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2023. 3. 1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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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샌프란시스코는 관광 도시답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Boudin이라는 이름의 빵집이지요. 언듯 보면, 특별할 것 없는 빵집이 그토록 유명한 데에는 그 빵이 맛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곳이 미국의 독특한 역사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848년은 미국 역사에서 서부개척이 본격화된 연도입니다. 바로 그해에 미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켈리포니아 주에서 황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지요. 캘리포니아에서 황금이 발견되었던 1848년 직전까지만 해도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대략 1,000명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서부에 황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매년 수만 명의 개척자들이 그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해인 1849년 조금 전 말씀드린 Boudin이라는 이름의 빵집이 샌프란시스코 시내 한 중앙에 세워지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금을 찾기 위해 일확천금을 노리고 그 머나먼 서부개척의 길에 합류하였습니다. 그러나 매년 수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서부로 넘어왔지만, 그들 가운데 금광을 발견하고 큰 부자가 된 사람은 정말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토록 원하던 금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지요. 사람들이 금을 찾아 헤매고, 저 멀리 서부 어딘가 있을 법한 보석을 찾아 헤매고 있을 그때, 바로 그들의 옆에서 열심히 맛있는 빵을 구웠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딘가에 있을 금광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그 손에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하루 세 번씩 매일 먹어야 하는 빵을 열심히 구웠던 사람들은 15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면 한 번쯤 꼭 찾아가는 유명한 명소가 되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황금을 찾아 나섭니다. 아직 내 손에 없어요. 그래서 저 멀리 찾아갑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것은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너무 가까이 있기에 언제부터인지 그 소중함을 잊어버린 우리의 가족이 그러하고, 처음 함께 모여 예배하였을 때는 그토록 기쁘고 즐거웠는데 그것이 일년 이년을 넘어 십 년 혹은 그 이상이 되니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우리의 교회와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우들이 그러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 그 복음 안에 담겨있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우리 삶에 가장 귀한 보물이건만, 우리는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가장 귀한 보물은 뒤로한 채 저 어딘가에 있을 신기루와 같은 금광을 찾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날마다 공급하는 따뜻한 빵이 내 곁에서 구워지고 있건만,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황금과 보석을 찾기에 헤매었던 19세기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참된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가장 귀한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임이요, 또한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복음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들으셨다고요? 이제는 복음 이외에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원하신다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을 새롭게 만들고 우리의 인생을 풍성한 은혜로 가득하게 만드는 교회와 성도의 참된 보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교훈, 새로운 가르침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지 않기 위해,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복음의 말씀을 반복해서 듣고 복음의 말씀을 반복해서 선포해야 합니다. 찬송가 205장은 이렇게 노래하지요.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나의 마음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복하여 귀를 기울일 때,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풍성한 선물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쁜 소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문자 그대로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복음은 매우 나쁜 소식으로 시작한다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복음은 먼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살인을 저지른다든지 강도짓을 한다든지 그렇게 사람들에게 지탄받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X2)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많은 잘못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죄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세상의 지혜자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세상의 지혜자가 크리스천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지금 커다란 죄의 짐을 지고 있는데, 그 커다란 죄의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때 크리스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손에 있는 이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책이 무엇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르는 수많은 죄를 인식조차 못하고 지나가죠.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나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죄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내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조그만 소망이나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기준이나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기준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고백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 우리는 나의 양 어깨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죄의 무거운 짐이 지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께 진심 어린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지금까지 그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진심어린 회개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면,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내가 이 정도면 신앙생활도 잘해왔고 사람들에게 특별히 손가락질당할 일도 하지 않았으니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복음의 첫 번째 메시지도 바르게 깨닫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가복음 2장 17a절)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가복음 2장 17b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건강한 자는 정말로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몸은 아파요. 몸은 큰 질병에 걸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의사가 아무리 많아도 쓸데없지요. 아무리 의술이 뛰어난 의사도 그러한 사람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서면 커다란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나는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대속의 십자가가 그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나 자신의 죄를 깨닫는 은혜가 먼저 임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 지적하는 것 말고,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들 말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내가 죄인이며,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간절히 필요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곧 하나님의 기준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절망하게 되지요.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16a절) 

여러분, 우리에게 복음, 곧 복된 소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었습니까?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것으로 나타났어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안에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담겨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에서 “주셨다”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매우 특별한 단어입니다. 자,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누가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았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직접 못 박은 사람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로마의 어느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모든 책임이 직접 그 행위를 한 로마의 군인들에게만 있을까요? 그 모든 책임과 잘못을 예수님의 손과 발에 직접 못을 박은 군인들에게만 돌리는 것은 적절한 평가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당시 유대지방의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넘겨주었지요. 성경은 이 장면을 묘사할 때 “넘겨주다”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헬라어로 ‘파라디도미’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모든 책임을 빌라도와 그의 명령을 따른 로마의 군인들에게만 묻는 것은 올바른 평가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준 사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잖아요. 어디 그뿐인가요? 대제사장들을 비롯하여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을 때,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한 사람도 있었지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가룟 유다였습니다. 

