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성경공부2021. 11. 9. 17:45

욥기 4장부터 시작된 욥과 친구들의 대화는 욥기 27장에서 끝난다. 빌닷의 세 번째 발언(25장)으로 친구들의 이야기는 모두 마쳤고, 본문은 이에 대한 욥의 마지막 대답이다.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 욥은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는가? 친구들에 대한 욥의 마지막 발언인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지금까지 친구들은 욥에게 많은 말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는 욥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 욥은 이와 같은 사실을 비꼬며 말한다.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 (2-3절) 

지금 욥의 모습은 ‘힘 없는 자’이며 ‘기력 없는 팔’이 맞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러한 욥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큰 지식을 가진 듯 자랑하지만 정착 욥에게 필요한 지혜는 친구들에게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이 누구에게 들은 지혜를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질문한다.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4절) 

친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대답할 것이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욥에게 필요한 말씀을 전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의 무수한 이야기는 욥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한 가지 얻는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교리를 가르치며,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전하였을 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언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기보다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내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는가?’ ‘누구의 정신이 나에게서 나오고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

친구들의 이야기는 욥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욥은 큰 고통 속에서 친구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깊은 절망 속에서 부르짖었던 욥이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조금씩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친구들과의 대화가 끝나가는 지점인 본문에서 욥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 스올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 (5-6절) 
 하나님은 지구를 우주에 매다셨다. (7절) 
 하나님은 구름에 빗물을 저장해 놓으셨다. (8절) 
 달과 구름의 조화도 하나님의 솜씨다. (9절) 
 하나님은 바다의 경계를 정하셨다. (10절) 
 하나님은 우주와 우주에 거하는 것들도 통치하신다. (11절) 

이러한 구절은 욥기 38~41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을 떠오르게 한다. 욥기의 후반부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직접 욥에게 찾아오셔서 폭풍 가운데 말씀하신다. 이것을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이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은 욥의 고난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선포하신다. 본문에서 욥은 아직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을 노래하는 욥의 발언은 이렇게 끝난다.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14절) 

욥은 자신의 고난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 섣불리 욥의 고통을 설명하려던 친구들의 이야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깊은 고통의 터널을 지나며 욥은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조금씩 발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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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욥기 성경공부2021. 11. 3. 15:57

욥의 친구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의인의 축복과 악인의 형벌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인과응보의 교리다. 본문에서 욥은 ‘악인에 대한 심판’이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악인의 등불이 꺼짐과 
재앙이 그들에게 닥침과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하게 하심이
몇 번인가 (17절) 


욥과 전도자, 그들의 현실 인식

욥이 악인에 대한 심판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심판을 내려야 마땅하다고 확신한다. 본문 18절부터 21절은 악인을 심판하여 달라는 욥의 간절한 탄원이다. 

  •  ‘바람에 날려가는 겨’ 이미지(18절)는 시편 1편이 묘사하는 악인의 결말이다.
  •  욥의 소원 – 악인들이 하나님의 재앙을 직접 알고 당하게 되는 것(19-20절). 

욥은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벌을 내리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악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즉각적으로 강력한 재앙을 내리셔야 한다. 그런데 욥이 관찰한 세상은 악인에게 하나님의 징벌이 내리지 않는다. 이는 전도자(코헬렛)가 관찰한 현실 인식과 동일하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전 8:11) 

욥은 계속해서 인간 최고의 슬픔인 죽음이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욥은 죽음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어떤 사람은 평안한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고(23-24절), 다른 사람은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25절). 그러면 서로 다른 죽음의 모습이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될 수 있는가? 욥의 대답은 ‘아니오’다. 두 사람 모두 죽음이라는 동일한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26절).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이러한 평가도 전도자(코헬렛)의 생각과 동일하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중략)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전 9:2-3) 


대화의 평행선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큰 재앙을 당하는 욥에게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큰 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거대한 고통을 당하는 욥은 친구들의 눈에 악인이 틀림없었다. 하나님은 언제든 악인을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반면 욥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심판받아 마땅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하필 자신에게 큰 재앙이 찾아왔다. 그러므로 욥은 이 세상 어디에도 악인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보이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친구들과 욥은 모두 자신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뿐 다른 가능성에 귀를 닫았다는 오류를 범하였다. 친구들은 악인도 심판을 피할 수 있으며 의인도 재앙을 당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반면, 욥은 자신의 무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정의롭게 악인을 심판하시는 분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서로의 다른 관점만을 강조하다 보니, 두 차례에 걸친 긴 대화은 친구들에 대한 욥의 불평으로 끝난다.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속셈도 아노라 (27절)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헛되이 위로하려느냐
너희 대답은 거짓일 뿐이니라 (34절) 

