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5. 3. 2. 14:51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 중의 하나는 단연코 금문교(Golden Gate Bridge)입니다. 샌프란시스코를 찾는 세계의 많은 여행객들이 금문교를 방문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금문교는 남쪽의 샌프란시스코 시내와 북쪽의 마린카운티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대부분의 관광버스는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카운티로 다리를 건너는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그 옆에 넓은 주자장과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장소에 정차합니다. 그런데 그곳은 금문교를 관람하기에 그다지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주차장이 넓고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편의시설도 있지만 눈으로 금문교를 관람하기에도, 사진을 찍기에도 그다지 좋은 전망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금문교를 조금 더 멋있게 내려다보며 좋은 사진을 남기고 싶다면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카운티로 올라가는 도로가 아니라, 그 반대의 방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북쪽 마린카운티에서 남쪽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달리다보면, 오른쪽에 조그마한 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빠져나와 언덕을 쭉 올라가면, 주차장이 매우 협소한 장소가 나옵니다. 거기에는 편의시설도 없고 화장실도 없습니다. 주차장도 매우 좁아서, 시간을 잘못 맞추면 주차할 때까지 30분 이상을 차 안에서 대기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언덕을 단 한번이라도 올라가본 사람은 다시는 금문교를 관람하기 위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길에 설치되어 있는 넓은 주차장으로 가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그 높은 언덕에 올라야 태평양의 바다와 샌프란시스코 시내,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금문교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방식이나 평소에 보았던 방식을 벗어나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가면, 지금까지 보았던 것이 완전히 새롭게 보이는 경우가 있지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것이 꼭 그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변형 (28-29절)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렇게 세 명의 제자들만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이전에 산 아래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얼마나 많이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날 산 위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알고 있던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29절) 

이 구절에서 “용모”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이 동일한 장면을 묘사하면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와 같이” 빛났다고 했으니, 이것은 비유입니다. 바로 그날 제자들이 보았던 예수님의 얼굴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웠는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 그저 “해와같이”라는 비유로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29절을 계속보시면, 예수님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기록하네요. 마가복음에는 이 장면을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인간의 언어로 다 묘사할 수 없었던 그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비유로 설명하는 장면이지요. 그러므로 제자들이 그날에 보았던 예수님 모습은 인간의 언어로 다 묘사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광스로운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장면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이 특별한 날에 산 위에서 ‘변형’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변형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영광의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온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며,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이 땅에 오실 때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사람들의 눈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이 잠시 감추어져 있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변화산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 위대한 영광이 잠시 잠깐 제자들의 눈에 드러난 사건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친밀하신 분이시지요.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시몬 베드로의 가정 집에도 들어가셔서 그 가정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시는 것처럼, 지금도 우리의 삶은 물론이요 우리의 각 가정을 찾아오셔서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시고 회복하여 주시는 분이시지요. 우리가 굶주리거나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이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없어 빈손으로 나아갈 때,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풍성과 충만으로 채워주시는 은혜의 주님이시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렇게 친근하고 친밀하게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태초부터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으로 온전히 가득한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우리와 늘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꿇어 경배해야 하는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별세 (30-31절) 

제자들이 산 위에 올라가니,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에 광채가 나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때 또 하나의 놀라운 사건이 겹쳐서 일어납니다. 곧, 구약 시대의 인물이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함께 등장합니다. 모세는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은 지금 펼쳐지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이 구약의 흐름, 곧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바 그 모든 말씀을 성취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대목은 그 다음입니다.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1절)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함께 대화를 하는데 그 대화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하네요. 이것은 누가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자,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게 될 것인데 그곳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변화산의 사건 후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신 뒤 다시 한번 자신의 수난과 고난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지체없이 나아가시는 것이 계속되는 누가복음의 흐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누가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그 출발점에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으로서 그 자신이 태초부터 가지고 계셨던 그 영광의 모습이 제자들에게 드러나는 변화산의 사건이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이러한 흐름은 교회의 절기인 교회력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산상변모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사건, 곧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 ‘산상’이지요 – 용모가 변화된 사건 – ‘변모’입니다 –, 그리하여 산상변모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리고 오는 수요일부터 주일을 제외한 40일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게 되지요. 이러한 교회력의 흐름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변모되신 사건 후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시는 누가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의 흐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순절을 지나며 우리 성도들은 마땅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목상하며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겉모습이 그렇게 영광스럽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밝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바로 지금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면서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지만, 나의 삶에 부활의 영광은 도대체 언제 찾아오는 것인지 기약이 없어 가슴 답답한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분은 안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있는 부활의 영광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이미 보여주신 변화산의 영광을 기억하십시오. 곧 여러분의 삶에 잠시나마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리하여 지금도 여러분의 인생에 주님의 영광을 비추시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는 우리 주님을 끝까지 믿으십시오. 비록 지금 나의 삶이 인생의 사순절을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영광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여러분의 삶을 붙잡고 계시니, 다시금 힘을 내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인내하십시오. 그 고난의 끝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Move Three. 그의 말을 들으라 (32-36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광의 주님으로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던 것같습니다. 32절에 이렇게 말씀하지요.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네, 그들은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33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을 금방 떠나고 말았네요. 그 시간이 너무도 짧아 베드로는 아쉬웠던 것같습니다.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에 그곳에 초막 셋을 지어서 주님을 모시고, 모세를 모시고, 엘리야를 모시자고 제안하잖아요. 그러나 베드로의 이와 같은 제안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33절 뒷부분입니다.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한 마디로 언급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었다는 평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영광의 장면이 짧게 끝나 아쉬워하는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5절)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목격하였으니 – 그 장면을 직접 보았으니 –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라는 명령입니다. 

성도 여러분, 변화산의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딱 한 번만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 이후에도 제자들 곁에 늘 함께 하셔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말씀을 가르쳐주시잖아요. 그러므로 변화산의 그 위대한 장면을 한번 보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더 크고 위대한 장면을 보여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따라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인 금문교의 진면목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도로 옆에 위치한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각종 편의시설도 있고, 주차장도 넓지만 금문교를 적당한 높이에서 내려다볼 수가 없어요. 그보다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다가 좁은 길을 타고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편의시설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주차공간도 비좁지만, 그 언덕을 오를 때 비로소 금문교의 참된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그 주변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던 저는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그 언덕을 참 많이 찾아 갔습니다. 타지에서의 유학생활이라는 것이 언제나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의 연속이었지만, 특별히 그날은 저희 부부에게 모든 계획과 기대와 소망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슬픔의 날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허탈한 마음으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금문교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을 올랐지요. 그리고 조그마한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한동안 아무 말없이 태평양을 바라보고, 금문교를 바라보고, 그 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갑자기 저의 눈에 너무도 멋진 무지개가 보이는 거예요. 구름 한 점 없는 캘리포니아의 맑은 하늘에 무지개라니 믿어지지가 않아 선글라스를 벗었다 썼다, 눈을 비볐다 떴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 아름다운 무지개가 분명하게 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랜 시간의 침묵을 깨고 제가 아내에게 말했죠. “여보, 무지개다” 그렇게 저희 부부는 구름 한 점 없는 캘리포니아의 하늘에 아름답게 떠 있던 무지개를 한동안 바라보다 그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금문교의 하늘에서 너무도 아름다웠던 무지개를 보았지만, 저희의 생활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매일 불안하고 앞날을 알 수 없는 유학 생활은 미국에 머무는 동안 지속되었고, 우리의 계획과 기대와 소망이 허무하게 무너졌던 경험은 그 이후로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금문교의 하늘에서 바라보았던 그 아름다운 무지개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에 남아 큰 위로가 되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외지에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 캘리포니아의 그 맑은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펼쳐 놓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의 경험 이후 지금까지 참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저희는 그날에 보았던 무지개를 다시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날의 무지개를 다시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 아름답게 빛나던 무지개가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날마다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펼치시는 주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진지하게 돌이켜본다면 여러분의 삶에도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신 변화산의 사건이 있지 않으셨나요? 오늘 본문의 사건처럼 거창하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시는 현장을 바라보았던 경험이 분명히 있지 않으셨나요? 우리의 삶에 고난과 수난의 날들이 가득한 것이 사실이지만 단 한 번이라도, 그것도 매우 짧은 순간이라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변화산 사건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만일 그렇다면, 비록 여러분의 삶에 인생의 사순절이 찾아왔다 할지라도 지금도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는 하나님을 확신하셔도 좋습니다. 

