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룹과 말씀묵상2022. 4. 8.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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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예장총회(통합) 순교자기념선교회가 발행하는 『순교신학과 목회』(2022년 6월)에 기고한 원고입니다. 순교자기념선교회에 양해를 얻어 저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크게 바뀌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이전까지, 예배 시간은 고사하고 교회 안에 마스크를 쓰고 들어온다는 것은 한국 교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천지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었던 제1차 유행 당시, 성도들 중에는 방역을 위해 예배시간에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도들도 있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에 어떻게 마스크를 쓸 수 있느냐고 생각하는 성도들도 있었다. 그로부터 약 2년이 흐른 지금,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물론이요 대표기도를 하는 장로나 설교를 하는 목사들 중에도 마스크를 쓰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마스크를 쓰고 예배할 수 있는지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배시간에 마스크를 바르게 착용하지 않는 성도가 있으면 불안하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코로나가 초래한 신앙생활의 변화에서 마스크 착용은 매주 작은 부분이다. 이른바 온라인 예배가 대중화되었고, 교회는 코로나 확진자나 유증상자들에게 온라인 예배를 권장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생명처럼 지키며 강조하였던 주일 성수는 어디까지나 예배당에 몸으로 참여하는 예배였지만 코로나를 이유로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을 이제는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코로나 팬데믹은 신앙생활의 모습과 형태만 바꾼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의 양태만 변했다면, 교회와 목회자가 그에 적응하면 된다. 문제는 코로나의 확산이 신앙생활 자체를 크게 위축시켰다는 점이다. 그리고 팬데믹 시대에 가장 크게 위축된 목회 영역은 단연코 소그룹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고 약 2년 동안 정부는 교회에 단계별 방역수칙을 강제하였다. 이에 따르면 주일예배를 비롯한 정규예배는 예배당 규모의 20%부터 많게는 70%까지 성도들에게 개방할 수 있었다.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그나마 주일예배는 지속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동일한 기간에 변하지 않는 방역수칙도 있었다. 곧, ‘소모임 금지’다. 소그룹의 활성화가 목회의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2020년부터 시작된 약 2년의 코로나 시대를 소그룹 목회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소모임 금지의 시대’로 소그룹 목회는 축소가 아니라 원천 차단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한지 3년째가 되어 가는 지금, 한국 교회는 목회 현장을 재건해야 한다는 당위성 앞에 서 있다. 코로나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온라인 예배를 비롯한 자구책을 간구해야 했던 지난 2년 여 기간을 바벨론 포로 시대로 비유할 수 있다면, 팬데믹(pandemic)의 시대를 지나 엔데믹(endemic)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지금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해야 했던 시기로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목회 영역이 소그룹이었다는 점에서 소그룹 목회의 회복은 우리 시대의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는 팬데믹 시대를 지나고 있는 한국 교회가 소그룹 목회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급격한 변동의 시기에도 변하지 않는 소그룹의 원리가 무엇인지, 또한 팬데믹의 시기를 지나며 변화된 소그룹의 환경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변하지 않는 소그룹의 원리

교회성장학에서 자주 인용하는 격언이 있다. 

방법론은 다양하지만 원리는 그렇지 않으며,
방법론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원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Methods are many, Principles are few;
Methods may change, But Principles never do. 

코로나 팬데믹은 목회의 방법론을 보다 다양하고 변화무쌍하게 만들었다. 만일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활성화하기 위해 급격히 변화하는 소그룹의 방법론만 뒤쫓는다면 정작 소그룹 목회에 면면히 흐르는 변하지 않는 원리를 놓치기 쉽다. 방법론이란 처음부터 다양하고 늘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급변하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원리를 찾아야 한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목회 현장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걸음 뒤에서 소그룹 목회를 관찰해보면 코로나 시대에도 소그룹 목회의 원리는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방법론은 변하더라도 원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에도 변하지 않았던 소그룹 목회의 원리를 세 가지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이다. 일찍이 소그룹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던 존 웨슬리는 대중설교만으로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큰 한계가 있음을 이렇게 지적하였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영적 각성을 일으키고 훈련을 시키지 않은 채 설교만하는 것은 살인자를 위해 자녀를 낳는 것과 같다. …(중략)… 정규적인 모임, 훈육, 규율 및 교류가 없으면 영적 각성을 경험한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더 빨리 영적 수면 상태에 빠진다.”[각주:1]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한국의 목회자 가운데 한 명이 조용기 목사다. 1981년 출판한 영문판 저서 『성공적인 구역』(Successful Home Cell Group)에서 조용기 목사는 사도행전 2장을 근거로 초대 교회 안에 성전에서 모이는 대형집회와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급격한 부흥이 삼중축복과 오중복음을 설파하였던 조용기 목사의 설교와 그의 치유사역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조용기 목사 자신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 비결이 초대교회의 가정모임에 해당하는 구역이라고 단언하였다. 

