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기독교 지도자 가운데 우찌무라 간조라는 분의 이름을 여러분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른바 ‘무교회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기에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우찌무라 간조에 대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평가는 뒤로하고,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한 오늘, 저는 그분의 일기 가운데 한 글귀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글을 쓴 것은 우찌무라 간조가 뉴 잉글랜드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라고 합니다. 아직 밀린 학비를 다 납입하지 못하였고, 뉴 잉글랜드의 그 추운 겨울을 난로 하나 없이 보내고 있던 시절, 우찌무라 간조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보다는 선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았다.
새, 꽃, 태양, 공기, 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고, 향기로운가!
그런데 인간은 날마다 악에게 불평하고 있다.
단 한 가지만 갖추면 이 세상은 천국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통곡의 소리 and 기쁨의 소리
바벨론 제국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지 어느덧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그 옛날 선지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을 신실하게 이행하셔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 다윗과 솔로몬의 왕좌가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그곳에 남아 있는 성전은 무너질 대로 무너지고 회파 될 대로 회파 되었으며 그렇게 70년 동안 그 누구도 관리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 돌무더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 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년 둘째 달에” 그들은 분명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이지만,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돌아왔다고 서술하지요. 왜냐하면 여전히 예루살렘에는 성전의 터가 남아있었고, 성전의 돌무더기가 그대로 내버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성전으로 기능을 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다시금 성전을 재건해야 했던 것입니다.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성전 재건을 주도했던 사람으로 스룹바벨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예루살렘에 그 옛날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을 ‘솔로몬 성전’이라고 부르고, 그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재건하였던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자,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하는 오늘 본문에서 함께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할 때 그 현장에는 두 가지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2절의 마지막을 다시 보십시오.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질렀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70년의 포로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고 다시금 고향 땅에 돌아오게 하셨다는 커다란 기쁨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독립을 쟁취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신앙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종교적인 자유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에 새로운 성전이 건축되니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들을 친히 만나주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가 이어질 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그리하여 성전이 재건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수많은 유대인들은 기쁨의 탄성을 내어 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12절에는 기쁨의 소리도 들렸지만 정반대의 소리도 매우 크게 들립니다.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특별히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 – 곧 솔로몬 성전 – 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합니다.’ 이들은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기 전 그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의 모습을 직접 목도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약 70년 전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전을 비롯한 모든 건축물이 다 불타는 장면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7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통곡하였습니다. 그들은 70년이 흐른 뒤 스룹바벨이 재건하는 성전이 그 옛날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었기에 그 장면을 바라보며 대성통곡합니다.
그러니 한쪽에서는 백성들이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고, 동일한 장면을 바라보는 나이 지긋한 분들은 대성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소리, 곧 대성 통곡과 기쁨의 탄성이 어찌나 컸는지 그 장면을 오늘 본문 13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습니다. 그만큼 한쪽에서는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성통곡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를 성경은 어떻게 묘사합니까?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그 두 가지 소리를 조금만 멀리서 들으면 이 커다란 소리가 즐거움의 함성 소리인지 슬픔에 겨워 통곡하는 소리인지 도무지 분별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니던가요? 우리의 인생은 슬픔의 조각과 기쁨의 조각이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모자이크를 만들지요. 어떠한 조각은 기쁨의 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어떠한 조각은 통곡의 소리로 들립니다. 그렇게 기쁨의 조각과 슬픔의 조각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 우리의 인생일진대 한 개인의 삶을 그 누가 기쁨의 인생이라고, 혹은 슬픔의 인생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는 단 하나의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기쁨의 장면이고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는 통곡의 이유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등장하는 사건 중에는 과연 이것이 기쁨의 장면인지 혹은 슬픔의 장면인지 쉽게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식에 가면 기쁨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의 이유만 되던가요? 슬픔의 이유가 되지는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어느 가정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기쁨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의 소리만 들리던가요? 자녀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리고 나아가 통곡해야 했던 순간이 우리의 삶에는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젊은 청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우리는 기쁨으로 그들을 축하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직장이라도 우리에게 기쁨의 소리만 들려주는 곳은 이 세상에 아무 데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직장이라는 장소는 기쁨의 소리와 더불어 슬픔의 소리도 함께 들리는 공간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삶의 모든 일들은 그 안에 기쁨의 함성 소리도 들리고 동시에 슬픔과 통곡의 소리도 들립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것처럼 조금만 거리를 두고 들어 보면 이것이 슬픔의 소리인지 통곡의 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인 것입니다.