우리의 삶에 산상변모주일은 일년에 단 한주로 너무도 짧은 반면, 우리 인생의 사순절은 일년에 40일이나 되어 너무도 길고 모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에 있었던 변화산의 사건이 계속 의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목천의 모든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을 들려주시며 조금 더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응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님의 격려와 응원에 새 힘을 얻어 마침내 십자가의 길을 모두 통과한 뒤, 그 모든 과정을 되돌아볼 때 여러분의 전 생애는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깨닫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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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5. 1. 26. 17:07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장면을 함께 묵상하였습니다. 똑같은 가버나움 회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그곳을 방문하여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들의 마음에 귄위 있는 새 교훈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곳을 방문하여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니 병자가 치유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 자리에 실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모였습니다. 바로 이곳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주셔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 하나님의 권세 있는 새 교훈이 들리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모든 아픔과 질병을 치유하여 주셔서 모든 아픔과 괴로움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자리에 가득 임재하기를 바랍니다. 


Move One. 회당에서 가정으로

오늘 본문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그 사건 직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하지요. 본문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38a절)

여기에서 회당이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가버나움 회당입니다. 회당에서 모든 사역을 마치신 뒤,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어디로 가십니까? 시몬의 집, 시몬의 가정으로 들어가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주로 사역을 행하셨던 장소가 두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장소는 어디입니까? 모든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공식적인 예배의 장소인 회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에서만 사역하지 않으셨지요? 또 어디가 예수님의 사역 현장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잖아요. 곧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적 공간인 가정이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의 장소였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셨던 장소가 어디였다고요? 회당과 가정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꿔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어디라는 뜻입니까? 그 첫 번째 장소는 회당이요, 또한 각 사람의 가정이라는 뜻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장소인 바로 이곳 예배당에서도 예수님께서 친히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시면 안됩니다.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이제는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시고 들어가셔서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는데요.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그 현장을 참여했는데요. 그런데도 부족할까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는데, 그 주님을 우리의 가정으로 꼭 모셔와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신다면,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네, 반드시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도 모셔 들이셔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예수님의 은혜를 누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일상이 완벽하게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그 다음 말씀이 무엇입니까?)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38a절) 

여기에서 “열병”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의학 지식으로 설명하면 질병의 이름이 아니라, 온몸에 열이 심하게 오르는 증상을 말하지요.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그 증상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의학적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어쩌면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는 증상을 겪고 있으니 더욱 두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몬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날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을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신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다른 동네 사람들처럼, 시몬도 예수님의 권위 있는 새 교훈에 놀라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위대한 권세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회당 예배에서 큰 은혜를 받았지만, 아직도 시몬의 가정에는 큰 아픔이 여전히 진행 중에 있네요. 여전히 가정에 돌아오면 장모님이 중한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잖아요. 그러니 아무리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났어도, 예배당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있더라도 우리의 가정에 예수님을 모셔오지 않으면 나의 일상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변화되지 않은 그대로인 것입니다. 

시몬은 회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모셔옵니다. 그러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그 가정의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이었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39a절)

예수님께서 그 열병을 향해 꾸짖으시네요.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실 때도 귀신을 향해 꾸짖으셨습니다(막 1:25; 눅 4:35). 예수님은 회당에서 행하신 것과 동일하게, 이번에도 열병을 꾸짖으시며 그 여인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모습은 회당이나 시몬의 가정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세히 보면 회당과 시몬의 가정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존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39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가까이 서서.” 예수님께서 그 여인 곁에 매우 가깝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치유하여 주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능력은 저 멀리서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회당에서도 시몬의 부탁을 받아 예수님께서 그 장모의 치유를 선포하시면 그 여인은 그 즉시 치유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까이 가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시몬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셨잖아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녀의 질병을 치유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들인 시몬이 누린 은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시몬과 같이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우리의 가정으로 모실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지금 교회 예배당에 오셔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계시지요? 참 잘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에 돌아가셔서 가족들과 함께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계시지요. 참 잘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에 돌아가셔서도 말씀을 읽고 가족들과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십시오. 교회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듯,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순종하여 서로 봉사하고 섬기십시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일상이 변화되고,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되시기를 바라시나요? 그러면, 예수님을 예배당에서 만나는 것에서 만족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일상으로, 특별히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마다 아픔도 많고 고통도 많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도 많지요.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예수님을 모시고 여러분의 가정까지 들어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하셔야 여러분의 가정이 치유되고,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 깊숙이 들어가셔야 여러분의 가정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Move Two. 사명을 감당하는 가정

시몬은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회당에서 받은 은혜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모셨습니다. 그러자 그 가정의 가장 큰 아픔이었던 장모의 열병까지도 치유를 얻게 되었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치유의 결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본문 39절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그 다음에 어떻게 말씀합니까?)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9절)

시몬의 장모가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곧 일어나 무엇을 하였지요? 수종을 듭니다. 여기에서 ‘수종을 들었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보았을 단어, ‘디아코니아’의 동사 형태인 ‘디아코네오’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가 일곱 분의 집사님들을 세우지요. 이때 집사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 ‘deacon’이 동일한 헬라어 어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서 치유된 뒤 곧 일어나 예수님의 일행을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그녀가 이제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고, 나아가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 그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여 주시자, 그 여인이 예수님을 섬기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마치고 누가복음 5장으로 넘어가면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여러분,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이미 결혼을 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 장모가 등장하기도 하잖아요. 당연히 시몬 베드로에게는 아내도 있고 자녀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생업인 어부의 일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공생애 삼 년 동안 예수님만 따라다니며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 기간 시몬 베드로는 가정을 돌보지 못했겠지요. 만약, 가족들의 동의가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가 있었을까요? 시몬의 가족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을 동의해 주고 응원해 주기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그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의 가정으로 예수님을 모셔오잖아요. 그리하여 장모님을 비롯하여 온 식구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고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결과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먼저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되었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온전히 따라가는 일에도 온 가족이 동의하고 지지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이 어떠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이 여러분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께서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도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기만 한다면, 여러분 가정의 모든 아픔을 예수님께서 친히 치유하여 주시고 여러분 가정의 모든 고통을 예수님께서 친히 회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나아가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며 교회를 위한 귀한 일꾼들이 되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Move Three. 전도의 방식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오전에는 회당에서 사역을 하시고, 오후에는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지요. 그렇게 안식일 하루가 마쳤을 때, 가버나움 동네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오늘 본문 40절이 그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네요.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0절)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들은 아마도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유대인의 시간으로 해가 지면 안식일이 마칩니다. 회당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를 직접 보고 또 전해들은 동네 사람들이 – 어떠한 노동이나 일을 할 수 없는 –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기다렸다가 저녁이 되어 온갖 병자들을 다 데리고 예수님께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40절에서 눈의 띄는 표현이 두 가지있네요. 그 첫 번째는 “온갖 병자”입니다. ‘온갖’이라는 표현은 다양한 종류의 모든 환자들을 말하는 것이잖아요. 몸의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는 물론이고, 귀신이 들려 그 영혼이 피폐해진 사람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남자도 데려오고 여자도 데려왔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누구든지 온갖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께 다 데려왔습니다. 이때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표현이 있으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들 위에 손을 얹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시고 고쳐주시네요. 네, 그렇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든 어떠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예수님께 데려온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한 명 한 명 다 손을 데시며 고쳐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할 우리의 질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외면하시는 우리의 아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지 못하실 질병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밤에 온갖 병자에게 일일이 손을 얹으시고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특이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본문 41절을 보십시오. 귀신들이 쫓겨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귀신의 이 말은 그 내용만 놓고 본다면 옳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41절을 계속 보시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귀신이 소리지른 이야기가 그 내용은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들이 소리치는 것으로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 43절에 나옵니다. 본문 43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3절) 

지금까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습을 그대로 다른 동네에서도 행하시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로 표현하십니다.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신 방식,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그대로 똑같이 다른 곳에서도 행하여 복음을 전파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의 마지막 절인 44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44절)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전도하셨습니다. 어떻게 전도하셨을까요?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셨겠지요. 예수님께서 어찌 회당에서만 가르치셨을까요?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듯 갈릴리의 여러 마을을 다니며 많은 사람의 가정에도 들어가셨겠지요. 그리고 그곳에서도 말씀을 가르치시고 질병을 치유하여 주시며 그 가정을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바꾸어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자신에게 찾아오는 온갖 병자들을 그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다 영접하여 일일이 손을 얹으며 고쳐주셨겠지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만나 만나주시고, 한 가정 한 가정 직접 찾아가주시며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전도 역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섬김도 사랑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치는 것은 귀신이 선택하는 방식이고 예수님께서 금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전도의 방법은 그와는 정반대의 것이지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전도대상자를 여러분의 마음에 떠올리게 하셨다면, 먼저 그들을 진심으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외면하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치유하여 주시고 회복하여 주실 때, 전도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설 연휴를 맞이하는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 이제는 우리의 가정에도 모시고 싶지만 여전히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식구들로 말미암아 큰 기도의 제목이 있으신가요? 오랜만에 만나는 형제와 가족, 그리고 친척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이 먼저 다가가 사랑으로 섬기며 봉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여러분의 가정에 어떠한 아픔이 있더라도 모두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가족의 아픔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예수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이제 여러분의 가정에 들어가시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치유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회복됩니다. 나아가 모든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교회의 일꾼이 되는 복된 가정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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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4. 12. 29. 16:25

