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0. 6. 17. 08:56
반응형

오늘은 여러분에게 성경 퀴즈를 하나 내면서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가리켜 ‘기적의 종교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 혹은 하나님의 이적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적과 기적이 무더기로 – 한 두 번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 무더기로 떼로 나타나는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이적이 무더기로 나타났던 시대가 크게 두 번 있었는데 그 두 번의 시대는 과연 언제일까요? 

첫 번째는 모세의 시대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낼 때, 하나님은 기적을 한 두 번 행하신 것이 아니라, 무더기로 기적을 행하셨지요. 바로 모세의 때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이 무더기로 나타났습니다. 자, 그럼 모세의 시대 이후에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무더기로 나타났던 시대는 또 언제였을까요? 바로, 엘리야-엘리사의 시대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갈멜산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불도 내려주시고, 온갖 신기한 기적과 이적을 무더기로 베풀어주셨습니다. 

자, 그럼 이제 정말 중요한 질문을 드리지요. 구약성경에서 모세의 시대,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무더기로 다발로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기적을 무더기로 떼로 경험했던 모세 시대의 사람들과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그 어떠한 시대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믿음이 더욱 견고하고 든든했나요? 하나님의 기적을 그토록 많이 보았으니, 모세 시대의 사람들과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과 신앙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나요?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모세의 시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 곧 열 가지 기적으로 베풀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애굽 사람들이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을 아무 말 없이 보내줄 만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열 가지 재앙으로 나라가 다 망해버린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 다시 잡아가겠다고 그들을 따라오잖아요. 그러다가 모두가 홍해에서 수장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기적과 표적으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냈으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앙이 생길 만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 그 땅을 점령해라 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잖아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결국에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었잖아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기적을 많이 경험한다고 해서 믿음이 성숙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도 생각해볼까요?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어요. 갈멜산에 사람들이 다 모여있는데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십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하고 바알 신, 아세라 신, 그 외의 모든 우상들을 다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다 나아올 만 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는데,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더 이상 어떠한 기적을 보여줘야 하나님을 믿겠어요? 그런데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위대한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달려들잖아요.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기적을 많이 체험했다고 믿음의 성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많이 체험하고, 이적과 기사를 많이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이적과 표적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이적이든, 표적이든, 기적이든 제 아무리 많은 이적과 기적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나의 믿음과 신앙에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이적과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살아가더라도, 나의 매일매일의 삶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려있다면 그 사람의 믿음과 그 사람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요구와 예수님의 거절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짧은 대화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오늘 본문 11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엇을 요구합니까? 표적을 구합니다. 이적을 구합니다. 기적을 행하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리십니다.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예수님은 분명하게 거절하시고 아예 다시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과 행동은 바리새인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이적이나 기적을 베풀 필요가 있습니까? 기적이나 이적을 베풀어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요?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지 않기로 마음에 결심을 했어요. 예수님을 힐난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적과 표적을 구했어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무리 큰 이적과 기적을 그들의 눈에 보여주어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퀴즈를 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적이 한 두 번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더기로 나타났던 시대가 두 번 있었는데, 그때가 언제였는가 라는 퀴즈였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그 답을 아시죠? 모세의 시대와 엘리야-엘리사의 시대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퀴즈도 가능합니다. 신약 시대에 – 구약 시대가 아니라 신약 시대로 넘어와서 –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곧 기적이 무더기로 다발로 나타났던 시대는 언제였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시대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 –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시고, 몇 개 되지 않는 빵과 물고기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 얼마나 많은 기적과 표적을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목격하였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시대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 가운데 주목해야 할 단어, 곧 이 말씀의 키워드는 바로 “이 세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 세대”라는 구절이 두 번 등장하죠?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 표적 보여주세요, 기적을 보여주세요 라고 요청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 바리새인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 세대가 어떻게 표적을 구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 곧 그 세대 사람들에게는 그 어떠한 시대에도 주어지지 않았던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수 천명의 사람들을 먹이셨다는 정도가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정도가 아니라니까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바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인류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기적, 곧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시는 성육신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무슨 기적이 더 필요합니까? 더 이상 무슨 기적을 보여주어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기적을 허락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육신을 너무도 괴롭히던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고쳐주시기도 합니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물질의 문제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풍성함으로 응답해주십니다. 그 어디에도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던 우리 가정의 문제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우리 가정에도 평안과 행복이 넘쳐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데 여러분, 그것보다 더 크고 더 위대한 기적이 있어요.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에 모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어느 시골에 여러 자녀를 둔 젊은 아기 엄마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분이 결혼을 하여 자녀를 여럿 나은 두었는데, 그만 남편이 아직 어린 자녀들을 남겨둔 채 먼저 세상을 떠난 거예요. 