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강해2021. 6. 2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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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성도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성도님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그룹이 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늘 가깝게 지내다 보니 서로에 대해 잘 알고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들이지요. 그 친구들 중에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는 친구도 있고, 교회를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는 친구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친구들,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친구들은 삶이 그렇게 고달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성적이 잘 안 나오거나, 학교를 졸업하고 열심히 준비를 하지만 직장을 얻기가 어렵다거나, 심지어 결혼하여 아이들을 양육하는 과정까지 뭐하나 쉽게 되는 것이 없답니다. 그런데 친구들 가운데 교회를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친구들은 그렇게 일이 잘 풀릴 수가 없더랍니다. 늘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삶이 형통하데요. 예수님을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삶에 고난이 많고, 오히려 예수님을 모르는 친구들은 삶이 형통한 현실을 말하면서 그 성도님이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을 모르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너무 좋다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예수님을 믿으면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은데 예수님을 실제로 믿는 가까운 친구들의 처지와 형편을 너무도 잘 아는 사이에 예수님을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자고 차마 말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신 적이 없으신가요?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우리 마음의 소원을 간구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믿음으로 기도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심지어 지금은 비록 하나님의 뜻이 다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로마서의 말씀을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롬 8:28).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몸에 원치 않는 질병이 찾아오고, 목표하였던 모든 계획이 무너지고, 그동안 공을 들여 쌓아 올린 것들이 한순간 무너지는 때가 있지 않나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믿음의 대해, 신앙에 대해 회의감이 찾아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였을 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우리의 믿음과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당하며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우리의 분명한 현실이 상충할 때, 그것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고백] 지금이 은혜의 때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그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교회 안에 사도 바울을 비판하고 공격하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비판했던 논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겠지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신실한 일꾼이라면 저렇게 가는 곳마다 고난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가 하나님의 진실한 일꾼이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사역자라면 어디를 가든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고 명성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도 바울은 툭하면 감옥에 갇히고, 툭하면 매를 맞고, 툭하면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쫓기고 있으니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바울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자신이 직면한 그 문제에 대해 대답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대답은 그가 경험하는 상황과 현실이 어떠하든 결코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믿음의 고백일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 우리에게 임하고 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여기에서 “이르시되”로 시작하는 구절은 구약성경 이사야서의 인용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인용하는 구절인 이사야 49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바로 이 대목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인용한 말씀이지요. 그리고 이 구절에서 핵심 개념은 ‘은혜의 때,’ ‘구원의 날’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인용한 말씀은 이사야 49장 8절의 앞부분입니다. 그러면,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했던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이 언제를 말씀하시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그 뒷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내가 장차)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사 49:8) 

그러므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인용하는 이사야서의 말씀은 ‘장차’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원의 때, ‘장차’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그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만들어주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 49장 8절이 구약시대의 예언이었다는 사실, 곧 이사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선포하였을 때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말씀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사야 말씀의 앞부분만 인용하고는 그 뒤에 이렇게 설명을 붙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장차’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지금’이라고 바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구약성경의 ‘장차’라는 단어를 ‘지금’이라는 단어로 바꾸었던 이유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이미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셨잖아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은 더 이상 장차가 아닙니다. 구원의 날은 오늘이요, 은혜의 때는 지금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소유한 기독교 신앙은 지금은 고통스럽고 괴롭지만 믿음으로 참고 인내하다 보면 장차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하게 되리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바로 오늘이 구원의 날이요 바로 지금이 은혜의 날이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에게 이 믿음을 흔들고 싶었어요. 너의 현실을 보아라, 지금 너에게 찾아온 아픔과 고난을 보아라. 그러고서도 너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공격했어요. 그리고 성도 여러분, 동일한 공격이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 몰려옵니다. 아니 당신의 현실을 정확히 보라고, 당신의 삶에 질병이 찾아오고, 고통이 찾아오고, 궁핍이 찾아오고, 염려와 걱정거리가 하루도 떠나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공격합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느냐, 당신에게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사도 바울은 자신의 믿음이 공격을 받고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려 할 때 더욱 큰 확신을 가지고 선언합니다. 
“보라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모습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이 믿음에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형편이 어떠하든 이 믿음에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로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역설의 진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극심한 고난을 빌미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음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현실의 고통에 눈을 감았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충성을 다하는 바울 자신의 삶에 극심한 고난이 지속되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거든요.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고린도후서 6장 4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충성을 다하여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신이 겪는 일이 무엇인지 서술합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한 가운데서도 (고후 6:4-5)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지금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길은 영광의 길입니다. 복된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은 또 하나의 진리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많아요. 그래서 많이 견디어야 합니다. 환난을 견디어야 합니다. 궁핍을 견뎌야 합니다.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을 겪어야 합니다. 자지 못할 때도 있고 먹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고린도후서 6장 8절) 