이처럼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넘겨주다’는 단어를 추적하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유대인들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로마의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빌라도, 예수님을 향한 시기와 미움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대제사장들과 유대교 지도자들, 예수님을 수년간 따라다녔지만 주님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은 삼십에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었던 가룟 유다가 그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우리가 묵상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예수님을 넘겨준 또 한 분이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장면을 깊이 묵상하였던 어느 신학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누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었는가? 
돈을 위하여 유다가 넘겨준 것,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빌라도가 넘겨준 것도 아니다. 
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넘겨준 것도 아니다. 
바로 사랑 때문에 성부께서 넘겨주신 것이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믿음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이 마주할 최종 목적지는 영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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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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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요한복음 강해2022. 5. 1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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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룻기는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에서 살아가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그 땅에 큰 흉년이 들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이스라엘 사람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주신 약속의 장소라 믿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흉년을 맞이하자 그곳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모압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흉년을 만난 이스라엘보다는 모압에서의 새로운 출발이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지리라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내가 계획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고 하여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압 나라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엘리멜렉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남겨놓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홀로 남겨진 나오미는 아들 두 명을 모두 모압의 여인들과 결혼시켰습니다. 이런데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두 아들 모두 자녀를 낳기도 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희망찬 내일을 꿈꾸며 모압으로 이주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나오미의 가정은 모압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침내 나오미는 큰 슬픔 속에서 다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나오미가 남편과 함께 베들레헴을 떠난 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베들레헴에 풍성한 곡식과 양식이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기 때문이지요. 자, 이제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잃어버린 가련한 여인 나오미는 모압에서 맞이한 두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려 합니다. 지금 나오미의 형편에서는 이것이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남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나오미 입장에서는 며느리들이라도 모두 친정으로 돌려보내야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솔의 숫자가 줄어들기 때문이지요. 며느리들의 입장에서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는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고, 재물도 없고, 고향에는 농사를 지을 땅 한 평 없으니 친정으로 돌아가 생계를 유지하면서 다시 적절한 혼처를 알아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이처럼 당당하게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며 베들레헴을 떠난 나오미였지만, 고향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와 그의 가정의 모습은 쓸쓸하고 초라하기만 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정에 아직도 작은 희망의 씨앗은 남겨져 있었으니, 그것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오미가 그의 며느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룻 1:11) 각자의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지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룻 1:13) 나오미는 지금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어버린 큰 슬픔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며느리들을 향한 미안하고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이 그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나오미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자 나오미와 두 명의 며느리가 크게 슬퍼하며 부둥켜안고 웁니다. 그리고 며느리 가운데 한 명이었던 룻이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룻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남겨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의 내일을 위해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홀로 남겨진 시어머니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자신이라도 곁을 지켜주겠다는 사랑과 연민이 룻의 마음에 가득했던 것이지요. 이처럼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나오미와 룻의 가정은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 서로를 향한 사랑이 있었기에 그 모든 위기와 어려움을 그들은 견디어 낼 수 있었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 가정을 기쁨과 행복의 가정으로 바꾸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지금 어떠하십니까? 행복을 위한 조건이 가득하신가요? 여러분의 가정에는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충분한 재물이 있고, 가족들은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고 모두 건강하며, 식구들이 함께 계획하고 시행하는 모든 것이 성공하고, 자녀들은 믿음과 신앙 위에 굳건하게 서 있기에 근심도 없고 걱정도 없이 나날이 행복한 삶을 계신가요? 아니면,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망하게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오미와 룻의 가정과 같이 여기저기 부족한 것뿐이어서 점점 행복의 조건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계시지는 않으시나요? 우리의 가정에 부족한 것도 많고 아쉬운 점이 많이 보일 때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서로를 향한 사랑만이” 그 모든 부족함을 채울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 곧 명령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때는 구체적으로 언제였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붙잡히셨던 바로 그날 저녁입니다. 하루만 지나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지난 삼 년 동안 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였지만, 이제는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실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시지요.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므로 이제 제자들을 떠나셔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친히 함께 계시는 동안에는 제자들에게 별로 부족한 것이 없었지요. 제자들에게 먹을 양식이 부족해도 괜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나누어주시니 오병이어만으로도 수천명의 사람들을 먹이실 수 있었잖아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을 상대할 성경 지식이 부족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그들의 질문과 공격에 대답하시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병자들이 찾아오고 귀신 들리 사람이 찾아와도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니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가 되었어요. 그러면 예수님을 떠나보내야 하는 제자들이 홀로 서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영적 은사입니까?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재물입니까?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건물이나 시설인가요? 여전히 무엇 하나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제자들 심지어 예수님마저 떠나보내야 하는 제자들에게 그 모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을 주님께서 새 계명으로 명령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는 예수님 곁에 있기만 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는 주님 곁에만 있으면,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이 펼쳐지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임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잖아요.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면 제자들의 모임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신앙의 공동체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의 모임 안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경험시켜 주셨던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아도 사람들은 우리의 모임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신앙의 공동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모임,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는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를 향한 사랑이 우리의 모임과 우리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나라로 빚어 갑니다. 특별히 우리의 공동체가 어려운 시간을 보낸다면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공동체를 지탱해주는 최고의 덕목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랑을 실천하기가 너무도 어렵다는 점입니다. 내가 먼저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나의 사랑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그때에도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할까요? 교회 안에서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성도들을 향해서 내가 왜 끝까지 사랑을 실천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이 나의 마음에서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멈추어 버리지요.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너무도 힘겨운 일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새 계명에 순종하여 사랑을 실천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자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명령하셨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우리가 서로에게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려면, 나를 적대시하고 무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의 생명까지도 내어 놓을 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과연 그러한 사랑이 우리에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잘 알지만, 막상 사랑을 실천하기가 망설여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새 계명을 어떠한 자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매우 단순한 사실부터 시작해보죠.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새 계명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명령하셨을가요? 그렇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조금도 실천할 수 없는 것을 행하라 명령하셨다면, 예수님의 명령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잖아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새 계명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완벽하게 나의 삶으로 실천하지는 못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의 작은 일부분은 우리가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위대한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부탁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며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때 무리들 가운데 한 여인이 예수님 곁으로 걸어오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포시 잡았습니다. 그리자 그의 몸에 있던 혈루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자 여인의 질병이 치유된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요 이적입니다. 그러면 이적이나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행하신 사랑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사랑은 여인의 질병이 치유된 이후에 등장합니다. 곧, 야이로와 함께 바쁘게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 여인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그 여인의 처지와 형편을 모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신 뒤 마침내 그 여인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명령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이적을 행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명령하셨지요. 그러므로 지금 내가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아도 그 걸음을 멈추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게 따스한 이야기를 건네는 정도의 사랑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행동이 됩니다. 이 정도의 사랑이라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우리도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볼까요? 하루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차리곤 했어요.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어떻게요? 그날 저녁 제자들과 따로 모인 자리에서 비유의 말씀을 쉽게 풀어주시지요. 한번 이야기했는데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붙잡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정도의 사랑이라면 우리도 간절히 기도하면서 실천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캘커타의 성녀라 불리는 마더 테레사를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지요. 그녀가 생전에 행하였던 선행과 그가 실천했던 사랑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잖아요. 그런데 마더 테레사가 했다고 전해지는 명언 가운데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큰 일을 하기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은 일을 사랑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크고 놀라운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작은 일부터, 상대방이 나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때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친절하고 상냥하게 나의 생각이나 마음을 전하는 것부터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요,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아름답게 바꾸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위대한 사랑을 실천했던 분을 꼽는다면, 많은 분들이 손양원 목사님을 떠올리실 듯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이른바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가 무엇이지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 자신의 양자로 삼는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셨잖아요. 과연 우리 가운데 그와 같은 위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요? 과연 우리시대에도 그와 같이 위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이 실천하신 사랑의 모습 가운데 개인적으로 저의 마음에 큰 감명을 주었던 장면은 두 아들을 죽은 공산당원을 양자로 삼은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병 환자를 대상으로 목회를 하셨잖아요. 극심한 통증 속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애양원의 한 성도가 목사님께 시원한 사이다가 마시고 싶다고 말할 때, 그 음료수 한잔을 마실 수 있도록 가져다주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장면이었습니다. 시원한 음료수 한 잔을 대접하는 것, 어찌 보면 너무도 작은 봉사지요. 그러나 그 안에 얼마나 크고 위대한 사랑이 담겨 있는지요.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하여 양자 삼는 위대한 사랑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음료수 한 잔 대접하는 작은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원자탄으로 기억하지만, 목사님도 작은 일을 사랑으로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가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그 기도문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옵소서
이들은 세상에서 버림을 당한 자들이옵고
부모와 형제의 사랑에서 떠난 자들이옵고
세상 모든 인간들이 다 싫어하여 꺼리는 자들이오나
오 주여, 그래도 나는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새 계명,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 위해 기도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는 위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없고, 간절히 기도하더라도 손양원 목사님께서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목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음료수 한잔을 대접하는 사랑이나 지금 나의 관심이 필요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여주는 정도의 사랑은 실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비록 작은 것이지만 사랑으로 행할 때 우리의 삶에 주님의 모습이 보이게 되고, 비록 작은 것이지만 사랑으로 행할 때 여러분이 계신 바로 자리는 비로소 예수님을 모신 천국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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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20 “마더 테레사”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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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요한복음 강해2022. 5. 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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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여러 선배 목사님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때마다 목양실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글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양일념”입니다. 열아홉 살이라는 매우 어린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했던 저는 목양일념이라는 글씨에 담긴 선배 목사님들의 진심을 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청운의 꿈을 품고 신학교를 입학했던 저에게는 목양보다는 크고 화려한 사역, 그래서 교회 역사에 한 줄이라도 기록될만한 사역을 감당하고 싶은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현장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그 어른들의 다짐, 곧 목양일념이 얼마나 귀한 가치였는지 이제는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크고 위대한 일, 그래서 사람들이 기억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을 일들보다 화려하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지라도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여 그들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목양의 사명이야 말로 얼마나 값지고 귀한 사명인지요. 이것은 성공주의와 승리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가치이지만 너무도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신 장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열심히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을 수 없었던 바로 그 날이었지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베드로가 물고기를 몇 마리 잡았는지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그를 불러 사명을 맡기시는 데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한평생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 예수님은 물고기를 낚는 어부 베드로를 불러 이제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주님의 제자로 삼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3년의 시간이 지난 뒤, 베드로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물고기를 낚기 위해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명을 잃어버리고 갈릴리 바다로 돌아간 베드로를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본문 15절은 그날의 대화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5절)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명을 어부라는 상징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을 돌보는 목자의 이미지를 사용하시네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 어린양을 먹이라”입니다. 곧 목양의 사명이지요. 이 목양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 값진 것인지, 예수님은 동일한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강조하십니다. 16절의 뒷부분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신 그때로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베드로에게 사도의 사명을 재차 확인하시는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베드로는 교회의 사도가 되어 위대한 일을 참으로 많이 행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많은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하나님에 대해, 율법에 대해 논쟁을 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베드로의 지혜에 감탄할 정도였지요.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가책을 받고 회개하여 그날에 성도의 숫자가 삼천 명이나 더하였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가 되어 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사역을 많이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처럼 대단한 사역을 감당했던 베드로이지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명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고기를 낚는 어부라고 표현을 하든 양을 먹이는 목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든 그 의미는 동일한데, 곧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여 그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입니다. 

