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성경공부2023. 3. 14.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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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자신을 향한 사울의 살해 의도를 분명히 확인하였다(삼상 20장). 사울 앞에서는 자신의 생명이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한 다윗은 도망자의 길을 떠난다. 본문은 도망자 다윗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으셨지만(삼상 1611-13), 현실은 정바대로 흘러가는 듯 보인다. 


제사장 아히멜렉의 도움 (1-9절) 

다윗은 제사장의 성읍인 놉을 찾아갔다. 놉은 실로가 파괴된 이후 성소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었다. 다윗은 그곳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떡과 칼을 얻는다. 일용할 양식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는 도망자에게 필수품이었다.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6절) 

제사장은 매일 성소에 떡을 진설하여 바쳐야 했다. 이 떡은 거룩한 것으로 제사장만 먹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정이 다급한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이 떡을 요구한다. 그만큼 다윗의 처지가 절박했다. 이후 예수님은 본문을 인용하며(마 12:3-4),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강조하신다(마 12:8). 

제사장이 이르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것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하더라 (9절)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릴 때 사용한 무기는 칼이 아니라 물맷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사용한다. 이 칼은 사울을 피해 도망하는 동안 다윗이 그 자신을 보호하는 중요한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다윗은 이제 한 치 앞을 알지 못하여 언제나 칼을 곁에 두어야 하는 도망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블레셋 망명의 실패 (10-15절)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을 떠나 블레셋의 가드로 망명을 시도한다. 다윗이 블레셋 망명을 시도한 근거는 아마도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외교적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브레셋과 이스라엘은 전쟁이 그치지 않는 적대국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의 미움을 받아 도망자가 된 다윗을 블레셋이 받아주리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의 계산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이 거둔 전공을 상기시키며 다윗을 위험한 인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11절). 위험을 감지한 다윗은 기지를 발휘하여 미친 척 연기를 하였고, 불행 중 다행으로 블레셋의 가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시편 34편의 표제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다.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블레셋에서 참기 어려운 수치를 당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하나님에게 피하는 자의 복을 노래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8) 

다윗은 억울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 제사장에게 음식과 무기를 구걸하고, 나아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이방인 앞에서 미친 체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으로 다윗은 억울하게 당하는 거대한 고난도 참고 인내할 수 있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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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사무엘상 성경공부2023. 1. 3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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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블레셋에게 행하신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언약궤를 찾아오는 데 그들이 행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역사였다. 


벧세메스의 기쁨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벧세메스에 도착하였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13절) 

언약궤가 도착했을 때, 벧세메스 사람들은 환영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 그들은 생업을 위해 밀을 베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들어 궤를 발견하였고, 그들에게 기쁨이 찾아왔다. 언약궤의 귀환은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14-15절)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 가운데 제사를 드렸다. 다만, 법궤는 레위인들만 다루어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 레위인들이 궤와 금 보물이 담긴 상자를 처리하였다. 


언약궤를 모시는 방법

벧세메스는 뜻하지 않게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그들의 마을에 도착하였고, 블레셋 사람들이 속건제로 드렸던 금 보물도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두었다(18절). 이처럼 벧세메스는 언약궤가 도착하여 큰 복을 받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19절) 

율법의 규정은 성소의 모든 기구를 레위인 가운데 고핫 자손이 메고 옮기게 되어 있다. 이때 고핫 자손 역시 성소의 기구를 보거나 만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고핫 자손이라도 성소의 기구를 만지거나 심지어 보기만 하여도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민 4:15, 20) 그래서 제사장이 성소의 성물을 모두 덮어두면 고핫 자손이 들어와 어깨에 멜 수 있었다(민수기 4장 "레위 지파의 가문별 역할"). 본문에서 벧세메스 사람들은 레위인조차 보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언약궤를 들여다보았고,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참고로, 사무엘상하를 계속 읽다 보면 성소의 성물을 만지면 죽게 된다는 규정에 따라 생명을 잃은 사람도 등장한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과정에서 그 궤에 손을 대었던 웃사가 그 주인공이다(삼하 6:6-7).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20절) 

많은 사람의 죽음은 벧세메스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과연 거룩하신 하나님을 누가 모시며 살아갈 수 있는가? 시편 24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성도들이 동일한 질문을 던지는 장면을 노래한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시 24:3)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언제나 이렇게 질문하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상 숭배에 찌든 이스라엘, 하나님의 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헛된 기대만 품었던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 물론, 헛된 우상인 다곤을 섬기는 블레셋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 그러면 과연 누가 하나님을 모시며 살아갈 수 있는가? 율법의 규정을 어기고 언약궤를 들여다본 벧세메스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장면(19절)이 역설적으로 그 대답을 제공한다.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며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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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사무엘상 성경공부2023. 1. 3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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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언약궤를 빼앗겼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가 곧 하나님의 실패는 아니다. 하나님은 친히 블레셋에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셨고(삼상 5장) 이제 블레셋에게 빼앗긴 언약궤를 직접 찾아오신다. 


