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느 부유한 남성이 마차를 타고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부유한 남성은 밤의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마차 안에 있었고 그 안에 환하게 등불을 켜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지만 그 부유한 남성에게는 따뜻한 공기가 있었고 밝은 빛이 있었습니다. 반면, 그 마차를 끌기 위해 차가운 밤 기운을 온 몸으로 맞으며 어두움 속에서 열심히 말을 모는 마부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마부에게는 어두운 밤 길을 비춰주는 등불도 없었고, 차가운 밤 기운을 막아줄 따뜻한 마차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이 두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시간 마차 안에서 따뜻한 공기와 밝은 등불을 누리던 부유한 남성은 결코 볼 수 없었던 한 가지,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 차가운 밤공기와 싸우며 말을 몰고 있던 가난한 마부에게는 너무도 분명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밤 하늘에 빛나는 찬란한 별들의 행진이었습니다. 마차 안에서 인간이 켜놓은 등불을 누리던 부자는 그 조그마한 등불 때문에 결코 밤 하늘의 영광스러운 별빛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빛도 자신의 앞길을 비춰주지 않는다고 여겼던 가난한 마부에게는 하늘의 찬란한 별 빛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덴마크의 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이 비유를 통해 과학의 급격한 발전으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이성적으로 밝혀 낼 수 있다고 믿었던 19세기 유럽 지식인을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곧, 과학이라는 등불과 이성이라는 등불이 오히려 온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19세기 유럽의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에도 자신이 마련해 놓은 조그마한 마차 안에 움츠리고 있는 사람들, 자신이 켜 놓은 등불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결코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차가운 밤바람을 온 몸으로 맞아들여야 하고, 자신의 앞에 그 어떠한 등불도 비취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때 온 땅을 뒤덮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에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
시편 8편은 온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1절)
그러나 온 하늘과 온 땅을 뒤덮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목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여기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명확하게 대조되고 있지요. 한편에는 대적, 원수, 보복자들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어린 아이들, 젖먹이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적, 원수, 보복자들은 세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거인들을 말합니다. 반면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은 누군가의 돌봄이 없으면 생존할 수조차 없는 연약한 인생들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은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합니다. 반면 원수들과 보복자로 대표되는 세상의 거인들의 입은 잠잠하게 하십니다.
오늘의 시편이 다윗의 시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하나님은 골리앗이라는 세상의 거인 앞에 서 있던 어린 다윗의 입술을 통하여 ‘여호와의 구원하심은 칼과 창에 있지 않다’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린 아이와 같았던 다윗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였던 거인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그의 입을 막아버리셨던 것입니다.
이후 신약시대로 넘어오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수많은 어린이들이 예수님을 향해 환호성을 지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
그런데 그 장면을 보며 그 시대의 거인들이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 모든 정치 권력과 모든 종교 권력과 모든 재력을 틀어지고 있었던 사람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인용하셨던 성경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시편 8편입니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 (마 21:16)
그러므로 여러분,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의 지식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닙니다. 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은 지하 단칸방에 사는 사람들은 볼 수 없고, 저 높이 펜트하우스에 사는 사람들만 볼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아니,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거하는 사람들, 어린아이와 젖먹이와 같이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니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그리하여 치열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주님의 이름을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시편 8편은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3절을 우리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다윗이 시편 8편을 노래하였을 때는 틀림없이 한 밤중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은 3절에 태양은 등장하지 않고, 그 대신 달과 별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절 마지막에 “내가 보오니”라고 되어 있으니 다윗은 분명 달과 별을 보기 위해 그의 눈을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윗의 삶은 참으로 치열했지요. 그날도 하루 종이 치열하고 힘겨운 삶을 살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어두운 밤이 되자 다윗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노래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을 내가 보오니”
어린 시절 다윗이 목동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돌보는 양떼를 공격하였던 곰이나 늑대와 싸우느라 하루 종일 힘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었을 때 다윗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노래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이후 다윗이 장성하여 이스라엘의 장군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인지도 모릅니다. 사울의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이곳 저곳을 정체 없이 도망 다니던 어느 날, 사울의 날카로운 칼날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또 하루를 무사히 넘기고 다시 캄캄한 밤이 되었을 때 다윗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노래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다시금 바라봅니다.”
