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2024. 2. 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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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 교단과 우리 교회의 표어는 “주여, 치유하게 하소서”입니다. 이 표어에는 치유와 회복이라는 중요한 주제가 담겨 있지요.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명이라는 주제도 담겨 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의 고전으로 자리를 잡은 헨리 나우웬의 저서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의 주제가 바로 치유와 회복, 그리고 사명입니다. 이 책에서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의 정체성으로 책의 제목인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를 제시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사역자는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온몸과 마음이 튼튼하여 상처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람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온몸이 상처로 가득하여 그 자신이 날마다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헨리 나우웬이 서술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의 고정관념을 수정해줍니다. 그 고정관념이 무엇일까요? 지금 나를 아프게 하는 그 상처가 모두 치유되어야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먼저 나의 질병이 치유되어야, 그 이후에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다는 착각이지요. 나는 여전히 몸이 병약하고 마음에도 큰 상처가 남아 있기에 아직은 다른 사람을 아픔을 보듬는 치유자가 될 수 없다는 자기변명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몸이 여전히 병들어 아프다 하더라도, 아니 나의 몸과 마음이 병들어 큰 아픔을 겪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는 것이요, 나아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참된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안식일 사역 

오늘 본문을 포함하여 마가복음 1장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하루의 사역, 보다 구체적으로 어느 안식일 하루에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해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1절부터 안식일에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막 1:21) 

아마도 안식일의 오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위있는 새 교훈에 깜짝 놀라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그 회당에는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며 “나오라” 명령하시니 그 즉시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바라보며 회당에 있었던 가버나움 사람들이 다시 한번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에 대해 깜짝 놀라게 되지요. 

같은 날이었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회당에서 나와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도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을 가르치셨지요. 그런데 그 집에도 병자가 있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자 그토록 심했던 열병이 그 즉시 나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등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같은 날 일어난 이 두 가지 사건은 몇 가지 측면에서 서로 대조를 이룹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을 내어 쫓아주셨던 사람은 남자였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서 고쳐주신 사람은 여자였지요.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던 사람은 귀신이 들렸습니다. 곧 그의 마음과 그의 영혼에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반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던 시몬의 장모는 열병, 곧 몸에 발생한 질병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으신 장소는 회당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공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장소는 그의 개인 집으로 사적인 공간이었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같은 날에 행하신 두 사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두 사건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남자든 여자든 구별 없이, 귀신이 들려 마음과 영혼에 큰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든 몸에 병이 들어 아파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회당이라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공적 장소는 물론이요 안식일에도 회당을 찾아가지 못한 채 여전히 병상에 누워있는 개인의 가정집에서도. 예수님은 모든 질병과 모든 아픔을 치유하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도 고쳐주시고, 같은 날 시몬의 장모도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루의 해가 저물자, 가버나움에 있는 모든 병자와 모든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입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모든)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2절) 

이 구절에서 “모든 병자와 모든 귀신 들린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오네요. 어떤 질병이든 누구의 아픔이든 상관없이 가버나움의 모든 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본문 34절입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34a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치유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육신의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히 치유하여 주십니다. 우리 가운데 마음과 영혼에 큰 상처와 아픔이 있어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우리의 모든 약함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지금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들만이 아니라, 주일이 되었음에도 몸이 너무도 아파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예배할 수밖에 없는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하는 능력은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어제의 치유와 오늘의 사명

예수님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그곳에서 귀신을 쫓아내셨지요. 이후 시몬의 집에 들어가서 또다시 병자를 치유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저녁이 되었는데, 가버나움 동네의 모든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은 그들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렇게 안식일 하루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병자를 치유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시는 사역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입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5절) 

예수님께서 새벽부터 기도하시네요.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이른 새벽부터 기도하시는 모습을 목격하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7절)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 곧 지금 예수님을 찾고 있는 그 “모든 사람”은 어제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치유를 경험했던 가버나움 동네의 모든 사람입니다. 그들이 지금 또다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제와 같이 오늘도” 말씀을 전해주시고 그들의 몸과 마음의 질병도 돌보아 달라는 요청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을 단번에 거절하십니다. 본문 38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8절)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전도”라는 단어가 우리의 시선을 이끕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거나 “천국 복음을 전하셨다”라고 표현하지 전도하셨다고는 잘 표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신약성경에서 전도라는 단어는 제자들 혹은 이후 사도들이 예수님을 전하는 활동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전도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고 말씀하시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을 전도의 여정에 초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 3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시지요. “그곳에서도 전도하자” 지금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십니까?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무엇을 권하시죠? 다른 마을로 가서 그곳에서도 전도하자고 초청하십니다. 안식일이었던 “어제는” 제자들에게 치유와 회복을 경험시켜 주셨습니다. 안식일이었던 “어제는”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치유와 회복의 사건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다른 마을로 가서 그곳에서 전도하자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명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언급한 헨리 나우웬의 책 <상처 입은 치유자>에는 하나님께 사명을 받아 다른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치유하는 참된 사역자의 모습을 매우 인상적으로 비유로 묘사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잠이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한꺼번에 다 풀었다가 
다시 한꺼번에 싸매지만, 
[참된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한 번에 한 군데씩 풀었다가 
다시 싸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하게 될 거야. 
그때 잠시도 지체하지 않기 위해 나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해”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가 가장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나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한 번에 다 풀어놓고 “하나님 나의 상처를 완벽하게 치유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우리를 치유해주셔서 우리의 아픔과 상처가 하나도 남지 않도록 완벽하게 치유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명자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나의 상처를 한 번에 한 곳만 풀어서 치료합니다. 그런데 아직 나의 몸에서 많은 상처가 남아있거든요. 그러나 어제 예수님께서 나의 상처 한 곳을 치료해 주었으니, 오늘은 주님과 함께 사명의 자리를 향해 떠날 수 있도록 자신의 남은 상처를 모두 싸매어 두는 사람이지요.

자신의 장모님이 예수님에게 치유를 받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과 모든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제” 우리를 치유해 주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돌보아 달하는 요청입니다. “어제”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로운 말씀을 또다시 들려달라는 요청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비유를 인용하면, 그들은 자신의 모든 상처를 다 풀어놓고 그 모든 아픔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치유해 주셔야 주님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서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안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제 이미 치유를 경험하지 않았느냐고, 어제 이미 권위 있는 새 교훈을 듣지 않았느냐고, 언제까지 나에게는 더 큰 은혜와 더 큰 치유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전도의 자리 사명의 자리를 외면하겠느냐고. 여전히 상처가 남아있지만, 이미 하나님의 치유하는 손길을 경험하였으니 그 정도는 다시 싸매어두고 나와 함께 사명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자는 제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는 성경의 말씀을 정말 믿으시나요? 여러분은 모든 아픔과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질병과 아픔도 치유하여 주실 것을 확신하십니까? 그 믿음이 있다면, 여러분의 남은 상처를 이제는 싸매고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와 회복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전도자가 되십니다.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괴롭지만, 어제의 은혜를 오늘도 요청하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마시고, 어제의 은혜를 받았으니 오늘은 주님과 함께 새로운 사명을 위해 전진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여러분에게 치유와 회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월 첫번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성만찬을 거행합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위대한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는 시간이지요. 나아가 성만찬은 지금도 우리에게 하늘의 풍성한 양식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또한 성만찬은 온갖 질병과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하던 우리를 온전히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식입니다. 이처럼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돌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만찬에는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넘어, 이제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는 ‘전도’의 의미 곧 사명의 의미도 담겨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나요? 성만찬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는 고린도전서 11장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6) 

오늘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하늘의 식탁인 성만찬에 참여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주일을 맞이한 “오늘” 우리 모두가 치유의 은혜를 누리고, “내일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을 위해 힘차게 달려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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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가복음 강해2021. 10. 1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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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 인간의 이성과 언어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조차 없는 이 난해한 가르침을 기독교가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육신이 아니면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야 한다면, 그래서 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 우리가 찾아 올라가야 한다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날 기대와 소망을 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다는 성육신의 진리를 믿는다면 비로소 하나님과 만나 교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열리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성육신의 가르침은 오는 것과 가는 것의 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오라”고 요청하시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인간을 찾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성육신의 가르침입니다. 