굳이 역사적 인물들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코로나 이전에도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설교만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한다고 생각하던 목회자는 거의 없었다. D12, G12, 제자훈련, 큐티나눔방 등 소그룹 방법론을 적용한 다양한 양육 프로그램이 개발되었고 신학교에서도 소그룹 목회를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맞이한 한국 교회는 약 2년 간 소그룹 목회를 멈추어야 했다. 바이러스의 집단 감염을 차단해야 했던 방역당국의 입장에서는 밀폐, 밀집, 밀접의 세 요소가 공존하는 교회의 소모임을 금지하였던 것인데 방역당국의 기준과 의도가 무엇이었든 교회는 소그룹 목회가 멈춘 시간을 통과해야 했다. 이 기간 한국 교회는 코로나의 시기를 지나며 기존의 소그룹을 대체할 수 있는 활동을 적극 개발하였다. 대면하여 심방할 수 없으니 문고리 심방을 시행하고, 소그룹으로 성경공부를 할 수 없으니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하여 배포하고, 대면하여 교제할 수 없으니 온라인을 통한 만남을 추진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여본 한국 교회는 다시금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다른 노력을 모두 동원하더라도 소그룹 목회를 대체할 수 없으며, 소그룹이 차단되니 목회의 원동력도 사라진다는 분명한 사실을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약 2년의 소모임 금지 시대는 목회 현장에서 소그룹 목회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였다. 

둘째, 소그룹 목회의 일반적 특징이다. 소그룹이라는 방법론은 대형집회와 비교할 때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장점은 소그룹 안에서 인격적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대형집회로 구분할 수 있는 주일예배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같은 시간에 같은 예배당에서 같은 목사의 설교를 듣더라도 주일예배만으로는 교회 성도들 사이에 인격적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그룹으로 모여 대화를 나누다 보면 쉽게 인격적 만남이 가능해진다. 소그룹의 또 다른 장점은 뛰어난 교육적 효과에 있다. 한 사람의 교사가 학생 50명을 가르칠 때와 학생 10명을 가르칠 때의 교육적 효과는 분명히 다르다. 동일한 원리로, 멘토링과 상호 모방이 가능한 소그룹에서는 신앙의 훈련과 교육이 효과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소그룹의 장점을 한 가지만 더 지적한다면, 현대 사회와의 적합성을 꼽을 수 있다. 현대 사회는 권위주의가 해체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하여 권위 있는 소수의 주장보다는 각자의 경험에서 나오는 대중의 의견이 중요해진 다원주의 사회다. 그런데 교회의 대형집회는 회중들에게 수동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반면 소그룹은 참석자들이 자신의 경험이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소그룹의 장점은 팬데믹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소그룹의 원리다. 