대나무의 성장은 다른 식물의 성장과 몇 가지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그 가지를 여러 방향으로 뻗는데 반하여, 대나무는 수직 방향으로만 성장을 하지요. 그리고 대나무의 또 다른 특징은 빠른 성장에 있을 것입니다. ‘우후죽순’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비가 내리고 나면 대나무 순이 매우 빠르게 성장하지요. 그런데 대나무가 수직으로 높이 자라면서도, 그것도 매우 빠르게 성장하면서도 거친 비바람에 구부러지거나 꺾이지 않는 이유는 그 마디에 있다고 합니다. 대나무는 일정한 높이로 자라면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추고 마디를 형성하는데 집중합니다. 그렇게 위로 올라가는 일을 멈추고 내부에 힘을 집중하여 마디를 형성하고 나면 성장의 튼튼한 기초가 형성되어 또다시 수직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성탄절을 보내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마지막 며칠을 보내며 새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탄절을 보내고 아직 새해를 맞이하지 않은 바로 지금, 대나무가 위를 향해 열심히 전진하다가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잠시 성장을 멈추고 하나의 마디를 형성하는 것처럼 잠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다시금 앞으로 나가기 위한 튼튼한 기초를 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오늘의 설교 제목 그대로,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머지않아 허락하실 2025년 새해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며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신앙의 기초가 쌓이는 오늘 송년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나온 과거 – 아픔과 은혜

오늘 본문은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전한 시점은 언제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뒤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었습니다. 그렇게 40년의 광야 생활이 거의 마칠 때쯤, 곧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었던 바로 그 시점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 강 동편을 점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워주셨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제 광야 생활이 청산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그들의 눈앞에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민족의 지도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잠깐만 과거를 되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해 보겠습니다.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21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여기에서 “네 아들”은 지금 신명기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다음 세대를 말합니다. 곧, 지금은 광야에서 생활하고 아직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네 아들” 곧 그들의 다음 세대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출생하게 될 첫번째 세대가 되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에서 펼쳐질 새로운 미래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부모의 세대와 달리 애굽에서의 생활 혹은 광야에서의 생활을 모두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힘차게 전진해야 할 세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일러주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옛적에” 지나온 과거를 반드시 회상해야 한다고 말씀하지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시는 새해를 소망 가운데 맞이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2025년 새해에 여러분에게 새로운 역사를 펼치시기를 원하십니까? 새해 2025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약속이 새로운 현실이 되어 나타나기를 기대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 있는데, 마치 대나무가 하늘을 향해 열심히 전진하다가 마디를 형성하기 위해 성장을 멈추고 그 내부로 힘을 집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새해 2025년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가기 전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며 두 가지 사실을 회상합니다. 그 첫번째가 무엇입니까?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솔직한 회상입니다. 우리가 옛적에는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어,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회상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과거에 대한 회상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모세는 바로 이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사건을 기억합니다. 본문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그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에 대한 기억이지요. 모세는 계속해서 본문 22절에서 출애굽의 과정을 보다 상세히 기억합니다.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22절)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있는 동안 바로의 종이 되어 비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큰 기적을 행하여 주셔서 그들을 애굽의 바로 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큰 구원을 행하여 주셨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하루 이틀 살아가는 것도 매우 힘겨운 일인데, 1년이나 2년도 아니고 40년을 살았으니 그 괴로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그런데 광야에서 보냈던 40년의 세월에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여 주셨으니, 먹을 것이 없어 주릴 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고 마실 물이 없어 목마를 때 반석에서 샘물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적군이 그들을 공격할 때 하나님은 친히 그 모든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이 두 가지를 기억합니다. 무엇입니까? 큰 고통의 시간들이 너무너무 많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꼭 필요한 은혜를 주셔서 지키고 보호하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2024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본다면 우리에게도 두 가지 사실을 회상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바로의 종으로 살았던 모습처럼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기진맥진하며 살아왔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지난 한해 동안 수많은 고비를 지나며 근근이 살아온 것이 과거에 대한 솔직한 회상이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질병이, 때로는 실패가, 때로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사로잡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를 회상할 때 우리는 또 한 가지를 기억할 수 있으니,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 모든 고비를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였음을 믿습니다. 


내일을 향한 비전

모세는 지난 과거를 돌아보니, 한편으로는 불행한 과거가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의 사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의 깨달음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곧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니 내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본문 2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23절)

모세가 가만히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니, 그 모든 사건과 시간 안에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뜻과 비전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뜻과 비전이 무엇입니까? 본문 23절이 이렇게 말씀하지요.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출애굽의 사건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사건입니다. 종으로 살던 그 고통의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은 출애굽의 사건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까? 본문 23절 말씀 그대로이지요.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곧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출애굽의 지난 역사를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돌보아 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마실 물이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샘물이 터지게 하셨지요. 이 모든 일은 그 자체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모진 광야 생활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돌보아주신 깊은 뜻과 비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3절의 말씀 그대로이지요.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세심하게 돌보아주신 하나님의 뜻은 마침내 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2024년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의 삶에도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으셨나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것 같은 고통이 우리에게도 있었고,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듯한 괴로움이 우리에게도 있었지만, 때마다 시마다 새 힘을 주고 용기를 주려고 무엇보다 피할 길을 주셔서 올해의 마지막 주일예배를 온 성도들과 함께 모여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은혜를 지금도 누리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만일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지기를 확신하셔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삶을 허락하셔서 애굽에서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지게 하셨던 것처럼,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삶을 허락하셔서 광야 40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새해 2025년은 지난 2024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역사로 가득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주가 지나 1월의 첫번째 주일이 되면, 또다시 창립기념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난 48년 동안 수많은 어려움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여 주셨고 필요한 은혜를 공급해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면서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이 교회를 지난 48년 동안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 출애굽의 역사를 넘어, 광야 40년의 시간을 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바로 그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새해의 표어 그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말씀과 경외

모세는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니, 고통의 불행한 역사 속에서 늘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지난 세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세어보자, 내일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내일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이 무엇입니까? 오래전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가나안 땅에 이제 곧 이스라엘이 들어가게 되리라는 비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벗어나고, 늘 궁핍에 시달렸던 광야를 벗어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안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삶이 펼쳐질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최고의 장소인 가나안 땅을 허락해 주시지만,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지만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축복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하나의 전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애굽에서든 광야에서도 심지어 가나안 땅에서도 이스라엘이 반드시 온 마음을 다하여 힘써야 했던 단 하나의 조건이었습니다. 바로 그 조건이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나와 있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24절)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온 마음을 다해 힘 써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지키며 순종하는 삶입니다. 본문 24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그 모든 규례를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을 늘 인식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가지 않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친히 가르치신 최고의 복된 길을 걸어가게 되어, 본문 24절의 말씀 그대로 “항상 복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새해 2025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예비하신 새로운 역사가 새해 2025년에 펼쳐지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일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오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힘쓰고 노력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힘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디에 있든지 나의 삶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그 말씀 한절이라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지요. 

우리는 이제 며칠 후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며, 2025년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말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임하셔서 우리가 순종하고 실천해야 하는 많은 말씀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용서와 화해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분들에게는 헌신과 봉사에 대한 말씀도 주시고, 또 어떤 분들에게는 위로와 용기의 말씀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모든 힘과 노력과 정성을 다 기울이십시오. 마침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 날에 하나님을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는 복된 삶이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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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3. 3. 29. 21:07

우리는 교회력으로 사순절을 보내고 있지요.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부활절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사순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여러분은 십자가에 대한 어떠한 교훈을 얻고 계십니까?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순절을 보내며 깊이 묵상해야 하는 십자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영국의 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던 중, 십자가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곳이다.” 십자가는 어떠한 장소입니까?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의 죄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인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십자가에서 처형한 인류 최악의 범죄가 펼쳐진 현장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야말로 우리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갔던 우리의 죄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십자가를 묵상하는 기간이요, 동시에 나의 죄악을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십자가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묘사해습니다. 그 첫 번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자, 레슬리 뉴비긴은 계속해서 십자가의 두 번째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그분의 은혜로운 용서의 대상임이 밝혀진 곳이다.” 십자가의 두 번째 의미는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께 용서와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는데, “이 기도에서 제외된 자는 하나도 없다”고 말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우리의 마음은 가장 먼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나의 죄악을 떠올리게 됩니다.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죄악에 얼룩져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로 내모는 나의 죄악을 깨달아 회개하게 되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침내 우리에게 또 다른 확신으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두 용서하셨다는 확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분명한 확신입니다. 