시골에서 남편 없이 어린 자녀들을 키우는 것만 해도 참 수고로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 여자분 자신의 몸에 중풍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었을 때,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은 모두 소진하고 본인은 한쪽 몸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 채, 집안에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자녀들은 키워야 하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고 괴로움만 깊어지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아주머니께서 그분에게 귀가 솔깃해질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교회 가면 병 낫는데.” 그 말을 들은 젊은 애기 엄마가 어떻게 했을까요? 그다음 날부터 움직이지 않는 한쪽 다리를 끌고 매일 아침 언덕을 넘어서 시골교회의 새벽기도에 출석하였습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몸을 이끌고 새벽기도에 하루도 빠지지 않는 열심이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교회에서 서리집사의 직분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여집사님이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는 단 하나, 뭘까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과를 먼저 말씀 드리지요. 그 여집사님은 풍을 앓으신 이후 날아계신 날 동안에는 몸의 한쪽을 단 한 번도 움직이지 못하셨습니다. 교회에 아무리 출석하고 새벽기도시간에 아무리 기도하였을 지라도 병이 낫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교회를 출석한 지 약 7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어느 날, 그 여집사님께서 큰 자신의 딸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출석한 지 7년 만에 자신의 속 마음을 큰딸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제 내가 병 낫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러분, 중풍병이 나아야 기적이지요. 마비되었던 몸이 다시 힘을 얻어서 열심히 일하며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어야 기적이잖아요. 그러나 이 여집사님은 그런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 이 여집사님은 하나님의 기적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건가요? 아닙니다. 그 여집사님은 비록 자신의 몸이 치유되는 기적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분과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났어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어요. 이것이 그 여집사님이 경험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아닐까요?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한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경험한 초자연적인 기적이 여러분의 믿음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 경험한 기적과 이적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여러분에게 초자연적인 기적을 선사하신 하나님께 여러분의 시선을 고정시키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혹, 우리 가운데 별다른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신 분들이 계신가요? 여러분, 괜찮습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셨다면 더욱더 우리의 일상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또 다시, 한 해가 저물어가고 성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매년 찾아오는 성탄절을 다시 한번 맞이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야 하는 기적이 있다면, 그것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나는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인가 새로운 기적과 표적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매년 찾아오는 성탄절은 무의미한 시간의 반복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열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성탄절을 통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모십니다. 매년 찾아오는 성탄절이지만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하여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거예요. 매년 반복되는 성탄절이지만 지금도 내 마음속에 찾아와 나와 함께 거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말구유가 아닌, 나의 마음에 모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생애 최고의 기적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절기설교2020. 6. 17. 08:50
반응형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있는 한 구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예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온 세상의 창조자,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온 세상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의 말씀은 현실은 그 반대였다고 선언합니다. 세상의 주인이시요, 세상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였고, 그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바로 그 날을 상상해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그 어느 민족보다 더욱 풍성하게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셨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 가나안에 오셨습니다. 구약 성경 미가서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장소가 베들레헴이라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 다니엘서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가 언제인지를 또한 정확하게 기록하셨습니다. 이 정도이면, 당시 모든 백성들이 나아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며 그분을 영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복음서 전체를 아무리 샅샅이 살펴보아도, 우리 주님의 탄생을 준비하며 영접하였던 사람들의 숫자는 손에 꼽을 만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며 기다렸던 사람으로 누구를 기억하십니까? 저는 먼저 세례 요한을 꼽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탄생하지 않으셨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찾아간 적이 있지요. 바로 그때, 엘리사벨의 태 안에 있었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다가온 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어머니의 태 안에 있던 세례 요한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뛰놀았다고 합니다(눅 1:41).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약 6개월 먼저 태어났고 그의 삶 전체를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는 일에 헌신하였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며 기다렸던 사람 가운데, 저는 세례 요한을 그 첫째로 꼽고 싶습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 외에, 또 누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였습니까? 네, 동방의 박사들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구약의 말씀을 몰랐을 가능성이 크지요. 그러나 그들은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별을 따라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의 마굿간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동방으로부터 준비하여 온 귀한 선물들,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우리 주님께 바치며, 성탄을 축하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세례 요한, 그리고 동방의 박사들 외에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기다리며 준비하였던 사람은 또 누구입니까? 네, 불행히도 그 이상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며 기다렸습니다. 세례 요한,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자 그분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당시 유대 땅 베들레헴에는 세례 요한과 동방의 박사 외에는 사람들이 한 명도 안 살았지요?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들레헴에 있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몰려왔는지 여관에 머물 곳이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며 기다렸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복음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참으로 정확한 말씀입니다. 세상의 주인이시요,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땅에 오셨지만,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였고,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헤롯과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은 또래의 남자 아이들을 다 죽이기까지 하였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이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0-11절) 

