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2021. 1. 29.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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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란 누구인가? 

예언자라고 하면, 흔히 미래를 점치는 사람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는 그러한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하나님의 대언자’이다. 예언서를 읽다 보면, ‘사자언체’(messenger style)가 많이 등장한다. 사자언체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와 같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표현을 말하는데, 이러한 사자언체는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출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율법에 그 기초와 근거를 둔다. 그런 점에서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였던 모세도 예언자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신명기 18장 18절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모세가 선지자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백성에게 전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자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히브리어 성경의 분류법이 기독교의 구약성경과 다르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구약성경은 율법서, 역사서, 성문서, 예언서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지만, ‘타낙’이라 불리는 유대인들의 성경은 율법서(토라), 예언서(느비임), 성문서(케투빔)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는 기독교인들이 역사서로 부르는 책들이 타낙에서는 예언서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과거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가 유대교 전통에서는 예언서다. 그 이유는 예언이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며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므리 왕조 시대(아합과 이세벨)의 예언자 _ 엘리야와 엘리사 

구약성경은 남 유다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멸망한 이후에도 남 유다는 약 150년 이상 존속하였다. 남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지만 70년 뒤에 그들은 예루살렘에 귀환하였고,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재건하였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역사가 남 유다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에 위대한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셨다. 

구약성경에서 위대한 선지자의 표상으로 등장하는 엘리야도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다. 엘리야의 시대적 배경을 열왕기상은 이렇게 서술한다.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열왕기상 16장 29-34절)

북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아합 왕과 왕후 이세벨은 온 나라가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게 만들었다. 기원전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의 유물 가운데 ‘쿤틸렛 아즈루드’(Kuntillet Ajrud)와 ‘키르벳 엘 콤’(Khirbet el Qom)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있다. “사마리아의 여호와와 그의 아세라로 너를 축복하노라”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데, 위의 문구에서는 북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와 아세라 우상이 부부 관계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만큼 북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앙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엘리야 선지자와 관련된 사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갈멜산에서의 대결이다. 엘리야는 홀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상대하였다. 이 대결에서 하나님은 엘리야가 쌓은 제단에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주셔서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온 백성에게 선언하셨다. 이처럼 갈멜산에서의 사건은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였지만, 갈멜산에서의 승리 뒤에도 북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으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남겨진 사역을 위하여 엘리야의 후계자로 엘리사가 세워진다. 


예후 왕조 시대(여로보암 2세)의 예언자 _ 아모스, 호세아, 요나 

시간은 더욱 흘러 북 이스라엘은 이제 예후 왕조의 네 번째 왕인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은 변함이 없었고, 하나님은 또다시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파송하신다. 

아모스 선지자가 여로보암 2세 때에 활동했던 선지자였다. 그런데 아모스 1장 1절에는 그를 소개하면서 “드고아 목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드고아 지역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 이스라엘이 아닌 남 유다에 속했다. 뿐만 아니라 아모스의 직업은 목자였다. 한마디로,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의 예언자 그룹이 아니었다. 그는 남 유다에 거주하던 목자였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북 이스라엘로 올라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실로 통렬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모스 4장 4-5절) 

벧엘과 길갈은 당시 유명한 성소가 있던 곳이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아모스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고 조롱한다. 벧엘의 성소에서 어떠한 죄를 범하라는 것인가? 희생 제물과 십일조를 드리며 수은제와 낙헌제를 드리는 것이 아모스가 지적하는 죄의 내용이다. 아모스 선지자가 이처럼 독설을 내뱉는 이유, 곧 벧엘에서 드리는 제사까지도 이스라엘의 죄악이 되는 이유는 이스라엘에 팽배한 사회적 불의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아모스 2장 6-7절) 

아모스 선지자의 언어는 이처럼 매서웠지만 그 안에도 희망은 담겨있었다. 다만, 북 이스라엘이 불의를 버리고 공의를 따라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아모스 5장 14-15절) 

호세아 역시 북이스라엘에서 여로보암2세 때 활동했던 예언자이다. 아모스서가 주로 사회적 불의를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지적했다면, 호세아는 그들의 종교적 타락을 질타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타락을 꼬집는 방식은 독특했다. 부정한 여인 고멜과의 결혼이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호세아 1장 2절)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 사이에서 자녀를 낳았다. 고멜이 낳은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의미고, 고멜이 낳은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로 ‘내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다. 호세아는 선지자의 역할을 위해 이토록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호세아의 결혼 생활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떠나 우상을 숭배하였던 이스라엘의 죄악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아픔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음녀와 같은 이스라엘, 과연 그들의 종교적 타락은 어디서부터 회복이 가능할까? 호세아는 그 시작점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세아 3장 1절) 

고멜의 음행이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을 보여준다면, 그녀를 끝까지 품었던 호세아의 사랑은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여로보암 2세때 활동하였던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는 아모스와 호세아 외에도 요나가 있다. 요나서에는 그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내용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열왕기하에는 그가 활동했던 시기와 선포했던 메시지를 기록해두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열왕기하 14장 25절)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약 성경의 전반적인 역사 흐름은 남 유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성경이 묘사하는 북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상숭배로 점철되어 있으며 불의가 가득한 역사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악은 결국 앗수르에 의한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이러한 흐름을 알고 있지만, 죄악으로 치닫는 북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도 기억해야 한다. 곧, 그들이 우상숭배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위대한 예언자들, 곧 엘리야와 엘리사, 아모세와 호세아와 요나를 북 이스라엘에 파송하셨다. 그리고 심지어 니느웨 성에 요나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셨다. 비록 구원 역사의 흐름이 유다를 중심으로 흘러갔을지라도,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나아가 이방민족 니느웨도 긍휼히 여기셨다. 이것이 북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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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