친구들과 욥의 대화는 여전히 평행선을 그었고, 이제 다음 장부터 세 번째 대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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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욥기 성경공부2021. 10. 29. 15:42

엘리바스 – 빌닷 – 소발로 이어지는 친구들과의 1차 대화가 모두 끝나고 욥기 15장부터 친구들과의 2차 대화가 시작되었다. 욥기 16장과 17장은 친구들과의 두 번째 대화 가운데,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대답이다.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대답은 그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다양한 주제가 등장하고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 속담과 인용문도 등장한다. 욥의 발언이 엘리바스 개인을 향한 것인 것, 친구들 모두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것인지도 불명확한 부분이 있다. 이처럼 욥은 큰 고통 속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하지만 욥기 16장에는 기독교인들이 스치듯 지나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주제가 담겨 있다. 


피의 호소

욥은 계속해서 자신의 무고를 주장한다.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18절) 

위의 구절은 창세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셨다(창 4:9). 가인은 하나님의 의도를 애써 외면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한번 가인을 몰아세우신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 4:10) 

여기에는 억울하게 흘린 피는 보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잠잠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는 고대인들의 생각이 담겨 있다. 아벨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것처럼, 욥 자신도 억울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의인 아벨의 피가 아벨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였듯 욥 자신이 흘리는 피 역시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뜻이다. 


나의 증인, 나의 중보자

욥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 흘리는 피도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의 부르짖음은 누구를 향한 것이며, 과연 누가 그의 무고함을 풀어준다는 뜻인가? 욥은 욥기 9장에서 이미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공정하게 판결해줄 재판을 요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욥이 처한 현실은 그러한 판결을 내려줄 주체가 없다는 절망이었다. (참고. 욥기 10장 “재판석에 선 욥”)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 9:32-33)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공정한 판결을 내려줄 주체가 없어 절망하였던 욥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고통이 지속되고 친구들과의 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욥기 16장에 이르면 하나님과 욥 자신을 이어 줄 중보자에 대한 확신이 표현된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욥 16:19) 

욥은 여전히 큰 고통 속에 있으며, 욥이 발견한 중보자도 저 하늘 높은 곳에 있다. 그러나 욥기 9장과 비교하면 분명 욥의 인식은 분명히 변화되었고, 이후 19장에서는 보다 강력한 확신을 표현한다(욥 19:25-26). 유대인들은 이러한 본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욥기의 이와 같은 구절을 읽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되심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욥기 연구 08 “욥기와 신약성경”

기독교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도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읽는다. 이는 기독교의 변하지 않는 특징이며 매우 중요한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욥기를 읽으면 어떠한 의미가 새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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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욥기 성경공부2021. 10. 19. 16:40

욥의 친구들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장하는 바는 인과응보의 신앙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므로 의인은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악인은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다. 욥의 시대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받아들였던 인과응보의 이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문제는 보편적인 이 진리가 욥의 고난이라는 구체적인 사안에는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의 실존

소발에 대한 욥의 대답은 친구들에 대한 대답(욥 12:1-13:19)과 하나님을 향한 호소(욥 13:20-14:22)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며, 욥은 인간의 실존에 대해 서술한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욥 14:1)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는 표현은 모든 인간을 나타내는 관용구로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인과응보의 신앙은 각자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욥이 강조하는 바는 모든 인간은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걱정으로 가득한 삶을 산다는 점이다. ‘걱정’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로게즈”는 ‘흔들다’ 혹은 ‘떨리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라가즈”에서 파생된 단어다. 인간의 짧은 삶은 늘 흔들리는 인생이다. 그런데 친구들의 발언을 염두에 둔다면 이 구절의 강조점은 의인과 악인의 차이가 아니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인간이라는 실존이 우리의 덧없는 삶을 규정하는 더욱 중요한 요인이다. 

욥은 (1) 짧고 (2) 흔들리는 인간의 실존을 설명하기 위해 3가지 비유를 사용한다. 


1. “꽃과 그림자”(2-6절) 
꽃은 아름다움과 즐거움의 상징이다. 하지만 꽃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림자는 꽃보다 더 빨리 지나간다. 시편(시 103:15-16)과 이사야 선지자(40:6-8)는 꽃의 비유를 통해 인생의 덧없음과 하나님 말씀의 영원성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 꽃과 그림자의 비유는 인생의 덧없음에만 적용된다. 


