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강해2021. 6. 2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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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바울의 편지, 특별히 고린도후서에는 바울 자신의 사역에 대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약성경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 고린도후서를 읽으며 바울이 어떻게 사역했는지,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보다 깊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온전히 바쳤지요. 그의 선교사역은 1차, 2차, 3차 전도여행으로 이어졌고 그의 노년에는 로마까지 건너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 바울의 삶은 전도와 선교의 인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린도후서를 비롯하여 바울 서신을 연구하다 보면 그의 선교 사역에서 바울이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하나의 사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구제 사업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큰 기근으로 말미암아 재정적으로 매우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상대적으로 조금은 여유가 있었던 안디옥 교회가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거든요. 그런데 사도행전은 안디옥 교회가 모금한 구제헌금을 예루살렘으로 전달해주었던 사람이 이제 막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였던 바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1:27-30). 

이후 사도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전도여행을 떠나지요. 사도 바울이 1차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에서는 각지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모여 매우 중요한 회의를 합니다. 이후 학자들은 그 모임을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불러요.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를 보면 그날의 회의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그 회의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에게 공식적으로 부탁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사업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 이전부터 자신이 그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도 갈라디아서에 덧붙이지요(갈 2:10). 그러므로 바울은 선교여행을 시작한 1차 전도여행 때부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운동에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바울의 모금활동은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요? 마지막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바울은 꿈에도 그리던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바울은 곧바로 로마로 직행할 수가 없었고, 예루살렘을 반드시 방문해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그 동안 자신이 모금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 1차 전도여행부터 시작된 바울의 구제활동은 3차 전도여행이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모금운동을 펼쳤던 시기가 1차 전도여행부터 3차 전도여행까지, 곧 그의 선교사역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이어졌다면 그가 모금운동을 펼쳤던 지역은 어떠했을까요? 바울이 1차전도 여행 때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지역은 갈라디아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를 보면,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거두었다는 말이 나옵니다(고전 16:1)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때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던 지역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8장 1절부터 4절에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 곧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 빌립보 교회가 기쁨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동참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아가야 지방의 대표적인 도시가 고린도인데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울의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종합하면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 아가야 지역의 교회 등 자신이 선교하고 개척한 거의 모든 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에 동참하도록 매우 강력하게 권면했습니다. 


구제헌금을 강조한 이유

바울은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선교사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사역을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복음을 전하는 일과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를 천천히 조사해보면 그는 자신이 선교하고 개척하여 세운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한 거의 모든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에 동참할 것을 매우 강력하게 독려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모금활동은 그에 대한 오해를 일으켜 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몇 주간 살펴본 것처럼 고린도교회 안에는 바울을 적대하는 대적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에게 바울의 모금활동은 딱 좋은 비난 거리를 제공했지요. 바울이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할 때는 자비량으로 선교한다고 말은 하지만, 뒤에서는 헌금을 강요하고 자기의 잇속을 챙기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신기하지요. 이러한 오해와 이러한 갈등을 초래하면서까지 바울은 자신의 선교기간 내내 자신의 모든 선교지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강행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연스럽게 질문이 하나 떠오르지 않으세요? 바울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알고 살았어요. 그런데 왜 바울은 교회 안에 오해와 갈등을 일으키면서까지 구제헌금을 위한 모금운동에 그토록 열심을 내었던 것일까요? 과연 무엇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선교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자신이 전도한 거의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펼쳤던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오늘 본문 10절에 나와있는 것 같습니다.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고후 8:10a) 

이 말씀에서 ‘이 일’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말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제헌금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바울은 ‘이 구제헌금에 관하여 자신의 뜻, 곧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고 말씀하네요. 그러면 바울이 피력하는 그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헌금을 모으는 그 일이 고린도교회 성도들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구제헌금을 전달받으면 기근에 시달리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도움이 되겠지요. 일차적으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유익하겠지요. 그러나 바울의 중요한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곧, 헌금을 모으고 그 헌금을 전달하는 고린도교회, 사도 바울이 직접 개척하여 교회를 세우고, 사도 바울이 직접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 아가야 지역의 교회와 그 성도들에게 큰 유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헌금을 많이 하시면 교회를 운영하는데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겠지요. 성도님들이 헌금을 많이 하여 교회가 더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다면 교회의 섬김을 받는 분들에게 더 많은 유익이 돌아가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그 정도의 의미에 머물러 있지 않아요.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헌금생활, 우리 그리스도인의 구제활동은 다른 누구보다 우리 자신에게 큰 유익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본문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네요.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고후 8:7a)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은사가 가득했습니다. 믿음이 있었고 지식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풍성한 신앙의 모습에서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어요. 그들의 신앙이 더욱더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앙이 모든 면에서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7절의 뒷부분이죠. 

