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심리학자였던 잭 볼스윅(Jack Balswick)은 ‘권위’라는 기준으로 가정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 유형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으로 가정의 모든 권위가 아버지에게 집중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 혹은 그 위의 세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대표적인 가정의 모습이지요. 가정의 모든 일은 아버지가 결정하고 그 외의 식구들은 아버지의 결정에 무조건 순종을 강요받습니다. 이것이 잭 볼스윅이 말하는 첫 번째 유형의 가정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현대적 가정의 형태로 권위가 부재한 가정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권위를 상실하였고,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모든 식구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살면서 가정은 혼란스럽고 때로는 서로 갈등합니다. 이것이 잭 볼스윅이 이야기하는 두 번째 가정의 형태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이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인데, 가정의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둔 성경적인 가정입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숙고하고, 하나님의 뜻이라 여겨지면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순종하는 가정입니다.
자, 권위를 기준으로 가정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가정, 권위를 잃어버린 현대의 가정,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권위를 부여하는 성경적인 가정.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이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십니까? 우리 교회의 모든 가정은 그 권위를 하나님께 두어서 모든 식구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성경적인 믿음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권위 있는 새 교훈
오늘 본문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행하신 일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가르치시는 일이요, 또 하나는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마가복음 1장 21절) 그러자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그 이유가 본문 22절에 나와 있는데요. 우리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귄위있는 자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 1장 22절)
그날 회당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지신 권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날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이 목격하고 체험하였던 예수님의 권위,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예수님의 권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을 가지고 본문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뭇 사람이 예수님의 교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어서 당시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율법 교사, 서기관, 랍비 등 율법을 가르치는 많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권위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 “위대한 랍비가 말하기를 ….”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마음도 선포할 수 있는 권위가 없기에 모세를 비롯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를 인용할 필요가 없고, 위대한 랍비를 인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는 그 말씀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안에는 인간들이 소유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일이 두 가지였다고 말씀드렸죠. 첫번째는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두 번째 일, 곧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사건 이후에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동일했습니다. 본문 27절을 보십시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마가복음 1장 27절)
그날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또다시 깜짝 놀랍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권위 있는 새 교훈에 귀신들도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서기관을 비롯하여 율법교사나 랍비와 같이 율법을 가르치는 스승이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당시 예수님 외에도 귀신을 쫓아내는 이른바 축귀를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귀신들을 결박할 권위가 없지요.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존재를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기도 하고,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여러 가지 도구를 이용하면서 귀신을 쫓아내는데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물도 바치고 주문도 외우고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하면서 뭔가 요란하게 행위를 해도 그들에게는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는 권위가 없으니 오랜 시간 귀신과 씨름을 해야 했고, 그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바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셨던 예수님의 모습에는 권위가 있었어요. 제물, 주문, 특별한 도구 그런 거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귀신하고 무슨 거래를 하는 것처럼 밀고 땅기는 일 없어요. 예수님은 그저 권위를 가지고 귀신에게 명령합니다. 본문 25절이 그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는데요.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마가복음 1장 25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니 귀신에게 ‘나오라’ 명령하면 귀신은 나가야 해요. 그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이 땅의 그 어떠한 인간도 소유할 수 없는 최고의 권위, 하나님의 아들로서 곧 하나님으로서 우리 인간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권위를 갖고 계신 분이신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요. 어디 그 뿐인가요? 골로새서 말씀을 보면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입술로만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며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주도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권위는 세상의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기에 가지고 계신 권위입니다. 이렇게 본문의 핵심 주제를 파악하고 나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오늘은 그 교훈을 두 가지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온전한 권위와 권세는 오직 예수님께만 있고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장 5절)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가버나움 회당에는 예수님께서 그곳을 방문하여 가르치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기 이전에도 매주 안식일마다 사람들이 모여 예배했어요.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서기관과 랍비들이 말씀을 해설하였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던 가버나움 회당이었으니 그 동네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예배에 참여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을 찾아가시기 전에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으니 매주 안식일에 드리는 예배에 아무런 역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참 다양하게 많은 것을 준비하지요. 