2. “나무”(7-10절)
나무는 밑동까지 잘리더라도 적절한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으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나무처럼 다시 살아날 수 없으니 한 번 죽으면 소망이 없다고 욥은 강조한다(10절). 


3. “강물”(11-12절) 
나무와 달리 물은 한번 마르면 소생의 가능성이 없다. 본문이 묘사하는 강물은 ‘와디’가 아니라 ‘강’이다. 이스라엘에서 와디는 종종 소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도 한번 죽음을 맞이하면 소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욥의 친구들은 인간의 소망이 개인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네 경외함이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욥 4:6, 엘리바스의 발언)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욥 8:13, 빌닷의 발언)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한 길을 걷는 개인에게는 희망이 있다. 반대로 저속한 개인에게는 희망이 무너진다. 이것이 인과응보에 입각한 친구들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욥의 고난은 친구들이 설파하는 인과응보의 신앙이 현실과 다름을 보여준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큰 재앙이 찾아왔다. 욥기 역시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여 인간에게 큰 고통을 야기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고난과 고통, 그리고 마지막 죽음은 개인의 죄가 낳은 결과라기보다 모든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욥은 강조한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이 고통과 죽음의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개인이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류의 운명을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구원과 영생으로 이끄실 수 있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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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욥기 성경공부2021. 10. 12. 16:40

욥기의 독자들은 욥의 재앙이 고발자(사단)가 주도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욥 1-2장). 그러나 천상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했던 욥은 자신의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믿었다. 육신의 고통이 지속되고 친구들과의 대화가 길어지면서 욥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바른 판결을 내려줄 존재를 갈망하게 된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 9:32-33) 

욥기 9장에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공정한 판결을 내려줄 재판석에 앉기를 원했던 욥의 심정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욥기 10장으로 넘어오면 다분히 법정의 분위기가 담겨 있다. 욥이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라면 욥이 고발하는 피의자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재판석의 판사도 되신다. 판사와 직접 법정 다툼을 해야 하는 욥은 또다시 절망을 느낀다. 


재판석에 선 욥의 호소

재판석에서 발언하는 욥의 첫 일성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지 마시라는 간청이다. 그리고 두번째 발언은 만일 유죄를 선고하려면 그 근거와 증거를 먼저 밝히라는 요구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 10:2)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이미 욥에게 유죄를 선고하셨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욥은 아직 하나님의 판결이 내려진 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떠한 판결이나 그에 따르는 증거를 전해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은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기에 욥은 재판관이 되시는 하나님께 공정한 판결을 지속적으로 요청한다.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욥 10:4-6) 

하나님께서 욥 자신에게 유죄를 판결하신다면, 그것은 단지 큰 고통을 당하는 자신의 외적인 모습만 바라보는 친구들과 동일한 시각이라는 호소다. 인간은 제한된 관점으로 사태를 파악한다. 그러나 모든 것의 최종 판결자인 하나님이라면 종합적인 관점으로 공의로운 판결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공의로운 재판관이라면 욥은 자신에게 무죄를 판결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욥 10:7a) 


욥에게 불리한 재판

욥은 자신이 무죄하다고 생각했고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무죄를 항변할 정도로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욥 자신은 큰 재앙을 겪으며 괴로워하고 있다. 무죄에 대한 확신과 참을 수 없는 고통, 이 두 가지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욥은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판결을 바르게 내리지 않으신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을 피의자로 고발하고 있지만, 그분이 곧 재판관이다. 그러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판결은 욥에게 불리하게 내려진다.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욥 10:14-15)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 (욥 10:17) 

욥은 하나님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고소에 바른 판결을 내려주어야 할 재판관도 하나님이라는 역설이 욥이 처한 현실이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다. 재판석에 앉아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니,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해 호소한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욥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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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욥기 성경공부2021. 10. 8. 10:44

친구들과의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욥은 위로를 받지 못한다. 아니, 엘리바스의 발언을 듣고 욥의 마음은 오히려 더욱 답답해졌다.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대답은 친구들을 향한 불평으로 이어졌고(욥 6:1-7:6), 본문에서는 급기야 하나님을 향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11절).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본문에서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다. 시편의 탄식시 중에는 하나님의 부재를 괴로워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시가 있다(cf. 시 10:1). 그런데 욥은 정반대로 하나님의 임재를 괴로워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따뜻하게 보살펴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을 공격하며 아프게 하는 분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욥 7:12) 