저는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성탄을 준비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성탄을 기다리셨습니까? 여러분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세례 요한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기뻐 뛰며 성탄을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여러분은 동방의 박사들과 같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준비하셨습니까? 

만일, 우리 가운데 세례 요한과 같이, 동방의 박사들과 같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미리 준비하셨던 분들이 많이 계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매년 성탄을 보내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도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 여전히 진리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가 매년 찾아오지만, 그분을 기다리며 그분의 탄생을 마음으로부터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그 숫자가 적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지난주일 유난희 집사님께서 헌금 특송으로 부르신 ‘당신 보다 못해요’의 가사 일부분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제 마음을 맴도는 가사의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사는 게 바빠 마음에 틈이 생겨 처음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하나님의 약속이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가져다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는 게 너무 바빠 마음에 틈이 생겨’ 매년 성탄절을 맞이하면서도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천사의 메시지, 천군의 찬양 

여러분은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셨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참 잘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하셨다면, 오늘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목자들에게 집중하셨으면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은 세례 요한이나, 동방의 박사들과 같이 미리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 8절과 9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날 밤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의 목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8절에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 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고,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는 것은 고사하고,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기대도 없습니다. 목자들은 그저 자신의 양떼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 순간까지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바로 그 순간까지도, 목자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사는 것이 너무 바빠, 구세주의 탄생에 대해서는 미쳐 마음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 순간까지도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며 기다리지 못했던 목자들에게 하나님은 천사의 메시지와 천군의 찬양을 통해 구세주의 탄생을 목자들에게 알려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 10절부터 14절까지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가 먼저 목자들에게 말을 하지요.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이제 수많은 천군이 나타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여러분, 천사가 기쁨의 소식을 전합니다. 수많은 천군이 내려와서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합니다. 목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 곧 양 떼를 지키는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소원이 생깁니다. ‘하나님, 우리가 성탄절 아침 예배에 참여하는 지금까지, 사는 것이 너무 바빠 우리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지 못하였다면, 지금 이 시간에 천사의 음성과 천군의 찬양을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탄절 예배에 참여하는 바로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으며, 세상의 일정에 쫓겨 다녔던 우리의 마음이 이 시간만큼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게 하옵소서.’ 저는 이와 같은 기도의 마음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목자들의 경배 

천사들이 목자들을 찾아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었습니다. 천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찬양하는 장면을 목자들이 보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찾아 나섭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 15절부터 15절과 16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천군과 천사들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천군과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들이 직접 목자들을 끌고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자리로 데려가지는 않습니다. 천군과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찬양을 합니다. 그리고는 하늘로 올라가지요. 이제 목자들이 직접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이제 목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 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16절에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마지막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지요.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여러분, 목자들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 순간까지 예수님의 탄생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목자들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 순간까지 이 세상의 구세주가 오셨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천군을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찬양을 듣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 목자들은 미리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 그분을 예배하며 그분을 영접하는 위대한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세례 요한과 같이, 동방의 박사들과 같이 성탄을 미리 준비하나요? 여러분은 세례 요한이나, 동방의 박사들과 같이 성탄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할지라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목자의 자리에는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 아침 성탄을 축하하는 이 예배에 참여하는 순간까지도, 사는 것이 너무 바빠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지 못하셨다면, 이 자리에서 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을 통해 말씀해주시는 성탄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예배 가운데 천군도 함께 찬양하는 그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 그분을 우리의 마음으로 영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절기설교2020. 6. 15. 17:07
반응형

