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5. 30. 17:57

우리는 새 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결심을 합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결단을 하죠. 올해는 기필코 성경을 한번 이상 읽어야 되겠다. 올해는 새벽기도를 열심히 참석해야 되겠다. 올해는 꼭 한 명 이상 전도를 하겠다. 그 외에도 다양한 신앙생활과 관련된 결심과 결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이 전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면, 그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시대에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신앙적인 열심은 있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충한 일꾼들이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 주제거든요.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종교적인 열심이 있다고, 교회에서 열심히 무엇인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대교의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하나님께 반역하는 불충한 일꾼들이 되게 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 3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예수님의 비유는 한 주인의 등장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주인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를 보여주지요. 33절을 다시 보십시오. 어느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포도원을 산울타리로 둘렀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즙 짜는 틀을 만들었고, ‘주인이’ 그곳에 망대를 만들었습니다. 포도원을 만들고 그곳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는 그 일을 누가 했습니까? 바로 주인이 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집주인이 이 모든 것을 모두 갖추는 동안 농부들이나 일꾼들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보십시오. 홀로 포도원을 만드시고, 홀로 산울타리를 두르고, 홀로 즙 짜는 틀을 만들고, 홀로 그곳에 망대를 세우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준비한 후 - 33절 후반부를 보시면 – 주인은 농부들을 불러 그 모든 것을 세로 주고 타국으로 떠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를 세우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를 공격하려는 수많은 적들로부터 우리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울타리를 쳐주신 분이 계시고, 우리 교회에 풍성한 은혜의 포도주가 넘쳐 흐릴 수 있도록 즙 짜는 틀을 만들어 주신 분이 따로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비전을 내다볼 수 있도록 망대도 세우시며 우리 교회에 필요한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다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준비해놓고 우리를 불러 그곳에서 일하게 하신 거지요.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한 것을 다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준비한 것 아니고, 우리가 돈으로 산 것도 아니고, 우리가 노력하고 수고해서 얻은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모두 다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그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불러주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 속에서 죄와 욕심과 어두움의 세력 아래에 살아가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구원하여 주셨다는 사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지극히 놀라운 은혜가 아닌가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를 충성스럽게 여겨 일꾼으로 삼아 주신 거에요. 제직으로 불러주시고, 항존직으로 불러주시고, 구역장으로 불러주시고, 찬양대원으로 불러주시고, 교회학교 교사로 불러주시고, 교회의 주차요원으로 불러주시고, 주방의 봉사자로 불러주시고, 다양한 사역의 사역자로 불러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친히 아름답게 가꾸어 오셨던 교회를 위해 지금까지 아무런 공로도 없는 나를 일꾼으로 불러주셨어요.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감격하고 또 감격할 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처음 직분을 받고 교회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봉사를 하게 되면,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라져요. 바로 그때 우리의 마음에 은혜에 대한 감격 대신 어떠한 마음이 들어오는지 아세요? 바로 보상 심리입니다. 

최근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회 고위층들의 여러 가지 잘못된 행동들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이 ‘보상 심리’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서울대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는 인간이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우리의 뇌가 그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은 보상심리를 느낀다고 주장합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서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갔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의 고생에 대해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인간의 뇌는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졌다는 것으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인간의 뇌는 그동안의 노력에 대해 보상을 받기 위해 보다 즉각적인 쾌락을 요구하게 되고, 그것이 언어폭력이나 성추행과 같은 돌출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거지요. 

연세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황상민 교수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고생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나름대로 높은 자리에 올라 성공을 하면,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정도야…’ 하는 보상심리가 그 마음 내면에 자리를 잡는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황상민 교수는 타이거 우즈가 자신의 스캔들을 반성하는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을 인용합니다. 우즈가 이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열심히 살았으니 유혹을 즐겨도 된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깊이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입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리고, 그 마음에 보상심리가 찾아온 사람들의 내면을 참으로 정직하게 묘사해주는 문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열심히 살았으니 유혹을 즐겨도 된다고 생각했다” 

여러분, 교회에서의 모든 봉사는 내가 봉사할 수 있고, 섬길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교묘하게 점령하려는 보상심리를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포도원의 소유권은 언제나 주인게 있습니다