차별이 없느니라

사도행전 15장은 이른바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진지하게 의논하였다는 이야기인데, 초대 교회에 무엇인가 큰 이슈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문제가 얼마나 컸는지 사도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서 이 일을 의논할 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이른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다루었던 핵심 의제는 단 한 가지였는데, 그 내용이 사도행전 15장 1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행 15:1) 

유대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율법의 내용을 가르치는 것을 보면, 그들을 율법교사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형제들, 곧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이지요. 여기에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주제가 등장하네요.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태어난 지 팔 일이 지나면 할례를 받았거든요. 그러므로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던 대상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에게는 굳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은 이방인들에게, 태어나서 지금까지 할례를 받지 않았던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이 명령하는 할례를 꼭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도 예수님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였습니다. 그들이 할례에 대해 가르쳤던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였지요. 그러므로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복음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 복음의 진리를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담긴 복음의 의미가 무엇이라 말씀드렸지요? 첫째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 곧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만 있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누구에게 그렇게 가르칩니까?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율법과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고 있어요. 자신과 같은 유대인에게는 십자가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다른 이방인에게는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지요.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의 주장에 대해 베드로가 이렇게 반박합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9절)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우리’로 호칭하는 대상이 있고 ‘그들’이라고 지칭하는 대상이 있지요. 베드로가 ‘우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한평생을 살아가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그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곧 율법에 대해 모르고 그 율법을 준행하지도 않던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믿어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자, 그러면 본문 9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방인의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담대히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이나 우리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온 유대인이나 그 오랜 세월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왔던 이방인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그러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어떤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없을까요? 십자가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말씀드렸잖아요. 

첫째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이 죄인이지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 없이 살았지요. 그러니 그들이 죄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은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실천했기에 의인일까요? 과연 구약성경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순종하는 의인들이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주범이었다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죄인이요, 십자가 앞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두 가지로 말씀드렸지요. 그 두번째는 무엇입니까?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지요. 그렇습니다.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를 드리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이방인들 역시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왔지만 십자가의 은혜로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로,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 마지막절인 11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 (11절) 

여기에서도 우리와 그들이라는 대명사가 등장하네요.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우리는 유대인을 그들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본문 11절은 어떤 뜻이 되지요? ‘그들과 같은 이방인도, 우리와 같은 유대인도 아무런 차이 없이 동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의 믿음이었고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믿음이지요. 


십자가의 가르침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복음의 은혜를 나 자신에게는 너무도 쉽게 적용하지만 그 동일한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데는 너무도 인색한 것은 아닐까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학장이었던 필립 클레이턴이라는 신학자는 미국의 백인 중산층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가 놀랍다고 찬양하면서 자신의 크고 더러운 죄악은 눈과 같이 희어졌다고 믿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 – 예컨대 흑인이나 멕시칸이나 아시아인들 – 도 그들의 모든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눈과 같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은 믿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율법을 가르쳤던 유대 출신의 교사들이 범했던 오류, 미국의 백인 중산층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범하고 있는 이러한 오류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는 없다고 여러분은 자신하실 수 있으신가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십자가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가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십자가는 한평생 교회를 출석하며 충성으로 봉사하는 여러분들과 이제 막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한 새신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던 것과 동일하게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은 풍성한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 8:11b) 

사도 바울이 그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너희만이 아니라 그들도)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형제라 (고전 8:11b)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더욱 깊이, 그리고 더욱 넓게 깨닫는 은혜가 임하기를바랍니다. 지금까지 나를 구원하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였다면, 이번 사순절에는 내 곁에 있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십자가의 은총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 곁에 있는 형제와 이웃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존귀하게 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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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3. 3. 5. 16:40

우리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인간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해’(苦海)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요. 문자 그대로, 모든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탁월한 통찰입니다. 

우리가 마주치는 고통에 대해 사유해보면, 인생의 고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에게 왜 이러한 아픔이 찾아왔는지 그 이유도 모르겠고, 또 내가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결책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만일 원인도 정확히 알 수 있고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해법도 분명히 알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에게 고통이나 고난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나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요, 바로 그것이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고통과 고난의 또 다른 특징은 내 안에 깊이 숨겨진 부정적인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평안하고 안락할 때는 나의 부정적인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숨길 수 있습니다. 내 성격이 모가 나고 마음 깊은 곳에 상처가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숨길 수가 있지요. 내가 평안하다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고통이 찾아오고 아픔이 찾아오면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여유가 없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나에게 찾아온 아픔도 나를 괴롭히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모든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나니 그 또한 나를 괴롭히는 이유가 되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레 위에 지은 집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모레 위에 지은 집이나 평안할 때는 차이가 나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고통의 시기가 찾아오거든요. 비바람이 몰아치고 홍수가 일어날 때, 곧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 찾아왔을 때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든든합니다. 그러나 모레 위에 지은 집은 허물어집니다. 이처럼 홍수가 몰려올 때, 곧 고난의 시간이 찾아올 때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이 다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는 고난의 일반적인 특징을 한두 가지 말씀드렸는데요.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한 가지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고난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고통이나 아픔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찾아왔을 때만 그것이 나의 아픔과 나의 고통이 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아픔과 괴로움을 바라보며 공감해줄 수는 있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내가 직접 겪는 아픔을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아픔으로 느끼게 됩니다. 성경도 이점을 분명히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인 장면이 욥기입니다. 욥이 큰 고통을 당하였지요.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고 욥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욥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욥 자신의 고통은 어디까지나 욥 자신의 아픔일 뿐 친구들의 아픔은 아니라는 무섭도록 냉정한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영성가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헨리 나우웬은 “가장 치유하기 힘든 아픔은 나 자신의 상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는 언제나 치유책을 제시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정작 나에게 아픔이 찾아올 때만 우리는 진정으로 아파하고 괴로워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연합

우리의 경험도, 우리의 사유도, 그리고 동서고금을 박론한 인생의 지혜도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동일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은 지독하리만치 개인적이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이 모든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위대한 선언이 등장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25a절) 

지금까지 누누히 말씀드린 것처럼, 고통이나 고난은 언제나 나의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고통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픔은 예수님께서 친히 당하신 아픔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아픔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예수님께서 담당하신 고난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범죄 때문에 당하신 대속의 고난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이지요. 분명히 나는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도 내가 아닌데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나를 위한 고난이 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언어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이 정확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신비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신비를 설명할 수 없어 단지 이 신비를 표현하는 하나의 단어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전가’입니다. 나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그 죄가 예수님께 옮겨갔습니다. 전가되었지요.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지만 내가 지은 수많은 죄악이 예수님께 전가되었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 고난에 내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친히 달려 그 모든 죄의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입니다. 