감사의 찬양 소리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는 그 현장에는 기쁨의 함성 소리와 슬픔의 탄식 소리가 함께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는 바로 이 장면에는 기쁨의 소리와 통곡의 소리라는 두 가지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쪽 편에서는 기쁨의 탄성이 너무도 우렁찼고, 다른 한쪽에서는 슬픔의 통곡이 너무도 요란하여 사람들의 귓전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는 이 장면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었던 제 3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계속 이어지는 11절 앞부분을 우리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대다수의 백성들은 한편에서 기쁨의 탄성을 질렀고 다른 한편에서는 슬픔에 싸여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었지만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 찬양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찬양이었다고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불렀던 찬양의 가사 곧 그들이 노래했던 감사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삶 속에 기쁨의 소리는 더욱 커지고 통곡과 슬픔의 소리는 잦아들었기 때문입니까? 그들의 현실 속에서 기쁨의 요소는 더욱 풍성해지고 탄식과 슬픔의 이유는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기쁨의 소리와 함께 통곡과 슬픔의 소리도 크고 웅장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작은 소리였지만, 그리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소리였지만, 바로 그 장면에서 유유히 울려 퍼지는 찬양의 가사, 곧 감사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스룹바벨의 주도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바로 그 장면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찬양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찬양은 언제부터, 과연 언제부터 예루살렘 성전에 울려 퍼지고 있었을까요?
자, 예루살렘에 역사상 처음으로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곧, 솔로몬 성전이지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시는 장면을 그려주는 여대하 5장은 바로 그때부터 예루살렘 성전 안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흘러나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역대하 5장 13절은 그 찬양의 가사가 무엇이었는지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여기에도 감사라는 단어가 등장하네요. 그러니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었을 때부터 예루살렘 성전에는 감사의 찬양이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역대하 5장 13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이제 찬양의 가사가 등장합니다. ‘주님은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은 영원히 있도다’ 이 찬양의 가사는 놀랍게도 오늘 본문 에스라 3장에서 들리는 감사의 찬양과 그 가사가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하고 영광스러운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 왕국의 흥망성쇠를 경험하지요. 급기야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을 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70년, 스룹바벨을 비롯하여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그 순간까지 예루살렘에서 펼쳐진 수많은 역사적 현장들은 기쁨의 조각과 슬픔과 통곡의 조각이 한데 어우러진 웅장한 모자이크였으며, 어떠한 조각은 그 자체가 기쁨의 조각인지 슬픔의 조각인지조차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진 인간 삶의 여러 단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시간들을 관통하여 솔로몬의 성전으로부터 스룹바벨의 성전에 이르기까지 그 500년에 걸친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유유히 흐르고 있었던 감사의 노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우리는 기쁨의 소식에 먼저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슬픔의 소식에 그 무엇보다 빨리 반응합니다. 그렇게 하루에도 수 없이 번갈아 가며 기쁨과 슬픔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서 정작 우리의 인생을 처음부터 선택하여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불러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하는 감사의 찬양 소리는 여전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잠시만이라도, 아주 잠시만이라도 여러분 마음에 가득 찬 슬픔과 통곡의 소리를 조금만 곁으로 밀어넣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혹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기쁨의 함성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하나님께 나와 예배하는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아주 잠시만이라도 여러분 마음에 있는 기쁨의 소리를 조금만 곁으로 옮겨놓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차피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그 모든 과정이 기쁨의 장면이었는지 슬픔의 장면이었는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기쁨과 슬픔의 그 순간순간마다 그리도 격렬하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귓전에 들리는 기쁨의 함성 소리를 조금만 잠재울 수 있다면, 여러분의 귓전에 들리는 슬픔의 통곡 소리를 조금만 곁으로 옮겨 놓을 수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비로소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이 세상에는 악보다는 선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았다.
새, 꽃, 태양, 공기, 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고, 향기로운가!
우찌무라 간조의 일기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날마다 악에게 불평하고 있다.
단 한 가지만 갖추면 이 세상은 천국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심과 그 영원한 인자하심을 날마다 우리에게 새롭게 부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며 살아간다면 제 아무리 시간이 흐를 지라도, 그 어떠한 사건이 우리를 휘몰아치더라도 여러분의 심령은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거룩한 성소가 되는 것이요, 여러분이 어디에 계시든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직장, 여러분의 삶의 자리는 천국을 변할 것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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