교회에서 행사는 여러 전도와 선교 역시 오는 것과 가는 것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전도와 선교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오라”고 요청합니다. 우리 교회가 전도 집회를 준비하고, 우리 교회가 전도 행사를 준비하고, 우리 교회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프로그램을 준비하였으니 많이 오셔서 많이 참석하시라고 요청합니다. 이 모든 활동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때로는 마케팅의 원리를 사용하기도 하고 기업이 상품을 홍보하듯 전단지나 홍보물을 제작하여 배포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이 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에 있어 더욱 중요한 원리는 성육신의 원리입니다. 한 마디로, 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 가는 것입니다.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갑니다. “오라”고 요청하기에 앞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나눕니다. 바로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를 따르는 전도와 선교의 방식입니다. 코로나 시대,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이 제약을 받는다고 아쉬워합니다. 코로나 이전에 성도들이 따닥따닥 붙어 앉아 예배했던 모습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믿는 성육신의 가르침에 따라면 우리가 더욱 안타까워해야 할 또 하나의 영역이 있습니다. 곧,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분들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 섬김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장 45절은 마가복음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마가복음의 핵심 문장입니다. 이 구절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인자가 온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곧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곧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목적, 그 첫번째는 무엇입니까? 섬김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마가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크게 두 구분으로 구분하는 여러 기준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지역입니다. 마가복음의 앞부분, 구체적으로 마가복음 1장부터 8장까지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지역은 이스라엘의 변방 갈릴리입니다. 이른바 소외계층, 빈곤층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첫 번째 이유로 등장하는 섬김은 마가복음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해줍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을 섬기셨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셨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변방인 갈릴리 지역에서 몸이 병든 환우들을 섬기셨고, 귀신 들려 괴로워하는 이들을 섬기셨고,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돌보시며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섬기신 수많은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한 대목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 첫번째 청중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군중이었어요. 당시는 마이크 시설도 없고 음향시설도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목소리를 높여서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가르치셨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해주셨지만,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그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곤 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군중을 피해 제자들과 있을 때에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그 비유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군중을 상대로 말씀을 전하시고, 또한 제자들과 만나 그 말씀을 보다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신 바로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해가 지고 하루의 일과를 마감해야 할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셨던 예수님도 피곤하셨겠지만, 예수님을 곁에서 수행하였던 제자들도 이제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쉬어야겠다고 생각했겠지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갈릴리 바다에 배를 띄워라. 지금 바로 갈릴리 바다 반대편으로 가야 되겠다.” 제자들은 그 밤에 왜 갈릴리의 반대편으로 건너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배를 타고 반대편으로 항해를 합니다. 갈릴리의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그 길에서 제자들은 큰 광풍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아둥바둥하고 있는데, 여러분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배에서 주무시고 계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 시간은 취침해야 하는 한 밤중이었어요. 큰 광풍에 배 안이 온통 바닷물로 가득한 순간에도 깊이 주무셔야 했던 밤시간이었다고요. 제자들이 다급히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바다와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참된 믿음에 대해 교훈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도착했던 곳은 다름 아닌 거라사인의 땅이었습니다. 바로 거기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한 명 있었거든요. 

이른바 ‘거라사의 광인’으로 알려진 그 한 사람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은 그 밤에 배를 타고 풍랑이 치는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셔야 했던 사람도 많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셔야 했던 사람도 많았으며, 예수님께서 봉사하며 섬겨야 할 사람이 언제나 예수님의 주변에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만큼은 풍랑을 헤치면서까지 거라사인의 땅을 찾아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러운 귀신 들린 그 한 사람을 섬기시기 위해, 그 한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 한 사람을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구해주시기 위해 찾아가셨어요. 바로 이것이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지역에서 갈릴리 바다 맞은 편에 위치한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을 향해 치유를 선포하실 수는 없으셨을까요?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그 밤에 굳이 풍랑을 맞으면서까지 갈릴리를 건널 필요가 없잖아요.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말씀 한 마디로 그 모든 귀신을 쫓아내실 수 있으시잖아요. 굳이 바다를 건너가시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을 보내어 그것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알려주실 수도 있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성육신의 원리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실 것이면, 굳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지요. 저 하늘 보좌 우편에서도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우리의 모든 약함을 치유하실 수 있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믿고 우리가 사랑하여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는 예수님은 저 멀리 하늘 보좌 우편에서 능력으로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요, 그 밤에 갈릴리를 건너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을 찾아가신 분이요,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사랑으로 섬기며 봉사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 대속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장 45절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신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찾아오신 성육신의 이유와 목적을 말씀해주시지요. 그 두번째 목적은 “대속”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우리가 묵상하는 마가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마가복음을 두 부분으로 구분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지역입니다. 마가복음의 앞부분, 곧 마가복음 1장부터 8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사역은 오늘 본문 10장 45절에 등장하는 하나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데, 바로 ‘섬김’이지요. 자, 이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변방이었던 갈릴리를 떠나 이스라엘의 중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마가복음의 후반부, 보다 구체적으로 마가복음 8장 이후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과정과 그곳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오늘 본문 10장 45절에 등장하는 하나의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대속’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이유는 그곳에서 영광을 받으려 함도 아니요,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기 위함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고 박해를 받고 마침내 죽음을 당하기 위해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연이어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 10장 45절은 예수님의 죽음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매우 명확하게 선언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러분, 대속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범죄한 것은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저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랑과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내가 스스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보라고,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고, 내가 뭐 그리 큰 잘못을 지었느냐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간에 대한 공정한 판단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내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악은 너무도 크고 너무도 무겁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때 대속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기에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인간들을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을 보면 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 곧 구원자는 대속의 고난을 당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4) 

사람들은 메시아의 고난을 지켜보면서도 그것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오해일 뿐, 인류의 구원자가 고난을 받는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대속의 고난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6) 

구약성경의 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막 10:45)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봉사요,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너희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지요. 섬김과 대속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시기 위하여 오셨지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대속과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비그리스도인들이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언급하기도 하시거든요.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막 10:42)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먼저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섬김에 대해 모릅니다. 그들은 주님의 대속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목표는 다른 사람을 임의로 주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은혜를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막 10:43a) 예수님의 이 말씀을 조금 더 분명한 표현으로 바꾸어 볼까요? “너희는 그들과 다르다.” “너희는 그들과 달라야 한다.” “너희는 그들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재물의 힘과 권세의 힘과 사회적 지위의 힘을 총동원하여 다른 사람을 임의로 다스리려고 합니다. 권세를 부리려 하고, 서로 다른 사람 위에 올라가 섬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나는,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일까요? 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을 받았잖아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받았잖아요.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았잖아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듣고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하는 삶의 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것과 전혀 달라야 합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3-44)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10147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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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가복음 강해2021. 2. 7.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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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장면을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당시 서기관이나 율법 교사에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참된 권위가 예수님께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귀신 들린 사람도 고쳐주셨지요. 이번에도 예수님은 참된 권위를 가지고 귀신을 꾸짖으시며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명령하시니 귀신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다시 한번 예수님에게 참된 권위가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상이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마가복음 1장 21절부터 28절까지의 내용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1-28절 “권위 있는 새 교훈”)


예수님께서 이처럼 참된 권위를 가지고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뒤, 예수님은 곧 이어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이지요. 지난주 본문이었던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축귀 사건과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오늘의 본문, 곧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사건을 하나의 흐름에서 읽으면, 이 두 사건은 예수님의 치유라는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는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그가 겪고 있었던 문제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아픔이었습니다. 반면, 시몬의 집에서는 열병으로 괴로워하는 그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열병이라는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셨던 것이지요. 또 하나의 대조점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사람은 남자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 사람의 성별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은 여러 언어들이 그런 것처럼 사람을 나타내는 명사에 성별 구분이 명확하거든요. 그래서 영어 성경만 보아도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귀신 들린 사람을 남성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한 사람은 시몬의 장모였으니 당연히 여자입니다. 이처럼, 지난주 본문이었던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축귀와 오늘 본문인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사건을 하나의 흐름으로 읽어보면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 곧 영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에 사로잡혔던 사람도 치유하시고 열병 들린 사람, 곧 육신의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자도 치유하시고 여자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건의 결론으로 마가복음 1장 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마가복음 1장 34a절) 

여기에 각종 병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에도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예수님은 각종 병, 곧 육신의 아픔이든 마음의 상처이든 영혼의 질병이든 그 모든 것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 곧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능력이 많은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모든 질병은 다 치유받아도 내가 겪고 있는 이 아픔만큼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은 다 치유하셔도 나는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 드세요? 아닙니다. 각종 병으로 아파하는 모든 사람을 고치셨던 예수님은 지금 여러분의 아픔도 넉넉히 치유하여 주십니다. 


