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2021. 10. 1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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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 인간의 이성과 언어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조차 없는 이 난해한 가르침을 기독교가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육신이 아니면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야 한다면, 그래서 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 우리가 찾아 올라가야 한다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날 기대와 소망을 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다는 성육신의 진리를 믿는다면 비로소 하나님과 만나 교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열리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성육신의 가르침은 오는 것과 가는 것의 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오라”고 요청하시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인간을 찾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성육신의 가르침입니다. 

교회에서 행사는 여러 전도와 선교 역시 오는 것과 가는 것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전도와 선교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오라”고 요청합니다. 우리 교회가 전도 집회를 준비하고, 우리 교회가 전도 행사를 준비하고, 우리 교회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프로그램을 준비하였으니 많이 오셔서 많이 참석하시라고 요청합니다. 이 모든 활동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때로는 마케팅의 원리를 사용하기도 하고 기업이 상품을 홍보하듯 전단지나 홍보물을 제작하여 배포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이 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에 있어 더욱 중요한 원리는 성육신의 원리입니다. 한 마디로, 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 가는 것입니다.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갑니다. “오라”고 요청하기에 앞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나눕니다. 바로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를 따르는 전도와 선교의 방식입니다. 코로나 시대,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이 제약을 받는다고 아쉬워합니다. 코로나 이전에 성도들이 따닥따닥 붙어 앉아 예배했던 모습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믿는 성육신의 가르침에 따라면 우리가 더욱 안타까워해야 할 또 하나의 영역이 있습니다. 곧,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분들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 섬김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장 45절은 마가복음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마가복음의 핵심 문장입니다. 이 구절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인자가 온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곧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곧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목적, 그 첫번째는 무엇입니까? 섬김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마가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크게 두 구분으로 구분하는 여러 기준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지역입니다. 마가복음의 앞부분, 구체적으로 마가복음 1장부터 8장까지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지역은 이스라엘의 변방 갈릴리입니다. 이른바 소외계층, 빈곤층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첫 번째 이유로 등장하는 섬김은 마가복음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해줍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을 섬기셨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셨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변방인 갈릴리 지역에서 몸이 병든 환우들을 섬기셨고, 귀신 들려 괴로워하는 이들을 섬기셨고,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돌보시며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섬기신 수많은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한 대목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 첫번째 청중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군중이었어요. 당시는 마이크 시설도 없고 음향시설도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목소리를 높여서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가르치셨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해주셨지만,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그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곤 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군중을 피해 제자들과 있을 때에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그 비유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군중을 상대로 말씀을 전하시고, 또한 제자들과 만나 그 말씀을 보다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신 바로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해가 지고 하루의 일과를 마감해야 할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셨던 예수님도 피곤하셨겠지만, 예수님을 곁에서 수행하였던 제자들도 이제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쉬어야겠다고 생각했겠지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갈릴리 바다에 배를 띄워라. 지금 바로 갈릴리 바다 반대편으로 가야 되겠다.” 제자들은 그 밤에 왜 갈릴리의 반대편으로 건너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배를 타고 반대편으로 항해를 합니다. 갈릴리의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그 길에서 제자들은 큰 광풍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아둥바둥하고 있는데, 여러분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배에서 주무시고 계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 시간은 취침해야 하는 한 밤중이었어요. 큰 광풍에 배 안이 온통 바닷물로 가득한 순간에도 깊이 주무셔야 했던 밤시간이었다고요. 제자들이 다급히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바다와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참된 믿음에 대해 교훈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도착했던 곳은 다름 아닌 거라사인의 땅이었습니다. 바로 거기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한 명 있었거든요. 

이른바 ‘거라사의 광인’으로 알려진 그 한 사람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은 그 밤에 배를 타고 풍랑이 치는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셔야 했던 사람도 많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셔야 했던 사람도 많았으며, 예수님께서 봉사하며 섬겨야 할 사람이 언제나 예수님의 주변에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만큼은 풍랑을 헤치면서까지 거라사인의 땅을 찾아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러운 귀신 들린 그 한 사람을 섬기시기 위해, 그 한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 한 사람을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구해주시기 위해 찾아가셨어요. 바로 이것이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지역에서 갈릴리 바다 맞은 편에 위치한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을 향해 치유를 선포하실 수는 없으셨을까요?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그 밤에 굳이 풍랑을 맞으면서까지 갈릴리를 건널 필요가 없잖아요.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말씀 한 마디로 그 모든 귀신을 쫓아내실 수 있으시잖아요. 굳이 바다를 건너가시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을 보내어 그것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알려주실 수도 있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성육신의 원리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실 것이면, 굳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지요. 저 하늘 보좌 우편에서도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우리의 모든 약함을 치유하실 수 있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믿고 우리가 사랑하여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는 예수님은 저 멀리 하늘 보좌 우편에서 능력으로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요, 그 밤에 갈릴리를 건너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을 찾아가신 분이요,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사랑으로 섬기며 봉사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 대속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장 45절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신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찾아오신 성육신의 이유와 목적을 말씀해주시지요. 그 두번째 목적은 “대속”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우리가 묵상하는 마가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마가복음을 두 부분으로 구분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지역입니다. 마가복음의 앞부분, 곧 마가복음 1장부터 8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사역은 오늘 본문 10장 45절에 등장하는 하나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데, 바로 ‘섬김’이지요. 자, 이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변방이었던 갈릴리를 떠나 이스라엘의 중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마가복음의 후반부, 보다 구체적으로 마가복음 8장 이후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과정과 그곳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오늘 본문 10장 45절에 등장하는 하나의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대속’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이유는 그곳에서 영광을 받으려 함도 아니요,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기 위함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고 박해를 받고 마침내 죽음을 당하기 위해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연이어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 10장 45절은 예수님의 죽음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매우 명확하게 선언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러분, 대속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범죄한 것은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저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랑과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내가 스스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보라고,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고, 내가 뭐 그리 큰 잘못을 지었느냐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간에 대한 공정한 판단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내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악은 너무도 크고 너무도 무겁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때 대속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기에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인간들을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을 보면 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 곧 구원자는 대속의 고난을 당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4) 

사람들은 메시아의 고난을 지켜보면서도 그것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오해일 뿐, 인류의 구원자가 고난을 받는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대속의 고난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6) 

구약성경의 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막 10:45)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봉사요,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너희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지요. 섬김과 대속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시기 위하여 오셨지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대속과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비그리스도인들이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언급하기도 하시거든요.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막 10:42)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먼저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섬김에 대해 모릅니다. 그들은 주님의 대속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목표는 다른 사람을 임의로 주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은혜를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막 10:43a) 예수님의 이 말씀을 조금 더 분명한 표현으로 바꾸어 볼까요? “너희는 그들과 다르다.” “너희는 그들과 달라야 한다.” “너희는 그들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재물의 힘과 권세의 힘과 사회적 지위의 힘을 총동원하여 다른 사람을 임의로 다스리려고 합니다. 권세를 부리려 하고, 서로 다른 사람 위에 올라가 섬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나는,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일까요? 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을 받았잖아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받았잖아요.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았잖아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듣고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하는 삶의 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것과 전혀 달라야 합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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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