헬라어로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는 “날이 지나고 해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입니다. 매년 음력으로 1월 1일이 되면 설날이 찾아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 한 달이 지나면서 또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한 해가 찾아옵니다. 이처럼 사연스럽게 흘러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시간을 연대기적인 시간 ,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 특별히 오늘의 설교본문인 스바냐서에서는 연대기적인 시간과 구별되는 독특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헬라어 단어로 표현하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을 압도하는 시간”입니다. 한 해가 지나면 새로운 한 해가 온다는 연대기적인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때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압도하는 그때, 바로 그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들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시는 바로 그때, 다시 말해 카이로스의 시간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한해 한해 연대기적인 시간, 곧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은 연대기적인 시간을 살아가지만, 우리 크리스천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연대기적 크로노스의 시간 외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시간,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성취하시는 시간 곧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새해가 여러분에게 단지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다가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카이로스의 시간, 곧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위해 준비하신 위대한 사건이 여러분에게 임하는 새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지배하는 시대 

오늘 본문 스바냐서는 바로 크로노스의 시대에 카이로스를 선포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스바냐서의 시간적인 배경을 소개하는 스바냐 1장 1절의 말씀을 함께 찾아서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이 짧은 한 구절의 말씀에 남 유다를 다스렸던 왕의 이름에 세명이나 등장합니다. 여러분 찾으셨습니까? 처음에 등장하는 왕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몬”입니다. 아몬이라는 이름 뒤에 ‘왕’이라는 표시가 없지만 요시야의 아버지 아몬은 남 유다의 왕이었습니다. 자, 그리고 아몬 이후에 또 다른 왕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누구입니까? “요시야”입니다. 그리고 스바냐 1장 1절에서 “요시야” 다음에 등장하는 남 유다를 다스렸던 어느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까? 스바냐는 누구의 현손이죠? 바로 “히스기야”입니다. 

자, 다시 정리를 하죠.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를 밝혀주는 스바냐 1장 1절의 말씀에는 세 명의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시간대로 정리하면, 히스기야, 아몬, 요시야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히스기야와 아몬 사이에 한 명의 왕이 더 있는데, 그의 이름은 므낫세입니다. 다시 말해, 스바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은 남 유다를 네 명의 왕이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곧,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그리고 요시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임재가 눈에 띄지 않는 크로노스의 시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네 명의 왕 가운데 두 명의 왕은 선한 왕으로 평가를 받는 왕입니다. 곧 히스기야와 요시야입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히스기야와 요시아 사이에 놓여있는 므낫세와 아몬은 성경에서 악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선한 왕의 시대와 악한 왕의 시대, 하나님을 섬기는 왕과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왕의 시대가 서로 섞여 있는 시대입니다. 어떤 왕은 집권해서 우상을 섬기게 합니다. 어떤 왕은 집권해서 우상을 파괴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게 합니다. 
우상을 섬기게 하든 하나님을 섬기게 하든, 한 나라 전체가 왕의 영향력 아래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든 이방 우상을 함께 섬기든 사람들의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손길은 보이지가 않더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지금 당장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우상을 섬기면 지금 당장 나라가 망해야 할 거 같은데 그렇지도 않아요. 지금 당장 모든 이방의 우상을 제거하고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섰으면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축복이 막 눈에 보여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변화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연대기적인 시간이 지나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왕도 바뀌고 국가의 권력을 뒤흔드는 사람들도 바뀝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리 연대기적인 시간이 흘를 지라도, 아무리 크로노스의 시간이 흘러도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대로 선을 행합니다. 제 아무리 연대기적인 시간이 흘러도 실제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우리 시대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의 고민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어렵게 만드는 올무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지요. 왜 하나님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으실까요?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여주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연대기적인 시간이 제 아무리 흘러도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만같습니다. 새해 좋은 일이 많을 것이라고 덕담을 나누어보지만, 경제는 위축되고 정치는 변화가 없으며 우리네 삶은 크게 변화가 없으리라는 낙심이 우리 사이에 퍼져있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또 다른 해가 찾아왔지만 새로운 희망이 없고 새로운 기대가 없습니다. 