공적 장소에서 사적 장소로

귀신들린 남자를 고쳐주신 사건과 열병으로 앓아누웠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는 사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입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마가복음 1장 29절)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공적 활동이 행해지는 회당에서 개인의 공간인 가정으로 장소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되어있으니, 한 형제였던 시몬과 안드레는 이 집에서 함께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자,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당연하지요. 시몬과 안드레의 집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 그들만의 사적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본문 29절은 예수님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간 사람이 야고보와 요한뿐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가버나움 회당이나, 시몬과 안드레의 집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셨던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서도 병자를 고치며 말씀을 가르치셨겠지요. 그러나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 나의 사적인 공간인 가정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 사이에는 너무도 큰 차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과의 친밀감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회당에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있겠지만, 주님과의 개인적인 친밀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가정을 방문하셨을 때 그들이 주님과 나누었을 그날의 식탁을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모신 그 식탁에는 시몬과 안드레가 주님을 마주 보았고 그 곁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겠지요. 그렇게 네다섯 명이 식탁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그 친밀함이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은 회당에서 많은 사람을 가르치며 많은 사람을 고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곧’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는 것보다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함께 둘러앉아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친밀함을 누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유진 피터슨이 생전에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고 있었던 자신의 아들과 나누었던 편지가 최근 출판되었습니다. 우리말로도 번역이 되었는데 책의 제목이 <젊은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한번은 멀리 이사를 가면서 새로운 교회를 찾는 성도를 유진 피터슨이 상담했나 봅니다. 유진 피터슨이 여러 가지로 권유했음에도 그들은 무조건 큰 교회, 잘 짜인 교회 프로그램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유진 피터슨이 평가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중에 한 문장만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알고 그들이 아는 목사는 아마 절대 갖지 못할 것이다.”(p. 133) 이 문장에서 제 마음에 참 오래 각인되어 있는 표현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을 알고 그들이 아는 목사” 성도의 입장에서 ‘나를 알고 또 내가 아는 목회자’를 만나 함께 신앙생활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한편, 목회자의 입장에서 ‘나를 알고 또 내가 아는 성도’들과 친밀히 교제하며 목양하는 일은 또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그래서 이 축복을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겼던 유진 피터슨은 규모가 큰 교회가 제공하는 수많은 장점들을 다 포기하더라도 이 ‘친밀함’만큼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값진 보물이라고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회당에서 예수님의 권위있는 새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 일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면 안돼요.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과 같이 자신의 가정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예수님과 교제하며 지금도 나를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비로소 회당에서만 예수님을 만났던 무리들의 자리에서 벗어나, 내가 주님을 알고 주님이 나를 아시는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셔오는 용기

예수님은 회당을 나와 곧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그들의 집에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어 있는지라 (마가복음 1장 30a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열병’은 온몸에 열이 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현대의 의학적 상식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의 질병이라기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체온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증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오늘과 같은 의학 지식이 없었기에 열이 나는 원인을 알 수 없어 그와 같은 모든 증상을 그저 열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해열제나 항생제가 있을 리 없으니 열이 펄펄 끓어오르면 그 원인도 모른 채 그 큰 괴로움이 다행히 모두 지나가기까지 그저 견디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니 본문에 등장하는 열병은 우리 시대에는 대수롭지 않은 증상으로 여길지 모르나, 당시로서는 너무도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을 자신의 사적인 장소인 가정으로 모셨습니다. 이제 회당에서는 불가능한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나누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에 모시니 예수님의 눈에 열병이라는 무서운 질병에 걸린 식구가 보이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사적인 장소, 나의 가정으로 모시며, 그분과 친밀함을 나누려 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우리 가정의 가장 연약한 장면이 드러나게 됩니다. 나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예수님께 보여드릴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오시자,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목격하는 것은 별로 불편한 일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을 목격하였지만, 회당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일은 놀라운 일, 깜짝 놀랄 일은 되어도 나의 문제나 우리 가정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 집으로, 예수님을 나의 개인적인 삶의 공간으로 모셔들이면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어요. 나의 치부가 드러납니다. 나의 연약함이 드러납니다. 마침내 나의 죄성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주님께 드러내지 않으면 주님을 나의 개인 공간에 모실 수도 없고, 그 주님과 친밀함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그 주님을 가까이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원한다면 우리 가정에 병자가 있어도, 나에게 큰 문제 거리가 있어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심각한 죄악이 도사리고 있어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아픔, 나의 문제,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죄에 대해 예수님께 솔직히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마가복음 1장 30절)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오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있었잖아요. 예수님께서 그 장면을 보기만 해도 상황 파악을 하셨겠지요. 모르실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을 주목해보세요. 사람들이, 곧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이 그 여자에 대해 곧 예수님께 다 아룁니다. 

예수님을 회당에서 만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의 가정으로 모셔들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이와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아픈 상처가 있으시나요? 여러분, 용기를 내어 바로 그 자리로 예수님을 모셔들이십시오. 여러분의 과거가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까?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셔들이십시오. 아직 떨쳐버리지 못하여 여전히 여러분의 영혼을 옥죄어 오는 습관적인 죄악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바로 그 자리에 모셔들이고 주님께 여쭈십시오.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내 깊은 내면의 모습과 우리 가정의 오랜 상처를 주님께 내어 놓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예수님을 여러분의 사적인 공간으로, 여러분의 깊은 내면으로 모실 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위대한 치유의 역사는 단지 회당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삶 속에서 펼쳐지는 여러분 인생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변화된 가정

시몬과 그 주변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열병으로 앓아 누운 여인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 예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그녀를 치유해 주십니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마가복음 1장 31a절)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자신의 사적인 공간으로 모셔들이며 예수님과 친밀함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은혜입니다. 본문 31절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결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마가복음 1장 31b절)

그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선 정도가 아니라, 온몸에 활력이 넘쳐서 자신의 역할을 힘 있게 감당하고 손님을 즐겁게 접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치유는 즉각적이고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서술은 단지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육신을 완벽하게 치유하셨다는 의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 예수님의 제자들로 구성된 신앙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이미 결혼을 했어요. 오늘 본문에 장모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연히 아내도 있었고 자녀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가정을 돌보기보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늘 동행해야 해요. 만일 시몬이 식구들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면, 그래서 식구들이 시몬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면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사복음서를 보면 시몬 베드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 본문의 사건 외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시몬의 가족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을 동의하고 지원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그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회당에서 만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아요.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초대합니다. 물론, 그의 가정은 완벽하지 않았지요. 부끄러워서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면도 있었지요.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을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장소까지 모셔들였고, 그 가정의 가장 아픈 부위를 주님께 아뢰었어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실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며 신앙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가정으로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회당을 나와 여러분의 가정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곳에서 여러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회당이라면 예수님께서 언제든 들어가 가르치실 수 있지만, 여러분의 가정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초대하고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해야 우리 주님께서 들어가실 수 있지 않겠어요? 물론 우리 가정에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가 있지요. 우리의 마음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지요.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죄악이 있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기를 내어 바로 그 자리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어 들이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 가정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아픔을 치유하시고, 
예수님께서 여러분 영혼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죄악을 치유하시며 
예수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은 물론이요, 여러분의 가정은 
주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축복의 가정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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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21-34절 “회당에서 가정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막 1:21-34) 본문에서 여러 마을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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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가복음 강해2021. 1. 3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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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심리학자였던 잭 볼스윅(Jack Balswick)은 ‘권위’라는 기준으로 가정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 유형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으로 가정의 모든 권위가 아버지에게 집중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 혹은 그 위의 세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대표적인 가정의 모습이지요. 가정의 모든 일은 아버지가 결정하고 그 외의 식구들은 아버지의 결정에 무조건 순종을 강요받습니다. 이것이 잭 볼스윅이 말하는 첫 번째 유형의 가정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현대적 가정의 형태로 권위가 부재한 가정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권위를 상실하였고,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모든 식구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살면서 가정은 혼란스럽고 때로는 서로 갈등합니다. 이것이 잭 볼스윅이 이야기하는 두 번째 가정의 형태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이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인데, 가정의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둔 성경적인 가정입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숙고하고, 하나님의 뜻이라 여겨지면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순종하는 가정입니다. 

