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1. 6. 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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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비텐베르크에 위치한 시립교회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교회입니다. 루터는 그 교회에서 3천 번이 넘는 설교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는 이른바 ‘종교개혁 제단화’라 불리는 네 점의 성화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크고 중앙에 위치한 그림이 <최후의 만찬>입니다. 지금까지도 가장 대중적인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지요.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 걸려있는 <최후의 만찬>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매우 가까운 친구였던 루카스 크라나흐라는 화가가 그린 것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왼편에 예수님께서 계시고,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이 ‘그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성경에 기록된 사도 요한이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맞은편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던 그날 저녁, 제자들과 나누셨던 유월절 식탁을 묘사하는 이 그림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림의 오른쪽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식탁을 바라보고 있는데, 유독 한 사람만이 식탁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는 손에 잔을 잡고 있는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어떤 사람에게 그 잔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성경이 기록한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크라나흐가 이 그림을 드렸던 16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의 종교개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성만찬을 행하면서 일반 성도들에게는 잔을 주지 않고 떡만 주었습니다. 루터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지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총은 사도들이나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을 가리키는 성만찬의 떡과 잔도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루터는 확신하였고, 그는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금기 사항을 깨고 성만찬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에게 떡과 함께 잔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약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개신교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고, 우리는 성찬식을 행할 때 모든 성도들에게 떡과 잔을 모두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크라나흐는 마틴 루터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나누셨던 최후의 만찬 장면을 그리며,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신 성만찬의 잔을 일반 성도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첨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성만찬의 잔을 자신의 뒤에 있는 어느 젊은이에게 전달하는 사람의 얼굴은 당시 비텐베르크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곧 마틴 루터입니다. 
 
크라나흐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는 마틴 루터 외에도 당시 비텐베르크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또 한 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16세기 비텐베르크에 살던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열 두 제자의 얼굴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실제 얼굴과 제자들의 실제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마틴 루터의 바로 왼쪽에 앉아 있는 인물은 당시 비텐베르크 주민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스 루프트인데,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인쇄하였던 출판업자입니다. 한스 루프트는 당연히 사도도 아니요, 성직자도 아니요, 목회자도 아닙니다. 그는 책을 출판하는 사업가였습니다. 크라나흐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며, 출판업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도움을 주었던 한스 루프트를 사도들만 참여했던 예수님과의 최후 만찬 자리에 당당하게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하여 크라나흐 역시 화가라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종교개혁의 핵심 가치를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 가치가 무엇입니까?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없이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없이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어진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가르침, 곧 마틴 루터가 생명을 다해 전파하였던 ‘만인제사장’의 개념을 이 한 폭의 그림 안에 담아 놓았던 것입니다. 


속죄의 은혜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높은 보좌에 앉아 계셨고, 그분의 옷자락은 온 성전에 가득했지요. 하나님을 곁에서 섬기는 스랍의 천사들조차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대면하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발을 가리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모든 천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사야 6장 3절)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온통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민족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 하나의 질문에 온 마음이 사로잡힌 이사야 선지자는 탄식하고 맙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 6장 5절) 

