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로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는 “날이 지나고 해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입니다. 매년 음력으로 1월 1일이 되면 설날이 찾아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 한 달이 지나면서 또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한 해가 찾아옵니다. 이처럼 사연스럽게 흘러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시간을 연대기적인 시간 ,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 특별히 오늘의 설교본문인 스바냐서에서는 연대기적인 시간과 구별되는 독특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헬라어 단어로 표현하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을 압도하는 시간”입니다. 한 해가 지나면 새로운 한 해가 온다는 연대기적인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때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압도하는 그때, 바로 그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들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시는 바로 그때, 다시 말해 카이로스의 시간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한해 한해 연대기적인 시간, 곧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은 연대기적인 시간을 살아가지만, 우리 크리스천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연대기적 크로노스의 시간 외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시간,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성취하시는 시간 곧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새해가 여러분에게 단지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다가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카이로스의 시간, 곧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위해 준비하신 위대한 사건이 여러분에게 임하는 새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지배하는 시대
오늘 본문 스바냐서는 바로 크로노스의 시대에 카이로스를 선포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스바냐서의 시간적인 배경을 소개하는 스바냐 1장 1절의 말씀을 함께 찾아서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이 짧은 한 구절의 말씀에 남 유다를 다스렸던 왕의 이름에 세명이나 등장합니다. 여러분 찾으셨습니까? 처음에 등장하는 왕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몬”입니다. 아몬이라는 이름 뒤에 ‘왕’이라는 표시가 없지만 요시야의 아버지 아몬은 남 유다의 왕이었습니다. 자, 그리고 아몬 이후에 또 다른 왕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누구입니까? “요시야”입니다. 그리고 스바냐 1장 1절에서 “요시야” 다음에 등장하는 남 유다를 다스렸던 어느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까? 스바냐는 누구의 현손이죠? 바로 “히스기야”입니다.
자, 다시 정리를 하죠.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를 밝혀주는 스바냐 1장 1절의 말씀에는 세 명의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시간대로 정리하면, 히스기야, 아몬, 요시야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히스기야와 아몬 사이에 한 명의 왕이 더 있는데, 그의 이름은 므낫세입니다. 다시 말해, 스바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은 남 유다를 네 명의 왕이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곧,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그리고 요시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임재가 눈에 띄지 않는 크로노스의 시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네 명의 왕 가운데 두 명의 왕은 선한 왕으로 평가를 받는 왕입니다. 곧 히스기야와 요시야입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히스기야와 요시아 사이에 놓여있는 므낫세와 아몬은 성경에서 악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선한 왕의 시대와 악한 왕의 시대, 하나님을 섬기는 왕과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왕의 시대가 서로 섞여 있는 시대입니다. 어떤 왕은 집권해서 우상을 섬기게 합니다. 어떤 왕은 집권해서 우상을 파괴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게 합니다.
우상을 섬기게 하든 하나님을 섬기게 하든, 한 나라 전체가 왕의 영향력 아래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든 이방 우상을 함께 섬기든 사람들의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손길은 보이지가 않더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지금 당장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우상을 섬기면 지금 당장 나라가 망해야 할 거 같은데 그렇지도 않아요. 지금 당장 모든 이방의 우상을 제거하고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섰으면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축복이 막 눈에 보여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변화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연대기적인 시간이 지나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왕도 바뀌고 국가의 권력을 뒤흔드는 사람들도 바뀝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리 연대기적인 시간이 흘를 지라도, 아무리 크로노스의 시간이 흘러도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대로 선을 행합니다. 제 아무리 연대기적인 시간이 흘러도 실제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우리 시대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의 고민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어렵게 만드는 올무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지요. 왜 하나님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으실까요?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여주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연대기적인 시간이 제 아무리 흘러도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만같습니다. 새해 좋은 일이 많을 것이라고 덕담을 나누어보지만, 경제는 위축되고 정치는 변화가 없으며 우리네 삶은 크게 변화가 없으리라는 낙심이 우리 사이에 퍼져있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또 다른 해가 찾아왔지만 새로운 희망이 없고 새로운 기대가 없습니다.
