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2020. 5. 3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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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사건은 벳새다라는 장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본문 22절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의 맹인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앞을 볼 수 없었기에 주변 사람들은 그의 앞길을 인도하며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께 한 가지를 요구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손을 대어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손을 좀 대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맹인을 굳이 예수님께 데려와 손을 대어 달라고 하였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예수님께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저 예수님께서 손만 대어주시면 그들이 만족하였을까요? 모르기는 몰라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손을 대어 그 눈을 열어주시기를 그를 치유하여 주시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에 응답하여 주셨습니까? 정답은 부분적으로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23절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먼저 예수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아주셨습니다. 맹인을 데리고 왔던 사람들의 요청, 곧 ‘그 맹인에게 손을 대어주세요’라는 요청에는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그들의 마음에서 간절히 원했던 맹인의 눈을 치유하여 앞을 볼 수 있게 하시는 일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23절은 이렇게 말씀하지요.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손을 대어 그의 눈을 고쳐달라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버리신 거예요. 

이때 성경에는 맹인을 데리고 왔던 사람들이 함께 갔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사실, 그 이후에 맹인을 데려온 사람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어요.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예수님께서 맹인만 마을 밖으로 데려 가신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므로 맹인을 데려와 예수님께 손을 대어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 맹인을 고치시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장면만 놓고 실망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본문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23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주변에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렸을 때, 아니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맹인을 데라고 사람들이 없는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신 이후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장소에서, 그들이 원했던 바로 그 시점이 아니었을 뿐이지요. 

여러분, 때로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온전히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손잡아 달라고 기도했더니, 정말 손만 잡아주시는 거에요. 손을 잡아주셨으면 질병이 떠나가고, 눈이 열리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체험하고 경험하는데 여전히 우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우리의 질병은 치유되지 않는 것이죠.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기도는 결코 무의미하게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다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맹인을 데려온 사람들이 직접 그 장면을 목격하지 못하였을 뿐이지, 예수님은 그들의 간구 대로 맹인을 고쳐 주신다고요. 

사람들이 맹인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대로 맹인의 손도 잡아주시고, 결국 그의 눈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건은 복음서에 기록되어있는 수많은 치유의 사건과는 다른 독특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침도 바르시고, 안수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나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어보시죠. “무엇이 보이느냐?” 

24절에 그 사람의 대답이 등장합니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 사람의 대답을 보면 이해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보인다고 말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을 사람들이 많이 있는 마을에서 사람이 없는 마을 밖으로 데리고 왔거든요. 그러니 그곳에서 사람들을 보았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나중 대답은 더욱 이상합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닌데요. 꼭 만취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같지 않으세요? ‘나는 가만히 있는데 전봇대가 와서 나한데 부딪쳤어.’ ‘아니 갑자기 아스팔트가 일어나더라고.’ 뭐 이런 대답이지요.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직접 눈에 침을 발라주시고, 직접 안수하셨지만 그 맹인의 눈이 완벽하게 치유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친히 안수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안수하여 주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한 치유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하지 못한 사건, 예수님께서 안수하여 주셨지만 여전히 완치되지 않은 사건은 복음서 전체에서 오늘 본문 밖에는 등장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묵상할 때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자,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눈에 침을 바르고 안수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치유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 번 더 그 맹인에게 안수를 해주신 것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오늘 본문의 키워드, 핵심 단어를 저는 25절에 등장하는 “다시”라는 부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안수하시매”의 ‘다시’라는 이 짧은 단어야말로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안수하셨습니다. 두 번째 안수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드디어 그의 눈이 열려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지요. 25절 뒷부분입니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여러분, 오늘 본문은 짧은 네 절의 기록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이 맹인에게 예수님의 첫번째 안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였고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눈은 완전하지 못하였고 만물을 명확하게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사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안수, 곧 예수님께서 다시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 바로 뒤에는 너무도 유명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눈이 열리기 시작했어요. 맹인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상태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첫번째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이 조금 열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메시아, 곧 구원자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해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던 베드로 역시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십자가의 길은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막아서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맹인이 첫번째 안수를 받고 눈이 조금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물을 분명하게 바라보지 못했던 것처럼,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분명히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의 모습은 그 옛날 베드로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묘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체험도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도 받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거의 경험으로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게 열려 우리 개인과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체험하며 살아가지만, 과연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지금 우리도 따라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우리는 벳새다의 맹인과 같이 예수님에게 첫번째 안수는 받았지만, 그리하여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나의 욕심과 탐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회피하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번째 안수, 다시금 나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예수님의 새로운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재정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십니까?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시기를 바라십니까? 우리의 앞길이 형통하게 되기를 바라십니까? 물론,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에 풍성하게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 있다면, 맹인을 예수님께 데려왔던 여러 명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풍성한 응답이 내가 원하는 시간과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함께 모여 기도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맹인에게 허락하셨던 두번째 안수, 오늘의 새로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릴 때, 비록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지라도, 비로소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삶을 풍성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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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