그런데 여러분, 이사야 선지지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악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애통하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찾아옵니다. 본문 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때에”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 6장 6-7절)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특별히 자신의 입술이 가장 부정하게 느껴졌어요.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그의 언어가 부정하고, 그의 언어생활이 죄로 가득하다는 의미이겠지요.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입술, 곧 자신의 언어생활이 가장 부정하다고 여겼던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의 입술에 숯불을 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니 자신의 입술이 그렇게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손이 부정하고 자신의 손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분도 계십니다. 손이 부정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손으로 행한 일이 죄악으로 물들어 있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이후 이사야서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해요.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이사야 59장 6b절)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어떤 분들은 자신의 손이 그렇게 더럽고 부정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은 그러한 분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어느 부분을 정결하게 하실까요? 그의 손을 정결하게 하시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너의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발이 너무도 부끄럽게 여겨지곤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발이 부정하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죄악의 길을 걷고 마땅히 피해야 할 곳을 떠나지 않았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이후 이사야서에는 이런 표현도 등장해요.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이사야 59장 7a절)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나의 발이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분이 계신가요? 하나님은 그러한 분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우리의 발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은 계속하고 있지만, 여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워 가리고 싶은 부분이 여러분에게도 있지 않으세요? 어제도 실패하여 오늘만큼은 또다시 잘못을 범하고 싶지 않은데 여전히 실패하고 넘어지는 지점이 있지는 않으세요? 이사야에게는 그것이 입술이었어요. 어떤 분들에게는 손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분들에게는 발이나 또 다른 곳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것이 무엇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그 모든 악을 제하시며 우리의 그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여 주실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명으로의 부르심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속죄의 은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이사야 6장 8a절)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사야를 선지자로 선택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질문을 던지며 이사야를 사명의 자리로 초대하시네요.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사야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라 명령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의 의향을 질문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겠지요.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의도에 정확히 부합하는 대답을 합니다.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 6장 8b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신앙의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속죄와 사명의 관계인데,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속죄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속죄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소명을 진실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겉모습은 유사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나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주시는 속죄의 은혜가 가득하지 않으면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나의 유익만을 쫓으며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에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속죄의 은혜가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속죄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던 이사야에게 이제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선지자의 사명을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상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사야 6장 9절)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은 이해가 되세요? 물론, 문자적인 의미는 이해가 되지요. 그러나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이라니, 이것이 이사야가 선지자로 한 평생 감당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십니까? 이사야가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알 수 없다.’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이사야의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러한 말씀을 전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도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사야 6장 10절)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백성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겨서 마침내 그들의 마음이 둔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왔던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사명이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유와 목적이 그들의 마음이 열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신 사명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백성들에게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라고 말하고 싶었겠지요. 백성들에게 귀를 열어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선포하고 싶었겠지요. 모르기는 몰라도 그것이 선지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여 ‘나를 보내소서’ 헌신하지 않았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말씀을 전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열려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선교사의 소명을 받아들였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사명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이 사명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지금 나에게는 사명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명을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내가 거부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저것입니다. 저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저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것을 맡기고 계시거든요.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 사이에 차이가 있으니,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속죄의 은혜, 대속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받으셨다면 여러분에게는 바로 지금 감당해야 할 사명이 반드시 주어져 있습니다. 때로는 직장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정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교회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여러분 자신이 결코 하고 싶지 않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그 자리로 부르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어 주십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에게 온갖 죄악에 빠진 유대인들을 향해 징벌과 심판을 선언하라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동일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회복과 치유의 때도 선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식탁

설교를 시작하며 크라나흐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함께 보았지요? 이 그림에는 오늘 설교의 두 가지 주제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속죄의 은혜입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식탁을 나누고 계시네요. 그래서 식탁의 한 중앙에는 유월절 어린양이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이 그림에 담긴 또 하나의 주제는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있는 제자들은 사도의 사명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그림에는 마틴 루터와 같은 성직자도 있지만 한스 루프트와 같은 사업가도 있어요.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들의 역할이 무엇이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속죄의 은혜를 누리는 모든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따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속죄의 은혜 그리고 사명으로의 부르심이라는 오늘 설교의 주제가 이 한 폭의 그림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다시 보니, 속죄의 은혜와 사명으로의 부르심이 함께 담겨 있는 장소는 다름이 아닌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부르며 초대하시는 은혜의 식탁이네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고 싶으시나요? 지금도 우리에게 속죄의 은총을 한 없이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식탁으로 오십시오. 과거에 실패하셨더라도 괜찮습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여 저지르셨더라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식탁에서 예수님은 여러분의 모든 과거를 용서하시며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영혼의 양식을 풍성히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원하시나요? 그리하여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참으로 원하시나요? 그러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에게 사명을 주시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 주시는 주님의 식탁으로 오십시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쓰임 받을지 알 수 없어 답답한 마음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시는 일이 서로 달라 어리둥절하여도 괜찮아요. 주님과의 친밀한 식탁의 교제를 누리며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주님께서 맡겨 주시는 그 소명에 응답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속죄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도 우리 주님이시요, 
여러분을 사명으로 부르시는 분도 우리 주님이시니, 
마침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여러분의 삶에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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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