자,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전가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뒤에 다시 살아나셨지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그 모든 공로와 은혜가 이제는 우리에게로 전가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5절)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대한 죄악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었고,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는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우리가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었고 천국의 시민이 되어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요,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범죄 때문에 내어줌이 되었다는 성경의 선언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말씀을 계속 읽다보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이 위대한 신비가 어떻게 가능한지 조금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여기에 예수님과 우리가 합한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예수님과 우리는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 예수님께서 포도나무가 되시고 우리는 그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분명히 다르지만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와 가지는 생사고락을 같이합니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 6장에서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졌다고 말씀하는 이유입니다. 로마서 6장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과 합해진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에도 합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결코 예수님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죽음이요, 곧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죽음이 되는 것이지요.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졌기 때문입니다. 자, 로마서 6장 3절은 우리와 예수님이 합하였기에 예수님의 고난이 곧 우리의 고난이 된다고 말씀하지요. 바로 이어지는 로마서 6장 4절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4) 

우리는 예수님과 합하였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지요.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로 합하였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와 그 나무의 가지가 하나로 묶여 있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도 곧 우리의 부활이 되어 우리는 지금도 새로운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고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보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나에게 참으로 의미있는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나에게 참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신비를 체험할 때, 마치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우리가 예수님께 온전히 붙들려 있음을 확신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사건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참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면 예수님과 하나되기를 추구하십시오.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가 되지 말고 예수님께 단단히 붙어있는 가지가 되십시오. 우리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그 주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사순절이 되십시오. 바로 그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나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가 되고, 바로 그때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세례와 성만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이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 되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은혜의 복음이 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듯이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가르치는 로마서 6장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과 합하여 하나가 되는 중요한 현장이 어디인지 말씀합니다. 로마서 6장 3절과 4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로 합하는 현장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세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과 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나를 위한 죽음이요, 나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 됩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 4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4)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 되어서 지금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과 합하였다는 증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한평생 세례를 한번 받지요.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되는 사건은 한번 일어나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이미 접붙여진 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였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그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현장은 어디일까요? 오늘도 우리가 행하게 되는 성만찬 예식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주님의 살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언약의 피를 받아, 그것을 먹고 마시며 우리는 다시금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성만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예수님과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었다는 연합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뱅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할 때마다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되는 이 신비를 체험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연합하는 그 신비를 간절히 원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이 있는 그 놀라운 신비를 체험하게 하여 주실 것이요, 바로 그때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를 얻고 예수님의 부활로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어지는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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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3. 2. 26. 17:41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제목을 말씀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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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80편 “믿음이 흔들릴 때”

기독교의 믿음을 설명하는 여러 비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은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사람이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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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80편 1-2절 “다시 주님을 기다립니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y Cartier-Bresson)이 있습니다. 그는 사진을 단수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의 경지로 이끌었다고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그의 예술 세계를 규정하는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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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이사야 9장 1-7절 “소망의 이유”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지요. 지금 나의 삶에 큰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오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참고 인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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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성탄절] 이사야 9장 6절 "성탄을 기다리며..."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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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누가복음 2장 8-20절 "성탄을 준비하셨습니까?"

오늘 대림절의 네 개 초가 모두 불이 밝혔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우리는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을 맞이하였고, 이제 며칠 지나지 않아 성탄절이 찾아오겠지요. 시간의 흐름은 어느 누구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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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요한복음 1장 1-14절 “영접하지 않는 세상, 영접하는 성도”

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든 일상이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지난 4월 부활절을 맞이하였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1차 대유행으로 우리의 예배는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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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마가복음 8장 11-13절 "내 생애 최고의 기적"

오늘은 여러분에게 성경 퀴즈를 하나 내면서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가리켜 ‘기적의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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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시편 97편 1절 “만백성 기뻐하여라”

메리 크리스마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의 충만한 기쁨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크리스마스 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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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주일] 신명기 6장 20-24절 “회상과 비전”

대나무의 성장은 다른 식물의 성장과 몇 가지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그 가지를 여러 방향으로 뻗는데 반하여, 대나무는 수직 방향으로만 성장을 하지요. 그리고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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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창세기 35장 1-7절 “야곱, 다시 출발선에 서다”

지구의 여러 나라들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다르기에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도 조금씩 차이가 나죠. 우리나라는 태평양의 서쪽에 위치해 있기에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매우 일찍 새해를 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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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여호수아 1장 “새롭게 출발하는 공동체”

몇 해 전 세례 교육을 하며 어느 성도님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어떤 계기로 세례를 받으려고 마음을 먹으셨나요? 어떻게 세례 문답을 신청하게 되셨습니까? 세례 교육을 받으러 교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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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스바냐 2장 1-3절 "카이로스의 시간을 준비하라"

헬라어로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는 “날이 지나고 해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입니다. 매년 음력으로 1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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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요한계시록 21장 5절 "만물을 새롭게"

한해를 마무리하며 새로운 한해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연말연시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오늘을 근거로 내일을 예측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죠. 그 중에서는 희망차고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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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요한계시록 21장 6절 "유한한 시간, 그러나 무한한 소망"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소의 제약을 받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시간의 제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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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수세주일] 마가복음 1장 9-13절/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

작년 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TV 드라마 가운데 이 있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도 작년 말 열심히 이 드라마를 챙겨 보신 분들이 적지 않게 계실 것으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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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변모주일] 마가복음 9장 2-8절 “보라, 그리고 들으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 중의 하나는 단연코 금문교(Golden Gate Bridge)입니다. 지금이야 코로나의 여파로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문화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와 그곳의 랜드마크인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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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시편 22편 “고난과 구원”

중세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안셀무스의 대표적인 저서가 (Cur Deur Homo?)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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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시편 32편 1-11절 “죄 용서의 축복”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안셀무스를 인용하는 것이 유익할 듯합니다. 안셀무스의 대표적인 저서는 (Cur Deur Homo?)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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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사도행전 15장 9-11절 “모두에게 동일한 십자가의 은혜”

우리는 교회력으로 사순절을 보내고 있지요.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부활절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사순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여러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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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로마서 4장 25절 “우리의 범죄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인간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해’(苦海)라는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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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시편 31편 5절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이야기할 때, ‘믿음’에는 3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요소란 지식, 동의, 신뢰입니다. 하나씩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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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마가복음 14장 32-42절 "겟세마네, 영혼의 고난"

예수님의 공생애는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히기 직전까지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조금 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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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마가복음 15장 1-15절 "누가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십자가 형을 언도 받은 장면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을 받는 오늘의 장면에서 매우 중요한 동사가 하나있습니다. 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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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마태복음 2장 19-23절 / 부활의 능력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과 불의와 약함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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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마태복음 28장 1-10절 "두려움과 큰 기쁨"

코로나19의 상황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 가운데 2020년 부활절은 많은 교회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부활절 예배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습니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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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마가복음 16장 1-8절 / 부활의 경험

언젠가 세례 교육을 받는 한 성도님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세례를 받으려고 결정하셨습니까? 그 성도님의 대답이 저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가 새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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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누가복음 24장 / 부활의 증인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모든 활동에 함께 했던 제자들도 이 사실을 믿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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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부활의 복음”

오늘은 온 교회가 함께 지키는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AD 2세기 고대교회 안에 부활절의 날짜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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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믿음의 가정" / 여호수아 24장 14-18절

이번 가정에 대한 시리즈 설교의 주제는 다섯 가지입니다. 믿음의 가정, 소망의 가정, 사랑의 가정, 축복의 가정, 그리고 행복의 가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 이와 같은 믿음과 소망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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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소망의 가정" / 사무엘상 1장 10-18절

오늘의 주제는 소망의 가정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많은 요소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언듯 보면 소망은 힘이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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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사랑의 가정" / 룻기 1장 15-21절

오늘 주제는 "사랑의 가정"입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지난 이틀에 걸쳐 함께 생각해본 믿음과 소망과 함께 기독교의 3대 덕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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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축복의 가정" / 요한삼서 2-4절

오늘 주제는 축복의 가정입니다. 구약성경 민수기 6장을 보면, 제사장의 축복문이 등장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제사장들은 민수기 6장에 등장하는 축복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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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행복의 가정" / 시편 128편 1-6절

오늘의 주제는 행복의 가정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앞에 등장하는 시편 127편과 함께 시편에서 가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시편 128편은 아름다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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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베드로전서 3장 1-12절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베드로전서는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전서의 시대적인 배경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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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느헤미야 1장 1-11절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면, 더욱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곤 합니다. 특별히 한반도의 국제 정세가 시시각각 변할수록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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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예배] 여호수아 22장 34절 “여호와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한반도에는 큰 전쟁의 소용돌이기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자료마다 숫자의 차이가 있지만,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국군의 숫자가 약 19만 4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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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에스라 3장 8-13절 “통곡과 기쁨, 그리고 감사”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 가운데 우찌무라 간조라는 분의 이름을 여러분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른바 ‘무교회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기에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호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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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골로새서 3장 15-17절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

우리의 귀에는 매 순간 많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그 모든 소리를 동등하게 처리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인지심리학에서는 ‘칵테일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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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데살로니가후서 1장 3-4절 “성장하는 믿음”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세쿼이아 국립공원은 규모가 작아 크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매우 멋진 공원입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제너럴셔먼트리’(General Sherman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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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14절 “마땅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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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가정예배] 출애굽기 40장 36-38절 "구름 기둥과 불 기둥"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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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가정예배] 로마서 12장 13절 "서로 주의하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로마서 14장 13절)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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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3. 2. 26. 16:57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안셀무스를 인용하는 것이 유익할 듯합니다. 안셀무스의 대표적인 저서는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r Homo?)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곧,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한다는 것이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단순히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고, 이제 너희 모두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만 하시면 될 것인데 왜 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그 모든 고통을 받아야 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안셀무스는 꽤 통쾌한 대답을 해줍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자신이 지고 있는 죄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숙고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죄가 너무도 심각하여, 하나님께서 그저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안셀무스의 표현대로 우리가 지고 있는 죄의 짐이 크고 무거웠던 만큼 예수님은 그토록 모진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성도들은 나의 모든 죄악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를 받았다는 감격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십자가의 은혜는 자신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크고 무거인지 진지하게 숙고해보지 못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언제라도 가볍게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 선언하면 모두 끝나는 일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 깊이를 충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의 첫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번째 단계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죄악을 깊이 되돌아보는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지 살펴보는 일이지요. 바로 그때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은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의 깊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죄 용서의 복

본문 시편 32편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시편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 시편을 인용하기 때문이지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본문을 인용하였던 이유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을 자격이 전혀 없지만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신 그 복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어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2절) 

다윗이 노래하는 신앙의 참된 축복이 무엇입니까?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를 용서받는 것, 나는 하나님 앞에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신앙의 참된 축복입니다. 

