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0. 6. 4. 15:20

존 헤론(John W. Heron)과 양화진 

양화진 외국인 묘에 최초로 묻히신 분은 미국인 선교사 존 헤론(John W. Heron)이라고 하는 의사였습니다. 존 헤론은 미국의 테네시(Tennessee)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테네시 대학이 설립된 이래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할 때, 테네시 대학은 교수회의를 열어 이번에 졸업하는 헤론을 그 학교의 교수로 초빙할 것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실력이 좋으면, 졸업생을 바로 교수로 채용하려고 학교에서 먼저 제안을 했을까요? 그러나 학교의 교수 청탁 제의를 받았던 헤론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저 미지의 땅 조선에 선교사로 떠날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존 헤론은 이제 막 결혼한 그의 아내와 함께 한국 땅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때는 1885년 6월이었는데, 그의 나이 스물아홉(29)이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근대적 시설을 갖춘 병원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국가의 운명이 다해가고 있는 조선의 많은 백성들은 마땅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여름이 되면 한반도 전역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헤론 선교사님은 그보다 1년 앞서 조선에 들어왔던 알렌(Allen) 선교사님이 세운 제중원이라는 병원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일했던 이 병원은 의료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던 당시 조선의 많은 백성들을 치료해주었던 것입니다.  

헤론 선교사님이 1885년 한국에 입국하여 의료선교사로서 일한지 5년 되던 해, 곧 1890년 여름 특별히 전염병들이 창궐하였고, 그 결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약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전염병은 당시 한국에 들어와 있었던 선교사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서양 사람이었던 선교사들은 한국의 전염병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여름 한철 동안 남한산성에 올라가 피하였다가 여름이 지나면 다시 서울로 내려와서 선교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헤론이라는 의료선교사는 극심한 전염병이 온 한반도를 뒤덮었던 1890년 여름 남한산성에 올라가지 않고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던 한국인들을 찾아 사방으로 뛰어 다녔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역시 전염병에 걸리고 맙니다. 한국인 환자들을 뛰어다니던 그의 몸은 과로와 피로로 이미 약해있었고 전염병에 걸려 3주 동안 앓다가 그해 7월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의 나이 34세의 일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교수 자리를 버리고, 잘나가는 의사 자리를 버리고, 한국에 들어와 5년 동안 질병으로 고생하는 한국인들을 열심히 돌보는 가운데 그 자신이 결국 전염병에 감염되어 죽음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순교의 길을 걸었던 헤론에게 한국에서 땅 한 평 있었을 리 없습니다. 그가 죽자 동료 선교사들은 한국 땅에 장사 지내 주려했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는 서양의 선교사들과 조선의 관료들 사이에 적지 않은 소동을 일으켰고 결국 조선의 마지막 황제이셨던 고종께서 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헤론의 헌신과 노력을 높이 평가하신 고종 황제께서 한강의 양지바른 곳을 선택하여 헤론을 장사할 수 있도록 하사하셨는데, 그곳이 바로 양화진입니다. 

헤론을 비롯하여 이 땅 한반도를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 헌신했던 여러 선교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분들의 사랑과 헌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깊이 깨닫게 됩니다. 


지식과 사랑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 짧은 구절은 참으로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진리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기록합니까?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사람의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우리의 주변 사람들에게 봉사하게 만들고 사랑으로 섬기게 합니다. 그래서 나의 행동으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되지요. 