어떤 분들은 베드로에게 주어진 영혼 돌봄의 사명이 저와 같은 목회자에게 주어진 사명이요,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한평생 견지해야 할 삶의 자세가 목양일념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전적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같은 목회자에게 주신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명이 목양의 사명이기에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지금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제가 먼저 목양일념의 자세로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베드로,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내 양을 먹이라는 목양의 사명을 주셨던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말씀에서 모든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벧전 2:9) 구약시대에는 아론의 자손들에게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중보하는 제사장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며 영혼을 돌보는 왕 같은 제사장의 사명이 주어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직분과 사역이 있지만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하는 사역의 핵심,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사명은 바로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이 주셨다는 말씀을 들으면, 과연 내가 돌보고 양육해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떠오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질문의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필요만을 집중하였던 시선을 돌려서 조금만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는 성도들의 처지와 형편을 돌아보며 그들을 심방하고 위로하는 권사의 직분을 받으신 분들이 계시지요. 우리 중에는 구역식구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들을 돌보고 목양하는 구역장의 사명을 받으신 분들도 계십니다. 또 우리 중에는 어린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모든 역할이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을 실천하는 너무도 소중한 현장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정의 달 5월을 시작하는 오늘 우리가 목양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현장 한 곳을 반드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우리의 가정이지요. 특별히 하나님께서 부모의 귀한 역할을 허락하신 분들에게는 자녀들의 육신만이 아니라 자녀들의 영혼을 돌보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책임과 사명이 주어져 있지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영혼을 돌보는 가장 귀한 사명을 받았다면 우리 모두는 마땅히 목양일념의 자세로 그 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셨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께서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일깨워 주시기에 앞서 먼저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주목하면서 본문 1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5절)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질문이 무엇입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그 마음에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연이어 질문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번에는 17절입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반복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하였는데, 그 실패를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의 배려가 담겨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에 ‘사랑한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두 가지 종류의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를 확인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세한 해석과 묵상을 모두 귀하게 여기면서도,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더욱 집중하여야 할 교훈은 이것입니다.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그 귀한 영혼을 돌보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마음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그 아름다운 길에서 벗어나 화려한 일, 사람들이 칭찬하는 일,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박수 받는 일을 더 좋아하게 될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목양의 사명을 마지막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는 목양의 귀한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들어올 때, 우리는 더 이상 영혼을 돌보는 일에 마음을 쏟을 수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셨습니다. 세 번째 질문에 이르자, 베드로는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어 예수님께 대답하지요. 본문 17절입니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의 대답을 조금 풀어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큰 실수를 하여 주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그러나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 깊은 곳에는 언제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예수님은 세 번의 반복된 질문을 통해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이끌어 내셨고, 베드로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남은 한평생 목양일념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인물 가운데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사역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출애굽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매우 짧은 시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 대신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더 많은 시간 그가 감당해야 했던 사명은 광야에서 백성들을 돌보는 사역이었지요. 다른 나라의 왕들처럼 권세를 부리며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다면 40년의 광야 기간이 모세에게는 그렇게 힘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은 백성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부족한 광야에서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며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해야 하는 목양의 사명이었기에 너무도 힘겨운 사역이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감당했던 사역이 목양의 사명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민수기에 등장합니다. 백성들이 여러 가지로 불평하고 불만을 토로할 때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민 11:11-12) 

모세가 묘사하는 자신의 사명은 마치 젖먹는 아이를 양육하는 아버지처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양육해야 하는 목양의 사명이지요. 내가 낳은 한두 명의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돌보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목양하는 사명도 너무 크고 힘에 겨운데, 이처럼 어려운 목양을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감당해야 하니 모세는 너무도 괴로워 하나님께 불평하듯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모세는 과연 어떻게 40년이라는 그 긴 세월 동안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을 마지막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 하나의 대답을 우리는 신명기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을 양육하는 목양의 사명을 40년 동안 완수하였던 모세가 이제는 그 모든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 

바로 여기에 천방지축으로 하나님의 마음도 몰라주고 모세의 마음도 몰라주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마지막까지 사랑으로 품고 양육할 수 있었던 모세의 비결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세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물론 힘겨울 때도 많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요.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큼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우리의 뜻을 다하고, 우리의 힘을 다하여 우리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비록 실패할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많지만, 크게 근심하면서도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야기했던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며 선포하십시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하여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가 영혼을 돌보는 그 귀한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배우자로, 부모로, 자녀로, 그리고 형제와 자매로 불러주셔서 가정 안에서 식구들을 믿음으로 양육할 사명을 주셨으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여 아름답고 행복한 믿음의 가정을 가꾸어가는 이번 5월 한 달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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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요한복음 강해2021. 4. 2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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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에 첫째 아이가 태어난 뒤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처음으로 병원 문을 나왔을 때 느꼈던 저의 감정은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저의 마음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분명 아이를 안고 있었지만 무게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포근한 느낌만 전해졌지요. 3kg이 조금 넘는 조그마한 생명은 무게가 아니라 감촉이었습니다. 그렇게 첫째 아이를 안고 업는 일은 아빠인 저에게 행복이라는 촉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아이는 저에게 더 이상 촉감이 아니라 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어린 아들은 아빠가 예전처럼 자기를 번쩍 안아주고 업어주기를 원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아들을 번쩍 안거나 업고 다니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더라고요. 지금은 그저 서 있는 아들을 안아줄 뿐이지 예전처럼 번쩍 안거나 업고 다니는 일은 없습니다. 언젠가 제 아들이 자기의 등을 나에게 향하고 쪼그려 앉으면서, 저에게 업히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때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간이 흐르면 아들은 아빠를 업어줄 수 있지만, 아빠는 더 이상 아들을 업어줄 수 없게 되는구나.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모습을 부모가 자녀를 안고 업어주는 장면으로 묘사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46장입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이사야 46장 3절) 

마치 부모가 이제 막 태어난 자녀를 안아주고 업어주듯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처음부터 안아주고 업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부모의 차이점이 그 다음 구절에 등장합니다.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이사야 46장 4절) 

시간이 흐르면 아들은 아버지를 업을 수 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업고 다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노년이 되기까지, 그의 백성이 백발이 되기까지 가슴에 품고 등에 업으면 인도하여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오늘 본문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 10장 7절)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양의 문은 양이 우리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문을 말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루 종일 초원을 돌아다니며 풀을 뜯었던 양들이 이제 저녁이 되어 우리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딱 하나밖에 없지요. 곧 양 우리에 나 있는 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뜻일까요?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반드시 찾아오게 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어느 통로를 이용해야 천국이라는 우리의 본향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또 다른 표현과 그 의미가 동일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찾아보면서 요한복음 10장 9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0장 9절)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어떠한 유익을 얻지요? 구원을 받습니다. 조금 전에 설명드렸던 바로 그 내용이지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또 하나의 유익을 더 말씀하시네요.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영혼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동일한 내용이 10절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장 10절)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바는 명확합니다.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도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도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의 삶을 허락해 주십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우리는 부활절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기쁨의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몇 주간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해 여러분과 나누면서 제 마음 한쪽에 한가지 의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너무도 명확하고,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도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의 은혜를 충만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영생의 은혜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풍성한 영생을 누리는 삶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으신가요? 

지난 몇 주 동안 제 마음에서 말끔하게 제거할 수 없었던 의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이 된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예수님을 말미암아 지금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부활의 메시지를 설교하고, 부활의 메시지를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하여 지금 이곳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삶은 우리가 추구하고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기대하는 그 풍성한 삶과는 너무도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요? 과연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이 부활의 이 기쁨 계절을 보내는 저의 마음 한쪽에 찜찜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을 품고 있는 상태에서 오늘 본문을 여러 차례 읽다가 어느 한 대목에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함께 읽었던 9절입니다. 

“내가 문이니”이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유익을 말씀하시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이 장면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양들이 저녁이 되어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 출입구, 곧 양의 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가며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주목해 보세요.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천국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았는데, 왜 또 천국에서 나와야 할까요? 이 구절에서 ‘들어가며 나오며’는 무슨 뜻일까요? 물론, 양들은 저녁에 우리에 들어갔다가 그다음 아침이 되면 풀을 찾아 나서기 위해 우리에서 나와야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천국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데, 그 천국에서 다시 나와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거든요. “들어가며” 그리고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런데 여러분, 이 구절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이 맞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소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는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최후 심판의 날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가면 다시 천국에서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날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 성도들의 삶이 “들어가면”의 삶이 아니라 “들어가며 나오며”의 삶이에요. 우리는 예배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도 하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천국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매일 그곳에서 나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선한 목자의 은혜

이쯤되면 또 하나의 의문이 들지요. 매일같이 안전한 우리를 떠나야 하는 양들처럼 험한 세상살이로 내몰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풍성한 ‘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약속하셨잖아요.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도 하시고, 지금 이곳에서도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신다면서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은혜는 지금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입니까? 그 대답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목자의 비유에 담겨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요한복음 10장 14-15a절)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친밀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도 예수님을 아는 친밀함이죠. 