다윗은 구약시대의 인물인데, 구약 시대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는 길이 있었을까요? 구약의 율법에 따라 범죄한 모든 인간은 용서가 아니라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네,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율법도 죄를 저지른 인간이 하나님께 용서받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예를 들어, 가축을 끌고 와 그 머리에 안수하고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를 위한 속죄가 되게 하셨습니다(cf. 레 1:4). 신약 성경으로 넘어오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드려 우리 모든 성도들의 죄악을 모두 씻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 용서의 방법에 있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조금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도 그리고 신약성경도 한결같이 강조하는 바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은 바로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죄용서의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떠한 복을 받으셨습니까? 마음의 평안, 가정의 화목, 교우들과의 교제, 물질의 축복 등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축복을 받았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죄 사함의 축복입니다. 


입을 열지 아니할 때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죄 용서의 축복을 노래하는데, 자신의 경험을 통해 죄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선포합니다. 본문 3절부터 이제 다윗 자신의 경험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3절) 

여기에서 입을 열지 아니했다는 표현은 자신의 죄악을 하나님께 토설하며 회개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죄의식이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백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다윗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하루 종일 신음하였고 뼈가 쇠할 정도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다윗이 지금 묘사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크게 죄를 범하였지요. 곧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한 사건입니다.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번의 잘못이 지나간 사건으로 사라지지 않고 씨앗이 되어 원하지 않는 결과를 맺게 되었습니다. 곧, 시간이 조금 흐르자 밧세바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들립니다.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는 오랫동안 전쟁터에 나가있었습니다. 그러니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는 당연히 다윗 자신의 아이였지요. 그런데 다윗은 오늘 본문 3절의 표현 그대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윗은 명령을 내려 전쟁터에 있던 우리아를 왕궁으로 데려옵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전쟁에 대해 질문하는 듯하더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우리아에게 집에서 쉴 수 있도록 하룻밤 휴가를 줍니다. 다윗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는 분명히 다윗 자신의 아이입니다. 그런데 우리아에게 휴가를 주면서 그 아이를 다윗 자신의 아이가 아닌 우리아의 아이로 바꾸려는 시도였지요. 그런데 우리아는 그날 밤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덮으려는 다윗의 시도가 이렇게 실패합니다. 그때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본문 3절 그대로이지요.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3절)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다윗의 첫번째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전히 입을 열어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덮으려는 두 번째 시도를 하게 되지요.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명령하여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입니다. 그렇게 밧세바는 사별하였고 다윗은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이렇게 행동한 다윗의 의도는 또 무엇이었을까요?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마치 다윗과 밧세바의 합법적인 결혼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인 것처럼 꾸미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다윗의 두번째 계획은 성공하는 듯 보였습니다. 왕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권력을 이용하여 우리아를 처리하고 그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합법적인 혼인관계를 맺었으니, 이제는 그 누구도 이스라엘의 절대 권력자인 다윗 왕을 공개적으로 비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다윗의 죄악은 감추어지는 듯했지요.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감출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가 없잖아요. 다윗이 큰 죄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다윗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감히 나아가지 못합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4절) 

다윗은 하나님의 손이 주야로 자신을 짓누르고 계신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다윗의 영적인 상태는 한 마디로 무엇이었습니까? 메마름입니다(4절). 나의 죄악을 말하지 않고 깊이 숨겨두면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결코 감출 수 없으니 우리의 영혼은 메마름, 곧 영적 기근과 영적 고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영적인 침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어요.  몸에 큰 질병이 찾아온다거나, 삶의 환경이 급격히 변해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거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 침체를 겪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큰 죄악이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순식간에 바싹 메말라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그때 우리가 취해야 할 바른 자세는 나의 죄를 숨기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은 피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숨길 수 없기에 회개하지 않고는 우리의 영혼이 되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복할 때

다윗이 자신의 죄악을 숨기려 할 때 그의 영혼을 메말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죠.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그의 죄악을 드러내어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악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었을 다윗은 얼마나 큰 수치와 모욕을 느꼈을까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사람들 앞에서 수치와 모욕을 받더라도 회개할 수 있다면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5절) 

다윗이 자신의 모든 허물을 하나님께 다 자복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다윗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죄악이 그의 마음에 가득할 때는 하나님의 손이 주야로 그를 짓누르는 듯했습니다. 다윗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죄악이 그의 마음에 가득할 때는 그의 뼈가 쇠하고 그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서 그의 영혼이 바싹 메말라 버렸습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회개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시고 그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6a절) 

이 구절에서 “주를 만날 기회”라는 번역에 미주가 되어 있지요. 미주를 보면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다고 나와있습니까? “죄를 깨달을 때에 주께 기도할지라” 죄를 깨달았을 때에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할까요? 당연히 회개의 기도지요. 다윗은 계속해서 회개가 가져오는 놀라운 변화와 축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6절)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거대한 홍수를 마주치는 경우가 너무도 많지요. 그런데 나의 죄악을 하나님께 모두 회개하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나의 모든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홍수를 만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홍수가 그 사람을 삼키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막혔던 모든 담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홍수가 와도 두렵지 않고 홍수가 그 사람을 쓰러트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의 특권이지요.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7절) 

아니, 앞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짓눌러서 뼈가 쇠하고 진액이 빠져 몸과 마음이 완전히 메말라 버렸다면서요.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나의 은신처가 되어 모든 환난에서 자신을 보호하신다고 노래하네요. 그 사이에 어떠한 일이 있었지요? 딱 한 가지가 변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막혔던 모든 담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이 되니 이제는 환난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축복을 받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죄 용서의 축복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동행합니다. 인생의 수많은 환란이 찾아오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 용서의 축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회개라는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시작된 사순절 기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개하십시오. 우리의 회개가 깊어질수록 사순절을 보내며 누리는 십자가의 은혜는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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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2. 12. 25. 16:45

메리 크리스마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의 충만한 기쁨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많이 듣고 또 부릅니다. 캐럴이라는 단어는 전 세계적으로 성탄절 음악, 성탄절 찬양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어에서 기원한 캐럴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이 야외 축제 등에 참여하면서 함께 기쁨을 표현했던 노래를 가리키는 용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도 크리스마스 캐럴 중에는 기쁨, 그리고 즐거움을 표현한 음악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에도 성탄절의 기쁨을 노래하는 곡이 많지요. 예를 들어, 찬송가 117장 “만백성 기뻐하여라 하늘의 평화가 저 마귀 권세 이기고 우리를 구했네” 이 찬양의 마지막 후렴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 기쁘다 반가운 소식 주 오셨네” 어디 그뿐인가요? 성탄절이 되면 수없이 듣고 부르는 찬송가 115장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기쁘다 구주 오셨네” 크리스마스 캐럴만이 아닙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떻게 인사합니까? MERRY CHRISTMAS!! 기쁨의 성탄, 즐거운 성탄이라는 의미이지요. 이처럼 성탄절이 되면 우리는 인사를 통해, 그리고 노래를 통해 성탄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최고의 선물, 그것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메리 크리스마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수님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기 위해 먼 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시는 분이 어디에 계신지 알고 싶어 먼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대인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장 베들레헴으로 경로를 변경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을 인도하던 별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장소 바로 위에 머무르자, 그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장면을 마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 2:10) 

여러분, 동방의 박사들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어린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아직 30년이라는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이제 막 태어난 아기 예수님이고,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준비한 예물을 드린 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후 성경의 기록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혹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신 사역으로 말미암아 동방의 박사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유익이 주어졌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헤롯의 눈길을 피해 조심조심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지요. 이처럼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그 어떠한 유익도 얻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들이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성탄이 동방의 박사들에게 수여한 최고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Merry Christmas, 기쁜 성탄절, 즐거운 성탄절, 곧 성탄의 기쁨입니다. 