‘바다 괴물’이란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얌’과 ‘탄닌’으로 상상의 동물이다. 고대 신화에 따르면 창조신들은 혼돈을 의미하는 바다의 괴물을 제어하여 세상의 질서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내가 바다 괴물이니이까?”라는 욥의 질문은 자신이 혼란을 초래하는 반역자도 아닌데 왜 하나님은 큰 힘으로 자신을 억압하느냐는 항변이다. 욥은 자신을 괴롭히는 하나님의 임재를 피하기 위해 잠을 청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꿈에도 나타나셨다.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욥 7:14) 

야곱이 형의 살해위협을 피해 도망치던 날 밤, 하나님은 꿈으로 그에게 찾아오셨다(창 28장). 그 외에도 성경에는 꿈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장면이 무수히 등장한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 역시 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욥 4:13). 그런데 욥은 잠들어 있는 시간까지도 꿈을 통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너무도 무서웠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을 피할 수만 있다면 죽음까지도 거부하지 않겠다고 말한다(욥 7:15) 


사람이 무엇이기에

욥은 자신의 불만을 더욱 극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시편의 한 구절을 ‘희화화’(travesty)한다. 희화화란 잘 알려진 시가의 형식을 풍자적으로 우스꽝스럽게 개작하는 방식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4) 

지금도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애송하는 시편 8편 4절을 말씀이다. 욥은 이 구절을 이렇게 바꾸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욥 8:17-18) 

시편 8편 4절의 ‘돌보다’와 욥기 8장 18절의 ‘권징하다’는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 ‘파카드’의 각각 다른 번역이다. 비록 같은 히브리어 단어라도 문맥이 너무도 달라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편 8편이 하나님의 임재에 감사하며 찬양을 올리고 있지만, 욥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괴로움을 당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욥에게 구원이란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다.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안식과 평안인가?

본문이 묘사하는 하나님을 향한 욥의 불평에 대해서는 평가를 잠시 보류하자. 지금 단계에서 욥의 발언을 신앙적으로 평가한다면 우리의 평가는 친구들의 또 다른 발언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본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도들에게 언제나 안식과 평안이 되는가? 본문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성도들에게 안식과 평안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위로자가 되셔야 하며, 인간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긴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성도들에게 나타나시며, 성도들의 영적/심리적/육적 상황도 시시각각 변한다. 그리하여 때로는 욥과 같이 하나님의 임재가 성도들에게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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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욥기 성경공부2021. 9. 28. 18:21

욥기에는 욥에 대한 시험이 두 번에 걸쳐 묘사되어 있다. 욥기 1장이 묘사하는 첫 번째 시험은 모든 자녀와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는 것이었다(욥 1:13-19). 욥은 이처럼 커다란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욥 1:20-22). 그러나 욥의 시험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시험

욥이 당한 두번째 시험은 자신의 몸에 찾아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극심한 종기가 돋았다(욥 2:7). 그 종기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욥은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어야 했다(욥 2:8). 

구약 성경의 종기 

  • 애굽의 임한 여섯 번째 재앙 (출 9장) 
  • 레위기의 정결법에 있는 ‘피부 법’의 주제(레 13장). 
  • 죽음의 위기를 맞이한 히스기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치유하여 주셨다(왕하 20장; 이사야 38장). 

욥의 첫번째 재앙도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첫번째 시험과 두번째 시험을 비교해보면, 첫번째 시험이 한 순간에 일어난 고통인 반면 두번째 재앙은 앞으로도 계속 겪어야 하는 아픔이다. 욥의 몸에 일어난 종기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욥기 2장이 두번째 시험을 묘사하고 있지만, 욥의 이 시험은 욥기의 마지막에 이르러야 끝이 난다. 여기에 성도들이 당하는 시험의 특징이 있다. 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한순간에 지나갈 수 있다면, 한 순간의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면 그 시험을 통과하기가 조금은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겪는 고통은 한 순간의 아픔이 아니라 지속되는 고통이다. 


고난을 통과하는 사람들

욥이 큰 고통을 겪는 중에도 욥의 아내는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녀는 욥이 큰 재앙을 당할 만큼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욥 2:9a) 두 번에 걸친 거대한 재앙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온전함을 지키는 욥의 마음을 그의 아내는 알아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욥의 아내는 욥의 친구들과 달리 회개를 촉구하지 않는다. 그녀의 충고는 4장 이후에 이어지는 친구들의 것과 전혀 달랐다. 어찌 들으면 너무도 무정히 보이는 충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b)였다. 그러나 욥은 온전함을 지키고 있지만 그 결과는 죽음보다 더 괴로운 고통이었기에, 이 사실을 곁에서 보고 있는 욥의 아내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여 지금의 고통을 끊으라는 매우 현실적인 충고였다. 