목사는 매일 아침 양들을 안전한 우리에서 이끌고 나와 초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말씀은 지금 당장 안전한 울타리 안에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쓸 것을 가득 채워놓고 그곳에서 우리를 사육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매일 아침 우리를 데리고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이끌고 가세요. 풀을 찾아 떠나는 길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풀을 찾기 위해 걸어가는 길에서 더위에 목이 마르기도 하고, 맹수들의 위협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내가 알고 주님께서 또한 나를 아시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거예요.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도 그 주님을 알아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누리고 있으니,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도 샘물이 나올 때까지 참고 견디며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어요.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장 14-15절)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구절이지만,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 매우 어색한 내용이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양을 공격하기 위해 사나운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삯꾼이야 당연히 양을 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먼저 구하겠지요. 그러나 삯꾼이 아닌 목자라도 사나운 맹수가 다가오는 장면을 보면 열이면 열 먼저 자신의 목숨부터 구하지 않겠어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목자가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를 처음부터 제거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안전한 곳에 머물러 있도록 하락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서 이끌고 나오십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목마름과 궁핍을 겪기도 하고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맹수들의 공격도 받지요. 그러나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이 괴로운 광야길이라면 더욱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주님을 아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더욱 누리십시오. 우리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가 여러분에게 새로운 힘을 주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나신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새로운 용기를 주어 그 모든 과정을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장면을 부모가 이제 막 태어난 자녀를 안고 혹은 업고 다니는 장면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인간 부모는 자녀가 어렸을 때만 번쩍 안거나 업어서 데리고 다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이 노년이 되어서도, 혹은 백발이 되어서도 번쩍 안아 주시고 등에 업어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모가 어린 자녀를 안거나 업어주는 장면을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부모의 품에 안겨있는 그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철저히 부모가 데려가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지요. 아이의 발은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안거나 혹은 업어서 인도해주시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안고 혹은 업어주신다는 것은 너무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 대신 우리는 한 가지를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고 그저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시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백발이 되기까지 우리를 안고 업고 다니시기에, 우리는 아무리 성인이 되어 나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은 나이가 되어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실제로 이사야서가 말씀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유대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우리는 안전한 우리 안에 머물러 있고 싶어요. 그저 선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께서 매일 안전한 나무 그늘 밑에 건건초를 공급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런데 주님은 매일같이 우리를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이끌어 내시네요.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다 보니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목마름과 굶주림을 겪기도 하고, 심지어 맹수를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하나님의 품에 안겨 주님이 이끄시는 장소로 왔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여러분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장소에 와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선한 목자요, 
여러분의 좋으신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심을 믿고, 여러분이 계신 그 자리에서 내가 주님을 알고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친밀함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고,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따스한 품을 누리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어디에 계시든 상관 없이 예수님께서 풍성한 은혜의 삶을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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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요한복음 강해2021. 3. 21.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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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자에 대해여”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단락이 있습니다. 그 단락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우리 신앙인의 모습을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예수님과 그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있거니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많이 있으나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만찬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금식을 같이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에 경탄하지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함께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각주:1]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십자가라는 사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토록 고통스러운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던 이유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영생의 선물이라는 것도 우리는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우리가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만을 묵상한다면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걸아가신 십자가와 부활의 그 길은 오늘 우리도 따라가야 할 제자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한복음 12장 23절)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므로, 23절의 영광은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요. 나아가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요한복음 12장 28절) 

저는 어린 시절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올림픽 등 중요한 대회에서 매달을 딴 선수들이 인터뷰를 하거나 연말 여러 가지 시상식에서 수상자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말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 시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1등을 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은 어린 시절 저에게만 있었던 생각이 아니라 지금도 한국 교회 안에 넓게 퍼져 있는 일반적인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후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읽으며 어린 시절의 그 이미지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나아가 성부 하나님의 영광의 핵심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들려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삶을 ‘한 알의 밀’에 비유하여 설명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집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의미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듯이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도 대단히 위대한 사건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인류 구원이라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그다음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 그 과정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서도 참된 영광을 얻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으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찬란한 영광의 중심에는 십자가의 고통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교회에서 많이 배우셨죠? 그러면 이제 한 가지 사실을 더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성공을 이루거나 자신의 분야에서 1등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본받아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때,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

자신의 삶을 한 알의 밀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희생하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한복음 12장 25절) 

이 구절은 앞뒤의 문맥을 떼어놓으면 오해하기 참 쉬운 구절이지요. 문자적으로 보면 자신의 생명을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인데, 언듯 깊은 절망 속에서 자살을 시행하거나 개인적인 야망과 포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뒤의 구절을 함께 읽으면 예수님의 의도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앞의 구절에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므로 앞의 구절과 연결해서 본문 25절을 읽으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나 자신을 희생하기 싫어 끝까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곧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본문 25절에 나오는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주님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생명까지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또한 바로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읽으면 본문 25절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요한복음 12장 26a절) 예수님은 지금 성도들이 예수님을 섬기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염두에 둔다면 25절의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섬기겠다고 입술로 말은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이육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동일한 논리로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은 누가 될까요?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본문 25절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한 번만 더 설명해 볼까요? 여기에 등장하는 ‘사랑’ 그리고 ‘미움’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감정을 나타내잖아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감정, 곧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나의 온 마음이 향하고 있어서 이 세상의 것들이 상대화되어 버리는지, 아니면 이 세상의 것들에 우리의 마음이 온통 향하고 있어서 예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지만 그 마음이 예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 25절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설명드렸는데요.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도 분명해서 그 의도가 무엇인지 우리는 많은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통해 수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바로 나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나의 십자가를 지는 자기 부인과 자기희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 복음의 진리를 이제는 나의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순종과 실천

여러분, 어떠세요? 오늘 본문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신가요? 아니지요. 더 이상 우리에게 설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순종하려는 결단,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에게 적용하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대면할 때 느끼는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에 순종하여 실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나는 성경말씀 중에 내게 이해되는 내용이 나를 더 괴롭힌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기에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1등 인생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을 참고 견디는 인내의 인생이라는 사실도 머리로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나의 삶에서 실천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워요. 그래서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걸아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일은 우리의 본성이 거부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일뿐 나의 삶이라는 현실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천국도 사랑하고, 예수님의 위로도 좋아하며,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만찬 자리도 사모하지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예수님과 함께 당하려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탄하였던 것입니다. 

올해 사순절을 시작하며 어느 권사님과 나눈 짧은 대화가 계속해서 제 머리에 맴돌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올해의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묵상하고 예수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 좋겠다는 소원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께서 그러한 마음의 소원은 있지만 생각처럼 잘 안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그 말의 의미를 잘 알죠. 때로는 저도 너무 힘들거든요.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세요?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절은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고 주님과 친밀함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다시금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는 그러한 이상이 우리의 삶의 현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근거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을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대원칙이라고 설교할 수 있고, 여러분도 설교를 들으며 ‘아멘’이라고 응답하실 수 있지요.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나의 생명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다고 저는 설교할 수 있고 여러분도 ‘아멘’이라고 응답하실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설교도 하고 아멘으로 응답하더라도 우리의 본성은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니,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을 사모하고, 예수님의 위로는 좋아하고 예수님께 함께하는 만찬을 즐거워하면서도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은 회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 마음에 여전히 맴돌고 있는 그 날 권사님과의 짧은 대화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동참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정반대로 우리를 인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악이 용서받았다는 대속의 은혜,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든 것 위에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하며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많은 열매를 맺나니

토마스 아 켐피스는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아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고, 예수님의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예수님과 함께 만찬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많지만 주님과 함께 금식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하늘나라의 첩경이 되는 
십자가의 길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십자가 안에 구원이 있고, 
십자가 안에 생명이 있고, 
십자가 안에 평화가 있고, 
십자가 안에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기쁨이 숨겨져 있습니다. [각주:2]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의 본성이 무엇이라 이야기하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한복음 12장 25절)

우리가 신앙생활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길도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자기희생과 자기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계신 장소가 가정이라면 여러분이 그곳에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자신을 부인하십시오. 여러분이 계신 장소가 직장이라면 여러분이 계신 그곳에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자신을 희생하십시오. 여러분이 계신 장소가 학교라면 여러분이 계신 그곳에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여러분이 계신 장소가 교회라면 여러분이 계신 그곳에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여러분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내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하여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직장과 여러분의 학교와 바로 이 교회 가운데 풍성한 열매를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끝까지 따라가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곳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음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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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05 “토마스 아 켐피스”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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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토마스 아 켑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2. 11. 1, 3.  [본문으로]
  2.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2. 12. 3-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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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요한복음 강해2021. 3. 14.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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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의 주제는 ‘거듭남’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의 ‘거듭남’은 너무도 중요해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거듭남의 중요성을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진실로 진실로”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시네요. “진실로 진실로” 얼마나 중요한 내용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강조하겠습니까? 그러면서 말씀하시죠. “사람이” 이것은 누구든지라는 뜻입니다. “사람이”(누구든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거듭남’을 신앙생활의 부수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어서 거듭나지 않으면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지만 1900년대 후반까지도 서유럽이나 북미의 나라들은 기독교 국가로 불릴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고, 성탄절이나 부활절이 되면 교회를 출석하고, 결혼식과 장례식 등 인생의 중요한 모든 의식을 교회에서 진행하였지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질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과 이러한 대답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지요. 기독교 문화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 기독교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동화되기는 하였지만 그 사람이 마음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지, 삶의 모든 과정 속에서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모시며 살아가는지는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명목상으로만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참으로 그리스도인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에 한 가지 표현을 덧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거듭남이라는 표현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입이까?”(Are You a Re-born Christian?)

