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강해2021. 6. 1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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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교회에서 자주 불렀던 찬양 가운데, 이러한 가사로 시작하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모든 사람은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지요. 우리나라는 남과 북이 분단되어 있기에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평화를 더욱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이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를 위해 더욱 기도하고, 민족을 위해 더욱 기도하면서 이 땅에 참된 평화가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굳이 민족적/국가적 차원의 거대담론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겪기도 하지요. 그때마다 우리 모두는 가정에서, 그리고 또 직장을 비롯한 사회생활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평화롭기를 원하고 그 안에서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한국 여행객들이 꼭 한 번은 찾는 장소가 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입니다. 저 멀리 한국에서 일어난 625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군인들의 희생을 기리는 장소입니다. 제가 미국 유학을 떠나 처음으로 머물렀던 곳은 워싱턴 D.C. 로부터 차로 약 4시간 정도 떨어진 린치버그라는 조그마한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에 처음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한 장소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도 조그마한 전쟁 기념탑이 있었는데, 한쪽 벽에 그곳 린치버그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앙에 헨리 포드의 명언이 기록되어 있었지요. 

I Now Know That 
Wars Do Not End Wars – Henry Ford 
(이제 나는 깨달았습니다. 전쟁으로는 결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습니다.) 

그때 저는 이 땅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전쟁의 분명한 교훈을 이역만리 타지에서 새롭게 확인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전쟁은 결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 그리하여 서로에 대한 미움과 그로 인한 적대적인 태도는 결코 평화와 화목을 도모할 수 없다 매우 단순한 교훈이었지요. 


겉모습에 따른 판단

성경에 등장하는 고린도교회는 성도들 간의 갈등과 분열이 극심했습니다. 이른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고 그리스도파의 존재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갈등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사도 바울을 적대시하여 바울을 공격하고 비난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의 내용만으로는 정확히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그들의 몇 가지 특징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2절은 그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고린도후서 5장 12절) 

바울을 비방하고 대적했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아니라 외모나 겉모습으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의 다른 구절을 참고하면, 그들은 추천서를 들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이적을 행하거나 눈에 보이는 어떤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사도 바울을 공격하면서 바울은 추천서도 없지 않으냐고, 바울은 눈에 보이는 능력이나 재능이 없지 않으냐고 비난했던 것이죠. 그들이 내세우는 평가 기준은 족보나 혈통, 출신지나 학력, 혹은 눈에 보이는 업적과 같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흔히 자랑하는 그러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러한 태도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데 ‘육신을 따른 평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고린도후서 5장 16a절) 

여기에서 ‘육신을 따라 안다’는 표현은 육신을 따라 평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여러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평가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우리도 육신을 따라 사람들을 평가했지요. 그가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그가 많이 배운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그가 크게 출세한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나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나에게 도움만 받을 사람인지. 이 모든 것이 육신을 따라 사람들을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본문 16절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육신, 곧 겉모습을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하고 있지요? 지금 내 곁에 앉아 있는 분의 성별이나 나이나 출신 배경이 여러분에게 중요합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지금 내 곁에서 함께 예배하는 그분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 중요해요. 그래서 동일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우리 모두가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만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 중요하게 여깁니다. 한마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복음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을 대적했던 사람들처럼 육신을 따라 누군가를 평가하면, 그 안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복음의 관점에서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믿음의 공동체에 화해가 일어나고 화평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주변 사람들과 갈등하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우리의 눈을 덮고 있는 육신의 관점이 벗어지기를 바랍니다. 전쟁은 결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없습니다. 폭력이 폭력을 근절시킬 수 없어요. 마찬가지로 육신의 관점으로 나의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갈등과 다툼은 결코 종결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화평하고, 우리의 가정이 화목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샬롬으로 가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육신의 기준을 버려야 합니다. 나아가 복음이라는 새로운 평가 기준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가 되어야 합니다. 