그의 아내가 인정하듯 욥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온전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내의 현실적인 충고까지도 뿌리친다. 

[욥이]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욥 2:10) 

이때 욥의 세 친구도 욥의 소식을 듣고 방문한다. 본문은 친구들이 방문한 목적을 분명히 서술해주고 있다. (1) “욥을 위문하고” (2) “위로하려 하여”(욥 2:11) 이것이 그들의 방문 목적이었다. 방문 후 첫 일주일은 이 목적에 충실하였다. 친구들은 욥을 판단하지도 꾸짖지도 않았다. 그들은 욥의 형편을 직접 눈으로 바라보며 더욱 안타까움을 느꼈고 아무 말없이 욥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욥 2:12-13). 

두 차례의 연 이은 욥의 극심한 재앙 속에서 욥의 아내는 욥의 온전함을 인정해주었으며 친구들은 함께 통곡하였다. 그리고 욥은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 욥기 2장이 묘사하는 욥와 그의 주변 사람들은 두번에 걸친 거대한 시험을 비교적 지혜롭게 통과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시험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친구들이 찾아온지 일주일이 지난 후, 곧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욥은 하나님을 향해 범죄하지 않았던 그 입술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기 시작한다(욥 3장). 욥의 저주를 시작으로 친구들의 입은 욥을 향한 정죄와 비판으로 이어진다(욥 4장 이후).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니 인간의 지혜도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욥기 연구 02 “신앙의 동기가 무엇인가?”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욥기 1장 1절). 여기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표현이 눈에 띄는데, 잠언은 이것을 지혜의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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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욥기 성경공부2021. 5. 7. 18:12

기독교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도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읽는다. 이는 기독교의 변하지 않는 특징이며 매우 중요한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욥기를 읽으면 어떠한 의미가 새롭게 부각될 수 있을까? 욥기 연구의 마지막 주제는 욥기와 신약성경이다. 


욥기의 덕목: 인내와 지혜

신약성경에서 욥기를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구절은 야고보서가 유일하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야고보서 5장 11절)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것은 ‘욥의 인내’다. 야고보서는 믿음의 시련을 통한 인내가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의 성숙에 이르게 한다고 강조하는데(야고보서 1장 2-4절), 이를 재차 강조하기 위해 ‘욥의 인내’를 언급하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께서 주신 결말’은 야고보서가 성도의 성숙 – 야고보서의 표현으로는 ‘온전함’- 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욥이 재산과 자녀와 건강을 되찾았다는 겉모습보다는 역경을 통과한 후 욥이 체험한 하나님 현현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야고보서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자비롭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성도들이 역경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성숙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이 직접적으로 욥기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신약성경의 배경에서 욥기를 읽을 때 떠오르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지혜’다. 욥기는 잠언과 전도서와 함께 지혜문학에 속한다. 그만큼 지혜는 욥기의 중요한 주제다. 이 세 권의 책은 지혜에 접근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지혜에 대한 궁극적인 가르침은 동일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장 7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도서 12장 13절)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기 28장 28절) 

욥기를 포함한 구약 지혜문학의 전통은 분명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지혜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신약성경에서 지혜는 예수님에게 그 초점이 맞춰진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 “지혜가 충만”하였고(누가복음 2장 40절), 예루살렘 성전의 선생들과 대화할 때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답에 경탄하였다(누가복음 2장 27절).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말씀’으로 묘사하는 요한복음 1장의 구약적 배경은 잠언에 등장하는 지혜의 의인화이다. 이 모든 것을 사도 바울은 한 마디로 정리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골로새서 2장 3절) 


욥기와 그리스도의 수난

인내와 지혜는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욥기를 읽는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욥기의 주제는 따로 있다. 곧 ‘고난’이다. 욥이 당한 고난을 읽으며 기독교인은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떠올린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고난 주간에 욥기를 읽는 관습도 있었다. 물론, 욥이 당한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연결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욥은 고난을 피하고 싶었지만(cf. 욥기 1장 5절)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다. 욥의 고통은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한 과정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었다. 한마디로 욥의 고난은 인생의 ‘교훈’이 그 목적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인간의 ‘구속’이 그 목적이었다. 이처럼 욥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욥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연상시키는데, 욥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중재자를 요청하는 장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기 9장 32-33절) 

욥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재판할 수 있는 중재자 혹은 판결자를 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처럼 보였다. 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로 나설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친구들과의 대화가 진행되면서 욥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욥기 16장 19절) 