마태복음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했던 동방의 박사들을 소개한다면, 누가복음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였던 목자들을 소개합니다. 목자들은 동방의 박사들처럼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날도 목자들은 양 떼를 지키기 위해 밖에서 가축과 함께 지내고 있었지요. 바로 그때 어디선가 천사가 나타나 목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0) 

천사는 목자들에게 매우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인류의 구원자, 곧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입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그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서술하였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 2:21) 

여러분,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목자들의 입장에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유익을 가져다주었나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기까지는 아직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30년이 흐르는 동안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였던 목자들은 나이 많은 노인이 되거나 혹은 이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기쁨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바라보았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유익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지만, 그날 밤 예수님을 찾아온 목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Merry Christmas, 기쁨의 성탄, 즐거움의 성탄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나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이제 막 태어난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던 공생애는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사도 요한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공생애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탄생, 곧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6) 

사도 요한은 동방의 박사들이나 베들레헴의 목자들처럼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충만으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아기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바라보지는 못했지만 사도 요한에게도 하나님은 성탄의 위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Merry Christmas, 성탄의 기쁨과 성탄의 즐거움입니다.


만백성 기뻐하여라

본문 시편 97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시편 97편 1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하는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시인은 누구에게 기뻐하고 누구에게 즐거워하라고 초대합니까?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1b절) 땅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워하자고, 바다에 떠있는 섬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도 함께 기뻐하자고 초대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자손만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만백성이 함께 기뻐하자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기쁨은 먼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성탄의 기쁨과 즐거움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탄이 선사하는 크고 위대한 기쁨은 성도들의 기쁨을 넘어 만백성이 함께 즐거워하는 기쁨입니다. 

시편 97편 1절 말씀을 유심히 관찰하면 우리는 먼저 누가 기뻐해야 하는지 기쁨의 주체에 대해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쁨의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시편 97편 1절은 기쁨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1a절) 이것이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니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은 즐거워하고 바다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기뻐하자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을 때, 그리고 시내산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약 40년 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친히 다스려 주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에는 회막이 세워져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위에 구름과 불의 모양으로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회막에서 정해진 율법의 절차에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통치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모든 장면을 다 소개하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시편 97편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던 그때의 장면을 암시하는 대목이 여럿 등장합니다. 지금 시인이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라고 노래하며 만백성이 함께 기뻐해야 하는 이유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그들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기쁨의 감정만 일으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기쁨이라는 감정에 앞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시는 모습은 큰 두려움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막에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레위인, 레위인 중에서도 제사장이었던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으신 다른 불로 향을 피워드리다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잖아요. 이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 분향을 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악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절차상의 문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로 그 불로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제사장도 아닌 레위인, 레위인도 아닌 일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통치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97편은 무엇을 노래합니까?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한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백성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은 모든 이스라엘은 물론이요 나아가 만백성이 기뻐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물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이요 곧 우리의 왕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의 사건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의 이유가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나아가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우리 모든 성도들은 더 이상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나의 마음에 모시며 주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선포했던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 영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에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으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날 매우 크게 기뻐하고 또 기뻐하십시오. 지금 나의 삶에 성탄이 선사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유익이 보이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이날, Merry Christmas, 성탄의 기쁨과 성탄의 즐거움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기쁨의 성탄절을 맞이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Merry Christmas, 성탄의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 거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도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우리를 친히 다스려 주옵소서. 주님의 다스리심을 기뻐하였던 시인의 마음처럼, 예수님의 탄생을 지켜보며 기쁨으로 경배하였던 동방의 박사들과 베들레헴의 목자들처럼, 오늘 우리의 마음에도 성탄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득 채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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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2. 12. 18. 18:35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y Cartier-Bresson)이 있습니다. 그는 사진을 단수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의 경지로 이끌었다고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그의 예술 세계를 규정하는 개념은 ‘결정적 순간’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사진집이 1952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책의 제목이 바로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정적 순간>에 수록된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진은 <생 라자르 역 뒤에서, 파리 1932>라는 작품입니다. 이 사진을 잠시 보시겠습니까? 기차역 뒤에 물웅덩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남성이 그 웅덩이를 뛰어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물 위에 뛰어오른 남성의 모습이 그 아래의 물에 반사되어 서로 대조를 이루면서 매우 역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지요. 그리고 이 사진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대목은 물 위에 뛰어오른 남성의 발과 그 아래 물에 비췬 그림자의 발이 이제 막 부딪치려는 찰나! 바로 그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여 역동성과 함께 안정성을 한 장면에 담은 데 있습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 출간된 이후,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자신도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수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비밀이나 노하우가 무엇인지 계속 질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과정은 수수께끼와 같아서 자신도 잘 모른다고 말입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포착한 결정적 순간은 잘 짜인 각본에 맞춘 기획의 결과물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찾아온 운명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집에는 17세기 프랑스의 성직자였던 장 프랑수아 폴 드 곤디(Jean François Paul de Gondi)의 다음 문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결정적 순간이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There is nothing in this world that does not have a decisive moment) 

비록 평범해 보이는 사람과 사물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과 그들의 모든 인생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결정적 순간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시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 주셨던 결정적 순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향년 175세를 살았습니다. 오늘과 같이 의료기술이 크게 발달한 시대에도 175세이면 매우 장수한 것이지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았던 아브라함이지만, 그의 삶을 변화시켰던 한 순간, 곧 그의 삶을 완벽하게 변화시켰던 결정적 순간이 있었습니다. 언제입니까? 그의 나이 75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2b-3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십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그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바로 이것이 결정적 순간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을 만나 이렇게 질문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 당신은 75세 되는 그때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받는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였는데, 우리 성도들도 신앙의 결정적 순간을 체험할 수 있는 비결이나 노하우가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이러한 질문에 프랑스의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과 동일한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은 내가 계획한 것도 아니고 예상한 것도 아니고 마치 수수께끼처럼 알 수도 없고 예상하지도 못할 때 자신에게 찾아왔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앙에 찾아오는 결정적 순간입니다. 

성경, 특별히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은 아브라함과 같은 한 개인에게 일어나기도 하지만 민족 단위로 결정적 순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민족 단위로 결정적 순간이 찾아온 대표적인 예를 찾아본다면, 단연코 출애굽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던 세월은 자그마치 430년이었습니다. 430년이면, 나의 할아버지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나의 아버지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이제 나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세월이지요. 430년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내가 애굽에서 종으로 살뿐만 아니라 나의 아들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나의 손자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그 정도로 긴 세월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4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도 변함없이 세대가 세대를 이어 애굽의 종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연 그 약속에 대한 소망이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소망도 없고 희망도 없고, 그 무엇보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아무런 전망이나 기대도 없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결정적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의 사건이지요. 그리하여 출애굽 사건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프랑스의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이 결정적 사건과 대해 이야기한 내용과 동일합니다. 출애굽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스라엘 자손은 출애굽이라는 결정적 순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결정적 순간이 찾아오니, 실마리를 조금도 찾을 수 없었던 수수께끼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풀리듯 이스라엘 백성은 전혀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 결정적 순간은 우리가 계획하고 우리가 노력하고 우리가 열심히 준비한다고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면 바로 그때 나의 삶에 그리고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신앙 공동체에 결정적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사실을 믿기에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을 지금도 기다립니다. 카리티에 브레송이 인용했던 문장, 곧 17세기의 프랑스 성직자였던 장 프랑수아 곤디의 문장 그대로, “결정적 순간이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기다리라

본문 시편 80편에는 출애굽 사건에 대한 회상이 많이 드러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찾아온 결정적 순간을 찾아본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출애굽의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 시편 80편은 출애굽이라는 결정적 사건을 회상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1절) 

여기에 하나님을 묘사하는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하네요.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입니다. 지금 시인은 목자와 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살이하던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셨던 출애굽의 사건을 회상합니다. 그러면 1절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는 어떠한 의미일까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할 때 그들의 한 중앙에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법궤는 두 개의 그룹, 곧 천사의 모양이 조각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므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 본문 2절에도 등장합니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2절) 

여기에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지파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자리를 잡은 열두 지파의 정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진을 시작하면 열두 지파가 앞뒤로 하나의 긴 행렬을 만들어서 진행했습니다. 그러면 이때는 법궤가 어디에 위치했을까요? 앞에서 행진하는 여섯 개의 지파와 뒤에서 따라가는 여섯 개의 지파 그 사이에 법궤가 위치하였지요. 그리고 그 법궤를 중심으로 바로 뒤따라오는 지파가 오늘 본문 2절에 등장하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러니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라는 본문의 표현은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던 장면을 회상하는 기도입니다. 