여기에서 그러하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영광과 아름다운 이름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영광과 욕됨이 함께 있어요.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이 함께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고난의 길도 있어요. 우리는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만 취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가지가 모순처럼 들리시나요?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반문하고 싶은 분은 안 계세요? ‘아니,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형통하게 된다는 겁니까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겁니까?’ 오늘 본문의 대답은 둘 다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꾼으로 충성하면 은혜의 삶을 살게 됩니까? 괴로운 삶을 살게 됩니까?’ 오늘 본문의 대답은 그 두 가지가 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자, 사도 바울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모순과 역설의 차이를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모순과 역설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모순이란 무엇입니까?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거짓입니다. 그래서 모순의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사안은 결코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역설은 무엇입니까? 논리적으로만 보면 서로 상충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한 진리를 전할 수 없어요, 그래서 엇듯 보기에는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명제를 늘 함께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역설이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고운 정 미운 정’ 곱다라는 말과 밉다는 말은 서로 상충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만 선택하여 ‘고운 정’이라고만 하거나 ‘미운 정’이라고만 하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충분히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언듯 보기에는 상충되는 개념이지만, 그 두 가지 개념이 모두 담겨 있어야 그 의미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역설이에요. 

우리의 신앙에는 역설의 진리가 참으로 많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입니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입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말도 안 되는 모순이지요.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수가 없어요. 이 두가지 명제가 함께 있어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균형 있게 묘사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입니다. 자, 모순과 역설의 차이에 대해 말씀을 드렸으니 이제 다시 본문이 말씀하는 두 가지 진리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바로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며 많은 고난을 당한다는 것 역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이 두 가지 진리는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진리는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거든요. 이제 사도 바울은 그 역설의 진리를 멋진 필치로 서술하기 시작합니다. 8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속이는 자 같습니다. 우리가 믿고 선포하는 신앙의 진리는 언듯 보면 모순처럼 보이거든요. 그러니 말장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모순된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고 역설의 진리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도 참되고, 우리의 신앙도 참되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진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명한 자와 같아요. 누가 우리에게 주목합니까? 이 세상에 누가 우리에게 관심을 둡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하나님께서 늘 관심을 갖고 살펴보시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는 무명한 자인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천국에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 같습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죽음과도 같은 절망에 결코 빠지지 않습니다. 

마지막 10절도 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근심하는 자 같아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충성을 다하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걱정과 근심이 멈추지를 않아요. 그러니 근심하는 자의 모습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서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거든요. 걱정과 근심의 거리가 가득하지만 우리의 마음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 흘러넘치잖아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 같아요. 통장 계좌를 보면 잔액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서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이렇게 말했잖아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 같아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 선언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듯 수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나누어주는 사람이에요.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마지막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실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 그룹 가운데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하는 친구는 많은 고난을 받고, 오히려 예수님을 모르는 친구는 삶이 형통하여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였던 성도님이 계셨지요? 저는 그분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집사님. 우리는 예수님 믿고 형통하였다는 것으로 전도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복을 받았다고 그것으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불신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나의 삶에 아픔이 찾아올 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아픔을 넉넉히 이겨내는 모습이요, 나의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조차 우리 마음에 기쁨이 멈추지 않는 모습이며, 세상의 온갖 불의로 말미암아 억울한 일을 당하는 동안에도 우리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진실한 신앙의 모습이요,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에게 보여주기 원하는 모습이고, 바로 이러한 모습을 통해 그들을 예수님의 은혜로 초대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전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도 큰 아픔과 고통이 늘 찾아오고 있지요? 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맞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과 아픔이 있어요. 그저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많지요.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또 하나의 분명한 진리가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도 여러분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여러분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여러분은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며 
여러분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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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