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있는 나무 가운데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무로 알려진 것은 세쿼이야 국립공원에 있는 ‘제너럴셔먼트리’(General Sherman Tree)입니다. 이 나무의 높이는 83m, 나무 밑동의 둘레는 31m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나무의 수령은 어떻게 될까요? 제너럴셔먼트리가 살아온 세월은 자그마치 2,600년이라고 하니 제 아무리 100세 인생을 살아가는 시대라 할지라도 제너럴셔먼트리의 수령을 가늠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제너럴셔먼트리와 거의 동시대의 나무들의 나이테를 조사한 연구자들은 제너럴셔먼트리 역시 지금까지 83번의 화재를 겪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600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지역에 화재가 일어났고 제너럴셔먼트리는 83번이나 큰 화재를 이겨내고 지금까지 생존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제 부터입니다. 세쿼이야 국립공원의 안내문에 의하면 제너럴셔면트리가 지금도 여전히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원 안내문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나무는 끝없이 자란다.”(X2) 이것이 나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물 가운데 동물들은 태어나 성장하여 성체가 되면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시간이 더 흐르면 노쇠해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지요. 그러나 나무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끝없이 자라고, 제너럴셔먼트리는 2,600년 동안 83번의 큰 화재를 겪으면서도 그 모든 시련과 아픔을 이겨낸 채 지금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두 가지 형태의 성장으로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의 믿음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자라나는 경향과 동일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어린 아이들이 성장하듯, 어린 동물이 성장하듯 우리의 믿음도 성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지점에 이르면 정체기를 맞이하고 결국 믿음이나 신앙이 그 상태로 머무거나 혹은 쇠퇴하는 경향을 보이지요. 대부분의 동물들이 성장하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은 이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것은 동물의 성장이 아니라 나무의 성장과 같습니다. 우리의 몸은 어린시절을 지나며 성장하지만 어느 순간 성장이 멈추는 시기가 찾아오고 시간이 더 흐르면 점점 노쇠해지지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혼만큼은 끝없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바로 그것이 신약성경이 이야기하는 우리 믿음의 성장입니다.
마을 밖으로 나가사
오늘 본문의 사건은 벳새다라는 장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2절)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의 맹인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앞을 볼 수 없었기에 주변 사람들은 그의 앞길을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인도하며 예수님께 데리고 왔겠지요. 그리고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께 한 가지를 요구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22절 뒷부분입니다.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그들은 예수님께 손을 좀 대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맹인을 굳이 예수님께 데려와 손을 대어 달라고 하였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정말로 예수님께서 손만 대어주시면 그들이 만족하였을까요? 모르기는 몰라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손을 대어 그 눈을 열어주시기를, 그를 치유하여 주시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에 응답하여 주셨습니까? 계속되는 23절에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23a절)
먼저 예수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아주셨습니다. 그 사람을 데리고 왔던 사람들의 요청, 곧 ‘그 맹인에게 손을 대어주세요’라는 요청에는 문자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그들의 마음에서 간절히 원했던 맹인의 눈을 치유하여 앞을 볼 수 있게 하시는 일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23절이 이렇게 이어지잖아요.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손을 대어 그의 눈을 고쳐달라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버리시네요.
이때 맹인을 데리고 왔던 사람들이 함께 갔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맹인을 데려온 사람들에 대한 언급도 오늘 본문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심지어 본문의 마지막 26절에는 예수님께서 눈을 뜨고 밝히 보게 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면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맹인을 데리고와서 예수님의 치유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하여 주신 장면을 목격하지도 못했고, 이후에 그 사실을 확인하지도 못했겠지요.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은 그들이 데려온 맹인을 치유하지 않고 내버려두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렸을 때, 아니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맹인을 데리고 사람들이 없는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신 이후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장소에서, 그들이 원했던 그 시점이 아니었을 뿐이지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이러게 말씀하셨지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성부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을 위한 새로운 일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여러분을 위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펼치고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장소가 우리의 생각과 달라서 지금 나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비록 여러분의 눈에 예수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섭리를 알 수 없을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을 위해 새 일을 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의 눈앞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하나님은 여러분이 마음에 품고 있는 소원을 다 아시고, 지금도 여러분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불완전한 치유
사람들이 맹인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지요. 예수님은 그 사람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그의 눈을 고쳐주십니다. 본문 23절의 뒷부분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네요. 여기에 그 사람의 눈에 침을 뱉으시는 장면은 우리 시대에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학지식이 없었던 고대 오리엔트지역의 문헌을 찾아보면, 인간의 침으로 병자를 치유하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에게 환처에 침을 뱉었다는 것, 나아가 그에게 안수하셨다는 것은 당시의 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치유 행위를 진행했다는 뜻이 됩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치유의 사건과는 다른 매우 독특한 점이 하나 등장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침도 바르시고 안수하여 주셨음에도, 곧 예수님께서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식적인 치료의 모든 과정을 다 밟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이 완벽하게 치유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3절의 마지막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신 뒤에 그 사람에게 “무엇이 보이느냐” 물어보시지요. 이때 그 사람의 대답이 24절에 등장합니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4절)