소그룹이라는 환경의 일반적 장점을 지적하였으니, 그에 따르는 위험성도 집고 넘어가자. 소그룹에서는 참여자들의 인격적 교류가 활발히 일어나는 장점이 있지만 그렇기에 상대방의 의견이나 감정이 틀렸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렵다. 소그룹에서는 기독교 교리나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부분을 분명히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어렵다는 의미인데 자칫 오류나 죄의 문제를 묵인할 수 있다. 또한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이 소그룹을 인도하다 보면 ‘검증되지 않은 가르침’(unapproved teaching)이 소그룹을 통해 전파될 위험성이 존재한다. 소그룹 환경이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 한 가지만 더 지적하면, 로버트 우스나우가 이야기한 ‘자기중심적 종교’(me-first religion)로 변질될 위험성이다. 소그룹은 참여자 개인의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자칫 공동체나 그 너머의 사회적 이슈를 무시하는 경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로버트 우스나우는 ‘자기중심적 종교’의 특징이 소그룹으로 모인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는 시간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관찰하였다. [각주:2] 소그룹의 장점과 함께 이러한 소그룹의 위험성 역시 코로나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소그룹 목회의 일반적인 원리다. 그러므로 소그룹 목회를 통해 목회 현장의 활력을 불어넣기를 원하는 목회자들은 팬데믹 시대에도 소그룹의 장점은 극대화하고 소그룹의 위험성은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셋째, 소그룹과 영성의 관계다. 소그룹은 그것을 채택한 기독교 공동체의 영성을 담지하기 마련이다. 교회사에서 가장 큰 성과를 내었던 소그룹 목회는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속회, class meeting)과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구역, home cell group)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감리교의 속회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은 방법론적으로 너무도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 이유는 감리교운동과 순복음운동이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인 영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덕(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가치를 추구하였기에 ‘속회-신도반-선발신도반’이라는 다층적 구조의 소그룹을 구성하였다. 반면, 조용기 목사는 오순절적이고 번영신학적인 가치를 전파하며 교회 성장을 추구하였기에 구역이라는 단 하나의 소그룹 형태로 만족할 수 있었다. 동일한 원리로 랄프 니버가 제창하였던 구역 모델은 목회적 돌봄이라는 가치를, 칼 조지가 주장했던 메타 모델은 평신도의 리더십이라는 가치를, 그리고 닐 콜이 전파한 가정교회 모델은 제자도라는 가치를 담아내기 위한 소그룹 목회다. [각주:3] 이러한 소그룹과 여성의 관계는 팬데믹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소그룹 목회의 원리다. 그러므로 소그룹은 매우 효과적인 목회 방법론이지만 목회자나 교회가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인 영성과 어긋나는 경우에는 그 장점을 발휘할 수 없다. 일례로 교회의 시스템을 팀사역 중심으로 변환하면서도 담임 목사가 목회 리더십의 일부를 평신도 리더들에게 이양하지 않는 경우를 본다. 메타 모델에 해당하는 팀사역 중심의 소그룹 목회가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는 평신도의 사역 리더십인데, 담임 목회자가 추구하는 가치가 이와 다르니 교회의 팀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소그룹 목회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공동체가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를 분명히 하고 그에 부합하는 소그룹 목회를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팬데믹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원리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이 크게 활성화되었던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적이고 번영신학적인 영성에 대해 다양한 비판이 가능하지만, 조용기 목사가 주창했던 사차원의 영성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공유하는 교회의 분명한 가치였다. 그리하여 조용기 목사가 추구하는 사차원의 영성을 강화하고 재생산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은 교회의 성장에 핵심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팬데믹 시대에도 풍성한 소그룹 목회를 꿈꾸는 장로교 목회자들은 먼저 다음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팬데믹 시대에 장로교회가 추구하는 소그룹 목회의 기독교적 가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개혁교회의 영성인 ‘경건’이다. 칼뱅은 경건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각주:4]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경건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지식은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대한 암기식 지식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여 아는 지식을 말한다. 그런데 개혁교회의 경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깨닫는 것이 경건의 시작이라면 경건의 지향점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다. 사랑과 경외라는 개념은 언듯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이 두 개의 개념을 칼뱅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미지 안에서 조화시킨다. 만일 하나님 앞에 선 성도의 모습이 주인 앞에 선 종의 모습이라면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는 있어도 사랑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개혁교회가 추구하는 경건의 지향점인데 시대가 변하여도 개혁교회가 추구하는 경건의 가치가 변할 수는 없다. 그리고 팬데믹 시대를 지나며 새롭게 소그룹 목회를 구성하려는 개혁교회 목회자들은 소그룹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러한 경건의 훈련에 두어야 할 것이다. 