 

매주 교회를 출석하며 예배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의 종교는 당연히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의 주제인 ‘거듭남’은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던집니다. 단지 교회의 성도 명부에 여러분의 이름이 등록되어 있는 것 말고, 단지 일주일에 한 번 교회 예배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 말고, 단지 예배시간에 눈을 감고 기도하거나 조그마한 목소리로 찬송가를 따라 부르는 것 말고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여러분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십니까? 물론 이 자리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손을 들어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이 질문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답해야 하는 너무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거듭남의 첫단계 _ 회개

 

거듭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주제가 많이 있지만, 오늘은 거듭남의 세 가지 단계에 대해 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거듭남의 첫번째 단계는 회개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죠. 한자말로 표현하면 중생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거듭남, 중생 혹은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면 모두 동의어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거듭남을 건물로 비유하면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계속하려면, 아니 우리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시작이라도 하려면 나 자신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리모델링으로는 안 됩니다. 나의 삶이 처음부터 다시 태어나는 재건축, 곧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이 필요해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곧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나에게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많으니 그러한 단점을 고치다 보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불가능해요. 처음부터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이 없이, 그저 일부분만 수정해서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첫번째 단계는 내가 하나님 앞에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의 절망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복음은 분명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매우 나쁜 소식으로 시작한다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복음은 먼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살인을 저지른다든지 강도짓을 한다든지 하는 그러한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많은 잘못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죄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아시지요? 이 책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세상의 지혜자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세상의 지혜자가 크리스천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지금 커다란 죄의 짐을 지고 있는데, 그 커다란 죄의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때 크리스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손에 있는 이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1] 이 책이 무엇일까요? 당연히 성경책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르는 수많은 죄를 인식조차 못하고 지나가죠.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나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죄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나의 행실의 일부분을 고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처음부터 구제불능이니 아예 다시 태어나야 하는구나, 거듭남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조차 없구나, 중생의 은혜가 없이는 나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구나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회개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지금까지 그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진심어린 회개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면,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그래도 내가 이 정도면 신앙생활도 잘 해왔고 사람들에게 특별히 손가락질당할 일도 하지 않았으니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거듭남의 첫번째 단계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셨지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가복음 2장 17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건강한 자는 정말로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몸은 아파요. 몸은 큰 질병에 걸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건강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에게는 의사가 아무리 많아도 쓸데없지요.아무리 의술이 뛰어난 의사도 그러한 사람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서면 커다란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나는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대속의 십자가가 그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므로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런 소망도 없는 큰 죄인이라는 분명한 깨달음이요, 그로 말미암은 진실된 회개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나 자신의 죄를 깨닫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 지적하는 것 말고요.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들 말고요.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내가 죄인이며, 내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간절히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남의 두 번째 단계 _ 믿음

 

거듭남의 두번째 단계는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등장하지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이 구절이 유명한 이유는 이 하나의 구절 안에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먼저, 이 구절의 뒷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여기서 영생이란 우리의 몸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첫 번째 탄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은혜를 말하지요. 그런데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이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거듭남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 믿음의 내용이 요한복음 3장 16절 앞부분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사랑이네요. 그리고 그다음을 주목해보세요. “독생자를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죄와 절망에 빠져있던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그 믿음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주셨다”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매우 특별한 단어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누가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았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로마의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모든 책임이 직접 그 행위를 한 로마의 군인들에게 있을까요? 그 모든 책임과 잘못을 예수님의 손과 발에 직접 못을 박은 군인들에게 돌리는 것은 적절한 평가가 아니죠? 왜 그렇습니까?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당시 유대지방의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넘겨주었지요. 성경은 이 장면을 묘사할 때 “넘겨주다”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헬라어로 ‘파라디도미’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빌라도와 그의 명령을 따른 로마의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올바른 평가인가요? 결코 아닙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잖아요. 어디 그뿐인가요? 대제사장들을 비롯하여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을 때,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한 사람도 있었지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가룟 유다였습니다.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넘겨주다’는 단어를 추적하다 보면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유대인들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로마의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빌라도, 예수님을 향한 시기와 미움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대제사장들과 유대교 지도자들, 예수님을 수년간 따라다녔지만 주님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은 삼십에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었던 가룟 유다가 그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우리가 묵상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예수님을 넘겨준 또 한 분이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장면을 깊이 묵상하였던 어느 신학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었는가?

돈을 위하여 유다가 넘겨준 것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빌라도가 넘겨준 것도 아니다.

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넘겨준 것도 아니다.

바로 사랑 때문에 성부께서 넘겨주신 것이다. [2]

 

성도 여러분, 거듭남의 두 번째 단계는 믿음입니다. 무엇을 믿는 믿음일까요? 십자가에 담겨 있는 성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던 나의 죄악을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죄악으로 점철된 인생에서 벗어나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영생의 선물임을 믿을 때,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내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도저히 용서받을 길이 없는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자책에 머물러 있는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어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셨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여러분의 그 무거운 죄의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으로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여러분은 과거의 죄악 된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 다시 태어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세 번째 단계 _ 거듭난 삶

 

회개와 믿음을 통해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는 거듭남의 단계를 세 가지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마지막 단계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단적인 예로, 이미 거듭남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에게 ‘당신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질문하면 당황하면서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의 과정을 거쳐 거듭남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 앞에 자신이 없어지는 이유는 이제 말씀드리려는 거듭남의 마지막 세번째 단계를 지속적으로 밝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3장 21절)

 

여기에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따른 자”는 복음의 진리를 믿어 거듭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회개와 믿음의 과정을 통해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은 빛을 좋아하게 되어 있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듭난 이후 자신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안에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따라가야 하는 삶의 대원칙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거듭남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셨잖아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나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도 믿으시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까?’ 질문하면 우리는 왜 이렇게 자신이 없어질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그 이유를 분명히 알려줍니다. 거듭남을 체험하기는 했지만,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안에서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이미 거듭남을 체험하셨다면 이제는 다시 태어난 사람답게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라디아서 2장 20절)

 

바로 이것이 거듭남의 마지막 세번째 단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은혜가 가득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아직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오늘 바로 이 자리에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거듭남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미 거듭남의 은혜를 체험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다시 한번 여러분의 마음에 거듭남의 은혜가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이 어둠이 아닌 빛으로, 절망이 아닌 희망으로, 슬픔이 아닌 기쁨의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새로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11026125

 

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10 “존 번연”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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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hn Bunyan, Pilgrim’s Progress, part I, v. 41.

[2]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No Condemnation in Christ Jesus, 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112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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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요한복음 강해2021. 3. 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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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교회의 활동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장 눈의 띄는 변화는 예배당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코로나로 인한 교회 활동의 변화를 조금 더 세밀하게 관찰해보면 코로나의 대유행 시기를 보내면서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지속되었던 교회의 활동은 단연코 예배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면할 수 없으니 비대면으로 진행을 하더라도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활동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지요. 예배, 교육, 친교, 봉사, 선교가 그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교회는 이 다섯 가지 영역이 모두 위축된 것이 사실이지만, 특별히 친교와 봉사 그리고 선교의 활동이 주로 멈추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다른 모든 활동을 다 포기하면서도 단 한 주도 멈추지 않고 진행되었던 것이 바로 예배요, 교회의 모든 역량이 집결되었던 영역도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니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은 교회의 예배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위협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코로나의 대유행은 교회와 성도들이 예배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의 예배를 이야기하다보면, 대면 예배와 비대면, 특별히 온라인 예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코로나 이전까지 예배당에 모이지 않고 TV나 모바일의 영상을 통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생각했습니다. 몸이 아파 교회에 갈 수 없는 경우나, 근처에 교회가 없는 선교지가 그러한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 속에서 예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교회는 온라인 예배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상을 통해 참여하는 온라인 예배의 부정적인 점이 많이 지적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성도들이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의 ‘시청자’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올려드리는 예배자의 자리를 떠나 영상의 단순한 시청자로 머물러 있다면 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예배자인가? 아니면 시청자인가? 이것은 영상을 통한 온라인 예배가 일상이 된 지금,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예배자와 시청자의 구분은 온라인 예배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배당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우리 역시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예배자인가? 아니면 예배의 관람자인가? 