스바냐서의 핵심 주제: 여호와의 날 

바로 이때, 사람들이 연대기적인 시간만을 살아갈 뿐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고 있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카이로스의 시간이 가까이 왔다고, 사람들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바로 그 하나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스바냐서의 핵심 주제가 바로 ‘여호와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스뱌나 1장 7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잠잠하라고 명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사람들이 예측할 수 있고, 사람들이 익숙한 연대기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곧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카이로스적인 시간이 곧 임할 것이기에 연대기적인 시간만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침묵하라고, 잠잠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스바냐 1장 14절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습니다. 가깝고도 빠릅니다. 여호와의 날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 곧 여호와의 날이 가깝게 다가왔으니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울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임하면 이 세상에서 힘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 용사들, 권력자들,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한다는 사람들은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죠? 하나님의 때가 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 찬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하면 인간의 계획인 인간의 노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1장 18절의 상반절만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의 분노의 날,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바로 그 날이 임하면 제 아무리 강한 힘을 갖춘 용사라도, 제 아무리 “은과 금”을 그득히 쌓아놓은 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심판의 날, 곧 여호와의 날을 피해 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로 그 날, 곧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그때까지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쌓아놓은 권세와 부귀가 모두 무력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히스기야가 남유다를 다스리던 시기부터, 요시야 왕이 다스리던 때까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는데 도무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용사와 같이 힘이 있는 사람들 권력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쥐고 있는 힘과 권력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금과 은이 풍성한 부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변하지 않는 신뢰가 아니라 자신의 재력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연대기적인 시간만을 살아가고 있었기에 어제와 오늘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올해가 지나고 내년이 되어도 힘이 있는 장수들과 용사들은 여전히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금이나 은이 풍성한 부자들은 오늘이든 내일이든 변함없이 풍족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는 반드시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인간을 압도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하나님의 때, 여호와의 날을 선언한 이후, 다시 말해 남 유다를 다스리던 요시야 왕의 사망한 지 30년도 되지 않아서 남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 성은 앗수르의 뒤를 이어 전오리엔트 지역을 지배하게 되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시간에 바벨론 제국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무너트리니 그동안 은과 금을 풍성하게 쌓아놓고 재력으로 살아가던 사람들도 견디지를 못합니다. 자신이 가진 힘과 권세로 세상을 호령하던 용사들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여호와의 날, 곧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하자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몸 하나 지킬 수가 없었던 거지요. 이것이 바로 스바냐 선지자가 선언했던 여호와의 날, 곧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살아갑니다. 연대기적 시간만을 살아갑니다. 한 해가 지나면 새로운 한 해가 찾아오는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와 같은 시간의 흐름이 한없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바로 그때,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고 믿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건 믿지 않는 사람들이건 상관없이 세계 역사의 주관자 되시며 세상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기 통치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다리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분 개인의 인생 시간표에 여러분의 각 가정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독특한 시간표를 가지고 계십니다. 바로 그때가 이르면, 때가 차면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이 여러분을 압도하는 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새해를 축하하며 기념하는 오늘, 매년 찾아오는 날짜의 반복을 넘어 여러분의 삶을 주관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때, 인류의 역사를 종결하고 하나님의 공의로 모든 만물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날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카이로스를 위한 준비 

스바냐 선지자는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살아가는 남유다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날’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려줍니다.  스바냐 2장 1절에서 3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작성하신 바로 그 때가 임하기 전에,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3절에 이렇게 말씀하지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호와의 날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크로노스적인 시간에서는, 연대기적인 시간에서는 그저 한해 한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는 은과 금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힘을 길러 용사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인간을 압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하면 인간이 모아두었던 은과 금은 아무짝에도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갖추어놓았던 힘과 권세는 더 이상 필요치가 않아요. 그 대신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 겸손하게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여호와의 날에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여호와의 날,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게 나타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구하고 겸신히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바냐 3장 17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의 이 기쁨은 모든 유대인들을 향한 기쁨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기쁨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기쁨은 연대기적인 시간, 한 해가 흐르고 또 다른 한 해를 맞이하는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쁨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기쁨은 연대기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나타는 여호와의 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겸손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더 없는 기쁨입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한 해동안 하나님의 기쁨의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새로운 한 해동안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넘어 하나님의 섭리가 온전히 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십시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절기설교2020. 6. 15. 12:33
반응형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 가운데 우찌무라 간조라는 분의 이름을 여러분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른바 ‘무교회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기에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우찌무라 간조에 대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평가는 뒤로하고,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한 오늘, 저는 그분의 일기 가운데 한 글귀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글을 쓴 것은 우찌무라 간조가 뉴 잉글랜드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라고 합니다. 아직 밀린 학비를 다 납입하지 못하였고, 뉴 잉글랜드의 그 추운 겨울을 난로 하나 없이 보내고 있던 시절, 우찌무라 간조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보다는 선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았다.
새, 꽃, 태양, 공기, 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고, 향기로운가!
그런데 인간은 날마다 악에게 불평하고 있다.
단 한 가지만 갖추면 이 세상은 천국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통곡의 소리 and 기쁨의 소리