소그룹 목회의 급변하는 환경

소그룹 목회의 변하지 않는 원리로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 소그룹 목회의 일반적 특징 그리고 소그룹과 영성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렇게 소그룹 목회의 변하지 않는 원리를 정리하고 나면, 이제 코로나 팬데믹으로 급변하는 이 시대를 소그룹 목회의 관점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점을 확보하게 된다. 물론, 향후 코로나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것이 한국 교회의 소그룹 목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현재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지난 2~3년 동안 진행되어온 목회 현장의 변화는 얼마든지 관찰하여 소그룹 목회의 관점으로 분석할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하며 소그룹 목회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목회 역량의 편중 현상이다. 목회 현장은 그 환경에 따라 대형집회와 소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와 소그룹 목회 모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절대비교가 아닌 상대비교를 한다면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보다는 소그룹 목회가 더 크게 위축되었다. 코로나 시대는 소모임 금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코로나의 시대에도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한국 교회의 목회적 총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다만, 그 방향이 바뀌었다. 코로나로 대면 예배에 제약이 생기면서 한국 교회는 온라인 예배에 목회 역량을 집중하였다. 온라인 예배가 익숙해지면서, 또다시 온라인을 통한 성경공부나 기도모임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을 일방적으로 콘텐츠를 전달하는 대형집회와 참여자들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소그룹으로 구분한다면, 그 대부분이 대형집회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성도들의 입장에서도 코로나 시대는 신앙생활의 큰 변화를 야기하였다. 지극히 상식적인 측면에서 코로나의 시대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크게 위축되었는데, 이는 성도들의 ‘참여’가 급감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성도들의 참여가 줄어드는 동안 오히려 급증한 것도 있다. 신앙생활을 위한 ‘자료’다. 상술한 바와 같이 코로나의 시대라고 한국 교회가 보유한 목회 역량의 총량이 갑자가 줄어들든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직접 만나는 목회 활동을 할 수 없으니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예배나 성경공부의 영상을 제작하고 때로는 문서의 형태로 비대면 자료를 제작하여 배포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유튜브나 인터넷 검색창에서 ‘예배’나 ‘성경공부’를 검색하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콘텐츠 목록이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이 신앙생활을 위한 ‘자료’다. 소그룹 목회의 관점에서 ‘참여’와 ‘자료’는 매우 중요한 주제다. 일반적으로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에서 성도들에게 제공되는 것이 자료라면 소그룹 목회에서 성도들이 체험하는 것이 참여이기 때문이다. 

코로나의 시대는 목회 역량을 소그룹보다는 주일예배를 비롯한 대형집회에 집중하게 강요하였다. 성도들의 입장에서도 참여는 줄어들고 자료는 넘쳐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코로나 이전에는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와 소그룹 목회가 공존하였던 목회 현장이 팬데믹을 지나며 대형집회 중심으로 모든 목회 역량이 편중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둘째, 진실한 관계를 향한 갈망의 증폭이다. 코로나의 시대를 지나며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를 지칭하기 위해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코로나 블루의 원인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코로나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원인이 되었다. 또 다른 이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해 우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원인들은 서로 연계되어 증상을 악화시킨다. 의학계는 아직 코로나 블루의 정확한 원인과 진단, 그리고 치유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상식선에서 동의할 수 있는 코로나 블루의 원인과 해법은 있다. 코로나 블루는 사람과의 불리가 원인이고, 그래서 사람과의 만남이 해법이다. 그러므로 코로나 블루로 표현되는 코로나 시대의 특징은 진실한 만남에 대한 갈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갈망은 소그룹 목회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운동의 소그룹인 속회에 참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장차 올 심판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죄로부터 구원받기 원하는 갈망”을 제시했다. 여기서 웨슬리가 이야기하는 갈망이란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관계로의 갈망인데,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꾼다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갈망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존 웨슬리가 성도들 사이의 인격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소그룹의 참여 조건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갈망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람들과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를 지배하고, 사람과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가 서로 역동적으로 어우러지는 환경이 바로 소그룹이다. 