보상의 속건제

언약궤가 블레셋에 머문 지 일곱 달이 흘렀다. 블레셋에는 다섯 개의 주요한 성읍과 그 지역을 다스리는 다섯 명의 통치자가 있었다. 언약궤가 블레셋에 머문 일곱 달 동안 하나님은 그 다섯 성읍에 모두 독종의 재앙을 내리셨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계획을 세운다.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3절) 

블레셋의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위의 구절에서 속건제라는 제사가 등장한다. 이후 그들이 설명하는 제사의 절차는 레위기에서 규정한 속건제의 규정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속건제 제사가 보상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금전적 손해를 끼쳤을 때 그는 상대방의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이때 드리는 제사가 속건제다(레 5:14-6:7). 블레셋의 제사장들은 속건제 제물로 독종과 쥐의 형상을 만든 금을 바치라고 권면한다. 금을 바친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속건제의 보상이었다. 

언약궤가 블레셋을 떠나는 이 장면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떠났던 출애굽을 연상시킨다. 블레셋 사람들이 금을 예물로 드리는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 패물을 얻었던 장면과 유사하다(출 12:35-36). 블레셋의 제사장은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라고 이야기하며, 출애굽의 사건을 소환한다(6절).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가 전쟁터에 나타났을 때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셨던 장면을 기억했다(삼상 4:8). 


벧세메스로 가는 길 

블레셋 사람들은 속건제를 드리며 언약궤를 이스라엘에 돌려보냈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을 해소하고 싶었다. 과연 지금까지의 재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인가?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7절) 

그들은 젖이 여전히 나오고 있는 소, 곧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암소를 이용했다. 그 송아지를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면 과연 젖 나는 소 두 마리가 수레를 끌고 이스라엘 땅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자기 새끼를 찾아 돌아올 것인가? 만일 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그 소들이 벧세메스로 올라가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 재앙을 내린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우연으로 볼 수 있다는 계획이었다(9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12절) 

암소의 모습은 의미심장했다. 그는 벧세메스를 향해 곧 바로 진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슬피 울었다. 새끼를 생각하며 슬퍼하였지만, 하나님은 암소의 발걸음을 정확히 이끄셔서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이 행하신 역사임을 명백히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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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사무엘상 성경공부2023. 1.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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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이가봇의 시대를 맞이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나타내 보이신다. 


다곤의 신당

이스라엘에게 언약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을 다곤의 신전으로 가져가 다곤 곁에 두었다(2절). 고대 근동에서 전쟁의 승리자는 패배자의 신을 자신이 섬기는 신전에 안치하는 관습이 있었다. 패배자의 신이 승리자가 섬기는 신의 지휘를 받는다는 의미다. 블레셋 사람들은 당시의 관습을 따라 행동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나타났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3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진 모습은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사람들이 다곤의 신상을 일으켜 세웠지만, 그다음 날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4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경배하듯 엎드려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의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있었다. 그 머리가 끊어졌다는 것은 다곤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동일한 논리로 손목이 끊어져 양손을 잃은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특별히 다곤의 머리가 떨어진 모습은 블레셋의 최고 영웅이었던 골리앗의 비참한 최후와 유사하다(감상 17:51).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그들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직접 블레셋 사람들에게 나타내신다. 이 사건으로 다곤의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능력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곤을 향한 충성은 배반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곤의 머리와 손이 놓였던 신전의 문지방을 밟지 않는 전통이 생겼다(5절). 이 대목에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그의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충성을 다하지 않았던 장면이 더욱 안타까워진다. 


하나님의 엄중한 손 

다곤 신상은 손목이 끊어졌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는 다곤이라는 우상의 무능을 보여준다. 본문은 이제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엄중하게 드러나는 장면을 묘사한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6절) 

'여호와의 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이가봇(영광이 없다)과 '가봇'이라는 어근을 공유한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말하며 그의 아들 이름을 이가봇이라 지었다(삼상 4:21). 그러나 그것은 비느하스 아내의 좁은 시야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블레셋 땅 한가운데 드러내신다. 블레셋 사람들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 여호와의 궤를 아스돗에서 가드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옮겨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디로 가든 여호와의 엄중한 손이 그들에게 독한 종기를 내리셨다. 본문은 이 장면에서 '여호와의 손'이라는 표현을 반복하며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고 강조한다(6, 7, 9, 11절). 

사무엘상 4장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블레셋과의 첫번째 전쟁에서 패배하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울부짖었다(삼상 4:3).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간 뒤에도 크게 패배하자 그 소식에 실로의 모든 사람이 울부짖었다(삼상 4:13b).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의 엄중한 손을 펼치시니 블레셋 사람들이 울부짖기 시작한다.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12절) 

한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신다고 기도했다(삼상 2:6-7). 하나님께서 손을 펴시니 승리한 블레셋 땅에 울부짖음이 가득해진다. 반대로, 전쟁의 패배로 부르짖던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소망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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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사무엘상 성경공부2023. 1. 27.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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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블레셋에 크게 패하였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 날에 전사하였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방인의 손에 빼앗겼다. 전쟁의 결과는 처참했다. 이 소식이 실로에 전해지자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큰 충격에 빠진다. 