욥의 증인 혹은 욥의 중보자는 여전히 높이 계신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중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중보자의 존재를 확신하기에 이른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기 19장 25-26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에 대한 욥의 갈망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도들의 갈망으로 해석되었다. 물론, 많은 구약학자들이 이러한 해석이 욥기의 원래적 의미가 아니라고 비판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신약성경의 눈으로 구약을 읽는 사람들이다. 욥기를 통해 고난이라는 주제를 심도 있게 고찰하며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떠올리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Messiah)이다. 지금도 부활절이면 수없이 연주되는 <메시아>의 제3부 “부활과 영원한 생명” 가운데, 첫 번째 곡인 소프라노 아리아 “내 주는 살아계시니”(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의 가사가 바로 욥기 19장 25-26절이다. 이처럼 교회는 지금도 욥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고 있다. 

 

 

욥기 연구 01 “욥기의 구조와 특징”

구약성경에는 지혜문학이 있다. 문자 그대로 지혜를 그 중심 주제로 다루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잠언, 전도서, 욥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실제로 잠언, 전도서, 욥기를 읽어보면 그 분위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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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2 “신앙의 동기가 무엇인가?”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욥기 1장 1절). 여기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표현이 눈에 띄는데, 잠언은 이것을 지혜의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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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3 “욥의 탄식” (욥기 3장)

큰 재앙을 겪으면서도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던 욥이지만(욥기 2장 10절), 욥기 3장에 이르러 그는 입을 열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다. 욥기 1-2장과 3장의 분위기는 이처럼 너무도 달라 당황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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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4 “욥기의 등장인물”

욥기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욥기라는 거대한 드라마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로서 욥의 신앙 여정을 다각도로 조명해준다. 욥기의 주인공은 단연코 욥이지만, 주변 인물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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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5 “지혜를 찾아가는 길”

욥기의 시작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안전한 울타리를 쳐주셨다(욥기 1장 10절). 그러나 욥에게 찾아온 고난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울타리가 벗겨지는 과정이었다. 먼저 재물이라는 울타리와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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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6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

욥기의 하이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직접 등장하여 욥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 욥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여 욥기 38-41장을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이라고 부른다(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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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7 “욥의 회개와 결말”

욥은 자신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질문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번에 걸친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을 통해 ‘왜’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누구냐’라고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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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성경공부2021. 5. 7. 18:02

욥은 자신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질문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번에 걸친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을 통해 ‘왜’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누구냐’라고 반문하셨다(욥기 38장 2절). 그런데 욥은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은 듯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욥의 대답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더 깊은 영적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욥의 회개

욥기에는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이 두 번 등장한다. 첫번째 폭풍우 언설에 대한 욥의 반응은 하나님의 위엄에 압도되어 자신의 입을 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욥의 그러한 반응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두 번째 폭풍우 언설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두 번째 말씀에 대한 욥의 반응은 회개다(욥기 42장 5절). 하나님께서 욥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인 듯하다. 그러나 욥의 회개는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았던 자신의 죄악 된 삶을 고백하고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살겠다는 회심이 아니다. 욥의 회개는 지금도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더 깊은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영적 성숙에 가깝다. 

하나님은 폭풍우 언설을 시작하시며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나 누구냐?”라고 질문하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욥의 대답도 동일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기 42장 3절) 

욥은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실제로 듣고 보니 욥 자신이 지금까지 말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피상적인 지식에 불과하며,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혜가 아니었음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욥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스승이나 지혜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에게 응답하여 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기 42장 4절) 

욥의 요청은 첫번째첫 번째 폭풍우 언설 이후의 반응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분명하다. 하나님의 첫 번째 언설 이후 욥은 자신이 비천하다고 이야기하며 하나님께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입을 가렸다(욥기 40장 4-5절). 그런데 두 번째 언설을 통해 욥 자신을 피조물의 으뜸으로 창조하신 사실을 깨닫고 욥은 하나님을 향해 친히 말씀하시기를 요구할 수 있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폭풍우 언설을 다시 말씀하실 필요는 없다. 욥은 이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장 5절)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한 욥은 자신의 회개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기 42장 6절) 

여기에서 “거두어들이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욥이 품었던 의문이 모두 해결되었다는 뜻이다. 욥은 극심한 고난이 찾아오자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고난의 이유로 숨겨진 죄를 지적하는 친구들에게 동의할 수 없었고, 하나님을 향해 울분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을 직접 뵙고 보니 그러한 모든 의문이 풀렸다. 둘째는 욥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해체되었다는 뜻이다. 욥도 친구들과 같이 의인에게는 복을 내리고 악인에게는 벌을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했다. 자신에게 큰 재앙이 찾아왔을 때 마음의 동기는 돌아볼 여유도 없이 입술로만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입술로만'에 대해서는 욥기 연구 02 “신앙의 동기가 무엇인가?” 참고). 그러나 하나님을 친히 뵙고 보니 관습적인 신앙의 모습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체험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6절에서 “티끌과 재”라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티끌과 재”라는 표현은 창세기와 욥기에 각각 한 번씩만 나온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창세기 18장 27절) 