코로나 시대를 소그룹 목회의 관점에서 관찰할 때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진실한 만남에 대한 갈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는 사람들의 내면에 찾아온 아픔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관계와 만남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스스로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진실한 만남에 대한 갈망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을 향한 갈망이 내재되어 있다. 존 웨슬리가 일찍이 간파했던 것처럼 이러한 갈망이 소그룹 목회의 전제 조건이라면, 코로나 시대는 외형적으로 소모임 금지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을 소그룹 목회를 위한 좋은 토양으로 일구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셋째, 온라인 소그룹의 대중화다. 코로나 이전에도 온라인교회에 대한 논의는 지속되었지만, 한국 교회의 대체적인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직접 대면하여 만나지 않는 온라인 교회는 공동체성에 심대한 결함이 발생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신학적 논의를 뒤로하고 지금 당장 온라인 소그룹을 시행하도록 강요하였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쉽게 떠올리는 온라인 소그룹은 영상기반(Video-based) 플랫폼을 통한 소그룹이다. 영상기반 플랫폼은 화상전화 방식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줌(ZOOM)을 비롯하여 구글 행아웃이나 페이스북그룹 등 소그룹 목회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영상기반 플랫폼이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온라인 소그룹을 위한 플랫폼은 그 외에도 다양하다. 카카오톡의 그룹콜처럼 음성기반(Audio-based) 플랫폼을 이용한 소그룹도 가능하다. 음성기반 플랫폼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단점도 있지만, 전화통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소그룹에 참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 외에도 비동시적(Asynchronous) 플랫폼이 있다. 카톡, 인스타그램,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SNS)가 이 범주에 속한다. 참여자들은 사전에 승인된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 글이나 사진을 남긴다. 다만, 온라인 공간에 들어오는 시간이 서로 달라 비동시적 플랫폼이라고 부른다. 비동시적 플랫폼은 소그룹의 역동성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만큼 참여자들에게 부담이 적다는 장점도 있다. 미국 새들백교회의 온라인캠퍼스 담당자인 제이 크란다(Jay Kranda) 목사는 온라인 소그룹의 시작은 문자 기반의 비동시적 플랫폼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문자 기반의 비동시적 플랫폼을 시작으로 음성기반이나 영상기반 플랫폼으로 옮겨올 수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시대에 온라인 소그룹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었지만, 온라인 소그룹의 또 다른 장점은 디지털 자료를 공유하기가 용이하다는 점이다. 온라인 소그룹은 필연적으로 공통된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플랫폼은 디지털자료를 공유하는 기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소그룹의 성공 사례로 보고된 새들백교회와 알파코스는 온라인 소그룹의 이러한 장점을 극대화한 경우다. 새들백교회는 온라인 소그룹의 참여자들이 함께 시청할 수 있는 영상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으며, 이와 연동하여 영상을 시청한 참여자들이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열린 질문을 책자로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소그룹 리더는 다른 이들을 가르치거나 정해진 목표를 향해 이끌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교회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를 참여자들에게 온라인을 통해 배부하고, 책자의 질문을 중심으로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환경만 조성하면 된다. 한편, 알파코스의 소그룹은 토크(talk)가 핵심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핵심 주제를 다루는 알파코스에서는 토크에 앞서 반드시 주제 영상을 함께 시청하도록 되어 있다. 알파코스의 창시자인 니키 검블(Nicky Gumbel)은 팬데믹의 상황 속에서 알파 코스를 온라인으로 진행한 사례를 소개하며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새들백교회와 알파코스는 온라인 모임을 위한 플랫폼을 이용하기에 양질의 디지털 자료를 보다 쉽게 공유하고 그와 관련된 열린 질문을 활용하여 온라인 소그룹의 장점을 살려낸 경우라 평가할 수 있다. 

온라인 소그룹의 성공사례가 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온라인 소그룹은 오프라인 소그룹에 비하여 인격적 상호작용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구촌교회와 한국소그룹목회연구원이 2021년 9월에 실시한 “한국 교회 소그룹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온라인 소그룹의 참여자들은 온라인 소그룹의 장점으로 ‘모임의 편리성’(38.4%)과 ‘바이러스로부터의 안전’(26.8%)을 꼽으면서도, 온라인 소그룹의 단점으로는 ‘깊이 있는 대화와 나눔의 어려움’(30.4%)이라는 대답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온라인 소그룹의 이러한 단점은 ‘모임 사이의 모임’(meeting between the meeting)의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대면하여 모이는 소그룹을 진행할 때, 공식적인 소모임 외에도 참여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교제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공식적인 소그룹 모임 사이에 이루어지는 참여자들의 비공식적인 만남을 ‘모임 사이의 모임’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비공식적 만남은 공식적인 모임 안에서 참여자들의 인격적 상호작용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요소다. 그런데 팬데믹 시대에 온라인을 소그룹으로 진행하는 중요한 이유는 전염병의 확신으로 대면 모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팬데믹 시대의 온라인 소그룹에서는 비공식적인 만남인 ‘모임 사이의 모임’도 차단되기 마련이요, 결과적으로 공식적인 온라인 소그룹에서만 서로를 마주하게 되니 인격적 상호작용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각주:5] 이처럼 팬데믹 시대에 온라인 소그룹은 하나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인격적 상호작용이라는 소그룹 목회의 핵심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소그룹 목회를 위한 제언