성전 정화 _ 예배자의 자리를 회복하라

예수님께서 유월절이라는 유대인의 절기를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 안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온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던 성전세를 납부해야 했는데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던 로마의 화폐가 아닌 수리아의 화폐로 성전세를 납부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로마 화폐를 수리아 화폐로 바꾸어주는 환전상들도 있었지요. 본문 14절이 이와 같은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이들은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판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요한복음 2장 14절)
[이들은 성전세를 납부하는데 필요한 수리아의 화폐를 환전해주는 사람들이었지요.]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잘 알기에, 이들의 행동이 옳지 못했다는 분명한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유월절이 되면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듭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거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 성전까지 제물로 사용할 짐승을 끌고 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는 것으로 바쳐야 했는데, 먼 여행길에 짐승을 끌고 오다가 특정 부위가 상하기라도 하면 낭패가 아닙니까? 그러니 구약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는 제물인 소와 양과 비둘기를 딱 준비해 두었다가 성전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었을까요? 당시는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다스리고 있었으니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도 당연히 로마의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성전세는 수리아 화폐로 납부하라고 하니 성전에 환전상이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요? 그러면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이들에게 역정을 내며 그들을 책망하셨을까요? 이 질문을 가지고 본문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행동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요한복음 2장 15a절) 

예수님께서 양과 소를 성전에서 성전 밖으로 내쫓으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양과 소를 모두 성전에서 내쫓았을 때 그것들을 판매하던 장사꾼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당연히 자신의 양과 소를 관리하기 위해 성전 밖으로 따라 나갔겠지요.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요한복음 16장 a절) 

예수님께서 소와 양은 직접 성전 밖으로 쫓아내셨지만, 비둘기는 직접 날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비둘기를 날려 보내면, 그 주인들은 비둘기를 다시 잡을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가지고 성전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물로 사용할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판매하는 상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제물을 파는 상행위 자체를 멈추라기보다는 그것들을 가지고 성전 밖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요한복음 2장 16b절) 

기는 성전이잖아요. 여기는 하나님의 집이라고요. 예수님께는 “장소”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여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장사하는 시장으로 만들었기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장사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제물을 판매하고 성전 안에서 환전하는 장면을 보면서 화를 내셨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대상은 상인과 환전상들이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들어온 사람들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제물로 쓰려고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샀겠지요. 그들이 성전세를 내려고 환전했겠지요. 그러나 그들에 대한 직접적인 책망이 본문에는 없어요. 그들이 제물을 구입하기도 하고 환전도 했겠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성전 안에서 예배자로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서는 상인으로 있으면 안돼요.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는 환전상이 되면 안돼요. 성전 밖에서는 상인이 될 수도 있고 농부가 될 수도 있고 어부가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핸드폰만 열면 예배의 영상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심령에 함께 계시기에 우리가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든, 어떠한 형태로 예배를 드리든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쁨으로 받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한 가지 전제가 있어요. 우리의 자세가 예배자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는 있지만, 혹은 우리의 눈 앞에 예배 영상이 송출되고는 있지만 예배자가 아니라 시청자, 예배자가 아니라 관람자, 예배자가 아니라 관리자의 자리에 있으면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화를 내며 이렇게 소리치지 않으실까요? 

‘너의 그 관심사를 가지고 이곳을 나가라’

여전히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 속에서 오늘도 예배에 함께 참여하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가 단순한 관람자가 아니라 바로 지금,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만큼은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예배하는 진실한 예배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의 예배에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제물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상점이나, 성전세에 필요한 화폐를 구할 수 있는 환전소라면 그 정도의 불편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의 예배는 제물을 판매하는 상인도 없고 돈을 바꾸어 주는 환전상도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온전한 예배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임을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로 만들어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성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인과 환전상을 쫓아내시자, 성전을 관리하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표적, 곧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권위를 가지고 성전에서 이와 같은 일을 행하시는지, 예수님 자신의 권위와 자격을 증명할 수 있는 기적을 보여달라는 요청이었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한복음 2장 19절) 

예수님의 말씀을 표면적으로 보면 기적을 보여 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에 대한 거절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그들이 요구하는 신비한 기적을 보여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욱 크고 위대한 약속이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 윤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요한복음 2장 20절)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이 성전”이라고 가리키는 성전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세 번째 성전입니다.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한 매우 아름다운 성전이었지요. 그래서 그 성전을 솔로몬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 의해 무너졌습니다. 이후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다시 세웠고, 이것이 두 번째 성전으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룹바벨 성전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재건하였으니 규모도 작고 그 모습이 초라했습니다. 그렇게 시작이 흘러오다가 기원전 약 20년, 이방인이면서 유대의 왕으로 다스렸던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크고 웅장하게 재건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헤롯 성전이라고 불리는 세 번째 성전이요, 신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예루살렘 성전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헤롯 성전을 자랑하듯 이야기합니다. 46년이나 걸쳐서 세워진 성전인데, 지금 보는 것처럼 이렇게 크고 멋진 성전인데 이 성전을 헐라니 그리고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니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어처구니없는 허풍으로 들렸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6일 만에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3일 만에 성전 하나를 세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각이나 상상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진심이었고 예수님은 이 위대한 일을 친히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2장 21절) 

이 구절을 열쇠로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해석하면 그 의미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전을 헌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가 무너지는 것, 곧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사흘 동안에 일으킨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이 손으로 만든 성전이 아니라, 헤롯이 정치적인 이유로 건축하는 그런 성전이 아니라,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그 안에는 상인들과 환전상들만 보일 뿐 참된 예배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그런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로 가득한 새로운 성전을 완성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조금 전까지도 예루살렘 성전을 소중하게 여기셨지요. 비록 헤롯이 정치적인 이유로 건축한 성전이지만 하나님의 집을 시장으로 바꾼 상인들과 환전상을 책망하며 모두 쫓아내셨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사역은 단지 인간들이 건축한 성전을 정화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언제든지, 그리고 어디서든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는 그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코로나 시대, 예배가 많이 위축되었다고 말합니다. 딱 보아도 한국교회의 예배 참석자의 숫자가 지난 1년 동안 급락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코로나바이러스는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의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에는 수많은 예배의 영상이 쏟아져 나오며,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교회와 예배를 비방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를 일구어갈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헤롯의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여전히 자랑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배자를 위한 제물을 보다 편리하게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많은 성전세를 걷기 위해 환전의 편리성을 주장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것이 오답이라고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있는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가 되고, 오늘 우리의 모임이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딱 하나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감당하셔야 했던 십자가의 죽음, 그 안에서 우리는 나의 죄가 얼마나 큰지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감당하셔야 했던 십자가의 죽음, 그 안에서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더 크고 위대한지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흘러 넘칠 때 우리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요, 우리의 모임은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눈을 들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금 이 시간, 바로 이 장소에서만이라도 여러분의 시선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고정하십시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여전히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참된 예배자로 만드는 것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오늘 우리의 모임을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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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요한복음 강해2020. 6. 16.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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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기도의 가장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라기보다는 ‘기도의 중보자’가 되시는 분으로 받아들입니다. 성경은 많은 기도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중보기도 하였습니다. 야곱은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였는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의미로 ‘이스라엘’이라는 별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모세는 민족을 위하여 여러 차례 40일 금식기도를 하였으며, 사무엘은 민족을 위한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 외에 얼마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들은 얼마나 바르고 합당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까? 우리가 본받을 만한 훌륭한 기도의 사람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며, 우리가 배워 유익할 만한 기도의 방법도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열거한 사람들, 혹은 그들의 기도와 같은 선상에 두기를 거부합니다. 아무리 많은 기도의 사람들이 있고, 아무리 많은 기도의 지침이 있을 지라도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모세가 회막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회막이 어떤 곳이었는지 아십니까? 영어성경(CEV)은 회막을 “meeting tent”로 적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회막이란 “만남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와 누구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특히 모세를 만나신 장소가 바로 회막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그런데 그 다음 11절의 말씀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약속 장소, 곧 “meeting tent”였던 회막에서 하나님과 대화하였는데,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함께 있을 때처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를 조금만 더 읽어 보면 모세가 얼마나 깊이 하나님과 대화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또 등장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을 받아 들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광채가 나는 것입니다.(출 34:29) 얼굴의 광채가 얼마나 강했는지 모세는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이만하면 모세가 하나님과 정말 깊은 영적 교감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우리 가운데 모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하나님과 더불어 마치 친구와 함께 있는 것처럼 말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광채가 내 얼굴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운 마음이 드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 히브리서는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8)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첫 장막, 곧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만들었던 성막의 제도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내용은 모세의 율법으로는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아무리 회막에서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성막을 지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하였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약속,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서는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우리는 모세 시대 만들어진 회막이나 성막, 혹은 여러 가지 제사의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가지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었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빠로 모시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참고 갈 4:6) 

