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0. 6. 4. 15:47

기도는 실천이 중요하다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의 어떤 본문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성경 본문을 난해 구절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예를 들면,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일반적으로 난해 구절이라고 –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라고 –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반면, 성경의 어떤 본문들은 읽기만 해도 이해가 되고, 그 뜻이 어떠한 의미인지 누구나 알 수 있는 본문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본문이 바로 오늘의 성경 본문입니다. 누구든지 읽기만 하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소개하기에 앞서 그 비유의 교훈이 무엇인지 너무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어요. 

오늘 본문의 주제는 본문이 시작하는 바로 1절에 명확하게 이미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는 어떠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어요. 비유가 무엇인지 소개하기도 전에 1절 말씀에서 그 교훈을 명확하게 요약해 주고 있지요. 그리고 이 비유를 한번 읽기만 하면, 혹은 한번 듣기만 해도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왜 말씀하셨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의 놀라운 비밀 가운데 하나는 성경의 어느 구절을 우리가 다 안다고 다 이해한다고 해서 그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이라는 분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때문에 괴로워 하지만, “성경말씀 중에 내게 이해되는 내용이 나를 더 괴롭힌다.” 성경의 말씀을 잘 모르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그 말씀을 더 알고 싶고 잘 이해하면 좋겠다는 아쉬운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참으로 알게 된다면 성경의 한 구절 혹은 한 단락의 의미를 참으로 알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더 괴로움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내가 그 말씀을 바르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어요. 예수님의 말씀이 옳아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부가 매일같이 찾아가 재판장에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했을 때, 그 재판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지만 이 과부가 자신을 매일같이 찾아오는 것이 번거러워서 귀찮아서 그의 송사를 처리해 주었지요. 불의한 재판장도 과부의 계속되는 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간절히 요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속히 이루어 주시겠지요. 머리로는 알아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는 “실천력”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루는 어느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질문하지요.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게 될까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율법 교사에게 반문하십니다. “너가 율법의 교사인데 네가 가르치는 율법에는 어떻게 하라고 쓰여있느냐?” 그러자 그 율법 교사가 정답을 말합니다. 율법을 보니까요, 성경을 보니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고요, 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되어 있었던 데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죠. “그래, 너 말이 맞아. 그대로 실천해, 그러면 살게 될 거야.” 

여러분, 예수님을 참아온 율법 교사에게 무엇이 부족했습니까? 그에게 지식이 부족했나요?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해가 필요했나요?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말씀, 이미 자신의 머리 속에 잘 정리되어 있는 바로 그 말씀을 실천하는 실천력이 부족했습니까? 네, 그 율법 교사에게는 지식이 풍부했지만, 그 지식을 실천할 수 있는 실천력이 부족했어요.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듣고 있는지 모릅니다. 매주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해서 말씀을 듣지요. 우리 가운데는 매일 열심히 큐티를 하는 분들도 있고, 여러 가지 양육 과정에 참여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말씀 가운데 단 한 구절이라도 나의 마음에 담고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한해를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결심을 하셨을 줄로 압니다. 특별히 우리 신앙인들은 신앙생활에 대해 몇 가지 결심을 하지요. 올해는 매일 큐티로 하루를 시작하겠다. 올해는 성경을 한번 이상 읽어야 하겠다. 올해는 열심히 기도해야 되겠다. 올해는 전도를 해야 하겠다. 올해는 교회에서 어느 어느 부서를 열심히 섬기겠다. 뭐 이런 결단을 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혹시 연초에 세웠던 계획이나 목표를 이미 오래전에 포기하신 분 계신가요? 오늘 본문 1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그다음이 무엇입니까? ‘낙심하지 말아라’ 

 