지금까지 논의한 소그룹 목회의 변하지 않는 원리와 소그룹 목회의 급변하는 환경에 근거하여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제언을 세 가지로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리더양성 소그룹을 먼저 재개하라. 여기에서 리더란 구역, 셀, 목장 등 목양 소그룹의 리더를 말한다. 교회 안에 소그룹이 활성화된다는 의미는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를 말한다. 그러면 팬데믹 시대를 지나며 큰 타격을 입은 목양 소그룹을 회복하기 위한 첫걸음은 무엇이겠는가? 목양 소그룹의 리더를 훈련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교회에서 구역장을 비롯한 목양 소그룹의 리더를 훈련하는 방식이 소그룹이 아닌 대형집회의 특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모든 구역장을 정해진 시간에 한 장소로 모아 담당 목사가 강의하는 방식이다. 팬데믹의 시대를 지나며 함께 모일 수 없으니 어떤 교회는 영상을 제작하여 소그룹 리더들에게 배포한다. 영상을 공유하든 문서 자료를 배포하든 목회자가 평신도 소그룹 리더에게 자료를 일방적으로 공급한다는 점에서 이 역시 소그룹의 형태가 아니라 대형집회의 특성을 따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소그룹 목회가 활성화되어 있는 시대에는 목회자가 대형집회의 특성인 설교나 강의를 통해 소그룹 리더에게 동기만 유발하여도 소그룹이 활성화되는 경우가 있다. 이미 목양 소그룹의 (예비) 리더들이 소그룹에 참여하며 그 역동성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그룹이 크게 쇠퇴한 상황에서는 강의와 설교만으로는 소그룹의 실제를 충분히 교육할 수 없다. 국제제자훈련원의 제자훈련은 리더양성 소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제자훈련을 받은 사람만 목양소그룹인 사랑방의 리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제제자훈련원의 창립자인 옥한흠 목사는 제자훈련의 소그룹 환경(리더양성 소그룹)과 교회 전체의 소그룹 분위기(목양 소그룹)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였다. “제자훈련반이라는 소그룹을 강조하는 목적은 교회 전체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는데도 그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전 교회가 소그룹으로 묶여 가능한 많은 수의 신자들이 몸의 지체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는 데 지장을 받지 않게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제자반에서 훈련을 받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각주:6] 

리더양성 소그룹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이다. 목양소그룹의 리더를 양성하는 모임이니 소그룹의 특성이나 소그룹 인도법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강의나 설명보다는 소그룹을 직접 체험하면서 체득하는 영역이 더 많다. 무엇보다 목회자가 직접 인도하는 리더양성 소그룹에 참여하면서 모방을 통한 교육이 효과적이다. 그러면 리더양성 소그룹에서 적극적으로 가르쳐야 할 내용은 무엇인가? 리더양성 소그룹은 교회의 소그룹 목회가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가 무엇인지, 나아가 교회의 모든 활동이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 곧 그 교회가 추구하는 영성을 공유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소그룹은 그것을 채택한 기독교 공동체의 영성을 담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연결고리를 명확히 하는 가장 적절한 현장이 리더양성 소그룹이다. 개혁교회의 소그룹 목회는 구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소그룹인 구역이 추구하는 오순절적이고 번영신학적인 조용기 목사의 영성을 따라갈 수 없다. 그 대신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개혁교회의 영성인 경건을 추구하는 소그룹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리더양성 소그룹은 담임 목사가 직접 목양 소그룹의 (예비) 리더들에게 개혁교회가 추구하는 영성인 경건의 가치를 보여주고, 경건을 함께 훈련하는 소그룹으로 이끌어야 한다. 