자, 권위를 기준으로 가정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가정, 권위를 잃어버린 현대의 가정,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권위를 부여하는 성경적인 가정.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이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십니까? 


권위 있는 새 교훈

오늘 본문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행하신 일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가르치시는 일이요, 또 하나는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마가복음 1장 21절) 그러자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귄위있는 자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 1장 22절) 

그날 회당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른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일이 두 가지였다고 말씀드렸죠. 첫 번째는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두 번째 일, 곧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사건 이후에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동일했습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마가복음 1장 27절) 

그날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또다시 깜짝 놀랍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권위 있는 새 교훈에 귀신들도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지신 권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날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이 목격하고 체험하였던 예수님의 권위,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예수님의 권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을 가지고 본문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뭇사람이 예수님의 교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어서 당시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율법 교사, 서기관, 랍비 등 율법을 가르치는 많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권위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 “위대한 랍비가 말하기를 ….”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마음도 선포할 수 있는 권위가 없기에 모세를 비롯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를 인용할 필요가 없고, 위대한 랍비를 인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는 그 말씀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안에는 인간들이 소유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27절도 다시 보십시오. 사람들이 다 놀라 서로 이야기합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그다음에 등장합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당시 예수님 외에도 귀신을 쫓아내는 이른바 축귀를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귀신들을 결박할 권위가 없지요.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존재를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기도 하고,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여러 가지 도구를 이용하면서 귀신을 쫓아내는데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물도 바치고 주문도 외우고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하면서 뭔가 요란하게 행위를 해도 그들에게는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는 권위가 없으니 오랜 시간 귀신과 씨름을 해야 했고, 그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바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셨던 예수님의 모습에는 권위가 있었어요. 제물, 주문, 특별한 도구 그런 거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귀신하고 무슨 거래를 하는 것처럼 밀고 땅기는 일 없어요. 예수님은 그저 권위를 가지고 귀신에게 명령합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마가복음 1장 25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니 귀신에게 ‘나오라’ 명령하면 귀신은 나가야 해요. 그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유하신 이 권위,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이 권위는 어떠한 인간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예수님만이 가지신 고유한 권위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저와 같은 설교자들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권위가 없어요. 그래서 말할 때마다 ‘성경이 말하기를…,’ ‘본문이 말하기를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인용하고 성경을 인용해야 합니다. 저를 비롯해 모든 인간 설교자들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권위가 없기 때문이지요. 

몸과 마음과 영혼에 큰 질병이 들어 괴로워하는 분들을 위해 우리가 서로 기도할 때도,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권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와 회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권위가 없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권위가 있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권위는 세상의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기에 가지고 계신 권위입니다. 이렇게 본문의 핵심 주제를 파악하고 나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오늘은 그 교훈을 두 가지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온전한 권위와 권세는 오직 예수님께만 있고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장 5절) 

지난주부터 우리는 주일5부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매주 주일5부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책임을 맡게 되면서 저에게 여러 가지 걱정이 찾아왔어요. 물론 매주 설교를 준비하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지요. 그러나 그보다는 주일 5부예배가 이제 막 신설된 예배이기에 아직 갖춰야 할 것들이 많아요.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찬양대나 찬양팀도 없고요, 별도의 예배인도자도 없어요. 봉헌위원도 지금은 전도사님들이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현장에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이 최대한 위축되어 있는 코로나의 제3차 대유행 중에 새롭게 시작된 예배이므로 성도님들이 얼마나 참여하실까라는 현실적인 걱정이 가장 켰습니다. 이렇게 주일5부예배에 대해 생각하며 걱정하고 있을 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어요. 찬양팀, 찬양대, 안내위원과 봉헌위원을 비롯한 예배 스텝, 그리고 그 무엇보다 온 예배당을 가득 채우는 회중들이 다 갖추어져 있을지라도 그 안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그 예배에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가버나움 회당에는 예수님께서 그곳을 방문하여 가르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기 이전에도 매주 안식일마다 사람들이 모여 예배했어요.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회당장과 랍비들이 말씀을 해설하였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던 가버나움 회당이었으니 그 동네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예배에 참여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을 찾아가시기 전에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으니 매주 안식일에 드리는 예배에 아무런 역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주일5부예배를 준비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준비하여 갖춰놓더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지 않으면 그 모든 준비는 허사가 되겠지요. 그러므로 주일5부예배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진정으로 걱정하고 근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제 막 신설되어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여러 요소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들만 열심히 준비하다 정작 모든 권위와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데 실패할 위험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건강을 잃어버릴까 걱정하십니까? 재물을 잃어버릴까 걱정하십니까? 성공의 기회를 잃어버릴까 걱정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더라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권위는 세상의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기에 가지고 계신 권위입니다. 이렇게 본문의 핵심 주제를 파악하고 나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 첫 번째 교훈은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교훈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가버나움의 회당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이전에 수많은 안식일을 보내며 그곳에서는 회당 예배가 시행되었습니다. 매주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회당장과 랍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지요. 마을 사람들은 안식일이 되면 어김없이 회당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이한 일도,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구원의 역사도 경험하거나 체험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그 안식일이나 그 바로 전주의 안식일이나 가버나움 회당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똑같아요. 그런데 유일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권위 있는 새 교훈을 가르치셨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달라지자 가버나움 회당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의 말씀을 듣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렸던 사람이 치유를 얻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갈릴리에 전파되면서(마가복음 1장 28절) 가버나움 동네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다면 우리 교회의 모든 예배가 이와 같은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 막 신설된 주일5부예배가 이러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현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찬양대요? 찬양팀이요? 예배 스텝이요? 더 많은 참석자들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시작된 주일5부예배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이 시간과 이 장소가 모든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는 현장이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이 시간과 이 장소가 모든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치유와 회복을 선포하는 현장이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이 시간과 이 장소가 예수님께서 친히 ‘권위 있는 새 교훈’을 선포하시는 현장이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 시간과 이 장소에 우리 주님께서 친히 행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며, 모든 아픔을 고치시며,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 자리에 펼치질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권위를 기준으로 가정을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첫번째 유형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으로 가정의 모든 권위가 아버지에게 집중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현대적 가정으로 가정 내에 권위가 모두 사라진 형태를 말하죠.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이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 가정으로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둔 성경적인 가정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세 가지 유형을 가만히 살펴보니, 이러한 가정의 형태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 먼저 첫번째 유형의 가정입니다. 아버지에게 모든 권위가 부여되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이지요. 이것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적용해보면 어떤 힘 있는 사람, 혹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권위를 양도하는 형태입니다. 그래서 힘이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을 하죠.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주고 유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교훈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 땅에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도 참된 권위는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 노래하잖아요(시편 146편 2절). 