이처럼 시편 80편은 1절부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빛나는 결정적 순간인 출애굽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은 나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마치 모든 사진사들이 포착하고 싶어서 사람과 사물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 순간에 셔터를 누를 수 있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는 바로 그 순간처럼 말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결정적 순간인 출애굽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드리는 기도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나의 삶을 변화시켜주신 결정적 순간을 회상하며 기도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되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출애굽의 사건을 회상하는 시편 80편은 감사와 찬송의 시가 아니라 간구와 탄식의 시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에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시편 80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받아 모든 국민이 제국의 각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한 사건이 본문의 시대적 배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80편은 나라가 멸망한 절망의 상태에서 출애굽이라는 과거의 결정적 순간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노래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결정적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을 한번 경험했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며 또다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이제 다시)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이제 다시) 빛을 비추소서 (1절)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이제 다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이제 다시)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2절) 


준비하고 기다리라

프랑스의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이 <결정적 순간>이라는 사진집을 출판한 후, 수많은 사진가들이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비법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때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은 마치 수수께끼 같아서 자신도 그 비법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지요. 그런데 그의 말년에 진행한 어느 인터뷰에서 카리티에 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결정적 순간은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렇게 덧붙였다고 합니다. “만약 사진을 잘못 찍었다면 그림을 그릴 때 지우개로 스케치를 쓱쓱 지우고 다시 그리듯 사진을 다시 찍으면 됩니다. 준비하고 기다리다 보면, 결정적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약성경이 묘사하는 최고의 결정적 순간을 꼽으라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출애굽의 사건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최고의 결정적 순간을 꼽으라면 우리는 주저 없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사건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림절을 보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우리에게 찾아온 최고의 결정적 순간, 곧 예수님의 성탄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찬양을 올려드리지요. 그런데 여러분, 대림절의 또 다른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다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미 나의 삶에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미 나의 삶에 친히 다가오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으니, 대림절을 보내는 우리는 다시 주님을 기다립니다. 어제는 결정적 순간을 놓쳐버린 사진작가가 오늘 또다시 찾아올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처럼. 오늘 스케치를 잘못 그린 화가가 새롭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결정적 순간은 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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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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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2. 12. 4. 17:12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제목을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 어느 집사님의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정의와 평화가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제가 재차 질문하였더니, 그분은 진심으로 우리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부탁하셨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국 교회 성도들은 언제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구한말 시작된 한국의 기독교는 일제의 탄압 아래에서 나라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민족의 해방 이후 남과 북으로 분단된 현실 속에서 한국 교회 성도들은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쉼 없이 기도하였습니다. 지난 반세기 대한민국이 민주화와 산업화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한국의 많은 성도들은 우리나라와 민족이 더욱 풍성한 삶을 살도록 기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흘러넘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도 쉬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주기도문의 한 대목이지요.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옵소서


제왕시

본문 시편 72편은 대표적인 제왕시입니다. 제왕시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을 높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시편을 말합니다. 우리는 시편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안에 인간 왕을 높이고 인간 왕을 위해 기도하는 시도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2편이 그 대표적인 제왕시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1절) 

여기에 “왕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그래서 학자들은 시편 72편이 왕이 새롭게 등극하였을 때 불렀던 노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72편에는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이 두 개 등장합니다. 시편 72편의 표제어가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마지막 20절은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고 말씀하지요. 그래서 다윗과 솔로몬의 이름을 감안하면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을 때, 다윗이 솔로몬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노래가 시편 72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제왕시와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시편에는 오늘 본문과 같이 이스라엘의 왕을 높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제왕시가 여럿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제왕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절대 권력을 소유한 왕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추구하지요. 이러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의 왕을 높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오늘 본문 시편 72편과 관련하여 한 가지 사실을 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2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문장, 특별히 대부분의 동사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 첫 번째는 간구와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합니다. 


간구와 기도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간구와 기도입니다. 본문 11절부터 보십시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11절) 

본문 11절은 간구와 기도로 해석할 수도 있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간구와 기도로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우리 왕 앞에 모든 왕들이 부복하게 하시고 모든 민족이 다 그분을 섬기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됩니다. 많은 학자들이 추론한 것처럼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할 때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 시편을 노래했다면, 그들의 노래는 솔로몬을 위한 중보기도였을 것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라는 기도였겠지요. 하나님께서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의 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스라엘이 차지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시편 72편을 ‘중보기도’라는 생각 하면서 본문을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게 해 주시고]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게 해 주시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게 해 주시고]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소서] (12-13절)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이스라엘 백성은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을 모두 차지하게 해 달라는 기도 했겠지요.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통해 힘이 없다고, 가난하다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왕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중보기도로 이해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이 땅의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고대 사회와 같이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지배하기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이 땅의 정치인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공의와 정의를 행하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해 주십시오] 

이 땅에 더 이상 어처구니없는 사고와 사건으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이 당에 더 이상 삶이 고달파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본문 14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게 하소서]

비록 이 땅에 억울한 희생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가 더욱 정의롭게 공의롭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들은 시편 72편을 따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

유대인들이 시편 72편을 처음 노래하였을 때, 그들의 노래는 주로 중보기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는 장면에서 많은 백성들이 솔로몬을 위해 기도하고 솔로몬이 공의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통치하기를 기도하였겠지요. 물론,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 가운데 응답해 주셔서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말년은 어땠습니까? 그는 우상 숭배에 빠졌고 공의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않았지요. 솔로몬의 과오는 이스라엘을 북 왕국과 남 왕국으로 분열시키고 말았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솔로몬의 뒤를 이어 남 유대의 많은 왕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마다 유대인들은 시편 72편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기도했겠지요. 주님의 공의로운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그 왕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는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남 유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쇠약해져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하는 처지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본문 시편 72편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유대인들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요? 물론, 시편 72편을 간구와 기도로만 이해한다면 그들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노래했던 시편 72편을 간구와 기도 외에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자, 예언이라는 관점에서 본문 1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실제로 한글 성경의 번역은 중보기도가 아니라 예언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기로다 (11절)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한 왕을 세워주십니다(요 19:19). 그리고 그의 앞에는 모든 왕들이 부복하고 모든 민족이 그 왕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왕은 한 나라의 왕이나 한 민족의 왕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왕 중의 왕, 곧 만왕의 왕이 되시지요. 본문은 그러한 왕을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리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예언의 말씀은 인류 역사에서 성취되었습니까? 성취되지 않았습니까? 신약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성취될 것입니다. 본문 11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예수 그리스도는]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는] 궁핍한 자의 생명을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구원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다시 한번 등장하네요)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12-14절) 

대림절을 보내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의 왕과 통치자들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온전히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불의와 거짓이 가득하지요. 새로운 정치인들이 등장할 때마다 그들에게 기대를 걸어보지만, 그 어느 인간 통치자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셨고,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모두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탄을 기억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대림절을 보내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15절) 


대림절 찬양

시편 72편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예언하고 있지요. 그래서 교회사를 보면 성도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기억하며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에 시편 72편을 자주 노래하곤 했습니다. 그러한 전통 가운데 하나는 17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이며 작곡가였던 아이작 와츠가 시편 72편을 기초로 작고한 찬양입니다. 그 찬양의 제목은 “Jesus shall reign”으로, 찬송가 138장 <햇빛을 받는 곳마다 주 예수 다스리시고>입니다. 이 찬양은 시편 72편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노래하지요. 그래서 햇빛을 받는 모든 곳이 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찬양의 가사를 살펴보면, 아이작 와츠는 시편 72편을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시편을 기도와 간구로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찬양의 2절 가사입니다. “주님을 찬양하면서 간절히 기도드리니 그 기도 향기 되어서 주 앞에 상달하도다” 아니,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시편 72편의 예언이 성취되었는데 왜 또다시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성탄으로 말미암아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지요.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그 완성의 모습도 그려주는데, 본문 16절과 17절입니다. 

산 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16-17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2000년 전에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고,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거하는 바로 그곳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도 시편 72편을 노래하면서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땅에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거짓과 불의가 가득합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기보다 자신의 유익만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 성도들에게 참된 소망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정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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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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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