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선교2016. 12. 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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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동역자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그러나 빌레몬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는 바울이나 빌레몬에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오네시모다. 그런 점에서 빌레몬서는 바울과 빌레몬의 양자 관계를 넘어 바울, 빌레몬, 그리고 오네시모 사이의 삼자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 그리고 오네시모와 바울의 관계에서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빌레몬서의 내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에서 바울이 기대하는 바는 빌레몬으로 대표되는 기존 교회가 오네시모라는 새신자를 환영하고 나아가 오네시모를 참된 의미의 교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부탁하면서 이렇게 당부한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16)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을 나오기 전, 그의 자리는 ‘종’이었다. 빌레몬의 가정에는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오네시모는 그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종’의 자리가 아니라 ‘형제’의 자리로 인도하라고 부탁한다. 계속해서 바울은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17)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동역자’라는 단어는 ‘코이노노스’라는 단어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누리는 참된 교제를 나타내는 ‘코이노니아’의 파생어이다.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라는 바울의 부탁은 바울과 빌레몬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성도의 교제를 누리듯이 새신자 오네시모와도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라는 의미다.[1] 그러므로 새가족 사역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새가족이 지역 교회에 정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서 참된 성도의 교제를 누릴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경우 새가족 사역은 교회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에서 환영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새가족 사역자들이 좋은 팀웍을 이루어 새신자들에게 이른바 ‘체계화된 호의’(organized friendliness)[2]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빌레몬과 그의 가정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새가족 사역은 새신자에게 ‘체계화된 호의’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참된 교회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될 수 있도록 받아들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새가족 사역의 목표는 교회를 처음 방문한 사람이 더 이상 ‘방문자’나 ‘새신자’의 자리에 있지 않고 교회 공동체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는 것, 곧 엄격한 의미의 교회 정착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작성하였고, 그 편지와 함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냈다. 과연 빌레몬은 바울의 간청에 순종하였을까? 문서화된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많은 학자들은 빌레몬이 바울의 간청대로 오네시모를 받아들였을 것으로 평가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빌레몬서가 신약성경 27권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편지의 내용이 빌레몬으로 대표되는 기존 교회의 실천으로 현실이 되었고, 오네시모는 이 편지를 ‘자신의 특별한 자유 증서’로 소중히 간직하였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이후 에베소의 감독이 되는데 바울의 편지들을 함께 모아 편집하는 일에 오네시모가 일익을 감당하게 되었고 자신이 간직하고 있었던 이 편지를 신약성경의 일부로 포함시켰다는 설명이다.[3] 이러한 가설이 옳다면 바울과 빌레몬을 비롯한 지역교회 성도들의 새가족 사역으로 말미암아 오네시모는 교회 공동체에 정착하였고, 시간이 지나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새가족 사역자들이 추구하는 새가족의 교회 정착이란 단순한 주일 예배 출석을 넘어 성도들과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요, 나아가 지역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지는 일이다.




[1] Cf. 피터 T. 오브라이언, 골로새서 빌레몬서, vol 44 of WBC (서울: 솔로몬, 2008), 505-9.  녹스(John Knox) 그의 Philemon among the Letters of Paul에서 빌레몬서의 실질적 수신자가 아킵보였다고 주장한다. 교회 공동체의 목회적 책임을 감당하고 있는 아킵보에게 오네시모를 기독교 공동체의 지체로 받아들이도록 권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지만, 바울의 저술 목적이 빌레몬 사람으로 하여금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머물지 않고, 빌레몬의 가정에 있는 교회가 그를 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2] Leslie Parrott 제안하는 용어로 교회를 방문한 사람들이 ‘환영 받고 있으며 그들의 필요가 충족된다고 느낌’을 지칭한다. Leslie Parrott, Serving as Church Greeter, 13.

[3] 피터 T. 오브라이언, 골로새서 빌레몬서, vol 44 of WBC, 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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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6. 12. 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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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동역자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그러나 빌레몬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는 바울이나 빌레몬에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오네시모다. 그런 점에서 빌레몬서는 바울과 빌레몬의 양자 관계를 넘어 바울, 빌레몬, 그리고 오네시모 사이의 삼자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 그리고 오네시모와 바울의 관계에서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빌레몬서의 내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빌레몬서를 바울의 새가족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새가족 사역이란 매주일 예배당 문 앞에 서서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처음 교회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교회 생활을 안내하는 일이다. 그러나 빌레몬서를 기록하여 오네시모의 손에 쥐어준 바울의 모든 노력을 그의 새가족 사역이라고 평가한다면, 빌레몬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의도 곧 바울과 오네시모의 관계에서,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에서, 그리고 빌레몬과 바울의 관계에서 는 넓은 의미에서 새가족 사역의 목표가 된다.

