가요? 만일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그분들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참된 가치를 아직 모르는데 그것을 위해 나의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깝겠어요. 만일 우리 가운데 아직 천국의 참된 가치를 경험하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그 무엇보다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통해 천국이야 말로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천국이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보물이라는 사실을 이미 깨달았지만, 어느덧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보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이 세상의 보물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고 계신 분들은 안계십니까? 처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의 시민이 되었을 때에는 그 감격과 감사과 기쁨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어 나의 시간을 드리고, 나의 물질을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였지만, 어느덧 시간이 흘러 그때의 감격과 그때의 감사가 어디로 갔는지 다 사라져 버린 분들은 안 계십니까? 그래서 과거에는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격 어린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내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섬겼지만 이제는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의무감에 교회를 출석하며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봉사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없습니까? 만일 그와 같은 분이 계시다면, 다시 한번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가치를 다시 한번 체험하시고 그 마음에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가득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94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그래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 귀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부귀와 바꿀 수 없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명애와도 바꿀 수 없어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행복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유혹과 핍박이 몰려옵니다. 그러나 유혹과 핍박이 몰려온다 하더라도 주 섬기는 나의 마음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다고 되는 거 아니에요. 의무감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귀한 보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만났고 경험했어요.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포기할지라도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입술로는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귀하고, 예수님을 믿어 얻게된 천국이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고백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세상의 보석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세상의 가치로 어두워진 우리의 마음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천국이 이 세상의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고, 우리의 영안이 열러 천국의 참된 가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옵소서.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 가장 귀한 저 천국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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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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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2020. 5. 3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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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익숙한 내용이지요. 농부가 밭에 좋은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런데 밤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 씨를 뿌리고 갔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좋은 씨에서 밀이 자랐지만 동시에 원수가 뿌려놓은 씨앗에서 가라지도 함께 자랐습니다. 그 밭에서 일하는 종들이 가라지를 알아보고는 주인에게 문의를 하지요.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그러나 주인은 내버려 두라고 말씀합니다. 추수 때가 되었을 때 곡식과 가라지가 뚜렷하게 구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교회의 모습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어 왔습니다. 왜 교회 안에 거짓된 믿음, 바르지 못한 믿음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교회 안에는 곡식도 있지만 가라지도 함께 있기 때문이라고 답을 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해석이 일면 타당한 면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현재 교회의 모습을 보다 정확하게 진단하는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라지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 강조점은 지금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심판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시는 장면을 보면, 이 비유의 강조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하게 알려주신 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있을 일에 대해 매우 자세히 설명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40-43절)

하나님의 나라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지막 때, 곧 종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마지막 종말의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 그날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정하게 판단하시고 바른 자리에 위치시켜 놓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지금은 마지막 때가 되지 않았기에 정확히 누가 곡식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무엇이 좋은 씨앗이고 무엇이 원수가 뿌린 씨앗인지 알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교회의 일꾼인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29절)

주인은 아마도 두 가지를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종들이 가라지를 뽑겠다고 밭에 들어가면 의도와 다르게 곡식을 밟을 수도 있고 해칠 수 도 있지요. 또 한 가지, 지금 곡식과 가라지가 한 자리에서 자라기에 그 뿌리가 서로 얽혀 있어요. 조심하면서 가라지를 뽑더라도 곡식의 뿌리가 함께 나올 수도 있고, 최소한 뿌리의 일부가 상하게 마련이지요. 이러한 가능성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주인은 종들에게 분명하게 명령합니다. “가만 두어라” 이것은 가라지로 말미암아 곡식이 괴로워하는 상황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곡식을 보호하기 위한 처사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라는 책에서 키스트메이커(Simon J. Kistmaker)라는 신약학자가 가라지 비유의 적용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 정화라는 기치 하에 시기심 많은 신자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판단함으로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일으키며 그들을 교회로부터 축출하고 있다. … 이 비유는 우리에게 인내하라고 하며 자칭 재판관으로서 행세치 말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러고 보니, 가라지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종들의 조급한 마음이 교회에서 봉사를 한다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불의라고 보이는 것, 내가 생각할 때 옳지 못한 모습을 우리는 고치려 하고 수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정당화하지요. ‘이것이 교회를 위한 일이고, 이것이 주님을 위한 일이다.’ 그러나 교회의 일꾼 된 여러분, 예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가만 두어라”


제발, 판단하지 마십시오. 추수 때가 되기까지 누가 곡식이요, 누가 가라지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기준을 가지고 쉽게 판단하고 섣부르게 행동한다면 오히려 곡식을 해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가라지를 뽑는 것이 아니라 곡식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돌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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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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