또한 모세는 하나님과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였을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빛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에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영광은 이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율법의 시대에는 모세가 자기 얼굴에 나타나는 광채를 수건으로 덮어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새로운 약속, 곧 복음에 의한 영의 직분에는 더욱 큰 영광이 있기에 수건으로 덮을 필요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우리에게 이점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 3:15-16) 모세는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 40일 금식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에 다른 어떠한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며 그 어떤 수건도 그 찬란한 영광의 빛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누구의 공로입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모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에, 하나님을 당당하게 아빠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기도의 중보자로 확신하기에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저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 제자들과 성만찬도 나누셨고, 또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섬김의 도를 직접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얼마나 진지하고, 얼마나 엄숙한 분위기였겠습니까? 그날 저녁 예수님은 진심을 다하여 한 마디 한 마디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전해주고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은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예수님께서 진심으로, 진심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분명히 약속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을 것이요, 우리에게 기쁨이 흘러넘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이런 말씀도 덧붙이십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요 16:26) 예수님께서 굳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조금 서운하게 들리십니까? 만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내게 서운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약속을 백퍼센트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온 마음으로 믿지 못하기에 “그래도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내 기도의 중보자로 확신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누구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모세가 하나님과 가까이서 기도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기도의 성자들이 있을 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언제라도 하나님은 우리 앞에 나의 아빠로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고 알려줍니다.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마치신 직후, 제자들과 이후 예수님을 믿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니라”(롬 8:26)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 성령님의 기도, 다른 사람들의 중보기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지 마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주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을 위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아니 오히려 여러분들이 주변의 이웃들을 위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가 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며 영적 전투의 좋은 군사로 나설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이미 갖추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자, 이제 당당히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우리에게는 기도의 무한한 특권, 곧 예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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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요한복음 강해2020. 5. 6.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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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요한의 제자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을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3장 23절부터 25절까지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 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요한복음 3장 본문에는 예배의 참된 내용은 잃어버리고, 형식에만 온통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당시의 무리들, 곧 유대인들입니다. 레위기에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정결 해지는 예식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나 실수로 몸과 마음이 더러워졌을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해질 수 있는지, 그 절차를 유대인들에게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200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는 사람들에게 레위기가 가르쳐주는 정례 예식과는 전혀 다른 형태인 세례를 줍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너도 나도 전통적인 정결 예식을 포기하고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습니다. 

구약 율법이 지시하는 정결예식이나,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에는 형태상의 차이가 존재할 뿐, 그 내용에 있어서는 큰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정결 예식과 세례는 모두 인간의 더러움을 씻어 정결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동일한 내용을 담은 두 가지 형태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결 예식이나 세례가 내포하였던 참된 의미는 잃어버리고, 무엇인가 새로운 형식을 쫒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따라가서 그에게 세례를 받은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요,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고, 오늘 우리들도 그 전통을 따라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눈에 매력적인 새로운 형식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과거의 전통을 쉽게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한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일에 온통 정신을 쏟다가 결국에는 그 안에 담겨 있어야 할 내용에 대해서는 망각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여러분 나병이 어떤 병인지 아시죠? 예전에 문둥병이라고 불렀던 병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14장에는 나병에서 건강해진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깨끗함을 보여주는 예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시고는 구약성경이 지시하는 정결 예식대로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는 세례든, 정결 예식이든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를 행하든, 정결 예식을 행하든 사람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예배의 형식에 너무 얽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의 찬양이 어떤 곡이며, 어떤 분위기냐에 너무 얽매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예수님 시대 많은 사람들은 정통적인 정결예식을 버리고 세례를 따라갔습니다. 또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정결 예식을 고수하면서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통해 명령하신 세례를 거부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자신을 거룩하게,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때로 예배 시간에 함께 부르는 찬양이 내가 좋아하는 곡이 아닐 수 있습니다. 때로 예배의 형태가 내가 원하는 형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예배에 담지 못한다면, 그 일차적인 원인은 예배의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나의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형식에 붙들린 사람들

무리들만 예배의 참된 내용을 잊어버리고, 형식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 역시 형식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베푸는 세례가 구약성경의 정결예식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도 인정하셨고, 구약성경의 정결 예식도 옳다고 인정하셨는데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 세례 요한이 베푸는 세례가 구약의 정결 예식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정결 예식의 핵심도, 세례의 핵심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에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세례가 간직하는 내용보다, 세례라는 형식에 더욱 집중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25절을 보십시오.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우리 성경에는 요한의 제자와 유대인이 논쟁을 한 것처럼 표현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원문을 보면, 논쟁이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요한의 제자들이 유대인에게 논쟁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 스승님이 전하는 세례야 말로 진짜다.” “우리 요한 선생님이 사람들에게 베푸는 세례가 너희들이 행하는 정결 예식보다 우월하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까지 주장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전하는 세례가 너희들이 행하는 정결 예식보다 사람들을 더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사람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은 마치 그들이 전하는 세례에 무엇인가 능력이 있어서 율법의 정결예식보다 더 힘 있게, 더 깨끗하게 사람을 씻긴다고 주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정결 예식에 대해서 논쟁을 일으키는 이 장면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중에서 리더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세례가 구약의 정결 예식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근거가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범한 치명적인 잘못이었습니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여러분 당시의 분위기를 상상해 보십시오. 2000년 동안 율법이 지시한 정결예식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정결 예식 안에는 우리를 깨끗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그 예식이 지루하게만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나타나서 세례라는 새로운 형태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니 이미 20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시행되었던 정결 예식이 따분하게만 느껴졌던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라는 것이 대단히 매력적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정결 예식보다 세례로 막 몰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요한의 제자들이 대단히 오해를 했어요. “야,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우리에게 오는구나. 역시 우리가 전하는 세례가 대단하구나.” 이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야 말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빠질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착각입니다. 

이 위험한 착각으로 인하여 교회의 지도자들이 새로운 형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매력적인 형태를 꾸미려고 모든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여 사람들이 몰려오면, 그것으로 자신이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리더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착각을 하게 됩니다. 어디는 대단히 사람들이 많이 몰리더라, 그런데 알고 보니 거기에는 우리와 다른 화려한 형식이 있더라. 역시 그런 교회는 성공하는 구나. 이런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착각들, 이 모든 현상들이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세례라는 형식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온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와 논쟁을 벌이던 유대인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공격합니다. “너희들의 스승 요한이 세례를 주자 많은 사람들이 너희들에게 몰려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예수라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자, 수많은 무리들이 너희 스승 요한보다 예수라는 그 사람을 찾아가고 있지 않느냐?”라고 공격합니다. 이러한 공격을 받은 요한의 제자들은 아무런 대답도 못합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돌아와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절)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대책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몰려와야 하는데, 지금 다 예수님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을 수 있는 형태를 고안하든 지, 아니면 저 예수라는 사람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이 다시금 자신들에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예배의 형식에만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 그러한 형식에 따라 몰려다니는 사람들에만 집중할 때, 요한의 제자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곧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오도록 하려는 욕망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세례 요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27절부터 보십시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몰려왔던 사람들을 빼앗아서 예수님께로 돌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죄 용서의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아무리 세례를 받고, 아무리 정결 예식을 행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깨끗해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매주일 드리는 예배가 여러분들 개인에게 가장 적절한, 여러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양곡으로, 여러분들이 가장 원하는 형태로 진행되면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것 같아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통하여 여러분들을 만나주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 어떤 형태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매주일 예배 때 부르는 찬양이 여러분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찬양이라고, 여러분들이 잘 모르는 찬양이라고, 예배의 순서나 형태가 여러분들과 잘 맞지 않는다고하여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통하여 여러분을 찾아가신다면 여러분들은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주시는냐? 은혜를 주시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사람이 정결하게 되는 의식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혹은 여러 가지 잘못으로 자신의 몸과 영혼을 더럽혔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레위기의 정결의식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몸과 영혼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눈에 보이는 예식일 뿐이었습니다. 
세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분을 믿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깨끗하게 씻어주신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형태로,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하느냐? 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을 깨끗이 씻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내용이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믿는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 

세례 요한의 제자들, 그리고 많은 무리들의 관심은 형식에 있었습니다. 어떠한 형태인지가 중요했습니다. 어떠한 형식으로, 어떠한 순서와 방식으로 깨끗하게 되는 예식을 진행하는지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어떠한 형식으로 정결 예식을 행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그 형태만을 바라보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은 어떠한 형태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지에 온통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내용은 형식을 통해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예배라는 형식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예배라는 형식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의 형식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형식이 곧 내용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배의 형태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장해 줄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예배의 형태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장해 줄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세례와 성만찬을 행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예배의 형식 속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우리의 예배를 살아있는 예배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함께 부르고 싶은 찬양은 “내가 주인삼은”입니다. 이렇게 시작하지요.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여러분,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형식들, 우리가 불평했던 어떤 형식들은 나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를까? 우리 교회는 장소가 왜 이렇게 작을까? 왜 매주일 모르는 찬양이 많을까? 그것들이 우리의 우상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예배를 통하여 내를 만나주시는 분, 예배를 통하여 내 마음을 만져주시는 분, 예배를 통하여 나의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분, 예배를 통하여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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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요한복음 강해2017. 12. 1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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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찾아가 만나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당혹감이 찾아오게 된다. 요한복음 21장에 등장하는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던 장면과 너무도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똑같은 사건을 두 번 기록한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의 사건과 약 3년 정도의 공생애 사건이 있은 이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찾아가신 사건이 너무나도 유사하다는 점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당혹감은 비단 성경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당혹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 더욱 성숙하기를 소망하지만 그것이 결코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것이죠.

