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2021. 4. 2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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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에 첫째 아이가 태어난 뒤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처음으로 병원 문을 나왔을 때 느꼈던 저의 감정은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저의 마음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분명 아이를 안고 있었지만 무게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포근한 느낌만 전해졌지요. 3kg이 조금 넘는 조그마한 생명은 무게가 아니라 감촉이었습니다. 그렇게 첫째 아이를 안고 업는 일은 아빠인 저에게 행복이라는 촉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아이는 저에게 더 이상 촉감이 아니라 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어린 아들은 아빠가 예전처럼 자기를 번쩍 안아주고 업어주기를 원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아들을 번쩍 안거나 업고 다니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더라고요. 지금은 그저 서 있는 아들을 안아줄 뿐이지 예전처럼 번쩍 안거나 업고 다니는 일은 없습니다. 언젠가 제 아들이 자기의 등을 나에게 향하고 쪼그려 앉으면서, 저에게 업히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때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간이 흐르면 아들은 아빠를 업어줄 수 있지만, 아빠는 더 이상 아들을 업어줄 수 없게 되는구나.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모습을 부모가 자녀를 안고 업어주는 장면으로 묘사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46장입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이사야 46장 3절) 

마치 부모가 이제 막 태어난 자녀를 안아주고 업어주듯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처음부터 안아주고 업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부모의 차이점이 그 다음 구절에 등장합니다.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이사야 46장 4절) 

시간이 흐르면 아들은 아버지를 업을 수 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업고 다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노년이 되기까지, 그의 백성이 백발이 되기까지 가슴에 품고 등에 업으면 인도하여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오늘 본문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 10장 7절)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양의 문은 양이 우리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문을 말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루 종일 초원을 돌아다니며 풀을 뜯었던 양들이 이제 저녁이 되어 우리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딱 하나밖에 없지요. 곧 양 우리에 나 있는 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뜻일까요?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반드시 찾아오게 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어느 통로를 이용해야 천국이라는 우리의 본향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또 다른 표현과 그 의미가 동일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찾아보면서 요한복음 10장 9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0장 9절)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어떠한 유익을 얻지요? 구원을 받습니다. 조금 전에 설명드렸던 바로 그 내용이지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또 하나의 유익을 더 말씀하시네요.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영혼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동일한 내용이 10절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장 10절)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바는 명확합니다.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도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도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의 삶을 허락해 주십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우리는 부활절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기쁨의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몇 주간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해 여러분과 나누면서 제 마음 한쪽에 한가지 의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너무도 명확하고,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도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의 은혜를 충만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영생의 은혜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풍성한 영생을 누리는 삶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으신가요? 

지난 몇 주 동안 제 마음에서 말끔하게 제거할 수 없었던 의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이 된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예수님을 말미암아 지금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부활의 메시지를 설교하고, 부활의 메시지를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하여 지금 이곳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삶은 우리가 추구하고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기대하는 그 풍성한 삶과는 너무도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요? 과연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이 부활의 이 기쁨 계절을 보내는 저의 마음 한쪽에 찜찜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을 품고 있는 상태에서 오늘 본문을 여러 차례 읽다가 어느 한 대목에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함께 읽었던 9절입니다. 

“내가 문이니”이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유익을 말씀하시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이 장면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양들이 저녁이 되어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 출입구, 곧 양의 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가며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주목해 보세요.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천국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았는데, 왜 또 천국에서 나와야 할까요? 이 구절에서 ‘들어가며 나오며’는 무슨 뜻일까요? 물론, 양들은 저녁에 우리에 들어갔다가 그다음 아침이 되면 풀을 찾아 나서기 위해 우리에서 나와야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천국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데, 그 천국에서 다시 나와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거든요. “들어가며” 그리고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런데 여러분, 이 구절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이 맞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소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는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최후 심판의 날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가면 다시 천국에서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날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 성도들의 삶이 “들어가면”의 삶이 아니라 “들어가며 나오며”의 삶이에요. 우리는 예배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도 하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천국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매일 그곳에서 나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선한 목자의 은혜

이쯤되면 또 하나의 의문이 들지요. 매일같이 안전한 우리를 떠나야 하는 양들처럼 험한 세상살이로 내몰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풍성한 ‘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약속하셨잖아요.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도 하시고, 지금 이곳에서도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신다면서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은혜는 지금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입니까? 그 대답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목자의 비유에 담겨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요한복음 10장 14-15a절)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친밀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도 예수님을 아는 친밀함이죠. 

목사는 매일 아침 양들을 안전한 우리에서 이끌고 나와 초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말씀은 지금 당장 안전한 울타리 안에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쓸 것을 가득 채워놓고 그곳에서 우리를 사육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매일 아침 우리를 데리고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이끌고 가세요. 풀을 찾아 떠나는 길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풀을 찾기 위해 걸어가는 길에서 더위에 목이 마르기도 하고, 맹수들의 위협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내가 알고 주님께서 또한 나를 아시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거예요.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도 그 주님을 알아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누리고 있으니,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도 샘물이 나올 때까지 참고 견디며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어요.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장 14-15절)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구절이지만,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 매우 어색한 내용이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양을 공격하기 위해 사나운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삯꾼이야 당연히 양을 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먼저 구하겠지요. 그러나 삯꾼이 아닌 목자라도 사나운 맹수가 다가오는 장면을 보면 열이면 열 먼저 자신의 목숨부터 구하지 않겠어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목자가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를 처음부터 제거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안전한 곳에 머물러 있도록 하락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서 이끌고 나오십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목마름과 궁핍을 겪기도 하고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맹수들의 공격도 받지요. 그러나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이 괴로운 광야길이라면 더욱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주님을 아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더욱 누리십시오. 우리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가 여러분에게 새로운 힘을 주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나신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새로운 용기를 주어 그 모든 과정을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장면을 부모가 이제 막 태어난 자녀를 안고 혹은 업고 다니는 장면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인간 부모는 자녀가 어렸을 때만 번쩍 안거나 업어서 데리고 다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이 노년이 되어서도, 혹은 백발이 되어서도 번쩍 안아 주시고 등에 업어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모가 어린 자녀를 안거나 업어주는 장면을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부모의 품에 안겨있는 그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철저히 부모가 데려가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지요. 아이의 발은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안거나 혹은 업어서 인도해주시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안고 혹은 업어주신다는 것은 너무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 대신 우리는 한 가지를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고 그저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시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백발이 되기까지 우리를 안고 업고 다니시기에, 우리는 아무리 성인이 되어 나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은 나이가 되어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실제로 이사야서가 말씀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유대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우리는 안전한 우리 안에 머물러 있고 싶어요. 그저 선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께서 매일 안전한 나무 그늘 밑에 건건초를 공급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런데 주님은 매일같이 우리를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이끌어 내시네요.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다 보니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목마름과 굶주림을 겪기도 하고, 심지어 맹수를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하나님의 품에 안겨 주님이 이끄시는 장소로 왔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여러분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장소에 와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선한 목자요, 
여러분의 좋으신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심을 믿고, 여러분이 계신 그 자리에서 내가 주님을 알고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친밀함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고,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따스한 품을 누리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어디에 계시든 상관 없이 예수님께서 풍성한 은혜의 삶을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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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