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강해2021. 7. 4. 17:40
반응형

어느 무명의 군인이 기록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기도문이라기보다는 기도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 뉴욕에 있는 장애인협회의 한쪽 벽에 약 30년 동안 걸려 있었는데, 그 글귀가 사람들에게 소개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보셨을 만한 기도입니다. 이 글의 저자는 말씀드린 것처럼 알려져 있지 않고, 어느 무명의 군인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의 제목은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I asked God)입니다. 

나는 성취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드셔서, 겸손히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허약하게 만드셔서,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재물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가난하게 만드셔서, 지혜롭게 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연약하게 만드셔서, 하나님이 필요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무명의 군인은 자신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 그 무엇도 받지 못했지만, 
내가 소망했던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나의 무언의 기도는 응답 받았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응답 받지 못한 기도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던 하나의 기도 제목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8절) 

여기에서 “이것”은 위의 7절에 등장하는 “육체의 가시”입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안질이었다고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일시적인 발작을 일으키는 간질이었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큰 고통 속에서 선교를 감당해야 했던 바울이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듯, 바울을 괴롭혔던 육체의 가시가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바울의 몸에 선교 사역은 물론이요 일상생활을 하기에도 매우 치명적인 육체의 질병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겪었던 질병이 아니라 바울의 삶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만성적인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그 질병이 자신에게서 떠나가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본문 8절에서 바울은 이 질병이 떠나가도록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바울의 질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어요. 

이 사실을 담담히 기록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신약성경의 또 다른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경은 그날 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도의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그리고 신약성경은 그날 밤 예수님도 세 번에 걸쳐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알려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도의 결과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이 잔,’ 곧 십자가의 고통이 자신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한 그대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만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규정한다면, 어느 무명의 군인이 드렸던 기도만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던 바울의 기도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기도도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느 무명의 군인이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 그 무엇도 받지 못했지만, 내가 소망했던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고백하잖아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질병이 사라지기를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질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과정에서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발견하였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뜻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세번에 걸친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는 성부 하나님의 결정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 – 심지어 그것이 인간의 모든 죄악을 대신지고 십자가의 무서운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수용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인 기도가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로 전락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정작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신앙이 아니지요. 예수님의 기도와 사도 바울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그대로 들어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아니, 그러한 때가 매우 많습니다. 하나님은 무명의 군인에게도 그렇게 하셨고, 사도 바울에게도 그렇게 하셨고,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응답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있으니, 우리는 기도를 통해 더 깊고 더 풍성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여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과대평가와 자만이라는 질병

바울의 기도는 그의 질병을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깨달았던 바울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고린도후서 12장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은 사도 바울 자신이 경험한 영적인 체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1절) 

고린도후서 12장은 바울이 체험한 주님의 환상과 계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주님의 환상과 계시에 대해 이야기하죠. 그리고 본문 6절에 이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6a절) 

바울이 1절부터 지금까지 말한 환상과 계시는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참된 것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영적인 체험, 곧 환상과 계시를 말하면서 그와 관련하여 매우 강조하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6b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놀라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그만 두겠다’고 말하네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바울 자신을 바라보거나 바울의 이야기를 들을 때 바울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 곧 그를 과대평가하는 것이 너무도 두려워서 자신의 경험을 다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바울이 환상과 계시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바울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에도 과대평가, 곧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7절) 

사도 바울은 환상과 계시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참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환상과 계시를 보았다고 하여 바울의 삶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환상과 계시를 보기 이전에도 바울은 바울의 삶을 살았고요, 환상과 계시를 본 이후에도 바울은 바울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어요. 만일 바울이 보았던 환상과 계시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라면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 환상과 계시의 내용을 전해주었겠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물론이고 바울의 서신 그 어디에도 그가 체험한 환상과 계시에 대한 내용은 단 한 번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하지요. 바울이 신비한 환상과 계시를 보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주변에서 바울이 어떤 특별한 영적인 능력을 소유한 사람인 것처럼 과대평가하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신앙 인품이나 자신의 성품은 그 이전과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비한 환상과 계시를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자신이 특별하고 대단해 보이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자만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 때문이든, 바울이 이룬 선교의 위대한 열매 때문이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에 대해 과대평가하게 된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바울을 의지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믿음은 파선하게 되어 있어요.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 때문이든, 바울이 이룩한 선교의 위대한 열매 때문이든, 바울의 가문이나 학벌 때문이든 바울 자신이 스스로 자만하게 된다면 바울은 교만이라는 무서운 덫에 걸리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주님의 일꾼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을 망쳐버릴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질병은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자만이라는 질병, 곧 교만이라는 뿌리 깊은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에요. 하나님은 바울에 대한 사람들의 과대평가, 바울 자신에 대한 바울의 자만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육체에 가시를 넣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바울을 겸손하게 만드시려는 의도입니다. 