 

 

거리감 -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였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두 귀로 들었으며 예수님의 삶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과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있어요.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어쩌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모습을 오늘 본문 3절과 4절이 묘사하고 있지요.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려보았습니다. 그러나 잡은 것이 있어요? 없어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겉모습이에요. 요한복음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매우 문학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지요. 9절을 보시면 그들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배에 올라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죠? 바닷가에 서계십니다. 그들이 지금 타고 있는 배와 예수님께서 계신 바닷가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그 거리가 약 50칸쯤 되었다고 말하는데(8),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대략 100m가 조금 못되는 거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밤에 제자들을 찾아오셨지만 그들에게 가까이 오셨지만 여전히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는 약 100m의 거리가 떨어져 있었던 것이죠. 한 때는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였고, 한 때는 한 방에서 잠을 자고, 한 때는 그분의 품에 안겨 대화를 나누었지만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약 100m 정도의 거리가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오늘 본문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어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바다까지 찾아오신 거에요.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긴 거리가 있어서 부활의 주님을 알아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사실, 요한복음은 이와 같은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하나의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4절 처음에 등장하는 구절이지요. “날이 새어갈 때에이것은 빛 줄기 하나 없는 캄캄한 어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밝은 새벽 빛이 비추었다는 의미도 아니죠. 어두움과 빛이 서로 섞여있는 상황, 빛이 비추이기는 하지만 온전한 광명이 드러나지는 않아 그 영광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 곧 우리의 모습을 묘사해주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삶에 열매가 없다고 느껴지세요.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다고 느껴지세요. 그것은 그저 우리의 겉모습일지도 몰라요. 우리의 내면을 조금만 들여다볼 수 있다면 예수님을 만났던 경험도 있고,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기적에 대한 체험도 분명히 있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그분의 사랑의 음성을 듣기도 하였지만, 그 모든 것은 과거의 경험일 뿐 지금 나의 마음에는 예수님과 약 100m에 이르는 거리가 있어 내가 사모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시며 바닷가에 서 계시지만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인 어두움이 아직 걷히지 않을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난 지 1년이 더 지나간들, 3년이 지나간들, 아니 10년이 지나간다 하더라도 우리 영혼에 각성이 없다면 우리의 영혼은 조금도 성숙하지 않은 채 정체되어 있는 것입니다.

 

깨우침 주님이시라

 

어두움과 빛이 섞여 여전히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그때. 어디선가 베드로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한 마디의 외침이 들려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곧 요한이 먼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베드로를 향해 외치죠.


주님이시라


어떻게 베드로보다, 혹은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이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았는지는 본문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가 아직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다른 제자들에게 소리쳤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시라

주님이 여기 계신다

 

베드로의 영혼을 깨우는 이 외침에 베드로는 급하게 바다로 뛰어들어 예수님을 향해 수영하기 시작하지요. 베드로만이 아닙니다. 8절도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예수님께서 계신 육지로 올라오는 거에요. 드디어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약 100m 정도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을 만나기 위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놓여있었던 100m 는 제자들이 수영을 하든, 배를 타든 예수님께 나아와야 하는 거리였던 것이죠. 사도 요한의 그 한마디 주님이시다.” “바로 예수님이시다.”라는 그 외침이 제자들로 하여금 마지막 100m를 이동하게 말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전도자들이 감당하고자 했던 역할이 바로 이것이었지요. 예수님께서 이미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오셨어요.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보좌에서 이 땅으로 오셨어요.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그 어떠한 전도자의 선언도 공허한 울림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셨잖아요.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어요. 우리 전도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주님이시라, “예수님이 여기에 계신다, “우리 인생의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 바로 이분이시라고 소리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외침은 사실 우리 자신을 향한 외침입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칭찬도 받고, 전도훈련까지 받는다고 박수를 받지만 우리 스스로가 내 모습을 가장 잘 알죠. 여전히 주님과의 거리가 있어요. 여전히 바닷가에 우두커니 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예수님을 못 본 척 내버려두고 있는 나 자신을 향해 소리를 치고 싶은 거에요.


주님이 여기 계신데, 왜 그물만 붙잡고 있느냐?”

주님이 나를 위해 여기까지 오셨는데, 왜 바다로 뛰어들지 않고 있느냐?”

 

여러분께서 참으로 예수님을 발견하셨다면, 여러분께서 참으로 예수님을 만나셨다면 사도 요한과 같이 소리 치십시오. “주님이 여기에 있다, “주님이 여기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소리 치십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어두움을 뚫고 여러분의 귓가에 분명한 외침이 들린다면 주님이시다라는 외침이 여러분의 귓가에 분명히 들린다면 용기를 내어 바다로 뛰어 내리십시오. 어두움과 추위를 무릅써야 하겠지만, 그 바다 저편에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침식사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100m 정도의 거리를 베드로는 수영을 하였고,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이동을 기록하고 있는 8절과 그들이 예수님께서 계신 육지에 도착한 9절 사이에는 그리 길지는 않겠지만 시간의 흐름이 숨어있겠지요. 그렇게 제자들이 육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육지에 도착하자 잘 준비된 식탁을 발견합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9)

 

여러분도 숯불에 음식을 구워보신 적 있으시죠? 특별히 야외에서 숯불로 음식을 구우려면 인내가 필요해요. 숯불이 막 피어오를 때, 열기가 화로에 가득할 때는 음식을 잘 구워낼  수 없어요. 불이 활활 타오르다가 어느 정도 잦아들어서 불길이 아니라 열기가 화로에서 흘러나올 때 그 열기로 음식을 구웠을 때 가장 맛이 좋은 숯불 구이가 되는 것이지요. 제자들에 육지에 올라와보니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막 불이 타오른 것이 아닙니다. 숯불을 피우고 어느 정도 불길이 잦아든 후 그 위에 생선도 굽고 떡도 굽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누가 불을 피우고 누가 제자들을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10절에 그 답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숯불을 준비하시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이제 막 요리를 시작하신 것 같아요. 준비하신 숯불에 생선 한 두 마리를 더 올리면 좋겠다고 생각하셨겠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금 막 잡은 생선을 얼마나 가져오라고 말씀하시죠? “조금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153마리의 어마어마한 물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 실제로 필요한 물고기는 그저 예수님과 본문에 등장하는 7명의 제자들이 아침식사로 나눌 수 있는 두세 마리의 물고기면 충분한 거에요.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숯불에 모여 예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생선과 떡도 굽고 그날 새벽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도 한두 마리 더 놓고 이제 요리가 시작됩니다. 지난 밤 바닷가에서 추위를 견디어야 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피워 두신 숯불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오기 시작하지요.

 

, 이제 음식이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12a)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아침식사를 가져다 주시죠.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13)

 

그날 아침 식사 당번은 예수님이셨나봐요. 제자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예수님께서 요리하신 음식을 직접 가져다 주십니다. 이렇게 하여 밤새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여 지쳤있던 제자들,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멀리만 계셔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제자들의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아침 식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날의 따뜻한 아침식사를 묘사하면서 요한복음은 매우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삽입해 놓았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12b)

 

저 멀리 바닷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도 그들의 심령을 일으켜 깨우는 외침 주님이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던져 예수님께로 나아가자 그곳에서는 주님과 함께하는 따뜻한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었고, 비로서 제자들은 주님이심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지요.

 

오늘 이 아침에 예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따뜻한 식사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비록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둔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지라도 주님은 찾아오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의 그물에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주님과의 식탁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큰 물고기 많은 물고기가 아니라, 그저 주님께서 준비하신 숯불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작은 생선 한 마리면 충분합니다. 지금 나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생선이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내어 놓는 그 작은 생선을 주님의 숯불 위에 올려주시며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따뜻한 아침식사에 여러분을 불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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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