권위를 기준으로 구분하였던 가정의 유형, 그 두번째는 가정 내의 권위가 모두 사라진 현대적 가정이었지요. 이러한 가정의 형태를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해보면 그 누구에게도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삶의 태도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자신의 방식대로 행동하지요. 이러한 삶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마치 자신에게 모든 권위가 주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의 태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현대인들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나에게는 아무런 권위도 없고, 우리에게는 아무런 권세도 없습니다. 얼마나 나 자신에게 실망해 보아야, 이 사실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권위라는 기준으로 가정을 구분할 때, 마지막 유형은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두는 성경적인 가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가정의 유형을 개인의 삶에 적용해보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은 나 자신에게도 권위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위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께만 참된 권위와 권세가 있음을 알기에 그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삶의 고비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삶의 작은 성취도 주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주님의 권위 아래 위치시키며 오직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에 역사하시니,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이 이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는 참된 권위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참된 권세가 없음을 깨닫고 우리의 모든 삶을 오직 주님의 권위 아래에 두십시오. 
그 옛날 가버나움의 회당을 찾아가 가르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셨던 주님께서 
오늘 이 예배 가운데 찾아와주시고,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권위 있는 새 교훈을 선포하셔서 
여러분의 모든 아픔을 치유하며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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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21-34절 “회당에서 가정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막 1:21-34) 본문에서 여러 마을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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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가복음 강해2021. 1. 2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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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왓슨이라는 분이 저술한 <제자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출판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지침을 제공해 주지요. 데이빗 왓슨은 이 책에서 성도 개인의 제자도와 교회 부흥의 연관성을 매우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하여 흥분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명백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에 
‘와서 보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때 복음 전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데이빗 왓슨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교회 공동체에는 지배와 경쟁, 시기와 미움이라는 세상의 법칙이 아닌 사랑과 온유, 겸손과 화평이라는 하나님의 법칙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법칙이 가득한 교회 공동체는 세상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교회, 교회 성도들이 자신 있게 불신자를 초대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제자도가 살아있는 교회는 전도를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부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제자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출석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이지만 그들이 모이는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 제자도가 없다면,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사라졌다면 누가 그러한 교회를 찾아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제자도가 사라진 교회에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데이빗 왓슨이 <제자도>라는 책에서 성도들의 제자도와 교회의 부흥의 관계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이 책이 출판된 1980년대 당시 미국 교회를 비롯한 서구의 기독교에 부흥이 사라진 이유를 데이빗 왓슨은 바로 제자도의 부재에서 찾았던 것이죠. 

2020년에 이어 2021년에도 우리 교회를 비롯하여 이 땅의 교회는 예배당을 교인들에게 개방하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코로나가 종결된 후에도 성도들이 예배당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코로나 이전에도 교회의 출석인원이 감소하고 있다는 아우성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는데, 코로나로 말미암아 더욱더 성도들의 예배 출석이 크게 위축되면서 이러한 걱정은 이제 더 큰 위기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우리 시대 교회가 더 이상 부흥하지 않는 이유도, 우리 시대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도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제자의 삶을 바르게 실천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는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아니 오히려 우리 시대에는 교회가 자꾸 쇠퇴한다고 눈에 보이는 출석 인원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제자의 삶이 없음을 더욱 근심하며 슬퍼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변함없는 일상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어부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마가복음 1장 16절)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마가복음 1장 19절)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며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조금 더 걸어가시니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는 장면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보고 계신 장면은 당시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너무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리 해변에 살던 사람들에게 어부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부라는 직업은 몇 세대를 이어 가업이 되었죠. 그래서 본문에는 서로 형제인 베드로와 안드래,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어부의 일을 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으니 그들 모두는 어부를 가업으로 잇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리 해변에서 함께 살아가던 여러 이웃과 마찬가지로, 어부라는 가업을 이으며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매우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5장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장 5절). 지금 베드로는 고기를 잡기 위해서 밤을 꼬박 새우면서 열심히 일을 했어요. 참 성실한 사람들이죠. 네, 그들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업을 잇는 것으로 자신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위한 헌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채워갈지라도 그들의 삶은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이 오늘과 같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사명,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인생의 참된 가치를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때로 열심히 사는 것에 만족하는 듯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네,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은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하여 아직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릴 수 없었던 갈릴리 어부들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밤을 새워서 열심히 그물을 던집니다. 성실하지요. 날이 새어 그물을 깁으며 내일을 준비합니다. 그의 가족들이 바라볼 때 든든한 아버지, 듬직한 남편,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없어요. 거기에는 아직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제자도가 없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무한 경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러한 열정과 성실함 속에도 아직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위해 헌신하는 참된 제자도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

열심히는 살아가지만, 밤을 새우면서까지 가족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없던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에게 이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가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마가복음 1장 17-18절)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마가복음 1장 20절) 

예수님께서 지켜 보셨던 장면, 곧 어부들이 그물을 던지거나 어부들이 그물을 깁는 모습은 당시 갈릴리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구절은 당시 갈릴리 해변은 물론이고 유대 나라 전체에서 결코 볼 수 없었던 장면입니다. 당시 스승으로 불리던 많은 랍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제자를 직접 찾아가서 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어려서부터 율법 교육을 철저히 받은 엘리트들이 아니 모여있는 예루살렘도 아닌 갈릴리의 어부들을 스승이 직접 찾아가 제자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예수님은 직접 갈릴리의 어부를 찾아가 그들을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러분, 여기에 신앙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찾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선택하고 그분을 찾아가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은 이 땅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셔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찾아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일상에 파묻혀 살아가다가 우리의 인생을 허무로 끝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찾아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시며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불러 주시면, 우리는 우리 인생의 참된 가치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의 나이 75세에 부르셨습니다. 그 이전까지 아브라함은 75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았지만 그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가치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가 75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가 열방을 축복하는 복의 통로로 부르시자, 아브라함은 비로소 새로운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며 세상을 축복하는 인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75세 때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의 나이 80세에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궁궐에서 40년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세의 삶을 부러워했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관점이었을 뿐, 바로의 궁궐에서 생활했던 40년의 세월도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주시지 않으니 삶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궁궐에서 생활했던 40년의 세월이나, 이후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 생활하였던 40년의 세월은 겉모습은 너무도 다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40년의 세월을 두 번이나 보내고 그의 나이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찾아가 그를 부르시잖아요.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이 모세의 삶을 압도한 뒤에야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아브라함은 75년의 세월을 살았고, 모세는 80년의 세월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오랜 시간을 새롭게 맞이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일상을 뚫고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불러주신다면 바로 그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받는 가치 있는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 연수도 상관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일상에 찾아오셔서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주님을 따라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실패하는 제자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 어부였던 그들이 그물을 버렸습니다. 품꾼을 버렸습니다. 배도 버렸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그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제시한 비전, 곧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는 소망만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겠지요. 그러나 마가복음서를 계속 읽어보면 그들의 모습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마가복음 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씨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마가복음 4장 11절) 

무슨 뜻입니까? 외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풍성해 깨달아야 마땅해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열심히 비유로 말씀해주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탄식하세요.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마가복음 4장 13절)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면 뭐해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그들에게 떠 먹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도 이해하지 못하는 걸요. 