기도의 실천을 방해하는 요소 - 더딤 

오늘 본문의 주제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비유 – 곧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 – 를 가만히 묵상해보면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낙심하고, 신앙 생활에 계속해서 넘어지는 중요한 이유를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게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오늘 본문 4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과부는 억울한 일을 당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재판장을 찾아가서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풀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장은 처음에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나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여러분, 이 짧은 한 마디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이 짧은 한 구절이 때로는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잘 아시잖아요.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시는데, 결혼한지 3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7년이 지나도 자녀가 안 생기는 거예요. 물론 목사님과 사모님도 열심히 기도하셨지요. 그리고 목사님께서 사역하시던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밤낮 목사님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을까요? 목사님에게 자녀를 주시라고 기도했어요. 그 목사님께서 그 교회에서 사역하신 지 7년, 결혼한 지 9년 만에 하나님께서 예쁜 딸을 주신 거예요. 지금도 그 딸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에 미소가 넘쳐요. 그 목사님에게는 4절에 등장하는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는 몇 년의 시간을 의미할까요? 그 목사님에게는 9년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와 비슷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볼까요? 여러분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을 기억하시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그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아직 아들 하나 없잖아요. 10년을 기다렸어요. 아브라함의 나이 85세에 하갈이 잉태하여 아브라함의 나이 86세에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어요. 11년을 기다렸거든요. 오래 기다렸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니래요. 조금 더 기다리래요. 그래서 또 얼마를 기다렸습니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에 사라가 잉태를 했고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어요. 아브라함에게는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의 ‘얼마 동안’이 아브라함에게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었어요? 모두 25년의 시간이었어요. 

아브라함의 증손자 가운데 한 명인 요셉은 어때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어요. 그리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어요. 아마 요셉은 이때부터 열심히 기도했을 거에요. 하나님께서 꿈으로 보여주셨으니,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현실이 되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까? 