미리 교회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차량 운행 및 주차안내로, 새가족부로, 주방 봉사로, 찬양대로, 교회학교 교사로, 예배의 모든 순서 마다 맡은 분들이 참 열심히 준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제 아무리 정성을 다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하더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이 자리에 찾아오시지 않으면 그 모든 준비는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가 진정으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것들만 열심히 준비하다 정작 모든 권위와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시는 주님을 우리의 삶에 영접하는 데 실패할 위험성입니다. 반대로 주일을 맞이하여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간절히 소망하며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와 권위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친히 이곳에 참여하시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친히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주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 각 사람의 연약한 몸과 마음과 영혼을 고치시고 치유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권위는 세상의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기에 가지고 계신 권위입니다. 이렇게 본문의 핵심 주제를 파악하고 나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 첫 번째 교훈은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교훈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가버나움의 회당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이전에 수많은 안식일을 보내며 그곳에서는 회당 예배가 시행되었습니다. 매주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서기관과 랍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지요. 마을 사람들은 안식일이 되면 어김없이 회당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이한 일도,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구원의 역사도 경험하거나 체험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그 안식일이나 그 바로 전주의 안식일이나 가버나움 회당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똑같아요. 그런데 유일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권위 있는 새 교훈을 가르치셨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달라지자 가버나움 회당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의 말씀을 듣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렸던 사람이 치유를 얻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갈리릴에 전파되면서(마가복음 1장 28절) 가버나움 동네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예배가 이와 같은 은혜를 누리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예배가 이러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현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예배 시설입니까? 주차시설인가요? 잘 짜여진 예배순서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난주와 똑같은 예배의 순서로, 지난주와 똑같은 성도들이 모여서, 지난주와 똑같은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더라도. 이 시간과 이 장소가 모든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을 가르쳐주신다면, 이 시간과 이 장소가 모든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치유와 회복을 선포해 주신다면, 우리의 모든 질병은 치유됩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은 회복됩니다. 우리를 아픔과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 자리에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권위를 기준으로 가정을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첫번째 유형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으로 가정의 모든 권위가 아버지에게 집중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현대적 가정으로 가정 내에 권위가 모두 사라진 형태를 말하죠.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이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 가정으로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둔 성경적인 가정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세 가지 유형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러한 가정의 형태를 우리 개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 먼저 첫번째 유형의 가정입니다. 아버지에게 모든 권위가 부여되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이지요. 이것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적용해 보면 어떤 힘 있는 사람, 혹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권위를 양도하는 형태입니다. 그래서 힘이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을 하죠.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주고 유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교훈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에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도 참된 권위는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말씀 그대로이지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 노래하잖아요(시편 146편 2절).
권위를 기준으로 구분하였던 가정의 유형, 그 두번째는 가정 내의 권위가 모두 사라진 현대적 가정이었지요. 이러한 가정의 형태를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해 보면, 그 누구에게도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삶의 태도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자신의 방식대로 행동하지요. 이러한 삶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마치 자신에게 모든 권위가 주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의 태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현대인들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나에게는 아무런 권위도 없고, 우리에게는 아무런 권세도 없습니다. 얼마나 나 자신에게 실망해 보아야, 이 사실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권위라는 기준으로 가정을 구분할 때, 마지막 유형은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두는 성경적인 가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가정의 유형을 개인의 삶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은 나 자신에게도 권위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위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께만 참된 권위와 권세가 있음을 알기에 그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삶의 고비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주님의 권위 아래 위치시키며 오직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에 역사하시니,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이러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정이 이러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에게는 참된 권위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참된 권세가 없음을 깨닫고 우리의 모든 삶을 오직 주님의 권위 아래에 두십시오. 오직 예수님께 모든 권위와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되십시오.
그 옛날 가버나움의 회당을 찾아가 가르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셨던 주님께서
오늘 이 예배 가운데 찾아와주시고,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권위 있는 새 교훈을 선포하셔서
여러분의 모든 아픔을 치유하며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반응형
'마가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10장 41-45절 “인자가 온 것은” (0) | 2021.10.17 |
---|---|
마가복음 1장 29-31절 “회당에서 가정으로” (0) | 2021.02.07 |
마가복음 1장 16-20절 "내가 너희로…" (0) | 2021.01.24 |
마가복음 13장 33-37절 "준비 되셨습니까?" (0) | 2020.06.03 |
마가복음 13장 1-13절 “흔들리는 터전” (0) | 2020.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