혹 다윗의 노년 시절,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왕궁을 급하게 나와야 했던 어느 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왕궁 안에서 쉬지 못하고 다시금 군인들과 야영을 하면서 다윗이 다시 한번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노래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바라봅니다.”
다윗은 이렇게 치열한 하루를 보낸 뒤, 자신의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고, 결국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에게 참으로 놀라운 깨달음을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다윗은 치열하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날이 저문 뒤 비로소 자신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된 거죠? 자신은 치열한 하루의 삶을 마치고 이제야 한숨을 돌리며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그저 자신의 코 앞에 펼쳐진 위협을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그때에도, 그리하여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늘 생각하고 계셨으며, 하나님은 그를 늘 지켜보시며 보호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찌 다윗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치열한 하루의 삶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기억하며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지만, 우리가 삶의 한 복판에서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던 바로 그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우리를 생각하시고, 그 위험한 순간에도 우리를 지켜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모든 우주만물을 운영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리하여 온 하늘과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신 분이시지만 매 순간 여러분을 바라보시며 그저 전 세계의 76억 인구 가운데 한 명으로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특별히 생각하시고, 특별히 사랑하셔서, 특별히 보호하며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다스림
다윗은 치열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보였고, 그 영광 가운데 자신을 지켜 보호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의 깨달음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윗이 치열한 하루의 삶을 마무리하고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자, 이제는 자기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 목표, 곧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 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오늘 본문 5절에 등장하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는 표현, 나아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신다’는 표현이 지시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입니다. 특별히 바로 앞 절인 4절의 “사람이 무엇이기에”에서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에노쉬)는 완전히 타락한 인간, 철저하게 범죄한 인간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4절과 5절을 조합하면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다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긍휼히 여겨주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치열한 삶을 살다 보니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가요? 혹, 여러분 가운데 예전에는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예전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어느덧 생활이 바빠 너무도 많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계신 분들은 안 계십니까? 다시금 여러분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인간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다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모습이 우리 안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만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간에게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사명도 주셨거든요. 하나님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함께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다스리는 사명’도 회복시켜 주십니다. 오늘 본문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실제로 시편 8편의 말씀과 같이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았던 다윗을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장면에서 잊지 말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의 힘과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거나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거인 앞에 서 있는 어린아이와 같고, 우리는 골리앗 앞에 서 있는 다윗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는 세상의 강력한 세력 앞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8편이 말하는 하나님의 비전,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꿈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매우 명확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도 없고, 세상을 지배할 수도 없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립니다.
오늘 본문 6절의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여러 차례 인용하는데, 신약성경이 이 말씀을 인용하는 구절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죠. 그리고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통치하십니다. 바로 이 장면을 묘사할 때, 신약 성경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발아래에 모든 만물이 복종하게 하셨다고 오늘의 본문 시편 8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세상을 통치하며 다스리시는 분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때 그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힘과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의 거인들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지금도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믿고 세상의 거인들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확신과 찬양
치열했던 하루의 삶을 마무리하고 어두운 밤이 찾아왔을 때,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았던 다윗은 시편 8편의 마지막 구절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지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 중의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위기를 겪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실패하며, 때로는 슬픔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치열한 삶의 한 복판에서도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일에 모든 시선이 사로잡혀 정처 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을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풍파가 제 아무리 거세게 몰려온다 하더라도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수가 있는 것이요, 바로 그때 온 땅을 뒤엎는 충만한 영광 중에 계시면서도 여전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등불 하나 없는 어두운 밤길에 말을 몰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던 가련한 마부의 처지에 놓여 있는 분들도 계시죠?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부러워하지도 말고, 시샘하지도 마십시오. 그 대신, 여러분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눈을 들어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비록 오늘 하루 치열하고 피곤한 삶을 사셨을 지라도 여러분이 눈을 들어 온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여러분이야 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요, 여러분이야 말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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