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2022. 5. 15. 16:44
반응형

구약 성경 룻기는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에서 살아가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그 땅에 큰 흉년이 들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이스라엘 사람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주신 약속의 장소라 믿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흉년을 맞이하자 그곳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모압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흉년을 만난 이스라엘보다는 모압에서의 새로운 출발이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지리라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내가 계획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고 하여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압 나라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엘리멜렉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남겨놓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홀로 남겨진 나오미는 아들 두 명을 모두 모압의 여인들과 결혼시켰습니다. 이런데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두 아들 모두 자녀를 낳기도 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희망찬 내일을 꿈꾸며 모압으로 이주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나오미의 가정은 모압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침내 나오미는 큰 슬픔 속에서 다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나오미가 남편과 함께 베들레헴을 떠난 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베들레헴에 풍성한 곡식과 양식이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기 때문이지요. 자, 이제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잃어버린 가련한 여인 나오미는 모압에서 맞이한 두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려 합니다. 지금 나오미의 형편에서는 이것이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남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나오미 입장에서는 며느리들이라도 모두 친정으로 돌려보내야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솔의 숫자가 줄어들기 때문이지요. 며느리들의 입장에서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는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고, 재물도 없고, 고향에는 농사를 지을 땅 한 평 없으니 친정으로 돌아가 생계를 유지하면서 다시 적절한 혼처를 알아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이처럼 당당하게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며 베들레헴을 떠난 나오미였지만, 고향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와 그의 가정의 모습은 쓸쓸하고 초라하기만 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정에 아직도 작은 희망의 씨앗은 남겨져 있었으니, 그것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오미가 그의 며느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룻 1:11) 각자의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지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룻 1:13) 나오미는 지금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어버린 큰 슬픔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며느리들을 향한 미안하고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이 그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나오미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자 나오미와 두 명의 며느리가 크게 슬퍼하며 부둥켜안고 웁니다. 그리고 며느리 가운데 한 명이었던 룻이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룻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남겨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의 내일을 위해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홀로 남겨진 시어머니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자신이라도 곁을 지켜주겠다는 사랑과 연민이 룻의 마음에 가득했던 것이지요. 이처럼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나오미와 룻의 가정은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 서로를 향한 사랑이 있었기에 그 모든 위기와 어려움을 그들은 견디어 낼 수 있었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 가정을 기쁨과 행복의 가정으로 바꾸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지금 어떠하십니까? 행복을 위한 조건이 가득하신가요? 여러분의 가정에는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충분한 재물이 있고, 가족들은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고 모두 건강하며, 식구들이 함께 계획하고 시행하는 모든 것이 성공하고, 자녀들은 믿음과 신앙 위에 굳건하게 서 있기에 근심도 없고 걱정도 없이 나날이 행복한 삶을 계신가요? 아니면,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망하게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오미와 룻의 가정과 같이 여기저기 부족한 것뿐이어서 점점 행복의 조건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계시지는 않으시나요? 우리의 가정에 부족한 것도 많고 아쉬운 점이 많이 보일 때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서로를 향한 사랑만이” 그 모든 부족함을 채울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 곧 명령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때는 구체적으로 언제였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붙잡히셨던 바로 그날 저녁입니다. 하루만 지나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지난 삼 년 동안 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였지만, 이제는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실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시지요.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므로 이제 제자들을 떠나셔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친히 함께 계시는 동안에는 제자들에게 별로 부족한 것이 없었지요. 제자들에게 먹을 양식이 부족해도 괜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나누어주시니 오병이어만으로도 수천명의 사람들을 먹이실 수 있었잖아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을 상대할 성경 지식이 부족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그들의 질문과 공격에 대답하시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병자들이 찾아오고 귀신 들리 사람이 찾아와도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니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가 되었어요. 그러면 예수님을 떠나보내야 하는 제자들이 홀로 서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영적 은사입니까?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재물입니까?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건물이나 시설인가요? 여전히 무엇 하나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제자들 심지어 예수님마저 떠나보내야 하는 제자들에게 그 모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을 주님께서 새 계명으로 명령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는 예수님 곁에 있기만 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는 주님 곁에만 있으면,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이 펼쳐지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임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잖아요.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면 제자들의 모임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신앙의 공동체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의 모임 안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경험시켜 주셨던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아도 사람들은 우리의 모임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신앙의 공동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모임,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는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를 향한 사랑이 우리의 모임과 우리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나라로 빚어 갑니다. 