그뿐이 아닙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이른바 오병이어 사건이지요.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cf. 마가복음 8장 1절)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었어요. 바로 얼마 전에 오병이어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제자들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주님께서 원하시면 이번에도 음식을 먹여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반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신앙의 건망증이 걸린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거든요.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마가복음 8장 4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길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해주셔도 이해하지 못해요. 예수님께서 위대한 기적을 보여주셔도 그 기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거 동락하였지만 예수님의 마음도, 예수님의 계획도, 예수님의 구원 사역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의 세월을 보냈던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을 바르게 따르지 못했던 결정적인 장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십자가를 언급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을 것이라고, 그러나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반응이 무엇이었는지 아시잖아요. 예수님을 향해서 항변하면서 말합니다. 안됩니다. 예수님.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길에 십자가라니요, 말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셔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제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바로 그 순간, 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 버립니다. 마가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장 50절) 

이 짧은 한 문장에서 ‘제자들’라는 단어, 그리고 그 뒤에 등장하는 ‘다’라는 한글자 단어가 너무도 크게 느껴지는 것이 단지 저 한 사람만은 아니겠지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물도 버렸습니다. 배도 버렸습니다. 품꾼들도 버렸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분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자 마침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걸어가시는 그 중요한 순간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렸고 제자들은 다 도망하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가복음의 이 모든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늘 분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제자들의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넘어 복음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약속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고,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변화시키시는 분은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너무도 많이 실패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너무도 많은 시간을 허비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주님을 떠나가셨습니까? 그리하여 다시금 나 자신만을 위하고, 우리 가족만을 위해 살아가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전히 여러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이십시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비록 실패하였고, 비록 낙심하였고, 비록 주저앉아 있었을 지라도 
다시금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일어서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러분을 
세상을 축복하고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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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가복음 강해2020. 6. 3.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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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회 사역을 하면서 누리는 다양한 복 가운데 하나는 장례식에 자주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전도서에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전 7:2)라고 말씀하지요. 그리고 이어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유익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전 7:2) 

장례식에 참여하면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지금이라도 나 역시 저 자리에 있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오늘 하루도 이 세상의 없어질 것에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삶으로 영위해 나가려는 마음 가짐을 되새기게 됩니다. 

여러분,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죽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개인의 종말, 곧 개인의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종말, 곧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모든 역사를 종결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시는 바로 그 날이 반드시 찾아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날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3장 33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여기서 “그 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셔서 이 땅을 하나님의 공의로 심판하시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믿고 소망하는 마지막 종말의 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하십니다. 35절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 오실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한 밤중일 수도 있어요. 내일 새벽에 예수님이 오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36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너희는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니,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날짜를 계산해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계산을 해도 우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 앉아서 그 날과 시간을 계산하지 말고, 그 대시 언제든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때를 위해 준비를 마치셨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를 준비하며 오늘도 깨어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다시 오신다면 ‘마라나타,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이야기하며 영광의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계십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 있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 있는 것은, 첫째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말씀하시고는 곧이어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 비유의 말씀이 34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34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어디로 갑니까? “타국”으로 갑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타국’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누가복음 19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비유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누가복음 19장 12절의 말씀을 함께 찾아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예수님 시대에 유대 땅을 다스리는 분봉 왕이 있었습니다. 왕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유대 땅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 땅의 분봉 왕을 임명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곧 당시 지중해 세계 전역을 다스리고 있었던 로마 제국의 황제입니다.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을 임명하는 권한이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드리죠. 예수님 당시 유대 땅에 대한 실질적인 주인은 유대 백성들이나 그 땅의 분봉 왕입니까? 아니면 로마의 황제입니까? 로마의 황제죠. 로마 황제가 자신의 마음대로 유대의 왕을 언제라도 갈아치울 수 있잖아요. 

다시 누가복음 19장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어디로 갑니까? “먼 나라”로 갑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왕이 되고자하는데,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왕이 되기 위해서 먼 나라로 가서 왕의 직책을 받아 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여러 왕들이 있고 통치자들이 있지만 실제로 이 땅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따로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믿고 기다리며 그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요, 하늘 위에 있는 저 하늘나라를 바라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다보면, 교회가 처해있는 역설적인 현실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온갖 박해와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지하 무덤에서 예배를 드렸겠어요. 당시의 신앙생활을 보면 비참해요, 처참해요, 초라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보면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이 하늘에서 드려지는 천상의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이 땅의 현실은 비참하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저 하늘에서 드려지는 천상의 영광스러운 예배의 일원이었던 거지요. 

여러분,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조금 부하게 살 수도 있고, 이 세상에서 조금 가난하게 살 수도 있어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사람들의 눈에 귀하게 보일 수도 있고, 때로는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많고, 큰 재산을 소유한 사람도 많으며,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가 세상을 호령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알고 믿습니다. 이 세상을 참으로 다스리시는 분은 권세를 부리는 몇몇 사람들이 아니라, 저 하늘의 보좌에 앉아계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찬송가 9장의 마지막 절인 4절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여러분, 고난도 슬픔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어요?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마지막까지 순결하게 지켜낼 수 있는 비결이 어디에 있냐고요? 우리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갈 때,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저 위에 있는 하늘 나라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권한과 재물이 곧 사라진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있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나에게 주어진 권한과 재물이 곧 사라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3장 34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첫 번째로 우리가 집중했던 단어는 ‘타국’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두 번째로 집중하고 싶은 단어는 ‘권한’입니다. 집주인이 종들에게 각자의 권한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권한’의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또 하나의 비유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어떤 부자가 자신의 재산을 관리할 청지기를 고용했습니다. 참고로 이 청지기라는 자리는 주인을 대신해서 그의 모든 재산을 대신 관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능력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그는 주인의 재산을 늘려주지 못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주인이 청지기를 불러 해고를 통지합니다. 해고 통지를 받은 청지가는 깊이 고민을 하던 중,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냅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청지기의 자리에 있을 때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기름 100말을 빚진 사람은 50말로 고쳐주고, 밀 100석을 빚진 사람은 80석으로 고쳐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이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른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입니다. 

자, 예수님의 이 비유는 성경을 읽는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이 비유가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합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주인의 입장에 있다면 청지기를 칭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이 주인의 자리에 있다면 예수님은 이 청지기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칭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생각의 차이입니다.

왜 우리가 주인의 입장에 있다면 이 청지기를 칭찬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청지기를 고용하는 것도 그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에 손해만 입혔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관점에서 이 청지기는 주인에게 칭찬은 고사하고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이야기를 들어도 누구의 재산이 늘어났는지, 혹은 줄어들었는지에만 큰 관심을 갖습니다. 그렇기에 이 주인의 입장에 섰을 때 자신의 재산에 손해를 끼친 이 청지기에게 벌을 내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재산이 늘어나느냐? 줄어드느냐? 에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강조점은 주인의 재산이 줄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청지기가 해고 통지를 받았고, 청지기로서의 지위를 모두 잃어버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바로 이 상황 설정입니다. 이러한 때, 곧 자신의 청지기 직분을 잃어버릴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자신의 청지기 지위를 이용해 무엇을 행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3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표현한다면, 집 주인이 종들에게 권한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한은 집주인이 돌아올 때까지만 유효합니다. 그렇다면 그때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 내 손에 있는 모든 재물이 사라지고, 주님께서 주신 권한이 사라지는 그때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손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재물이든, 권한이든, 사회적 지휘이든 상관 없이 우리의 손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선물이 사라지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손에 있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때가 속히 옵니다. 

한때 제가 즐겨 보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정도전>이라고 하는 사극입니다. 한 회 한 회 볼때마다 흥미가 진진합니다. 한 나라의 권력을 놓고 서로 암투를 벌이는 모습이 재미가 있어요. 고려라는 나라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인가? 이런 주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재미있게 봐요. 그리고는 잠자리에 누워서 생각합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새벽기도 가야 되는데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었나. 이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지만, 오늘 밤에도 아마 그 드라마를 볼 거 같아요. 그러면서 한편으로 드는 생각이 있어요. 국가의 권력을 놓고 그렇게 암투를 벌이며 서로 으르렁 거리며 싸우고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에 와서는 그들이 누리던 권력과 그들이 누리던 권세가 다 어디에 갔느냐는 겁니다. 다 사라지고 말았어요.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언젠가 무너집니다. 우리가 소유한 재물과 권세도 어느 순간 한 번에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완성하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베드로전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벧전 2:24) 

시간이 지나면 모두 말라버리고 시들어 떨어지고마는 세상의 영광을 구하다가 모든 시간을 허비하는 인생이 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잠깐 우리에게 맡기신 재물과 권한을 영원히 내 것인 양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또 하나님께도 모두 돌려드려야 할 것들입니다. 