바벨론 제국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지 어느덧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그 옛날 선지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을 신실하게 이행하셔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 다윗과 솔로몬의 왕좌가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그곳에 남아 있는 성전은 무너질 대로 무너지고 회파 될 대로 회파 되었으며 그렇게 70년 동안 그 누구도 관리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 돌무더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 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년 둘째 달에” 그들은 분명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이지만,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돌아왔다고 서술하지요. 왜냐하면 여전히 예루살렘에는 성전의 터가 남아있었고, 성전의 돌무더기가 그대로 내버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성전으로 기능을 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다시금 성전을 재건해야 했던 것입니다.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성전 재건을 주도했던 사람으로 스룹바벨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예루살렘에 그 옛날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을 ‘솔로몬 성전’이라고 부르고, 그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재건하였던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자,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하는 오늘 본문에서 함께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할 때 그 현장에는 두 가지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2절의 마지막을 다시 보십시오.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질렀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70년의 포로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고 다시금 고향 땅에 돌아오게 하셨다는 커다란 기쁨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독립을 쟁취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신앙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종교적인 자유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에 새로운 성전이 건축되니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들을 친히 만나주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가 이어질 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그리하여 성전이 재건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수많은 유대인들은 기쁨의 탄성을 내어 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12절에는 기쁨의 소리도 들렸지만 정반대의 소리도 매우 크게 들립니다.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특별히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 – 곧 솔로몬 성전 – 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합니다.’ 이들은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기 전 그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의 모습을 직접 목도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약 70년 전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전을 비롯한 모든 건축물이 다 불타는 장면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7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통곡하였습니다. 그들은 70년이 흐른 뒤 스룹바벨이 재건하는 성전이 그 옛날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었기에 그 장면을 바라보며 대성통곡합니다. 

그러니 한쪽에서는 백성들이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고, 동일한 장면을 바라보는 나이 지긋한 분들은 대성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소리, 곧 대성 통곡과 기쁨의 탄성이 어찌나 컸는지 그 장면을 오늘 본문 13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습니다. 그만큼 한쪽에서는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성통곡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를 성경은 어떻게 묘사합니까?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그 두 가지 소리를 조금만 멀리서 들으면 이 커다란 소리가 즐거움의 함성 소리인지 슬픔에 겨워 통곡하는 소리인지 도무지 분별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니던가요? 우리의 인생은 슬픔의 조각과 기쁨의 조각이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모자이크를 만들지요. 어떠한 조각은 기쁨의 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어떠한 조각은 통곡의 소리로 들립니다. 그렇게 기쁨의 조각과 슬픔의 조각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 우리의 인생일진대 한 개인의 삶을 그 누가 기쁨의 인생이라고, 혹은 슬픔의 인생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는 단 하나의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기쁨의 장면이고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는 통곡의 이유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등장하는 사건 중에는 과연 이것이 기쁨의 장면인지 혹은 슬픔의 장면인지 쉽게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식에 가면 기쁨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의 이유만 되던가요? 슬픔의 이유가 되지는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어느 가정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기쁨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의 소리만 들리던가요? 자녀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리고 나아가 통곡해야 했던 순간이 우리의 삶에는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젊은 청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우리는 기쁨으로 그들을 축하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직장이라도 우리에게 기쁨의 소리만 들려주는 곳은 이 세상에 아무 데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직장이라는 장소는 기쁨의 소리와 더불어 슬픔의 소리도 함께 들리는 공간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삶의 모든 일들은 그 안에 기쁨의 함성 소리도 들리고 동시에 슬픔과 통곡의 소리도 들립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것처럼 조금만 거리를 두고 들어 보면 이것이 슬픔의 소리인지 통곡의 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인 것입니다. 