존 헤론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마음에 숙연한 마음과 그분을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이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기 때문이 아니지요. 그분에게 지식이 풍성했기 때문에 아니라, 그분의 마음에 거대한 사랑이 넘쳐흐르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그와는 반대로 지식으로 인해 교만해진 한 율법 교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교만하여져서 스스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자리에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시험할 자격이 있다고 느꼈던 그는 예수님께 시험 문제를 제출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것인가? 의 문제였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질문하고는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대답을 하든 그는 자신의 해박한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예수님의 대답을 판단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로 상대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전공과목으로 대답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에 율법 교사는 율법의 두 가지 핵심,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정확히 대답합니다.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 대답은 매우 정확한 정답이었습니다. 율법 교사는 정확한 정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율법 교사는 율법의 핵심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꿰뚫고 계십니다. 그에게는 지식이 부족하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그에게는 지나치게 교만해질 정도로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니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28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기준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율법교사의 대화는 지금까지 살펴본 28절까지로 끝나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다 하셨거든요. 그러나 율법 교사의 질문은 끊이지 않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여전히 율법 교사는 예수님과의 ‘논쟁’을 의도합니다. 그 논쟁 속에서 자신의 해박한 율법 지식을 드러내고, 나아가 자신이 의롭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율법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는 또 다른 논쟁을 일으켜 자신은 그 안에 숨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이웃사랑 실천의 행동을 요구하셨는데, 그는 이웃의 한계를 질문함으로써 율법과 성전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또다시 숨어버립니다. 이때 그의 도피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죽어가고 있는 이 사람의 곁을 제사장이 지나갔고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그들은 이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오늘 본문 36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너무나도 쉬운 질문이고, 누구라도 그 정답을 알 수 있는 질문입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요리조리 피하려는 율법 교사의 퇴로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여러분, 중요한 것은 우리의 머리에 얼마나 많은 지식이 있느냐가 아닙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있는가입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우리의 머리에 얼마나 많은 지식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있는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강도만난 사람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었던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에게 지독한 선입관이 있었어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여러분, 그가 비록 사마리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없을지라도 그에게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그는 율법 교사에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는 진정한 의미의 ‘교사’였던 것입니다. 반대로, 율법 교사는 그 누구보다 율법에 대한 지식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여 사랑의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면 그는 율법의 교사이기는커녕 진정한 신앙인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은 지식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시작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신앙의 목적지는 강도만난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그를 극진하게 보살펴주는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회피하고 싶은 말씀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주제가 명확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내 주변에 있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성경에 대해 알아가는 지식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말씀이지요. 오늘 본문의 주제는 너무도 분명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계속해서 묵상하고 묵상할 수록 저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어요? 성경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지시하시거든요. 그것은 머리로 충분히 이해가 돼요. 그런데 문제는 저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여러분, 한번 진지하게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보세요. 만일 우리가 영생을 얻는 길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면 –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적극적으로 나의 모든 시간과 정성과 재물을 쏟아부어주는 것이 영생의 길이라면 – 여러분은 그 영생의 길에 들어갈 자신이 있으세요? 설교를 시작하며 존 헤론 선교사님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만일 그와 같이 이웃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자신이 있으세요?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본받고는 싶어요, 그러나 그렇게 살아갈 자신은 없어요. 존 헤론 선교사님과 같이 열방을 품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요. 그러나 그렇게 살아갈 자신이 있느냐 누군가 물으신다면, 저는 자신이 없어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때문에 괴로워하쟎아요. 그러나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라는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말씀 중에 내게 이해되는 내용이 나를 더 괴롭힌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마크 트웨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점점 더 알 것 같아요. 오늘 본문의 주제는 명확해요. 오늘 본문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머리로는 분명히 알겠어요. 이해가 돼요. 그래서 더욱 피하고 싶은 본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교사와 같이 정답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분명히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계속해서 예수님의 교훈을 논쟁으로 말싸움으로 회피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교사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은 던졌지만, 정작 예수님의 대답 앞에 우리의 부끄러운 본성이 드러나서 더 이상 어디로도 피하거나 숨을 수 없는 벌거벗겨진 우리의 자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상관없었어요. 성경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아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성경의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깨달아가면서 우리의 마음에 갈등이 찾아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 너무나도 멀리 괴리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자리 

이러한 갈등과 고민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비유에는 몇몇 등장인물이 있어요. 먼저 강도만난 사람이 등장하죠. 둘째로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지식은 있었지만 사랑의 마음은 없었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셋째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율법에 대한 탁월한 지식이 있었는지를 모르겠어요.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너무도 분명해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질문해봤어요. ‘네, 그래요. 하나님의 자녀답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싶어요. 그러나 나의 본성을 주님께서 아시잖아요. 저의 본성은 제사장과 레위인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때 제 마음에 들어왔던 또 한명의 등장인물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바로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지금 당장 강도를 만나서 모든 재물을 다 빼앗겼고, 지금 당장 강도를 만나 그의 몸은 상할 대로 상했고, 지금 당장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어요. 제사장이  자신을 보았지만 그저 지나갑니다. 레위인이 자신을 살펴보았지만 그 역시 피하여 갑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아무런 소망도 아무런 기대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한 사마리아 사람이 걸어오는 거예요. 그리고는 자신의 상처를 씻어주기 시작해요. 자신을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옮겨줘요. 그리고 치료를 받는데 필요한 모든 비용을 그분이 대신 치러줍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구원의 은혜를 받았어요. 

여러분,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이제 완전히 치유되어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강도만난 사람, 곧 선한 사마리아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난 그가 이후 누군가 큰 곤경에 빠진 사람을 만났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그 자리를 그저 피해버릴까요? 그럴 수는 없는 거죠.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그 사람에게 달려가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그를 돌봐주지 않겠어요? 오늘 본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그러나 한 사마리아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사람이 이후 큰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는 분명히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돌보아 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마음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아직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은 부족하기 짝이 없을 수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적어도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자리에는 있지마십시오. 차라리 강도 만난 사람이 되십시오. 강도 만난 사람의 자리에서 우리의 깨어져버린 마음, 상한 마음, 병든 마음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치유를 경험하십시오.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온 마음과 온 생명과 온 뜻과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으며, 이웃을 사랑하되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존 헤론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잠시 말씀드렸지요. 그토록 조선 사람들을 위해 한 없는 사랑과 헌신을 드렸던 존 헤론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지금도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자신을 주셨다.” 

존 헤론 선교사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리에 있기에 앞서, 강도만난 사람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자리에서 자신을 찾아와 상처를 싸매시며 돌보아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의 인생이 바뀌어서 미국 의과대학에서의 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와 미지의 땅 조선에 그의 젊음을 불태우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단에 자신을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당장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리에 있지 못하다면, 우리의 사랑없는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곳에서 우리의 상처 난 마음, 고장 난 마음, 깨어진 마음을 선한 사마리아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십시오.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깨어지고 상한 마음이 치유를 받을 그때, 우리는 역시 하나님을 사랑을 들고 내 곁에 있는 이웃 한 사람을 사랑하되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또 한 사람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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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