나의 소유로 선을 행하라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있는 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나에게 주어진 권한과 재물이 곧 사라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우리의 소유로 최선을 다하여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3장 34절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우리는 제일 먼저 ‘타국’이라는 단어를 보았고, 둘째로 ‘권한’이라는 단어에 집중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사무’입니다. 집주인이 종들에게 무엇을 나누어주었나요? ‘사무’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무’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비유를 한 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첫번째 비유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모두 말씀하신 뒤에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 25:13) 

오늘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지요. 다시 말해 열처녀의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는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과연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깨어있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있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열 처녀의 비유 바로 직후에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곧 달란트 비유입니다. 어느 주인이 타국으로 가면서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다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깨어있는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하여 그것으로 많은 수익을 남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3장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우리의 사무, 곧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며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이 더 떠오릅니다. 주님, 그렇다면 나에게 주신 달란트로 최선을 다해 이윤을 많이 남긴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입니까? 과연 우리가 무엇을 남겨야 할까요?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떠한 사무에 최선을 다해야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마지막 세 번째 비유입니다. 곧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 주님께서 세계 만민을 심판하시면서 양과 염소로 구분하십니다. 그리고 양의 무리에 들어온 사람들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헐벗고 주리실 때 예수님을 돌보아 주었다는 칭찬입니다. 그러나 양에 속한 사람들은 반문하죠. “주님, 도대체 언제 주님께서 헐벗고 주리실 때 우리가 주님을 돌보아 드렸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말씀을 함께 찾아서 봉독하겠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주님께서 이번에는 염소에 속한 무리들에게 화를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헐벗고 주리실 때 그들이 예수님을 돌보아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염소에 속한 사람들도 주님께 반문합니다. “주님, 도대체 언제 우리가 주님께서 헐벗고 주리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대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5절 말씀도 함께 찾아서 봉독하겠습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 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여러분,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우리의 사무, 우리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최선을 다해 감당해야 하는 직무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작은 자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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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가복음 강해2020. 6. 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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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시대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도 아니고,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온 스룹바벨이 지은 성전도 아닙니다.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이 모두 무너진 후,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왕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금 바라보고 있었던 성전은 바로 헤롯이 건축한 성전입니다.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건축했기에 크고 웅장하게 성전을 건축하였던 것입니다. 

먼저 제자 가운데 한 명이 성전에 대해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1b절)

우리말 번역에는 질문의 형태로 되어 있지요? 그러나 원문의 느낌은 질문을 통한 감탄문입니다. 그러니 이 제자의 이야기는 이 건물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 제자는 헤롯이 건축한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제자만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헤롯 성전은 신앙의 자부심이었습니다. 비록 유대 민족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지만, 거룩한 성전에 예루살렘에 우뚝 솟은 모습은 그들의 믿음만큼은, 그들의 신앙만큼은, 그들의 정체성만큼은 흔들리지 않고 높이 솟아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웅장한 성전을 바라보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지켜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의 웅장함에 기대어 신앙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한 제자와 당시의 모든 유대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2절)

여러분, 성전은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제 아무리 크고 웅장하고 자랑할만한 성전이라도 무너지게 됩니다. 제 아무리 믿음과 신앙의 자부심을 지탱해주는 성전이라도 그 건물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과거 솔로몬이 건축하였던 솔로몬 성전도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졌고 과거 스룹바벨이 건축하였던 스룹바벨 성전도 셀류쿠스 왕조의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혔습니다. 그리고 헤롯이 건축한 성전도 결국 로마 군대에 의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어려분이 쌓아 올린 모든 건축물은 언젠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어떤 이들은 건강이라는 건물을 높이 쌓고 있습니다. 건강으로 자신의 자랑을 삼는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재물이라는 건물을 높이 쌓고 있습니다. 재물로 자신의 터전을 삼는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로 건물을 높이 쌓아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를 자신의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것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아름다운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졌던 것처럼, 웅장한 헤롯 성전도 로마 군대에 의해 무너지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한순간 무너지는 때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경험을 폴 틸리히(Paul Tillich)라는 신학자는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것들이 웅장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쌓아 올린 것들로 자만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이 여러분에게 든든한 기초가 되리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 모든 것이 한순간 무너지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여러분이 쌓아 올린 성전의 외관이 아니라 그 성전을 세워주시고 그 성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우리가 제 아무리 듣든한 토대를 쌓고, 그 위에 아름다운 건물을 세운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우리 삶의 토대가 흔들립니다. 최소한 이것만큼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져내리는 경험입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가 이야기한 ‘흔들리는 터전’은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흔들리는 터전’이야말로 신앙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 쌓아 올리는 모든 것들이 그저 강력한 파도 한 번이면 사라지고 마는 보잘것없는 모래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눈에 보이는 성전의 외형이 아니라 그곳에서 우리 인간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마지막 13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한 약속 하나를 주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b절)

우리 삶의 기초가 흔들리고 우리 삶의 토대가 흔들릴 때, 오랜 세월 쌓아올린 공든 탑이 한순간 무너져 내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기초가 흔들리고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 때 그저 하루하루 인내하여 끝까지 견디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구원을 주십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내로 끝까지 견디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의 현장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이 발을 딛고 서있는 기초와 토대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하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 이유와 원인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그 어디에서도 소망이 없다고 여겨지도라도,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도 무너졌고, 스룹바벨이 건축한 성전도 짓밟혔고, 헤롯이 건축한 성전도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았으니, 여러분만 당하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의 기초가 흔들리는 바로 지금,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가 시작되는 순간임을 기대하십시오. 

그렇게 하루 하루 인내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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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가복음 강해2020. 5. 3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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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사건은 벳새다라는 장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본문 22절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의 맹인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앞을 볼 수 없었기에 주변 사람들은 그의 앞길을 인도하며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께 한 가지를 요구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손을 대어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손을 좀 대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맹인을 굳이 예수님께 데려와 손을 대어 달라고 하였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예수님께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저 예수님께서 손만 대어주시면 그들이 만족하였을까요? 모르기는 몰라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손을 대어 그 눈을 열어주시기를 그를 치유하여 주시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에 응답하여 주셨습니까? 정답은 부분적으로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23절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먼저 예수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아주셨습니다. 맹인을 데리고 왔던 사람들의 요청, 곧 ‘그 맹인에게 손을 대어주세요’라는 요청에는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그들의 마음에서 간절히 원했던 맹인의 눈을 치유하여 앞을 볼 수 있게 하시는 일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23절은 이렇게 말씀하지요.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손을 대어 그의 눈을 고쳐달라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버리신 거예요. 

이때 성경에는 맹인을 데리고 왔던 사람들이 함께 갔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사실, 그 이후에 맹인을 데려온 사람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어요.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예수님께서 맹인만 마을 밖으로 데려 가신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므로 맹인을 데려와 예수님께 손을 대어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 맹인을 고치시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장면만 놓고 실망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본문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23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주변에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렸을 때, 아니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맹인을 데라고 사람들이 없는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신 이후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장소에서, 그들이 원했던 바로 그 시점이 아니었을 뿐이지요. 

여러분, 때로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온전히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손잡아 달라고 기도했더니, 정말 손만 잡아주시는 거에요. 손을 잡아주셨으면 질병이 떠나가고, 눈이 열리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체험하고 경험하는데 여전히 우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우리의 질병은 치유되지 않는 것이죠.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기도는 결코 무의미하게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다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맹인을 데려온 사람들이 직접 그 장면을 목격하지 못하였을 뿐이지, 예수님은 그들의 간구 대로 맹인을 고쳐 주신다고요. 

사람들이 맹인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대로 맹인의 손도 잡아주시고, 결국 그의 눈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건은 복음서에 기록되어있는 수많은 치유의 사건과는 다른 독특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침도 바르시고, 안수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나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어보시죠. “무엇이 보이느냐?” 