감사의 찬양 소리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는 그 현장에는 기쁨의 함성 소리와 슬픔의 탄식 소리가 함께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는 바로 이 장면에는 기쁨의 소리와 통곡의 소리라는 두 가지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쪽 편에서는 기쁨의 탄성이 너무도 우렁찼고, 다른 한쪽에서는 슬픔의 통곡이 너무도 요란하여 사람들의 귓전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는 이 장면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었던 제 3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계속 이어지는 11절 앞부분을 우리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대다수의 백성들은 한편에서 기쁨의 탄성을 질렀고 다른 한편에서는 슬픔에 싸여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었지만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 찬양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찬양이었다고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불렀던 찬양의 가사 곧 그들이 노래했던 감사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삶 속에 기쁨의 소리는 더욱 커지고 통곡과 슬픔의 소리는 잦아들었기 때문입니까? 그들의 현실 속에서 기쁨의 요소는 더욱 풍성해지고 탄식과 슬픔의 이유는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기쁨의 소리와 함께 통곡과 슬픔의 소리도 크고 웅장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작은 소리였지만, 그리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소리였지만, 바로 그 장면에서 유유히 울려 퍼지는 찬양의 가사, 곧 감사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스룹바벨의 주도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바로 그 장면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찬양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찬양은 언제부터, 과연 언제부터 예루살렘 성전에 울려 퍼지고 있었을까요? 

자, 예루살렘에 역사상 처음으로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곧, 솔로몬 성전이지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시는 장면을 그려주는 여대하 5장은 바로 그때부터 예루살렘 성전 안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흘러나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역대하 5장 13절은 그 찬양의 가사가 무엇이었는지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여기에도 감사라는 단어가 등장하네요. 그러니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었을 때부터 예루살렘 성전에는 감사의 찬양이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역대하 5장 13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이제 찬양의 가사가 등장합니다. ‘주님은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은 영원히 있도다’ 이 찬양의 가사는 놀랍게도 오늘 본문 에스라 3장에서 들리는 감사의 찬양과 그 가사가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하고 영광스러운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 왕국의 흥망성쇠를 경험하지요. 급기야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을 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70년, 스룹바벨을 비롯하여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그 순간까지 예루살렘에서 펼쳐진 수많은 역사적 현장들은 기쁨의 조각과 슬픔과 통곡의 조각이 한데 어우러진 웅장한 모자이크였으며, 어떠한 조각은 그 자체가 기쁨의 조각인지 슬픔의 조각인지조차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진 인간 삶의 여러 단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시간들을 관통하여 솔로몬의 성전으로부터 스룹바벨의 성전에 이르기까지 그 500년에 걸친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유유히 흐르고 있었던 감사의 노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우리는 기쁨의 소식에 먼저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슬픔의 소식에 그 무엇보다 빨리 반응합니다. 그렇게 하루에도 수 없이 번갈아 가며 기쁨과 슬픔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서 정작 우리의 인생을 처음부터 선택하여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불러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하는 감사의 찬양 소리는 여전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잠시만이라도, 아주 잠시만이라도 여러분 마음에 가득 찬 슬픔과 통곡의 소리를 조금만 곁으로 밀어넣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혹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기쁨의 함성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하나님께 나와 예배하는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아주 잠시만이라도 여러분 마음에 있는 기쁨의 소리를 조금만 곁으로 옮겨놓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차피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그 모든 과정이 기쁨의 장면이었는지 슬픔의 장면이었는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기쁨과 슬픔의 그 순간순간마다 그리도 격렬하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귓전에 들리는 기쁨의 함성 소리를 조금만 잠재울 수 있다면, 여러분의 귓전에 들리는 슬픔의 통곡 소리를 조금만 곁으로 옮겨 놓을 수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비로소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이 세상에는 악보다는 선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았다.
새, 꽃, 태양, 공기, 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고, 향기로운가!