화평의 복음

바울의 대적자들은 육신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의 관점에서 성도들을 바라보았지요. 그러자 바울은 모든 성도들 안에 일어난 위대한 사건 하나를 감지하게 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이야기를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복된 소식, 곧 복음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큰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유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거듭남이지요.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세력에 억눌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죄악 된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해 버리지요. 나아가 인간의 죄성은 다른 사람을 향해 육신을 따라 판단하고 비판하게 만듭니다. 마침내 내 곁에 있는 이웃과의 관계를 갈등과 다툼으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옛 모습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전 모습은 모두 지나가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용서를 받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의 딸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주셨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모습은 과거와 별로 다르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을 따라 평가하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일 뿐, 복음의 관점에서 우리의 참모습을 바라보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복된 소식, 곧 복음이 되는 이유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또 다른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곧 ‘화목’입니다. 본문 18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고린도후서 5장 18a절) 

모든 선한 것,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것 가운데 최고의 선물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곧, 복음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화목입니다. 동일한 내용이 바로 다음 절에도 등장해요.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린도후서 5장 19a절) 

위의 18절과 동일한 내용이지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18절과 19절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어요. 발견하셨나요?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고린도교회 성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19절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상은 신자와 불신자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19절의 세상이라는 단어에 집중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고 세상은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다고 말씀합니다(요한복음 1장 9-11절).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 당신과 화목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는 말로 소개하였던 것입니다(행 10:36).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 사건을 나 자신에게만 적용하는 것 같아요. 사도 바울이 경탄하며 찬양하는 내용, 곧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위대한 선언을 나 자신에게만 적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시듯, 내 곁에 있는 우리의 가족, 우리 교회의 교우, 나아가 나의 직장동료까지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신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필립 클레이턴이라는 신학자는 미국의 백인 중산층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랍다’고 찬양을 부르며 자신의 크고 더러운 죄악이 눈과 같이 희어졌다고 믿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 – 예컨대 흑인이나 멕시칸이나 아시아인들 – 도 그들의 모든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눈과 같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은 믿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나요? 여러분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도 그 사실을 정말 믿으실 수 있으세요? 실수도 많이 하시잖아요. 하나님의 뜻을 몰라 이곳 저곳을 헤매기도 하시잖아요. 믿음이 흔들려 세상의 풍조에 휩쓸릴 때도 있지 않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정말로 믿으세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고 확신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바라볼 때도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고, 복음의 기준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도 육신의 기준이 아닌 복음의 렌즈로 바라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여전히 흠도 많고 실수도 많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신다면, 내 곁에 있는 식구들과 친구들과 이웃들도 여러 가지 단점이 존재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아름답게 재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가 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고 선포하는 복음은 “화평의 복음”입니다. 


화목의 직분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가득했던 고린도교회에 사도 바울은 화평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화평의 복음 안에는 우리에게 주신 사명도 있는데, 곧 화목의 직분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고린도후서 5장 18a절)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화평의 복음이지요. 이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고린도후서 5장 18b절)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입니까? 화목의 직분입니다. 여기에 직분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디아코니아’입니다. 주로 봉사와 섬김이라는 의미로 알고 계시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화목의 직분은 화목하게 하는 봉사, 화평을 실천하는 섬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복음은 화평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화목의 직분, 곧 화목하게 하는 봉사와 화평을 실천하는 섬김의 사명이 화평의 복음을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성 프란시스의 기도문이 있지요? <평화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데 이 기도문을 천천히 묵상하다 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화목의 직분을 감당하게 해 달라는 기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기도하지요.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는,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는, 신뢰를 
절망이 있는 곳에는,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는,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는,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나의 주님,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기를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기를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가 받는 것은 주는 일에 있고, 
우리가 용서받는 것은 용서하는 일에 있으며,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죽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쟁은 결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없습니다. 육신을 따른 판단은 미움과 다툼을 결코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갈등과 다툼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오직 화평의 복음만이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자리잡은 미움을 제거할 수 있고,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과 섬김을 실천하는 화목의 직분만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샬롬을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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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