24절에 그 사람의 대답이 등장합니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 사람의 대답을 보면 이해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보인다고 말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을 사람들이 많이 있는 마을에서 사람이 없는 마을 밖으로 데리고 왔거든요. 그러니 그곳에서 사람들을 보았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나중 대답은 더욱 이상합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닌데요. 꼭 만취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같지 않으세요? ‘나는 가만히 있는데 전봇대가 와서 나한데 부딪쳤어.’ ‘아니 갑자기 아스팔트가 일어나더라고.’ 뭐 이런 대답이지요.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직접 눈에 침을 발라주시고, 직접 안수하셨지만 그 맹인의 눈이 완벽하게 치유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친히 안수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안수하여 주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한 치유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하지 못한 사건, 예수님께서 안수하여 주셨지만 여전히 완치되지 않은 사건은 복음서 전체에서 오늘 본문 밖에는 등장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묵상할 때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자,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눈에 침을 바르고 안수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치유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 번 더 그 맹인에게 안수를 해주신 것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오늘 본문의 키워드, 핵심 단어를 저는 25절에 등장하는 “다시”라는 부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안수하시매”의 ‘다시’라는 이 짧은 단어야말로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안수하셨습니다. 두 번째 안수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드디어 그의 눈이 열려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지요. 25절 뒷부분입니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여러분, 오늘 본문은 짧은 네 절의 기록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이 맹인에게 예수님의 첫번째 안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였고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눈은 완전하지 못하였고 만물을 명확하게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사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안수, 곧 예수님께서 다시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 바로 뒤에는 너무도 유명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눈이 열리기 시작했어요. 맹인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상태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첫번째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이 조금 열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메시아, 곧 구원자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해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던 베드로 역시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십자가의 길은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막아서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맹인이 첫번째 안수를 받고 눈이 조금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물을 분명하게 바라보지 못했던 것처럼,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분명히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의 모습은 그 옛날 베드로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묘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체험도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도 받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거의 경험으로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게 열려 우리 개인과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체험하며 살아가지만, 과연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지금 우리도 따라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우리는 벳새다의 맹인과 같이 예수님에게 첫번째 안수는 받았지만, 그리하여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나의 욕심과 탐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회피하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번째 안수, 다시금 나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예수님의 새로운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재정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십니까?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시기를 바라십니까? 우리의 앞길이 형통하게 되기를 바라십니까? 물론,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에 풍성하게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 있다면, 맹인을 예수님께 데려왔던 여러 명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풍성한 응답이 내가 원하는 시간과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함께 모여 기도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맹인에게 허락하셨던 두번째 안수, 오늘의 새로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릴 때, 비록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지라도, 비로소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삶을 풍성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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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가복음 강해2020. 5. 3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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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믿음이 있습니다. 곧,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확신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의 해답.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의 해답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삶의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고난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의 해답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요. 
우리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삶의 좌표를 정하고 그 질문의 해답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요.  
그러니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요청과 응답

마가복음 5장에서는 인생의 해답을 찾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야이로였지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회당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삶의 중심지인 회당의 최고 책임자였습니다. 그러나 야이로의 사회적 지위는 그가 안고 있던 인생의 커다란 과제 앞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되시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마가복음 5장 22절부터 보십시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야이로는 딸이 죽어가는 현장에서 인생의 해답이 되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참으로 바른 선택을 한 것이죠. 그 결과는 순조로웠습니다. 24절입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야이로가 죽어가는 딸을 놓고 예수님을 찾아갈 때까지 여러 가지 생각이 그의 마음에 스치지 않았을까요? 과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예수님을 만나더라도 예수님이 과연 나와 함께 따라오실까? 과연 예수님은 내 딸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일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여 주십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수많은 문제와 과제가 찾아온다면,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셔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주시고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야이로는 자신의 딸이 죽어가는 현실 속에서 인생의 모든 해답이 되시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참 바른 선택을 한 것이죠. 예수님을 만난 야이로는 이제 예수님과 자신의 집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을 만났다고 예수님과 함께 걸아간다고 해서 아직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만나 안수하여주시고 병이 치유된 것은 아니지요. 그런 만큼 예수님을 모시고 자신의 집으로 걸아가는 야이로의 마음은 조급했을 거예요.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딸을 살릴 수가 있잖아요. 야이로의 마음은 조급합니다. 야이로의 발걸음을 빨라집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예수님의 너무 더디었어요. 24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큰 무리가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어서 빠른 걸음으로 갈래야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아시잖아요. 야이로의 입장에서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하는 그 긴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발걸음을 아예 멈춰 세우는 사건이 일어나지요.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사건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괴롭혔던 질병으로부터 회복되었어요. 너무도 기쁜 사건입니다. 그러나 야이로의 입장에서는요? 아이, 내 딸부터 좀 고치고 그리고 예수님께 부탁을 드렸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혈루증 여인의 사건은 그저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고 치유를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멈추어 서시고 그 여인과 대화를 시작하는 거예요. 그 대화가 결코 짧지 않았던 것 같아요. 마가복음 5장 33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여인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이 장면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거든요. 
그런데 33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여기에서 “모든 사실”이라는 단어에 주목해보십시오. 이 여인은 자신이 병이 걸린 때로부터 많은 의사를 만나보았지만 병을 고치지 못한 이야기를 포함해서 자신이 어떠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는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자신의 몸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등 “모든 사실”을 가감없이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가장 마음이 초조해지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야이로입니다. 

아니, 대화는 좀 나중에 하면 되잖아요. 지금 내 딸이 죽어가고 있다니까요. 야이로에게 그 여인은 너무도 원망스로원 대상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여인의 이야기를 천천히 듣고 있는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야이로는 그 장면에서 소리라도 치고 싶었을 거예요. ‘예수님, 내 딸이 죽어간다니까요.’ 그런데 바로 그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35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더 괴롭게 하나이까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바로 그때, 회당장의 귓가에 믿을 수 없는, 아니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으니, 예수님을 보내주십시오.’ 

야이로가 이 말을 듣는 순간, 예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요? 그 따위 대화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죽어가는 내 딸에게 가는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을까? 예수님을 향한 원망은 야이로 자신을 향한 원망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요?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먼저 찾아왔을 걸.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예수님을 모셔갔어야 했는데. 정확히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체할 수 없는 원망과 절망이 야이로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여인과의 대화를 멈추고 야이로를 향해 말씀합니다. 신약성경 전체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야이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딱 이 한 말씀 밖에는 없어요. 우리 36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은 야이로와 같이 최고의 선택을 하신 분들이시죠.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믿어 내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며 기도하는 최고의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선택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있었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여러분 삶의 문제는 조금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분들이 계시죠? 아니 야이로에게 그의 딸이 치유되는 장면을 고사하고 오히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것처럼 예수님과 동행하는 여러분의 발걸음에도 삶의 너무도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기보다 오히려 악화되어 어디로 향해야 할지도 모르는 원망과 분노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바로 그때 여러분의 귓가에 세밀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달리다굼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되시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 예수님께 기도하였고, 그 예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삶의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내 삶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오히려 악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단 한 말씀만 하시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라’고 우리에게 한 말씀만 하시면, 비로소 우리 삶의 문제는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이미 죽었으니 더 이상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야이로의 집 사람들은 야이로를 찾아와 더 이상 소망의 포기하라고,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돌려보내라고 조언합니다. 야이로가 자신의 집에 들어가보니 사람들은 딸의 죽음을 애도하며 크게 슬퍼합니다. 온 집안에 울음소리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야이로를 향해 단지 한 말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하신 후부터 예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야이로에게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이후, 마가복음 5장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야이로가 예수님께 그래도 우리 딸을 만나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딸이 죽었으니 야이로의 집 사람들도, 그리고 모르기는 몰라도 야이로 자신도 예수님을 굳이 자신의 집에 모시고 가야 할 필요를 못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딸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혈루증 여인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며 야이로의 마음을 애태우시더니,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예수님은 누구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시고 그저 야이로의 집으로 걸어 가시는 거예요. 그리고 결국 아이의 방에 들어가 소녀의 손을 붙잡고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많은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이 소녀에게도 딱 한 말씀만 하십니다. 우리 함께 41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라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님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되십니다. 비록 예수님과 동행을 하여도, 예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하시며 예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내가 누릴지라도 물론 내 삶의 과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되신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말씀만 우리에게 하신다면, 우리의 심령에 예수님의 말씀이 한 말씀만 들린다면,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예수님의 한 말씀만 드린다면 여러분 삶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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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