패전의 소식

블레셋과의 전쟁에 참전하였던 한 베냐민 사람이 실로에 돌아왔다(12절).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전쟁의 결과를 전했고, 온 성읍은 슬픔으로 부르짖었다(13b절).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인 엘리를 만나 직접 소식을 전한다. 그의 보고는 군더더기가 없이 명확했고, 잔인할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1)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2)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3)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4)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7절) 

엘리는 자녀를 율법에 따라 분명히 징계하지 못하는 등 여러 결점이 있었지만 대체로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보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더 걱정했다.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가면서 승리를 확신했던 사람들과 달리 그의 마음은 언약궤로 말미암아 떨고 있었다(13a절). 소식을 전하는 자의 보고는 그의 불안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1) 이스라엘은 패배하였다. (2)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패배였다. (3) 이 과정에서 두 아들도 전사하였도. (4) 무엇보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고 말았다. 언약궤에 대한 소식에 이르자, 그는 더 이상 충격을 견딜 수 없었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18절) 

엘리는 전쟁의 소식을 기다리며 "자기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13절). 그가 아직 이스라엘의 사사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소식을 듣자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떨어진다. 성경은 곧 이어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40년이 지났다고 서술한다. 98세의 나이로 시력은 거의 상실되었고(15절) 몸은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진 엘리의 40년 간 지속된 사사의 역할이 멈추는 순간이다. 


이가봇 

이스라엘의 패전 소식은 비느하스의 아내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19절) 

비느하스의 아내는 패전의 소식을 듣고 조산한다. 주변에서는 아들을 낳았다고 축하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고 말하며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영광이 없다)이라고 부른다(21절). 엘리에게 두 아들의 죽음이나, 비느하스의 아내에게 남편을 비롯한 가족의 죽음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결정타는 가족의 죽음이 아니라 언약궤를 빼았긴 사실이었다고 반복하여 강조한다.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22절) 

이스라엘은 바야흐로 이가봇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언약궤를 이방민족 블레셋에게 빼았겼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고 떠나셨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역설이 있으니, 40년간 지속되었던 엘리의 시대가 끝나고 이가봇의 시대가 시작된 바로 이 장면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성경의 시선은 이가봇을 선언하는 실로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빼앗긴 블레셋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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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사무엘상 성경공부2023. 1. 2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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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4~6장은 법궤의 행방에 이야기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법궤 이야기"(ark narrativ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 

이른바 '법궤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블레셋은 BC 12세기 경 소아시아의 그레데 섬과 에게 해 지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의 해안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팔레스타인 서부 해안에 이주한 블레셋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본문의 배경도 블레셋의 이스라엘 침략이다.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1b절) 

이스라엘이 진을 친 에벤에셀은 아벡 근처의 지역으로 이후 사무엘이 기념비를 세운 에벤에셀과 다른 곳이다. 사무엘이 에벤에셀이라고 이름하였던 지역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위치했다(삼상 7:12). 당시 블레셋은 매우 빠르게 철기문화를 발전시켰다. 반면 이스라엘은 칼이나 창을 벼리는 기술이 없었다. 사울 시대의 이스라엘 군인들 가운데 칼과 창을 소유한 사람은 사울과 요나단 뿐이었다(삼상 13:19-22). 그러니 전쟁에서 블레셋이 이스라엘 군대를 물리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2절).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의 패전에 대해 신앙적 이유를 제시한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3b절) 

이스라엘 장로들은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패배하게 하셨는가? 전도자는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고 권면한다(전 7:14). 전도자의 권면처럼 이스라엘 장로들이 스스로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다면, 그들의 다음 행동은 '회개'가 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은 채 손쉬운 해답을 구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가는 것이다(3c절).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

본문은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온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4절) 

위의 구절은 두 가지 사실을 서술한다. 먼저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왔다. 그런데 본문은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라는 긴 설명을 덧붙인다. '그룹 사이에 계신'이라는 표현은 모세가 광야에서 제작한 바로 그 언약궤라는 의미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은 언약궤 위에 임재하셔서 그들을 보호하여 주셨다. 이 궤가 지나가자 요단강의 물이 말랐고, 이 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돌자 성이 무너졌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설명하는 표현을 보면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온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불리칠 것만 같다. 이스라엘 진영에 언약궤가 들어왔다는 소식에 블레셋 사람도 겁을 먹었다. 블레셋 사람들 역시 언약궤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8절). 

본문 4절이 묘사하는 또 다른 사실은 언약궤 주변에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무엘상 2~3장을 읽으며 독자는 그들의 죄악,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그들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 알고 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 있으니, 아무리 언약궤를 가져오더라도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0절)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의 첫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전사자는 4,000명이었다. 그런데 언약궤를 가져온 뒤에 치러진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전사자는 30,0000명이 되었다. 앞선 전투보다 더 처참한 패배였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빼았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하였다(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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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