요셉이 꿈을 꾸었을 때의 나이는 17세였습니다. 그로부터 13년의 시간이 흘러 요셉의 나이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러면 요셉에게는 꿈을 이루는데 13년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이후, 7년의 풍년이 있었어요 그리고 연이어 2년의 흉년이 있었어요. 바로 그때 요셉의 앞에 형들과 요셉의 동생 베냐민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게 돼요. 그리고 그 장면을 통해서 그 옛날 하나님께서 요셉 자신에게 주셨던 꿈이 자신을 통해 온 이집트와 자신의 가족을 포함하여 오리엔트 전역의 모든 사람들을 7년의 거대한 가뭄으로부터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비전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요셉이 꿈을 꾼 후 총리가 될 때까지 13년 형들을 다시 만날 때까지 9년, 총 22년의 세월이 필요했어요. 그러므로 요셉에게는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의 ‘얼마 동안’은 총 몇 년의 시간을 의미해요? 22년 동안 재판장이 들어주지 않은 거예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의 ‘얼마 동안’이 참 길고 힘겹게만 느껴지거든요. 그 유명한 사영리의 제1원리인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는 말은 수 없이 들어보았지만. 과연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향한 그 놀라운 계획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언제까지 내가 기다리고 인내해야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농부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시편 126편 5절과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우리는 시편 126편을 묵상할 때 주로 그 결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요. 씨를 뿌리를 때는 눈물을 흘리지만 기쁨으로 거두게 된다고, 울면서 씨를 뿌리지만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오게 된다고. 그렇지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알게 되는 한 가지 사실, 씨를 뿌리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과정이 너무나도 고단하고 힘이 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편 126편을 읽으면 여러분은 그 내용이 쉽게 이해가 되시나요? 저는 시편 126편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한 대목이 있어요. 시편 126편 5절을 다시 보세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씨를 뿌리는 농부의 눈에 지금 무엇이 있어요? 씨를 뿌리는 농부는 지금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어요. 
시편 126편 6절도 보십시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씨를 뿌리러 나가는 농부의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씨를 뿌리러 나가는 농부의 마음이 지금 매우 슬퍼요. 그래서 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이 쉽게 이해가 되세요? 여러분은 농부들이 논이나 밭에 씨를 뿌리러 나갈 때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세요? 대부분의 농부들은 씨를 뿌릴 때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봄에 씨앗을 뿌리면 가을이면 추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논이나 밭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씨를 뿌리는 과정이 고단하기는 하지만 눈물을 흘리거나 울음이 가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시편 126편에 등장하는 농부는 눈물을 흘리며 씨앗을 뿌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시편 126편 5절과 6절 안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농부는 씨앗을 뿌리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거에요. 여러분, 이해하세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까요? 시편 126편에 등장하는 농부는 씨앗을 심는 것이 아니라 뿌리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고요. 
만일 여러분이 농부라면 씨앗을 그저 논이나 밭에 뿌리겠어요? 아니면 흙을 조금이라고 헤치고 땅 속에 씨앗을 심어놓겠어요? 당연히 씨앗을 심지요. 바람이 불면 날아가고 비가 내리면 씻겨나가도록 씨앗을 왜 뿌리겠어요. 그런데 시편 126편에 등장하는 농부는 그 땅이 얼마나 척박했는지, 그 땅이 얼마나 건조했는지 씨앗을 심지 못하고 그저 뿌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씨를 뿌리는 비유’가 있지요. 이 비유에서도 농부는 씨앗을 심지 못하고 씨를 뿌립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씨를 심지 못하고 씨를 뿌리기 때문에 그 씨앗의 4분의 1은 길 가에 떨어져요. 씨앗을 심지 못하고 그져 뿌리기 때문에 4분의 1은 돌짝밭에 떨어지죠.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땅이 없어요. 그래서 그저 씨앗을 뿌려요. 그러니 농부가 뿌리는 씨앗의 4분의 1은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거예요. 오직 농부가 뿌린 씨앗의 4분의 1만이 좋은 밭에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그 농부의 눈에 눈물이 주르룩 주르륵 흐르죠. 나의 손에서 씨앗이 떠남과 동시에 바람이 부는 대로 씨앗이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그 장면을 바라보는 농부 가운데 그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여러분, 이것이 시편 126편이 묘사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항상 기도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런데 그러면 뭐해요. 내가 뿌린 씨앗이 지금 나의 손에서 떠나는 그 순간 그 씨앗의 4분의 1이 길가에 떨어지는데요, 그 씨앗의 4분의 1이 돌짝밭에 떨어지고, 또 4분의 1이 가시덤불에 떨어지잖아요. 그러니 아침과 저녁으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 눈물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시편 126편을 따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여러분이 지금 흘리는 그 눈물을 통해 하나님은 나머지 4분의 1의 씨앗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인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통해 항상 기도하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낙심하지 말라고 교훈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의 그 ‘얼마 동안’의 시간이 참으로 고난의 시간이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시간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7절과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요.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 그러니까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 언젠가는 응답을 해 주시겠지요. 그런데 그 뒤의 말씀은 참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네, 하나님. 어떤 목사님에게는 9년을 기다리게 하셨고, 아브라함에게는 25년을 기다리게 하셨고, 요셉에게는 22년을 기다리게 하셨잖아요. 우리에게는 씨앗을 심지 못하고 뿌려야 하기에 오랜 시간 눈물을 흘리게 하셨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다음에 어떠한 단어가 등장합니까? “속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아니 예수님, 해도 너무하시지. 온 성도들이 기도하였더니 9년 만에 자녀 주신 것도 ‘속히’ 주신건가요? 아브라함에게는 25년 만에 아들을 주신 것도 ‘속히’ 이루어 주신 건가요? 요셉에게 22년 만에 꿈을 이루어주신 것도 ‘속히’ 이루어 주신 건가요? 그토록 오랜 세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게 하신 것도 ‘속히’ 이루신 건가요? 우리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요. 속히 이루어 주신 것이 아니라, 오래 기다리도록 하셨다가 이루어주신 것처럼 보이거든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제가 가만히 묵상해보니, 이 본문을 해석할 수 있는 별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저 하나님께는 9년 도 속히고, 25년도 속히고, 22년도 속히 이루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하기에 하루도 너무나 길게 느껴지지만 그것도 속히 이루어 주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길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가장 적절한 시간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교훈이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할 때, 때로는 우리의 관점에서 인간적인 우리의 시각에서 볼때 기도의 응답이 굉장히 늦어진다고 생각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이 조금 늦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지 아세요? 하루를 기도하고, 이틀을 기도하고, 일주일을 기도하고 한 달을 기도했어요. 그것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농부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의 응답이 보이지 않잖아요. 바로 그때 우리의 마음에는 의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나봐?’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 것을 보면, 이제 이 기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 그러면서 기도를 쉬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을 기도하고 기다렸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얼마 안 지난 거에요. 아직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가장 좋은 시간이 오지 않은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여전히 기도의 응답이 보이지 않아서 낙심하고 계세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물리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다시금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구약성경 하박국서에 있는 구절을 소개하면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하박국 2장 3절의 말씀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 민족의 참상을 보면서, 하나님께 따지듯이 기도했어요. ‘하나님, 도대체 언제예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구원의 날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예요?’ 바로 그때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이 2장 3절의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번째,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반드시 있어요. 두 번째,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속히 임한데요.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데요. 그런데 세 번째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죠. “비록 더딜지라도” 어떻게 하라고요?  “기다리라” 하박국 네가 보기에,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에 조금 더딘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에 비록 더딜 지라도 기다리라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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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