이쯤 되어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과 교만의 의미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겸손이란 지금 내가 처해있는 위치보다 나 자신을 더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 정도의 위치에 있다면 스스로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겸손이 아닙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지독한 교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나 자신을 원래의 위치보다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나의 원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위치, 우리 인간의 형편이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그러니 나 스스로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려고 해도 내려갈 곳이 없는 거예요. 이러한 나의 형편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을 나 자신의 위치에서 스스로 더 낮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전히 교만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인생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여러분은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의 덕목을 갖추셨나요? 아니면 겉모습은 겸손하지만, 교만이라는 질병이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지는 않으세요? 우리는 우리의 몸에 질병이 찾아오면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심지어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질병을 미리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질병의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질병이 있다면, 그리하여 그 질병의 치유를 위해 우리가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할 마음의 질병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를 과대평가하여 하나님이 아닌 그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이요, 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여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만하여 교만해지는 태도입니다.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던 질병을 치유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뜻이 있어 그의 육체에 가시를 박아두셨으니 바울의 이 기도만큼은 들어주시지 않으시네요. 그 대신 바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9a절)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가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만이라는, 교만이라는 더욱 치명적이고 무서운 질병으로부터 바울을 지켜주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원리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9b절) 

하나님은 ‘나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진다고 말씀하시네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은 처음부터 완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온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던 그 태초의 시간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온전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온전해진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온전히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약함은 하나님의 약함이 아니라 당연히 인간의 약함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 보다 정확히 묘사하면 우리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에게 온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바울의 육체에 박혀 있던 가시는 너무도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가시로 말미암아 과대평가되지도 않고 자만하지도 않게 된다면, 그래서 바울이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인식하는 겸손의 사람이 된다면 그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선언하셨던 것이요,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이 선포하는 ‘약함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곧 약함의 은혜를 깨달은 바울의 반응이 이제 본문의 마지막인 10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10절) 

바울은 약함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을 약하게 하는 요소들, 곧 자신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들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어요. 바울은 질병으로 약해졌습니다. 그는 능욕을 받으며 약해졌고, 궁핍하여 약해졌습니다. 박해와 곤고는 바울을 약하게 만들었고 그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약함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깨닫게 되니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고 약함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큰 질병을 비롯한 온갖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마지막 결론인 10절 말씀에서 눈에 띄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10절을 다시 보시겠어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님을 위한 삶을 살기 원했어요. 그는 사도요, 선교사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온전히 헌신했고 자신의 사명에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10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표현에는 한 평생 하나님의 사명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던 바울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10절은 그가 진정한 사도, 신실한 선교사,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음 전도자, 곧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숨겨진 비결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는 구절입니다. 

여러분, 마음 속으로 한번 대답해 보시겠어요? 과연 무엇이 바울을 우리가 알고 있는 그토록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만들었을까요? 그가 로마 시민권자라는 사실입니까?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다는 그의 빛나는 학력입니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던 그의 출신 성분이었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의 유창한 헬라어 능력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의 장점은 그가 위대한 사도가 되는데 결코 핵심적인 원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의 여러 가지 장점은 스스로 자만하게 할 수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몸에 무서운 질병을 넣어두어야 했던 걸림돌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러면 과연 무엇이 바울을 그토록 위대한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였던 것일까요? 그의 육체적 가시, 그가 떨쳐버리고 싶어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던 그 몹쓸 질병이요, 본문 10절에서 바울이 자랑하는 약함, 능욕, 궁핍, 박해와 곤고입니다. 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께 작은 역할이라도 쓰임받기 원하십니까? 여러분도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이제는 주님을 위해 봉사하며 살기를 원하시나요? 여러분의 장점, 여러분의 달란트,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만한 그러한 것들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여러분의 아픔, 여러분의 슬픔,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내보이고 싶지 않은 여러분의 그 약점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는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을 위해 봉사하기 원하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약함의 은혜’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