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2022. 5. 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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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여러 선배 목사님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때마다 목양실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글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양일념”입니다. 열아홉 살이라는 매우 어린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했던 저는 목양일념이라는 글씨에 담긴 선배 목사님들의 진심을 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청운의 꿈을 품고 신학교를 입학했던 저에게는 목양보다는 크고 화려한 사역, 그래서 교회 역사에 한 줄이라도 기록될만한 사역을 감당하고 싶은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현장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그 어른들의 다짐, 곧 목양일념이 얼마나 귀한 가치였는지 이제는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크고 위대한 일, 그래서 사람들이 기억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을 일들보다 화려하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지라도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여 그들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목양의 사명이야 말로 얼마나 값지고 귀한 사명인지요. 이것은 성공주의와 승리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가치이지만 너무도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신 장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열심히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을 수 없었던 바로 그 날이었지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베드로가 물고기를 몇 마리 잡았는지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그를 불러 사명을 맡기시는 데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한평생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 예수님은 물고기를 낚는 어부 베드로를 불러 이제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주님의 제자로 삼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3년의 시간이 지난 뒤, 베드로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물고기를 낚기 위해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명을 잃어버리고 갈릴리 바다로 돌아간 베드로를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본문 15절은 그날의 대화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5절)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명을 어부라는 상징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을 돌보는 목자의 이미지를 사용하시네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 어린양을 먹이라”입니다. 곧 목양의 사명이지요. 이 목양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 값진 것인지, 예수님은 동일한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강조하십니다. 16절의 뒷부분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신 그때로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베드로에게 사도의 사명을 재차 확인하시는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베드로는 교회의 사도가 되어 위대한 일을 참으로 많이 행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많은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하나님에 대해, 율법에 대해 논쟁을 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베드로의 지혜에 감탄할 정도였지요.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가책을 받고 회개하여 그날에 성도의 숫자가 삼천 명이나 더하였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가 되어 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사역을 많이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처럼 대단한 사역을 감당했던 베드로이지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명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고기를 낚는 어부라고 표현을 하든 양을 먹이는 목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든 그 의미는 동일한데, 곧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여 그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입니다. 

어떤 분들은 베드로에게 주어진 영혼 돌봄의 사명이 저와 같은 목회자에게 주어진 사명이요,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한평생 견지해야 할 삶의 자세가 목양일념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전적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같은 목회자에게 주신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명이 목양의 사명이기에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지금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제가 먼저 목양일념의 자세로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베드로,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내 양을 먹이라는 목양의 사명을 주셨던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말씀에서 모든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벧전 2:9) 구약시대에는 아론의 자손들에게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중보하는 제사장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며 영혼을 돌보는 왕 같은 제사장의 사명이 주어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직분과 사역이 있지만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하는 사역의 핵심,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사명은 바로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이 주셨다는 말씀을 들으면, 과연 내가 돌보고 양육해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떠오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질문의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필요만을 집중하였던 시선을 돌려서 조금만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는 성도들의 처지와 형편을 돌아보며 그들을 심방하고 위로하는 권사의 직분을 받으신 분들이 계시지요. 우리 중에는 구역식구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들을 돌보고 목양하는 구역장의 사명을 받으신 분들도 계십니다. 또 우리 중에는 어린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모든 역할이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을 실천하는 너무도 소중한 현장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정의 달 5월을 시작하는 오늘 우리가 목양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현장 한 곳을 반드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우리의 가정이지요. 특별히 하나님께서 부모의 귀한 역할을 허락하신 분들에게는 자녀들의 육신만이 아니라 자녀들의 영혼을 돌보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책임과 사명이 주어져 있지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영혼을 돌보는 가장 귀한 사명을 받았다면 우리 모두는 마땅히 목양일념의 자세로 그 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셨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께서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일깨워 주시기에 앞서 먼저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주목하면서 본문 1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5절)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질문이 무엇입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그 마음에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연이어 질문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번에는 17절입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반복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하였는데, 그 실패를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의 배려가 담겨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에 ‘사랑한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두 가지 종류의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를 확인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세한 해석과 묵상을 모두 귀하게 여기면서도,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더욱 집중하여야 할 교훈은 이것입니다.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그 귀한 영혼을 돌보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마음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그 아름다운 길에서 벗어나 화려한 일, 사람들이 칭찬하는 일,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박수 받는 일을 더 좋아하게 될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목양의 사명을 마지막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는 목양의 귀한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들어올 때, 우리는 더 이상 영혼을 돌보는 일에 마음을 쏟을 수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셨습니다. 세 번째 질문에 이르자, 베드로는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어 예수님께 대답하지요. 본문 17절입니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의 대답을 조금 풀어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큰 실수를 하여 주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그러나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 깊은 곳에는 언제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예수님은 세 번의 반복된 질문을 통해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이끌어 내셨고, 베드로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남은 한평생 목양일념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인물 가운데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사역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출애굽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매우 짧은 시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 대신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더 많은 시간 그가 감당해야 했던 사명은 광야에서 백성들을 돌보는 사역이었지요. 다른 나라의 왕들처럼 권세를 부리며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다면 40년의 광야 기간이 모세에게는 그렇게 힘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은 백성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부족한 광야에서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며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해야 하는 목양의 사명이었기에 너무도 힘겨운 사역이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감당했던 사역이 목양의 사명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민수기에 등장합니다. 백성들이 여러 가지로 불평하고 불만을 토로할 때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민 11:11-12) 

모세가 묘사하는 자신의 사명은 마치 젖먹는 아이를 양육하는 아버지처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양육해야 하는 목양의 사명이지요. 내가 낳은 한두 명의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돌보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목양하는 사명도 너무 크고 힘에 겨운데, 이처럼 어려운 목양을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감당해야 하니 모세는 너무도 괴로워 하나님께 불평하듯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모세는 과연 어떻게 40년이라는 그 긴 세월 동안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을 마지막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 하나의 대답을 우리는 신명기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을 양육하는 목양의 사명을 40년 동안 완수하였던 모세가 이제는 그 모든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 

바로 여기에 천방지축으로 하나님의 마음도 몰라주고 모세의 마음도 몰라주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마지막까지 사랑으로 품고 양육할 수 있었던 모세의 비결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세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물론 힘겨울 때도 많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요.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큼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우리의 뜻을 다하고, 우리의 힘을 다하여 우리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비록 실패할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많지만, 크게 근심하면서도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야기했던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며 선포하십시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하여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가 영혼을 돌보는 그 귀한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배우자로, 부모로, 자녀로, 그리고 형제와 자매로 불러주셔서 가정 안에서 식구들을 믿음으로 양육할 사명을 주셨으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여 아름답고 행복한 믿음의 가정을 가꾸어가는 이번 5월 한 달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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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