리더양성 소그룹부터 시작하다보면 교회 규모에 따라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목회지가 직접 인도하는 리더양성 소그룹에서 충분한 목양 소그룹의 리더가 배출된 이후에야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교회의 소그룹이 쇠퇴를 넘어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차분히 소그룹 목회의 기초부터 쌓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난 2~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온 한국 교회의 소그룹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모든 것이 무너진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였던 것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둘째, 전도 소그룹을 시작하라. 목회 활동을 그 규모에 따라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와 소그룹 목회로 구분할 수 있다면, 전도의 방식도 동일한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곧 전도집회와 전도 소그룹이다. 20세기까지 세계 교회의 전도는 주로 전도집회가 중심이었다. 그러한 경향이 가장 먼저 전도 소그룹으로 변화된 곳이 영국이었다. 1980년대 영국에서 대규모의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가 개최되었는데, 전도집회의 효과가 그 이전 세대에 비해 급격히 하락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우연히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의 주최 측은 전도집회를 통해 회심으로 초청된 사람들을 양육하기 위해 소그룹을 운영하였고, 전도보다는 전도 이후의 양육이 목적이었기에 그 이름을 ‘목양 그룹’(nurture group)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결과는 주최 측의 의도와 정반대였다. 통계를 내어보니 전도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23%가 이후 지역 교회에 등록한 반면 목양 그룹에 참여한 사람들은 72%가 이후 지역 교회에 등록하였다. 이를 계기로 영국 교회는 대형집회보다 소그룹을 전도의 핵심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한국 교회에서 대표적인 전도 소그룹으로 꼽히는 알파코스도 1977년 영국의 목양 그룹 가운데 하나로 시작했지만 1986년 그 성격과 목적을 전도에 맞춰 개편하면서 세계적으로 확산된 전도 프로그램이 되었다.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를 확성화 하기 위해서는 전도 소그룹이 필수다. [각주:7]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도 소그룹과 목양 소그룹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소그룹 목회라고 하면 구역, 목장, 셀, 순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는 목양 소그룹을 가리킨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목양 소그룹은 대체로 랄프 니버의 구역모델을 따라 목회적 돌봄을 통한 전도에 그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다. 목양 소그룹의 하나인 구역을 전도와 교회 성장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채택했던 조용기 목사는 목양 소그룹을 통한 전도와 교회 성장을 세포분열에 비유하였다. 건강한 어린이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세포가 분열하여 성장하듯, 교회 안에 건강한 소그룹이 정착되면 소그룹의 분화를 통해 교회가 성장한다는 이론이다. 조용기 목사가 소그룹을 통한 교회 성장을 설명할 때 사용한 또 하나의 비유는 ‘교회의 뒷문’이다. 많은 새가족이 교회에 등록해도 교회가 성장하는 않는 이유가 그만큼의 성도들이 교회의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기 때문인데, 구역을 통한 목회적 돌봄은 교회의 뒷문을 잠그는 효과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21세기로 접어들면서 한국 교회의 목양 소그룹은 전도나 교회 성장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이는 목회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목회자가 관찰하는 바인데, 과연 그 원인은 무엇일까? 

20세기까지 행해진 교회의 전도를 소그룹 목회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전도집회 – 목양 소그룹’의 구조가 된다. 새가족이 교회를 찾아오는 앞문이 전도 집회요, 그들이 교회를 떠나지 못하게 뒷문을 잠그는 역할이 목양 소그룹이었다는 뜻이다. 부흥의 시대에는 전도 집회로 많은 새가족이 찾아왔고 구역을 비롯한 목양 소그룹은 빈번하게 분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전도 집회를 통해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팬데믹의 시대를 지나며 한국 교회는 더욱 깊은 침체기를 맞이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목양 소그룹은 분가를 멈추었다. 교회에 새가족이 늘어나면 목양 소그룹은 자연스럽게 활성화되지만 교회가 침체기를 맞이하면 목양 소그룹은 어떠한 방법을 동원하여도 침체기를 벗어나기 어렵다. 목양 소그룹은 뒷문이지 앞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목양 소그룹이 교회의 뒷문이라는 관찰은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가 교회의 전도에 달려있다는 통찰력을 준다. 