아브라함이 자신을 ‘티끌과 재’와 같다고 말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이 표현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성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소돔 성에 벌을 내리시기로 결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티끌과 재’같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과 동일한 위치에서 협상을 하듯 아브라함의 요청을 받아주신다.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는 욥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대등한 대화의 파트너가 되었다. 


욥의 결말

욥기의 마지막 구절은 욥이 아브라함과 같은 족장의 반열에 들어갔음을 시사한다.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욥기 42장 16-17절) 

매우 평범한 서술인 것처럼 보이지만, ‘티끌과 재’와 같이 구약성경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을 떠오르게 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셨다(욥기 42장 12절). 욥기가 묘사하는 하나님의 복은 재물과 자녀의 축복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재물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증표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욥기가 서술하는 욥의 결말은 그가 모든 고난을 이겨낸 후 하나님과 더불어 풍성한 삶을 살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집어볼 점이 있다. 재앙을 만나기 이전의 욥과 재앙을 만난 이후의 욥은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욥기를 건강, 재물, 자녀라는 관점으로 읽는다면 재앙을 만나기 이전의 욥과 재앙을 이겨낸 이후의 욥의 삶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재앙 이전의 욥은 사탄이 마음먹고 달려드니 삶의 울타리가 모두 사라지고 그 안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여 깊은 낙심과 허무에 빠져들었다. 그만큼 기초가 약했고 토대가 허술했다. 그러나 큰 재앙 속에서 지혜를 찾기 위한 긴 여정을 떠나 마침내 폭풍우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욥은 건강, 재물, 자녀라는 울타리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보다 근본적인 울타리를 든든하게 세운 믿음의 족장이 되었다. 


 

욥기 연구 01 “욥기의 구조와 특징”

구약성경에는 지혜문학이 있다. 문자 그대로 지혜를 그 중심 주제로 다루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잠언, 전도서, 욥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실제로 잠언, 전도서, 욥기를 읽어보면 그 분위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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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2 “신앙의 동기가 무엇인가?”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욥기 1장 1절). 여기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표현이 눈에 띄는데, 잠언은 이것을 지혜의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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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3 “욥의 탄식” (욥기 3장)

큰 재앙을 겪으면서도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던 욥이지만(욥기 2장 10절), 욥기 3장에 이르러 그는 입을 열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다. 욥기 1-2장과 3장의 분위기는 이처럼 너무도 달라 당황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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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4 “욥기의 등장인물”

욥기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욥기라는 거대한 드라마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로서 욥의 신앙 여정을 다각도로 조명해준다. 욥기의 주인공은 단연코 욥이지만, 주변 인물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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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5 “지혜를 찾아가는 길”

욥기의 시작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안전한 울타리를 쳐주셨다(욥기 1장 10절). 그러나 욥에게 찾아온 고난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울타리가 벗겨지는 과정이었다. 먼저 재물이라는 울타리와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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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6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

욥기의 하이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직접 등장하여 욥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 욥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여 욥기 38-41장을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이라고 부른다(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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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8 “욥기와 신약성경”

기독교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도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읽는다. 이는 기독교의 변하지 않는 특징이며 매우 중요한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욥기를 읽으면 어떠한 의미가 새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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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욥기 성경공부2021. 5. 7. 17:49

욥기의 하이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직접 등장하여 욥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 욥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여 욥기 38-41장을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이라고 부른다(참고. 욥기 38장 1절, 40장 6절).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보이던 욥과 친구들의 대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항변하였던 욥의 탄식은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폭풍우 언설이 욥기 38-39장이라면, 두번째 폭풍우 언설은 40-41장이다(cf. 욥기 40장 1절).

