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인문학2021. 10. 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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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헌신의 마음으로 신학교에 입학한 전도사님이 계셨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며 그 마음의 열정이 조금씩 수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불처럼 타올라야 주님의 일에 충성을 할 수 있다고 여겼던 전도사님은 큰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학교의 교수님과 학생들이 공원에서 바비큐 파티에 참여하게 되었다. 바비큐를 위해 불을 피우며 교수님은 이런 교훈을 주었다. “마른 장작에 힘 있게 타오르는 불꽃으로는 고기를 맛있게 구울 수 없습니다. 타오르는 불은 고기를 태워버리죠. 그러나 불길이 잦아들고 장작이 숯불로 변하면 그제야 고기를 먹음직스럽게 구울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여러분들은 지금 숯불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로써 전도사님의 고민은 말끔하게 해소되었다. 이후, 공원에서 바비큐를 구울 때마다 전도사님은 그날의 교훈을 떠올리며 자신이 타오르는 불꽃인지, 아니면 은은한 열기를 발하는 숯불인지를 점검하게 되었다. 

일상의 사물이 과거의 기억과 교훈을 떠오르게 할 때가 있다. 그 사물이 가까이 있다면 더 자주 그날의 교훈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 마련이다. 


예수님의 실물 교육: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교구(敎具)를 폭넓게 사용하셨다. 산에 올라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랐으니 제자들의 머리 위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공중의 새를 바라보자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6) 

예수님은 계속해서 “들의 백합화를 보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이 시선을 돌려 주변에 피어있는 백합화를 바라보자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8-29) 

시간은 어느덧 흘러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고 더 이상 제자들의 곁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도가 되었다. 사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무엇하나 풍족하지 않았던 그들은 시시각각 하늘을 나는 공중의 새를 바라보며 주님의 교훈을 기억하지 않았을까? 바쁘게 길을 걷으면서도 자신의 발길에 스치는 백합화의 향내는 주님과 함께 했던 추억을 끄집어내지 않았을까? 비록 주님은 그들 곁에 안 계시지만 공중의 새를 먹이시며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여전히 자신과 함께 하심을 그들은 느낄 수가 있었다. 


예수님의 실물 교육: 어린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사용하셨던 또 하나의 중요한 교구(敎具)가 어린이였다. 하루는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라는 질문을 놓고 논쟁이 이어졌다. 이제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것인데,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인지에 관심이 몰렸다. 그 열두명은 자타가 인정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대를 단번에 무너트리는 말씀을 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막 9:35)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중요한 가르침을 제자들의 마음에 각인시키기 위해 중요한 교구를 하나 사용하셨다. 이때 사용하신 도구가 ‘어린이’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막 9:36) 

예수님 시대에 어린이는 사회적 등급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속하였다. 그 부모에게는 귀한 자녀이지만, 다른 사람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 결정할 권리나 특권이 전혀 없음을 의미했다. ‘누가 큰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는 가장 작은 존재요,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들의 모임 한 중앙에 예수님은 어린이를 세워주셨고, 주님께서 친히 안아 주셨다.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도, 안드레도, 요한도 주님께서 한 중앙에 세워주신 일이 없었는데 아무런 권한이나 주도권도 없었던 어린이를 주님께서 이렇게 대우해주셨다. 제자들의 눈에 잊을 수 없는 이 장면이 펼쳐지고 있을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막 9:37)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그 모임의 중심에 세워 주시고 친히 안아 주셨던 것처럼, 세상의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자를 영접하여 섬겨야 함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제자들의 평소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들의 눈앞에 어린이들이 보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주님의 가르침을 떠올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막 10:13) 

한글 성경에 “사람들이”라고 번역된 주체는 당연히 어린이들의 부모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는 이 문장의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어린 자녀였다. 제자들은 얼마 전 주님의 가르침을 잊어버린 채, 그들에게 익숙한 방식대로 어린이들과 그들을 데려온 부모를 대하였다. 그것은 정중한 거절이 아닌 “꾸짖음”이었다. 제자라는 자신들의 위치가 사회적으로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그들을 꾸짖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모습을 보시는 주님께서 어찌 가만히 계실 수 있었겠는가?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14) 

제자들은 예수님께 혼쭐이 났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완악한 마음을 보시며 크게 노하셨던 예수님이지만, 이번만큼은 예수님의 제자라 불리는 자신들을 향해 크게 노하셨으니 이 장면을 어떻게 잊을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는 크게 화를 내셨다. 그러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어린 자녀는 또다시 받아들이고 축복하여 주셨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 10:16) 

이제 제자들의 마음에 분명히 각인되었다. 제자라는 이름, 사도라는 위치, 교회 지도자라는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은 주님께서 화를 내며 혼을 내시지만 아무런 권리도, 특권도, 결정권도 없는 어린이는 주님께서 안아 주시며 축복하셨던 그날의 장면이 말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지위가 높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자리에 있을수록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한 성도를 품고 섬기며 축복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모범이라는 사실도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어린이를 마주칠 때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안아 주셨던 어린이는 대략 몇 살 정도 되었을까? ‘어린 아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파이디온’만으로는 그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안아 주셨다는 성경의 기록은 하나의 힌트를 준다. 주님께서 그 아이들을 안으신 채 안수하여 주셨으니, 한 팔로 안을 만한 정도의 어린이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기준으로 이야기하면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미취학 어린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시간이 흘러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교회를 돌아보며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목양하는 동안, 제자들의 눈 앞에는 언제나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젉은 엄마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아직은 부모의 품을 떠날 수 없어, 하루 24시간 엄마의 손을 놓을 수 없는 어린아이들, 꼭 그 또래의 아이들을 예수님께서 친히 안아 축복해주시지 않았던가. 제자라는 지위에 있었기에, 그리고 지금은 사도라는 권위 있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교회 안에서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던 그들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무명의 여인들을 대할 때마다 주님의 호된 꾸지람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막 10:15)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사도들은 또다시 작은 자를 품어 안으셨던 주님을 떠올리며 스스로의 마음도 점검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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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