특별히 우리의 공동체가 어려운 시간을 보낸다면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공동체를 지탱해주는 최고의 덕목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랑을 실천하기가 너무도 어렵다는 점입니다. 내가 먼저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나의 사랑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그때에도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할까요? 교회 안에서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성도들을 향해서 내가 왜 끝까지 사랑을 실천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이 나의 마음에서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멈추어 버리지요.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너무도 힘겨운 일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새 계명에 순종하여 사랑을 실천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자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명령하셨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우리가 서로에게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려면, 나를 적대시하고 무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의 생명까지도 내어 놓을 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과연 그러한 사랑이 우리에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잘 알지만, 막상 사랑을 실천하기가 망설여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새 계명을 어떠한 자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매우 단순한 사실부터 시작해보죠.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새 계명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명령하셨을가요? 그렇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조금도 실천할 수 없는 것을 행하라 명령하셨다면, 예수님의 명령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잖아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새 계명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완벽하게 나의 삶으로 실천하지는 못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의 작은 일부분은 우리가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위대한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부탁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며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때 무리들 가운데 한 여인이 예수님 곁으로 걸어오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포시 잡았습니다. 그리자 그의 몸에 있던 혈루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자 여인의 질병이 치유된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요 이적입니다. 그러면 이적이나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행하신 사랑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사랑은 여인의 질병이 치유된 이후에 등장합니다. 곧, 야이로와 함께 바쁘게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 여인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그 여인의 처지와 형편을 모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신 뒤 마침내 그 여인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명령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이적을 행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명령하셨지요. 그러므로 지금 내가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아도 그 걸음을 멈추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게 따스한 이야기를 건네는 정도의 사랑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행동이 됩니다. 이 정도의 사랑이라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우리도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볼까요? 하루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차리곤 했어요.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어떻게요? 그날 저녁 제자들과 따로 모인 자리에서 비유의 말씀을 쉽게 풀어주시지요. 한번 이야기했는데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붙잡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정도의 사랑이라면 우리도 간절히 기도하면서 실천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캘커타의 성녀라 불리는 마더 테레사를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지요. 그녀가 생전에 행하였던 선행과 그가 실천했던 사랑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잖아요. 그런데 마더 테레사가 했다고 전해지는 명언 가운데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큰 일을 하기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은 일을 사랑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크고 놀라운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작은 일부터, 상대방이 나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때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친절하고 상냥하게 나의 생각이나 마음을 전하는 것부터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요,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아름답게 바꾸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위대한 사랑을 실천했던 분을 꼽는다면, 많은 분들이 손양원 목사님을 떠올리실 듯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이른바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가 무엇이지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 자신의 양자로 삼는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셨잖아요. 과연 우리 가운데 그와 같은 위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요? 과연 우리시대에도 그와 같이 위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이 실천하신 사랑의 모습 가운데 개인적으로 저의 마음에 큰 감명을 주었던 장면은 두 아들을 죽은 공산당원을 양자로 삼은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병 환자를 대상으로 목회를 하셨잖아요. 극심한 통증 속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애양원의 한 성도가 목사님께 시원한 사이다가 마시고 싶다고 말할 때, 그 음료수 한잔을 마실 수 있도록 가져다주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장면이었습니다. 시원한 음료수 한 잔을 대접하는 것, 어찌 보면 너무도 작은 봉사지요. 그러나 그 안에 얼마나 크고 위대한 사랑이 담겨 있는지요.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하여 양자 삼는 위대한 사랑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음료수 한 잔 대접하는 작은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원자탄으로 기억하지만, 목사님도 작은 일을 사랑으로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가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그 기도문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옵소서
이들은 세상에서 버림을 당한 자들이옵고
부모와 형제의 사랑에서 떠난 자들이옵고
세상 모든 인간들이 다 싫어하여 꺼리는 자들이오나
오 주여, 그래도 나는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새 계명,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 위해 기도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는 위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없고, 간절히 기도하더라도 손양원 목사님께서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목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음료수 한잔을 대접하는 사랑이나 지금 나의 관심이 필요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여주는 정도의 사랑은 실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비록 작은 것이지만 사랑으로 행할 때 우리의 삶에 주님의 모습이 보이게 되고, 비록 작은 것이지만 사랑으로 행할 때 여러분이 계신 바로 자리는 비로소 예수님을 모신 천국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33423114

 

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20 “마더 테레사”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blog.naver.com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