먼저, 바울과 오네시모의 관계에서 바울이 기대하는 바는 오네시모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사랑을 받는 형제가 되는 것이요, 나아가 복음과 교회를 위해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네시모는 비록 그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이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 자신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유효한’(useful)이지만 오네시모의 실제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보다는 해를 끼치는 사람이었다(11a). 그러한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 변화되기 시작했다. 오네시모는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의 사랑 받는 형제가 되었고(16), 이제는 그 이름의 뜻과 같이 주변 사람들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11b). 바울은 오네시모를 향해 나의 심복[심장]’(my very inner being)이라고 부르는 데 이 단어는 주로 어린 자녀와의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 오네시모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나아가 모든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는 형제요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새가족 사역자로서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에 대하여 수행하였던 첫번째 역할은 오네시모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되고,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전도였다.


전도가 새가족사역에 포함되는가? 만일 전도를 교회 밖에 있는 사람(unchurched people)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 나아가 교회의 회원으로 등록시키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전도는 새가족사역자의 역할이 아니다. 이러한 정의에서 전도는 새가족사역에 선행되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도를 진리를 찾는 사람들 (seeker)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전도는 새가족사역자의 중요한 역할이다. 이미 교회의 예배를 출석하고 지역 교회에 등록하여 교회의 회원이 된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복음을 들어야 하는 구도자’(seeker)들이 많기 때문이다.


리버티대학교의 데이빗 얼리(David Early) 교수는 전도를 참된 회심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참된 회심에 이르는 네 단계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첫째로 궁금증을 품는 단계 (Curious), 둘째로 자신의 죄를 자각하는 단계 (Convicted), 셋째로 죄 용서의 확신을 갖는 단계 (Convinced), 끝으로 죄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회심의 단계(Converted).[1] 어떤 이들은 참된 회심의 모든 단계를 경험한 이후 교회를 찾는다. 그러나 교회를 찾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호기심을 품은 단계에서, 혹은 자신의 죄를 자각하거나 죄 용서의 확신을 갖는 정도에서 교회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므로 새가족 사역자는 교회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환대하며,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파악하여 죄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참된 회심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바울의 새가족 사역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면 오네시모라는 초신자를 빌레몬으로 대표되는 기존교회가 받아들이도록 권면하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 참된 회심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곧 오네시모를 전도하는 바울의 역할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어떠한 근거로 빌레몬에게 자신의 재산을 훔쳐 도망한 오네시모라는 종을 용납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겠는가? 교회 성도들이 한 마음의 가족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 분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며,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한 분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4:4-6). 지역교회를 처음 찾은 새가족이 기존 교회의 한 식구가 되는 길도 다르지 않다. 새가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참된 회심을 경험할 때 비로소 새가족과 기존 신자들이 성령 안에서 한 식구가 될 수 있는 기초가 놓인 것이요, 새가족 사역자는 이를 위해 먼저 새가족을 전도해야 한다.




[1] David Early and David Wheeler, Evangelism is … : How to Share Jesus with Passion and Confidence (Nashville: B&H Academic Publishing Group, 2010),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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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6. 12. 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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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옛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그의 손에 쥐어줄 편지를 쓴다. 이 편지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빌레몬 개인이 자신의 재산을 탈취하여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여 달라는 부탁이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면서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거론한다. 먼저 편지의 발신자는 사도 바울 자신과 함께 디모데를 언급하고 수신자로서는 빌레몬과 그의 아내 압비아, 아킵보를 비롯한 빌레몬의 가정에 있는 온 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다(1-2). 뿐만 아니라 편지의 마지막에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혀있는 에바브라를 비롯한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의 이름으로 안부를 전한다( 23-24).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적인 일로 보인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지 빌레몬 한 사람이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 공동체가 오네시모라는 새가족을 받아들이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아울러 새가족인 오네시모를 기존의 교회 공동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편지를 작성하면서 바울 개인 이름이 아닌 자신과 함께한 동역자들의 이름으로 발송한 것은 새가족 사역이 한 사람의 역할이 아닌 공동체가 협력해야 하는 사역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새가족 사역은 한 개인의 사역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감당해야 하는 사역이다.