자,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그 안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을 불러 그 포도원을 세로 주었습니다. 주인의 호의요. 주인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소출의 얼마를 받기 위해 주인이 농부들에게 종들을 보내자, 이 농부들이 배은망덕하게도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돌로 치기도 합니다. 또다시 종들을 보내보았지만 농부들의 자세는 변함이 없습니다. 자, 이제 주인으로서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듭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는 것이죠. 바로 그 장면을 오늘 본문 37절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37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이 말씀에 의하면 주인이 자신의 아들을 보내며 농부들에게 요구하는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주인이 농부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아들을 존대하고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농부들이 자신의 아들을 존대하고 존경할 것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아들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의 반응은 주인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 38절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우리가 함께 읽은 38절의 말씀에는 농부들이 주인을 존대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38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합니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아들의 유산, 곧 포도원 자체를 자신들의 것을 소유하자는 제안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고 그 안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을 불러 포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때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원의 소유권을 넘겨 준 것이 아닙니다. 세를 받고 포도원의 사용권을 주었죠. 다시 말하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주어졌지만, 포도원에 대한 소유권은 여전히 주인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농부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사용권을 준 주인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용권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욕심을 냅니다. 주인의 소유권까지 차지하여 주인의 자리에 오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 결과 주인에 대한 존대, 주인에 대한 존경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어느 단체나 조직에서 회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을 대부분은 칭찬받고 박수 받을 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조금 다릅니다. 교회는 회원들이 주인의식을 갖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저만의 주장이 아니라 지구촌교회의 이동원 원로 목사님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이동원 목사님이 40대 후반 지구촌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 지구촌교회의 출석인원이 일만 명을 넘어섰어요. 그러자 어느 성도가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목사님께서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목사님의 왕국이 됐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이동원 목사님이 가슴을 치며 ‘내가 지금까지 목회를 잘못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동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우려할 만한 모든 일들은 청지기 의식에서 떠나 자신이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여러분, 성경은 단 한 번도 우리가 교회에서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우리를 청지기라고 말합니다. 청지기에게는 소유권이 없고 다만 사용권이 있습니다. 주인이 허락한 시간 동안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정한 시간이 지나면 내가 자기고 있던 것을 다른 사람에 넘겨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청지기 정신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지금 자리를 잡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지요. 지금은 여러분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고 우리 모두가 이곳을 떠나는 순간 그 자리는 더 이상 여러분의 자리가 아닙니다. 다음에 누가 앉든지 그 사람의 자리가 되는 거죠. 봉사하는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학교를 섬기고, 또 어떤 분들은 구역장으로 구역원들을 섬기시고, 또 다른 분들은 찬양대를 섬기시지요. 하나님께서 어떤 분들은 제직으로, 또 어떤 분들은 항존직으로, 그리고 또 어떤 분들은 목사와 장로로 교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자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의 주인이 언제나 여러분은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한 분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두 가지 모습의 심판

예수님께서 비유의 내용을 다 말씀하신 뒤, 이렇게 질문합니다. 오늘 본문 40절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비참한 최후를 매우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오늘 본문 41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1절의 말씀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 대해 내리는 심판의 모습을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41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에 대한 감격도 없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도 없어 충성하기보다는 반역했던 악인들에 대해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이것이 포도원 주인이 내리는 심판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의인들에 대한 심판도 등장합니다.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드디어 ‘다른 농부’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다른 농부’들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시대의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이 처음부터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포도원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감격스러운 것인지 깊이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포도원의 주인을 경외할 줄 알고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기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주인에 베풀어준 은혜에 대한 감격과 주인에 대한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일할 사람들이었죠.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자신을 반역하는 농부들을 진멸하고 새로운 충성스러운 일꾼을 포도원에 불러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봅니다. 그래서 누군가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일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죠.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보상심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지, 아니면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는지 하나님은 정확하게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주인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지, 아니면 청지기 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지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보상심리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주인의식이 아니라 청지기 의식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을 포도원의 일꾼으로 써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떠한 역할이 주어졌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충성함으로 말미암아 ‘잘하였다’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으며, 더욱 많은 것으로 받아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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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