이 은혜에도 (여기서 이 은혜는 당연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입니다)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후 8:7b) 

기도생활이 풍성해지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풍성해지죠. 말씀 생활이 풍성해지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풍성해집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여러 모습으로 봉사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면 우리의 믿음 생활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드리는 헌금생활이 풍성해지면 우리의 믿음과 신앙생활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헌금 안에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영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 안에 우리의 신앙이 풍성해지는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의 원리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이 예루살렘 교회를 유익하게 할 뿐만 아니라, 헌금을 드리는 고린도교회에도 더 큰 유익이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본문에는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본문 9절의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9)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묘사하는 바울의 표현이 참 멋있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이미 우리는 다 알고 믿고 있어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이미 알고 믿고 감사하고 있잖아요. 계속해서 바울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의 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무런 소유도 없이, 아무런 권한도 없이 자신이 가진 그 모든 것을 모두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가지신 가장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하게 되신 거예요. 그런데 가장 부요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난해지신 이유가 바로 우리를 위한 일이라는 거예요. 

바울은 계속해서 그 결과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어요. 우리는 물질적으로 가난했고, 정서적으로 빈곤했으며, 영적으로 극빈했어요. 그런데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cf 고후 6:10). 이처럼 예수님께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셨다면, 우리도 나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가지고 여전히 궁핍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선언한 이 복음의 은혜에는 헌금에 대한 더욱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우리가 여전히 궁핍한 가운데 살아가는 이웃을 위해 그 은혜를 나누게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더욱 깊이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이제 바울은 그 유익에 대해 설명합니다)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고후 8:10-11) 

여기에서 바울은 성취 그리고 완성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 구절에서 성취와 완성의 일차적인 의미는 처음에 계획하고 작정했던 금액의 헌금을 모두 완료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8장을 기록했던 지금 시점으로부터 약 일년 전부터 고린도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시작했는데, 그것을 이제 완성하라는 촉구입니다. 그러나 본문 11절은 우리 신앙의 시작과 우리 신앙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구절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소유하신 부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어요.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이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은 신앙의 시작점이에요. 신앙생활에서 시작점은 반드시 필요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그 은혜를 받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신앙의 시작점이지 완성은 아닙니다. 그러면 완성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 받은 풍성한 은혜를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때로는 스스로 가난하게 되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베풀 때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에 더 깊이 참여하게 되고 우리의 신앙은 완성을 향해 더욱 전진하게 됩니다. 

자, 이쯤되니 설교를 시작하며 품게 되었던 하나의 의문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선교사였습니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서, 자신이 선교한 지역과 자신이 개척한 교회와 자신이 직접 전도한 성도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 자신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선교의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자신이 선교한 거의 모든 지역과 교회에서 왜 그토록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강조했던 것일까요? 바울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과 이웃을 위한 구제야 말로 성도들의 신앙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첩경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과 여러분의 신앙도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사도 바울의 글을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균등의 은혜

자, 이제 바울은 헌금과 구제가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바로 ‘균등’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 8:13-14)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하게 되시면서까지 우리를 부요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평안하고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넉넉하지만 다른 사람은 곤고하고 다른 사람은 궁핍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균등의 은혜가 아니겠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승자 독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은 –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 그곳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어요.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으로 강조하는 균등의 원리는 구약성경에서 차용해온 개념입니다. 

기록된 것 같이 (이제부터 출애굽기 말씀을 인용합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후 8:15) 

바울이 인용하는 출애굽기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만나를 내려 주신 사건의 일부입니다. 광야 어디에서도 먹을 양식을 구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침이 되면 광야로 나가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거두어들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몸도 건강하고 부지런하여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거둔 사람도 있었겠지요. 또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몸이 약하거나 멀리 걸어갈 수가 없어서 조금 거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인용하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는 많이 거두었다고 하여 남지 않았습니다.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그러니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한쪽에 자신만을 위해 쌓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재산을 쌓아 놓고 싶은 마음이 있지요. 쌓아 놓으면 나의 마음이 안심이 될 것 같아요. 어쩌면 이 쌓아 놓고 싶은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선뜻 이웃과 나누지 못하도록 만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나누다 보면 한쪽에 쌓아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의 경험이 충분히 증명하지 않았나요? 한쪽에 쌓아 두려고 아무리 열심히 거두어도 참 신기하게 그것은 남지도 않고 쌓이지도 않아요. 본문 15절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나가서 많이 거두었어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 조금 늦게 나갔더니 진영 가까이에 있던 만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거두어 갔어요. 만나를 찾아 멀리 나가보았지만 그날은 조금밖에 거둘 수가 없었네요. 그런데 여러분,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본문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매일 많이 거둘 수는 없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많이 거두던 사람도 어느 날은 적게 거두게 되어 있다고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의 은혜, 하나님께 베풀어 주시는 균등의 은혜는 너무도 놀랍습니다. 광야에서 살았던 40년 동안, 어느 날은 많이 거두기도 하고 어느 날은 적게 거두기도 했는데 단 한 번도, 단 하루도 양식이 부족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바로 이것이 신앙의 시작점을 넘어 신앙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동참하여 나에게 베풀어 주신 그 풍성한 은혜를 내 곁에 있는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성숙한 성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만나의 은혜요, 균등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이 거두어도, 많이 모아도 그 무엇도 남지 않고 그래서 쌓아 둘 수 없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여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나에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것을 이웃에게 나누며 베푸십시오. 

여러분의 섬김과 나눔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균등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요, 
여러분이 적게 거두는 그날에도 
부족함이 없도록 공급하시는 균등의 은혜를 여러분에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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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