바울에게 있어 새가족 사역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동참해야 하는 사역이었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새가족 사역은 보다 전문화된 사역으로 훈련받은 몇몇 사역자들의 역할이 되었다. 19세기까지 북미의 기독교에는 교회의 여러 가지 사역 분야가 전문적으로 구분되지 않았다. 20세기에 이르러 교회학교, 찬양대, 젊은이 사역 등 보다 전문화된 사역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새가족 사역(ushers or greeters)이 구체화된 것도 바로 이때이다.[1] 특별히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상품 자체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고객의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영학적 전략이 소개되면서 새가족 사역은 보다 전문적인 영역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2]


교회 내의 한 가지 사역이 전문화된다는 것은 전문 사역자를 위한 별도의 교육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훈련 받은 준비된 일꾼만이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각각의 지역교회가 다양한 교육 형태를 견지하고 있지만 새가족사역이 전문화될수록 새가족 사역자를 위한 교육과정의 존재는 필수적으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새가족사역을 시작하기 위한 사전 교육일 수도 있고, 새가족 사역자들의 정규적인 기도회 및 세미나가 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전문적인 새가족사역자들 사이에 소속감이 형성되고 대부분의 성도들은 새가족사역으로부터 배제되는 경향이 나타난다.[3] 새가족사역의 특성화 및 전문화가 두드러질수록 새가족사역에 대한 장벽은 높아지기 마련이다.


새가족사역의 효율성을 위해 전문화 및 특성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새가족사역은 특정 개인의 사역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사역이다. 크리스토퍼 워커 목사는 새가족사역의 필요성을 교회의 존재 목적으로부터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로부터 교회는 믿는 사람들만의 모임이라고 생각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전도 및 새가족사역은 교회의 중요한 역할일 수 없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사명이 주어졌다면 불신자를 전도하고 교회를 방문한 사람들을 환대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새가족사역은 교회의 핵심 사역이 된다.[4] 그리고 교회는 가능한 모든 성도들이 교회의 존재 목적인 새가족을 환대하는 사역에 깊이 관여하도록 도와야 한다.


새가족사역이 온 교회가 함께 감당해야 할 사역이기에 전문적인 새가족사역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진다. , 새가족을 환대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사역과 더불어 훈련받은 새가족사역자 이외의 성도들도 새가족을 환대하는 일에 초청하는 일이다. 새가족 전도자, 소그룹의 리더, 양육과정의 교사 등은 새가족사역자들의 좋은 동역자들이다. 나아가, 새가족들과 함께 예배하는 여러 성도들을 새가족사역자의 협력자로 초청할 때 새가족사역은 특정인들만의 사역이 아닌 온 교회의 사역이 될 수 있다.




[1] Christopher Walker, Church Greeter 101: Putting the Pieces Together for an Effective Greeting Team and Ministry (Glen Allen, VA: EvangelismCoach Press, 2013) Kindle Edition, loc 207.

[2] Leslie Parrott, Serving as Church Greeter (Grand Rapid: Zondervan, 2002), 11-12.

[3] 새가족 사역자만을 위한 공간 소품의 활용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킬 있다. 

[4] Christopher Walker, Church Greeter 101, loc 265-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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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6. 12. 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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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한 평생 로마 제국 전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믿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바울도 나이가 많아졌고 그의 삶을 정리해야 할 시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지금 바울의 몸은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13) 로마 제국 전역에서 바울의 사역은 열매를 맺고 있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심겨졌고, 수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 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한 사람들 가운데 빌레몬이 있었다. 그는 브루기아에 거주하는 유력한 사람으로 그의 집에는 사람들이 매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과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인 빌레몬서는 빌레몬 개인에게 보낸 편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빌레몬 집에 있는 교회에보낸 편지다( 2).[1] 빌레몬은 부유한 사람이어서 그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고, 그들을 섬기며 집안의 여러 가지 일을 감당하는 많은 종들도 있었다.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에 참석하는 성도들은 빌레몬의 섬김과 헌신을 늘 칭송하였고 그 소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까지 들려왔다( 7).