‘전도 집회 – 목양 소그룹’의 구조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를 위해 어떠한 구조를 만들어야 할까? ‘전도 소그룹 – 목양 소그룹’의 구조다. 20세기까지 부흥의 시대를 견인했던 ‘전도 집회 – 목양 소그룹’의 구조에서 전도 집회를 전도 소그룹으로 대체한 구조다. 한국 교회는 이미 정체기에 접어들었고 팬데믹 시대는 이를 가속화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목양 소그룹을 포기할 것인가? 나아가 소그룹 목회를 포기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 시대의 전도 역동성은 전도 소그룹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팬데믹 시대에는 더욱 힘겨운 일이지만, 전도 소그룹이 활성화되어야 목양 소그룹의 역동성이 살아날 수 있다. 동시에 목양 소그룹의 역동성이 살아나면 전도 소그룹에도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런데 이러한 선순환을 일으키는 시발점은 어디까지나 뒷문인 목양 소그룹이 아니라 앞문인 전도 소그룹이다.

셋째, 목회자가 직접 소그룹을 인도하라.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 활동은 모임을 주도하는 소수의 목회자가 다수의 평신도 참여자를 대상으로 펼쳐진다. 한 마디로, 철저히 목회자 중심이다. 이에 반하여 소그룹 환경은 평신도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모든 소그룹을 목회자가 참여하거나 주도할 수 없으며 상당 부분을 평신도 리더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면 목회자의 역할과 역량은 주로 대형집회 목회 현장에서 발휘되며 소그룹 목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목회자의 역할이 적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특별히 팬데믹의 시대에는 직접 소그룹을 인도하는 역할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물론, 목회자가 교회 안의 모든 소그룹을 직접 이끌 수는 없다. 그러나 목회자가 참여하고 직접 인도하는 소그룹의 분위기는 교회 소그룹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좌우한다. 

청교도 지도자였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참목자상』(The Reformed Pastor)이라는 책에서 목회자의 회개를 촉구했다. 백스터는 목회자가 시급하게 회개해야 할 항목으로 교만, 게으름, 세속적 관심, 분열 등을 언급하는데 그가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목회자의 죄는 목양의 사명을 다하지 않은 죄다. “대개 사람들은 목회가 설교하고, 세례와 성찬식을 베풀고, 병자를 심방하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목회가 이 정도로 인식될 때 성도들은 목회자를 좀처럼 따르려 하지 않고, 목회자 역시 그 이상의 일을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소명을 제대로 알지 못해 의무를 제한해버리는 것을 보면 무척 안타깝습니다. 유능한 목회자들 중에도 설교 준비에 열심을 내지만 영혼 구원을 위한 다른 일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양들과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각주:8]  이처럼 열심히 설교문을 작성하여 강단에서 외치는 것으로 목양의 사명을 다했다고 여기는 풍습, 바로 이것이 리처드 백스터가 생각하는 반드시 회개해야 할 목회자의 죄악이었다. 나아가 그가 강조한 목회자의 개혁은 설교와 더불어 성도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 그들의 회심과 성장을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리처드 백스터는 목양의 책무를 말과 글로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매주 모이는 두 개의 소그룹을 인도하였다. 하나는 지난 주일 설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기도하는 그룹이요, 또 하나는 청년들과 기도하는 모임이었다. 리처드 백스터의 이러한 외침과 실천은 팬데믹 시대로 소그룹 목회가 크게 위축된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반드시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대목이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소그룹 목회는 쇠퇴를 넘어 붕괴되었다. 이제 소그룹 목회는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팬데믹 시대에도 소그룹 목회의 그 시작점은 어디까지나 평신도가 아닌 목회자다.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 - 예스24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목회 영역이 소그룹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위한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목회 현장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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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hn Wesley, “Rev. J. Wesley’s Journal on August 25, 1763,” in The Works of John Wesley, 8:254. [본문으로]
  2. Robert Wuthnow, ed., “I come away stronger”: how small groups are shaping American religion (Grand Rapids: Eerdmans, 1994), 356. [본문으로]
  3. 소그룹의 형태와 그에 따른 영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한진,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양주: 드림북, 2022), 1부에서 자세히 서술하였다. [본문으로]
  4.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2.1. [본문으로]
  5. 온라인 소그룹과 모임 사이의 모임의 관계에 대해서는 Allen White, Leading Online Small Group: Embracing the Church’s Digital future (LA: Allen White Consulting, 2020), 110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6. 옥한흠, 『다스쓰는 평신도를 깨운다』(서울: 국제제자훈련원, 1998), 248-249. [본문으로]
  7. 교회 안에 전도 소그룹을 정착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이한진,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양주: 드림북, 2022), 119-123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8. Richard Baxter, 『참목자상』, 최치남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3), 24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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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