이 사람의 대답은 이해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보인다고 말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서 사람이 없는 마을 밖으로 데리고 왔거든요. 그러니 그곳에서 사람들이 보인다는 것부터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나중 대답은 더욱 기괴합니다.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다닌데요. 나무가 아니라 나무처럼 생긴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걸어다닌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꼭 만취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같지 않으세요? ‘나는 가만히 있는데 전봇대가 와서 나한테 부딪쳤어.’ ‘아니 갑자기 아스팔트가 일어나더라고.’ 뭐 이런 대답이지요. 한 마디로, 그 맹인의 눈이 아직 완벽하게 치유되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예전보다는 무엇이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실체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가운데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자, 오늘 본문 바로 뒤에는 그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시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계속해서 예수님은 더욱 중요한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지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시니이다”라고 멋지게 신앙을 고백합니다(막 8:29). 베드로의 눈이 그만큼 열린 것이지요.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바로 뒤이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앞을 가로 막으며 십자가의 길은 결코 가시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저항하잖아요. 베드로의 눈이 조금씩 열린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이 십자가로 완성된다는 사실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희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있게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아픔과 질병을 치유하시는 회복의 예수님도 보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필요와 궁핍을 다 아시고 충만과 풍성으로 채워주시는 오병이어의 예수님도 보았지요. 심지어 인간의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 예수님도 베드로는 눈을 떠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해 점점 눈을 뜨고 있던 베드로가 결정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눈을 감게 되었던 지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구원의 길이 십자가 고난의 길이요, 베드로 자신을 포함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그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의 모습은 그 옛날 베드로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상태도 정확하게 묘사해주고 있지 않나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체험도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도 받아보았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부어주시는 풍성하고 충만한 은혜도 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신앙생활에 대해 내가 좀 안다고 이제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 좀 본다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았던 베드로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애써 외면하며 눈을 감아버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정확한 영적인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은혜로운 모습은 다 받아들이지만, 정작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에는 눈을 감아버린다면,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무엇인가 보기는 하지만 정작 우리가 보는 것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기괴한 현상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벳새다의 맹인이 예수님에게 첫번째 안수는 받았지만, 그의 눈이 여전히 사물을 흐릿하게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는 눈을 닫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의 영적인 눈이 어느 정도 열리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나의 욕심과 탐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회피하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 맹인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5절)
25절이 어떻게 말씀합니까?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오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집중해야 할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여기에 등장하는 “다시”라는 부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안수하셨습니다. 두번째 안수하신 것이지요.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25절 뒷부분입니다. 먼저 주목하여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밝히 보기 시작했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첫번째 안수를 받아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눈앞의 사물을 정확히 볼 수 없었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두 번째 안수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이제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안다고 자부하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에 도사리는 욕심과 탐심이 우리의 눈을 가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주목하여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고 나아가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게 만든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번째 안수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두 번째 안수를 받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완악해서 또다시 나의 욕심과 탐심으로 여전히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 길을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세 번째 안수, 네 번째 안수, 아니 우리의 신앙생활이 평생 지속되는 동안 “다시 안수하시매”, 이 말씀 그대로 다시 안수하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세쿼이야 국립공원에 있는 제너럴셔먼트리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그 공원 안내문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나무는 끝없이 자란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문장의 일부를 누락한 것입니다. 세쿼이야 국립공원에 있는 안내문은 정확하게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무는 충분한 햇볕과 영양분과 수분이 공급되기만 하면
끝없이 자란다.
나무는 끝없이 자랄 수 있습니다. 2,600년이라는 거대한 세월을 지나온 제너럴셔먼트리는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다. 그 오랜 세월 80회가 넘는 화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시련이 이 나무를 넘어트리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단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충분한 햇볕과 충분한 영양분과 충분한 수분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10년 전, 20년 전에 공급되었던 햇볕과 수분은 지금의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 달 전, 일 년 전에 공급되었던 영양분과 수분도 지금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두 번째 안수를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안수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의 눈이 활짝 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다시” 안수하여 주셔서, 말씀과 기도로 말미암은 햇볕과 영양분과 수분이 공급된다면 – 사도 바울의 선언 그대로 –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요, 우리는 세상의 어떠한 유혹과 고난이 찾아와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마지막까지 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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