우찌무라 간조의 일기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날마다 악에게 불평하고 있다.
단 한 가지만 갖추면 이 세상은 천국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심과 그 영원한 인자하심을 날마다 우리에게 새롭게 부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며 살아간다면 제 아무리 시간이 흐를 지라도, 그 어떠한 사건이 우리를 휘몰아치더라도 여러분의 심령은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거룩한 성소가 되는 것이요, 여러분이 어디에 계시든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직장, 여러분의 삶의 자리는 천국을 변할 것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절기설교2020. 6. 12. 07:04
반응형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베드로전서는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전서의 시대적인 배경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가하는 사람이 나와 자주 만나지 않는 사람, 나와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극렬하게 반대하고, 기독교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이 지구상에 많이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그들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하루 우리가 살면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만날 가능성은 별로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을 반대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곁에 있고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나의 직장 상사가 기독교인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우리의 가정 안에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고 적대하시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의 삶이 매우 힘들어지는 것이지요. 


불신 남편에 대한 신앙인의 자세 

베드로전서를 읽는 성도들 중에는 자신의 가정 안에, 특별히 자신의 남편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극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믿는 않는 남편을 대하는 아내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오늘 본문은 아내들에게 명령합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남편이 늘 기도하는 사람이고 말씀에 근거하여 모든 일을 결정하는 사람이라면,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그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남편이 불신자이고 때로는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때에도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그 남편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합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그 이유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라 할지라도]” 아내의 말이 아니라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그 남편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가족 전도’가 가장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전도할 수 있어요. 그러나 가까이 지내는 사람, 특별히 가족에게는 복음을 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왜 가까운 사람에게는, 특별히 가족에게는 복음을 전하기 어려울까요? 우리의 입술로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만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복음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멀리 있는 사람들, 가끔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언어와 우리의 말만 듣게 되지만,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 특별히 우리의 가족들은 우리의 행동을 바라본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아내들에게, 특별히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입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입술로만 예수님을 전한다고 우리의 남편이나 우리의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행동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꾸미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다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을 보다 아름답게 다듬어 가는 노력으로부터 우리의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교회에 등록한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어요. 그가 자라난 가정도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청년에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주 가까이 지낸 친구가 있었는데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 친구는 자신의 삶으로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어요. 최근 우리 교회를 등록한 청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더라도 자신의 친구는 그 마음의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친구는 저에게 위로하고 힘이 되어 주었지요.’ 그렇게 약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작은 계기 하나에도 이 청년의 마음에 ‘나도 내 친구와 같이 신앙을 갖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기기 되었고 스스로 자원하여 가까이에 있는 우리 교회를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믿지 않는 남편과 여전히 순종하지 않는 자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의 남편과 우리의 아내와 우리의 자녀들이 변하기를 기도하기에 앞서 오늘 우리의 삶이 먼저 변화되기를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남편과 우리의 아내와 우리의 자녀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정결하게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변화된 마음과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교훈 

오늘 본문은 아내에게 주는 명령에 이어 남편들에게 주는 명령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7절입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믿는 아내라면 마땅히 그의 남편이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안든지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믿는 남편이라면 그의 아내가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내들에게 주는 권면과 동일하게 남편에게도 언어나 말이 아니라 삶으로,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라고 명령합니다. 나아가 단순한 한 두 가지의 행동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남편을 존경하고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7절에는 마음으로부터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7절을 다시 보시면,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리라” 이렇게 명령하고는 계속해서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나의 아내와 나의 남편이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믿음으로 살기 위해 노력을 하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믿음을 방해하는 박해자인지 상관 없이 나의 배우자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면, 제 아무리 우리의 가정 안에 믿지 않는 식구들이 많이 있을지라도 기도의 문이 닫히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반복되는 권면 

여러분, 때로는 여러분의 식구들이, 여러분의 배우자가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회방할지라도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십시오. 바로 그때 여러분의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하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불신자 남편, 불신자 아내, 불신자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악한 말과 악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나의 믿음과 나의 신앙을 방해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어떻게 할까요?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강조를 하여도 성도들이 악을 악으로 갚고, 믿지 않는 배우자와 식구들에게 악한 말과 행동을 할까봐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다시 한번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악에서 따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귀울이시되 주의 얼굴을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여러분, 비록 여러분의 믿음 생활과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장애물과 회방꾼들이 여러분 주변에 가득할지라도, 여러분은 악에서 떠나시고 선을 행하시며 무엇보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의 화평을 구하며 화평의 길을 따라가십시오. 

그리하면 12절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눈은 여러분을 향하시고, 하나님의 귀는 여러분의 간구와 기도에 기울여주십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셔서 우리의 모든 가정을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복된 가정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