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1. 5. 30.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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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한 마디로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지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6장 1절) 

하나님께서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이사야는 그 장면을 보기 위해 얼마나 높이 머리를 들어야 했을까요? 저 높은 하늘 보좌에 하나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그 장면만으로도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분의 옷자락을 통해 그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셨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대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그가 입고 있는 의복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의복을 통해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옷의 색깔이었습니다. 당시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청색에 가까운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구약 성경은 제사장의 옷을 청색으로 만들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청색이 높은 신분을 나타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푸른빛을 내는 염료가 당시로서는 너무도 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짙은 청색의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은 한눈에 그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지요. 색깔과 함께 의복을 통해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는 방식이 또 하나 있었는데, 옷의 길이입니다. 옷이 길면 길수록 그 사람의 신분이 높다는 뜻이었지요. 그 이유 역시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옷감이 귀했던 시대잖아요. 그런데 많은 옷감을 들여 옷을 길게 지어 입을 수 있다면 당연히 높은 신분이라는 것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하나님의 모습은 저 높은 하늘 보좌로부터 이 땅의 성전까지 그 옷자락이 이어졌고, 본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하나님의 옷자락이 온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사야 선지자가 눈을 들어 바라보았던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하시고, 가장 높으시며, 가장 거룩하신 온 세상의 통치자였습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이사야 6장 2절) 

여기에 스랍이라 불리는 천사가 등장하네요. 우리는 스랍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들은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중요하게 묘사하는 장면은 그들의 날개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두 6개의 날개가 있었습니다. 두개의 날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두 개의 날개는 자기의 발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두 개의 날개로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두 개의 날개로 그들의 발을 가렸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랍이라 불리는 천서까지도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발을 드러낼 수가 없었고, 자신의 얼굴과 발을 가리기에 바빴습니다. 본문 2절은 스랍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만 본문의 의도는 스랍이라 불리는 천사들의 존재를 자세히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랍들조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얼굴과 발을 가리기 위해 분주할 만큼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장면입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사야 6장 3절) 

본문이 묘사하는 하나님,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곧 세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분은 온 땅에 영광이 충만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6장을 읽으며 우리가 배우게 되고 우리가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모습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보살핌 등 지금도 우리의 삶을 세밀하고 따스하게 감싸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경향이 이해가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도 분문에 등장하는 스랍들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가리기에 급급하겠지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힘들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하늘 보좌에서 세상 만물을 통치하시며 모든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랑으로 우리를 세밀하게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모습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절뚝발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시에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신약성경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선포하지만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시는 모습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로마서 11장 22절)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사랑과 은혜만을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우리를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지요. 그러면 이제부터 그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선지자의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러면 이후로 그가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때 그의 자세와 그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오늘 본문 이사야 6장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1절 처음입니다. 본문 1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오늘 우리에게는 이 표현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이사야 시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웃시야 왕은 대단히 상징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무려 52년이 남유다를 다스렸던 웃시야는 다윗과 솔로몬 이후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던 왕입니다. 그가 왕위에 앉아 있을 때 국방은 튼튼했습니다. 경제의 핵심이었던 농업은 융성했습니다. 에시온게벨이라는 항구를 장악하여 국제무역을 통해 큰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한 번성과 융성의 시기를 이끌었던 웃시야 왕이 죽었으니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하여 당시 남유다의 지도자들은 이제 나라의 운명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웠습니다. 

바로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선지자에게 찾아온 첫번째 변화는 그의 관심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웃시야의 죽음이 초래하는 정치적인 변화도 중요하지요. 그가 이루었던 경제적 번영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요. 웃시야의 죽음을 틈타 남유다를 노리는 주변 나라들의 동태도 잘 살펴야겠지요.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이사야 선지자는 그 모든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민족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5절의 탄식이 나오게 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도다 (이사야 6장 5절)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의 관심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도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 하나에 집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 된 삶에 대해 탄식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관심사가 바뀌고 나니, 이제는 그의 행동이 하나씩 바뀝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한마디 한마디를 얼마나 신중하게 내뱉었을까요? 선지자로 매일의 삶을 살아갈 때 죄악을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이후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야 말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거룩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48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구속자이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이사야 48장 17절) 

거룩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행동을 바르게 고쳐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된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며 이사야 선지자의 이 경험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동시에 이곳에서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그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도 체험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지요. 그러면 우리의 삶도 거룩으로 조금씩 바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더 해보니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장면을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실 것 같아요. 여러분, 제 이야기를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영광 중에 이 성전에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니 우리 인간이 그것에 대해 평가하고 예단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그 장면을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보여주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성경에 기록해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 6장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읽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뵈었지만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항변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온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만군의 하나님,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지금 그 장면을 묵상하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이라도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삶도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그루터기 _ 거룩하신 씨앗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며 거룩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회복의 역사를 일으켜 주십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들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 6장 11-12절) 

본문 11절과 12절은 분명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온갖 죄악에 빠져있는 유대 나라를 황폐하게 만드시겠다는 심판의 선언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바로 이 구절 안에 유대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셨나요?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하죠?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사야가 묻는 ‘때’는 회복의 때, 치유의 때, 구원의 때입니다. 지금은 죄악이 횡횡한 시대입니다. 지금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남 유다에게 여러 가지 형벌을 내리시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어둠과 죄악의 지나가고 새로운 회복의 때가 언제 도래하겠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놀랍게 하나님은 그때가 언제인지 대답해 주십니다. 12절의 마지막입니다.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때도 심판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치유하고 회복하시며 구원해 주시는 바로 그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의 때에 일어날 일을 마지막 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6장 13절) 

여기에 그루터기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나무의 줄기가 잘려나간 뒤에도 여전히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남아 있는 밑동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 구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큰 죄악에 빠져있었던 남 유다를 심판 하셨고,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유대인들은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지요. 이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무리들을 본문 13절이 말씀하는 그루터기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루터기라는 이미지에 집중하며 본문 13절의 의미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자 칼뱅은 13절을 주석하며 ‘그루터기’를 한 겨울의 모진 한파를 견디어 내는 나뭇가지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을 조금만 읽어보겠습니다. “겨울에 잎이 다 떨어져 버리면 죽은 나뭇가지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봄이 되면 잎은 다시 돋아난다. 즉 이 백성도 그와 같게 된다는 뜻이다.”한 겨울 살이 베이는 듯한 추위 속에서 앙상해진 나뭇가지가 따뜻한 봄의 햇살 속에서 녹음으로 푸르러지듯,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황폐해진 유대 나라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회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13절 말씀에는 그루터기라는 단어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직접 설명해 놓으신 대목이 있습니다. 13절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여기에 거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요. 이미 충분히 말씀드린 것처럼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선지자는 이후 자신의 삶과 자신의 행동을 거룩으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악 된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6장의 마지막 문장은 드디어 거룩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 한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적용하네요.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거룩한 씨는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13절에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만나고 체험하였던 사람들, 그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도 최선을 다하여 거룩으로 바꾸어 가려는 사람들, 그 몇 명 되지 않는 거룩한 씨가 곧 그루터기가 되어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출석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도 이사야 선지자가 경험하였던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외면하고, 그저 나에게 복을 주시고 그저 나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그저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하나님만을 원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사야 6장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도 조금씩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바로 그때,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치유하여 주실 것입니다.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직장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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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