 

 

첫번째 폭풍우 언설

 

욥과 친구들은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욥은 왜 고난을 당하였을까? 친구들은 욥에게 숨은 죄악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고,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유 없이 벌을 내리셨다고 주장했다. 대답은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왜’라는 질문에 매달렸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는 결론이 나지 않았고, 하나님께 직접 대답해주시기를 기대하였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하시지 않고 그 대신 ‘누구냐’라고 질문하신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욥기 38장 2절)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은 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욥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가득하다. 대부분의 주해가들이 하나님의 질문을 ‘수사적 질문’(rhetorical questions)이라고 설명한다. 수사적 질문이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기 위한 질문으로 하나의 문학 기법이다. 독일의 구약학자인  게르하르트 폰 라드(Gerhard von Rad)는 고대 이집트의 지혜전승을 깊이 연구하였는데, 당시 수사적 질문은 고위 관료들의 지혜 교육을 위한 주된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폰 라드의 연구를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폭풍우 언설은 하나님께서 지혜의 스승이 되어 욥에게 지혜를 전해주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욥에게 보다 높은 단계의 지혜로 이끌기 위해 수사적 질문을 던지면서 욥에게 대답을 요구하신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기 38장 3절)

 

마이클 폭스(Michael Fox)는 하나님의 질문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1) 누구에 관한 물음 (2) 무엇에 관한 물음 (3) 인간의 한계를 확증하는 질문. 질문의 유형을 이처럼 구분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첫번째 폭풍우 언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우주의 법칙이 주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질문의 의도는 동일하다. 어떤 주석가는 욥기 38-39장을 ‘욥기 시대의 지구과학 교과서’라고 표현하는데, 욥기가 쓰였을 당시 우주의 구조에 대한 설명이 총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욥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 그 시선이 온통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다. 지금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해석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폭풍우 언설을 통해 욥을 우주의 구석구석으로 이끄신다. 욥을 비롯한 인간의 희로애락과 상관없이 지금도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며 유지되는 우주의 세계를 보여주신다. 이로써 하나님은 욥에게 자신의 좁은 관점을 벗어나 하나님의 창조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르치고 계신다.

 

하나님의 첫번째 폭풍우 언설을 직접 들은 욥은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자신의 입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욥기 40장 3-5절)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피조물인 욥을 압도하였기에 욥은 하나님 앞에 나약한 자신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고 침묵을 자처하였다. 그러나 욥의 이러한 태도는 욥에게 지혜를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듯, 두번째 폭풍우 언설을 시작하신다.

 

 

두번째 폭풍우 언설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폭풍우 가운데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첫번째 폭풍우 언설에 대한 반응으로 욥이 입을 가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하나님은 다시금 욥에게 대답을 요구하신다(욥기 40장 7절). 두번째 언설에서 하나님은 주로 베헤못과 리워야단에 대해 말씀하신다.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하마나 악어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한글개역성경은 베헤못과 리워야단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보다는 상상의 동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특별히 구약성경에서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에 저항하는 존재로 그리기도 한다. 그러나 폭풍우 언설에서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창조물의 으뜸으로 여긴다.

 

[베헤못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

모든 들 짐승들이 뛰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내느니라 (욥기 40장 19-20절)

 

세상에는 [리워야단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 (욥기 41장 33-34절)

 

베헤못과 리워야단의 실체에 대해 추적하는 것은 폭풍우 언설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찾아내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베헤못은 욥기가 쓰여질 당시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지상동물이요, 리워야단은 욥기가 쓰여질 당시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수상생물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상상의 동물을 동원하여 그들을 피조물의 으뜸이라고 칭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의 숨은 의도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통해 욥의 존재를 말씀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욥기 40장 15절)

 

여기에서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라는 표현이 핵심이다. 곧,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창조의 으뜸으로 지으신 것처럼, 하나님은 욥을 창조의 으뜸으로 만드셨다(cf. 시편 8편 5절). 그래서인지 하나님은 두번째 폭풍우 언설을 시작하시며 욥에게 요구하신 바가 있었다.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욥기 40장 10절)

 

여기에 등장하는 위엄, 존귀, 영광, 영화는 신적 존재를 나타내는 단어로 욥이 미천한 피조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으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심리학자들은 ‘자아 팽창’과 ‘자아 소외’의 개념으로 욥기를 분석하기도 한다. 욥기 1장에서 재앙을 당하기 이전의 욥은 자아가 팽창된 욥이었다. 그러나 재앙을 당하자 욥의 자아는 왜소해지기 시작하여 자아 소외를 경험한다. 그러나 자아 팽창도, 자아 소외도 욥의 바른 자기 정체성은 아니었다. 첫번째 폭풍우 언설에서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보여주시며 욥을 미천한 피조물로 위치시킨다. 그리고 두 번째 폭풍우 언설을 통해 만물의 으뜸으로 높여주신다. 욥은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것이 폭풍우 언설을 시작하며 던지셨던 “누구냐?”라는 질문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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