그러던 어느날, 빌레몬의 집에 있던 종 가운데 한 명이 주인 몰래 도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종이 그 주인의 집에서 도망하는 일이 종종있었는데 로마 제국의 영토가 너무도 넓었기에 멀리 도망하면 주인이 그 종을 찾아내기가 워낙 어려웠던 점도 그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종이 주인의 집을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나면 대부분의 종들은 새로운 지역에서 정착하기까지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달아나곤 하였다. 주인의 집에서 도망하다 붙잡히면 어짜피 살아남기 어려우니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을 때를 대비하여 주인의 집에서 자신의 손으로 움켜 잡을 수 있을 만큼의 재물을 들고 떠났던 것이다.


빌레몬의 집에 있었던 종으로 그 주인의 재산을 탈취하여 도망하였던 오네시모는 운 좋게 자신의 모든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행하였다. 주인의 눈을 피해 멀리 도망하였고, 그의 손에는 지금 당장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입할 수 있는 재물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삶이 평탄할리 없었다. 자신의 출신을 숨긴 채 좌충우돌하며 근근히 살아가던 가운데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바울이 전해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의 신분이나 처지는 그대로였지만 오네시모는 하나님께서 빚으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무엇보다 사도 바울을 도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는 귀한 일꾼이 되었다.


오네시모의 삶이 변화되어 하나님과 복음을 위한 삶을 살아갈수록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에 대한 죄의식이 더욱 깊어졌다. 아마도 오네시모는 견딜 수 없는 마음에 사도 바울을 찾아가 자신의 과거사를 고백했을 것이다. 자신이 브루기아의 빌레몬이라는 주인을 섬기던 종이었으며 그곳에서 도망쳐 나올 때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눈물로 고백하였다.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초지종을 알게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그의 손에 쥐어줄 한 장의 편지를 쓴다.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다.


빌레몬서의 내용은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양한 교훈을 던져주지만, 특별히 새가족사역과 관련하여 많은 통찰력을 준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장면에서 빌레몬의 가정에는 교회 공동체가 있었으며 빌레몬서의 수신자가 빌레몬 개인이지만 동시에 빌레몬의 가정에 있는 교회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새신자인 오네시모를 교회를 대표하는 기존 신자인 빌레몬에게 보내며 온 교회 성도들이 오네시모를 맞이하며 환영하도록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새가족 사역이란 새로운 신자가 기존의 교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런데 새가족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기존의 신자들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이들이 있다. 사회적 신분이 다르거나 이해관계가 얽혀있을 수도 있고, 국적이나 언어의 차이도 있을 수 있다. 심지어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처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아니 만나서는 안되는 사이도 있다. 바로 그때 새가족 사역자는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새가족이 기존 교회의 성도들과 화해하고 새로운 교회 구성원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과 그 가정에 있는 교회가 오네시모를 마음으로부터 영접하고 환대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 한장의 편지를 쓴다. 그런 점에서 빌레몬서는 곧 사도 바울의 새가족 사역이었다.

 



[1] 빌레몬서의 수신자는 주로 “너”라는 단수로 표시되어 있지만 인사말과 결어는 “너희”라는 복수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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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6. 1. 5.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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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족부’라는 이름은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등록하여 새로운 가족이 되신 분들이 우리가 섬겨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새가족부’라는 단어의 영어식 표현인 ‘Hospitality Ministry’는 새가족부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새가족부 사역자의 역할은 바로 “환대”(hospitality)입니다.


환대(hospitality)는 병원이라는 단어의 hospital과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병원을 찾은 환자를 정성껏 받아들이고 돌봐야 하듯, 새가족부 사역자는 우리 교회를 처음 찾은 분들을 환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응급실을 찾아온 환자에게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재정상태, 도덕적 자질 등에 따라 환자를 취급한다면 그곳은 더 이상 병원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세를 상실한 것이겠지요. 새가족부 사역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를 찾아온 분들이라면 그들의 배경이나 사회적 지위에 상관 없이 우리는 그 모든 분들을 환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은 행정 처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조직 관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게 맡겨진 한 영혼을 바라보며 그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바로 그 분을 환대하는 것, 이것이 새가족부 사역자로 세워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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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