스바냐서의 핵심 주제: 여호와의 날
바로 이때, 사람들이 연대기적인 시간만을 살아갈 뿐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고 있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카이로스의 시간이 가까이 왔다고, 사람들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바로 그 하나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스바냐서의 핵심 주제가 바로 ‘여호와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스뱌나 1장 7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잠잠하라고 명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사람들이 예측할 수 있고, 사람들이 익숙한 연대기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곧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카이로스적인 시간이 곧 임할 것이기에 연대기적인 시간만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침묵하라고, 잠잠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스바냐 1장 14절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습니다. 가깝고도 빠릅니다. 여호와의 날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 곧 여호와의 날이 가깝게 다가왔으니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울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임하면 이 세상에서 힘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 용사들, 권력자들,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한다는 사람들은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죠? 하나님의 때가 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 찬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하면 인간의 계획인 인간의 노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1장 18절의 상반절만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의 분노의 날,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바로 그 날이 임하면 제 아무리 강한 힘을 갖춘 용사라도, 제 아무리 “은과 금”을 그득히 쌓아놓은 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심판의 날, 곧 여호와의 날을 피해 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로 그 날, 곧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그때까지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쌓아놓은 권세와 부귀가 모두 무력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히스기야가 남유다를 다스리던 시기부터, 요시야 왕이 다스리던 때까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는데 도무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용사와 같이 힘이 있는 사람들 권력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쥐고 있는 힘과 권력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금과 은이 풍성한 부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변하지 않는 신뢰가 아니라 자신의 재력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연대기적인 시간만을 살아가고 있었기에 어제와 오늘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올해가 지나고 내년이 되어도 힘이 있는 장수들과 용사들은 여전히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금이나 은이 풍성한 부자들은 오늘이든 내일이든 변함없이 풍족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는 반드시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인간을 압도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하나님의 때, 여호와의 날을 선언한 이후, 다시 말해 남 유다를 다스리던 요시야 왕의 사망한 지 30년도 되지 않아서 남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 성은 앗수르의 뒤를 이어 전오리엔트 지역을 지배하게 되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시간에 바벨론 제국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무너트리니 그동안 은과 금을 풍성하게 쌓아놓고 재력으로 살아가던 사람들도 견디지를 못합니다. 자신이 가진 힘과 권세로 세상을 호령하던 용사들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여호와의 날, 곧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하자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몸 하나 지킬 수가 없었던 거지요. 이것이 바로 스바냐 선지자가 선언했던 여호와의 날, 곧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살아갑니다. 연대기적 시간만을 살아갑니다. 한 해가 지나면 새로운 한 해가 찾아오는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와 같은 시간의 흐름이 한없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바로 그때,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고 믿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건 믿지 않는 사람들이건 상관없이 세계 역사의 주관자 되시며 세상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기 통치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다리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분 개인의 인생 시간표에 여러분의 각 가정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독특한 시간표를 가지고 계십니다. 바로 그때가 이르면, 때가 차면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이 여러분을 압도하는 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새해를 축하하며 기념하는 오늘, 매년 찾아오는 날짜의 반복을 넘어 여러분의 삶을 주관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때, 인류의 역사를 종결하고 하나님의 공의로 모든 만물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날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카이로스를 위한 준비
스바냐 선지자는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살아가는 남유다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날’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려줍니다. 스바냐 2장 1절에서 3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작성하신 바로 그 때가 임하기 전에,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3절에 이렇게 말씀하지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호와의 날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크로노스적인 시간에서는, 연대기적인 시간에서는 그저 한해 한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는 은과 금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힘을 길러 용사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인간을 압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하면 인간이 모아두었던 은과 금은 아무짝에도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갖추어놓았던 힘과 권세는 더 이상 필요치가 않아요. 그 대신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 겸손하게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여호와의 날에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여호와의 날,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게 나타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구하고 겸신히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바냐 3장 17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의 이 기쁨은 모든 유대인들을 향한 기쁨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기쁨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기쁨은 연대기적인 시간, 한 해가 흐르고 또 다른 한 해를 맞이하는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쁨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기쁨은 연대기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나타는 여호와의 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겸손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더 없는 기쁨입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한 해동안 하나님의 기쁨의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새로운 한 해동안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넘어 하나님의 섭리가 온전히 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십시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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