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2. 8. 2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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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국의 소설가이자 캠브리지대학교의 교수였던 C. S. 루이스의 글귀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아침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지요. C.S. 루이스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를 믿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노래하네요.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곧, C.S. 루이스에게 있어 기독교의 가르침은 단지 하나의 진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독교의 진리로 온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관점을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기독교의 신앙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사주나 팔자 혹은 타로와 같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고, 복을 받기 위하여 우상 앞에게 예물을 드리며 정성을 들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 안에 달려 있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숭배하거나 사주팔자 등 운명을 점치며 부적을 가지고 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모든 우상숭배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게 되지요.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권세를 성취하고, 더 많은 재물을 성취하고, 세상의 더 큰 성공을 성취하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쟁취하여 그것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이용하고 속이고 때로는 짓밟는 것을 서슴치 않지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행복한 삶은 무엇입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요, 또한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여 나누며 섬기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처음부터 성경의 이러한 가치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차츰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신의 성취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던 사람이 이제는 양보하고 배려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가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결국 그의 행동과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경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도 날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조금이라도 달라져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이 어제보다 더욱 성숙하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치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0절)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안식일을 맞이하면 여러 회당을 돌아다니며 말씀을 가르치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특정한 장소, 곧 정해진 회당에서 매주 안식일마다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나사렛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면 다음주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방식이었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안식일에 ‘한 회당’, 곧 어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말씀에는 그 이전까지 그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다른 랍비들이 가르치다가 혹은 이 회당을 관리하는 회당장이 가르치다가, 바로 그날은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날, 예수님께서 바로 그 회당을 찾아가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 말씀의 능력과 그 말씀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하였을까요? 본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로 그날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다른 랍비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권위와 권세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권위와 권세를 확증이라도 하듯, 바로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오랜 세월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을 치유하시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1절) 

이 여인은 지난 18년 동안 몸에 큰 질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근육이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굽어져 몸의 그 어느 곳도 전혀 펴지 못하는 질병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지 못하니 당연히 반듯하게 걸어가지도 못했겠지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온 몸이 꼬부라져있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인이 지금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그곳 회당에) 있더라”(11절) 온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 여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 그날 하루뿐이었을까요? 지난 18년 동안 못쓸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안식일만큼은 바로 그 회당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난 18년이라는 오랜 세월, 매주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는 그날까지입니다. 

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그 회당을 찾아가셨고 이제 그 여인에게 치유를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2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시면,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3절) “아멘”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그 회당에는 오랜 세월 안식일마다 회당예배가 드려졌을 것입니다. 매주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많은 회당장과 랍비들이 말씀을 해설하였겠지요. 당시 회당은 유대인 사회의 중심이었으니, 그 동네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예배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을 찾아가시기 전에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만큼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시기 바로 일주일 전의 안식일이나 바로 그날의 안식일이나 회당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똑같아요. 그런데 유일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곳에 찾아가셨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달라지자 회당의 예배가 달라졌습니다. 그 회당에 참여하고 있던 한 여인은 비로소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위한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더라도, 예배 준비가 완벽하여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을지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지 않으시면 그 안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와 똑같은 예배라 할지라도, 아니 심지어 예배 준비가 조금 부족하고 예배를 위한 시설에 조금 문제가 있어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신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질병과 연약함은 치유를 받은 것이요,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관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드디어 그 회당은 하나님의 역사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자, 18년 동안 온 몸이 꼬부라지는 극심한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이 깨끗이 치유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은혜의 순간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가 풍성하게 드러난 바로 그 현장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역설적으로 그 회당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모든 책임을 가진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14a절) 

지금 회당장은 누구에게 화가 났습니까? “회당장이 예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라고 말씀하잖아요. 그러므로 회당장이 화가 난 대상은 병을 고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화를 낼 수 없던 그는 회당에 모여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무리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4절) 

회당장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그가 지적하는 사항은 안식일의 규정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담겨있는 회당장의 마음을 읽어보기 위해서는 그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담겨있는 행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회당장은 분명히 안식일 규정을 문제 삼고 있는데 왜 굳이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그의 또 다른 의도를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은 중요한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회당장이 크게 화를 내는 핵심 이유가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듯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회당장의 발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때문입니다. 1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외식하는 자들아” 외식이라는 것은 위선을 말하잖아요.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하지요. 

자, 회당장이 내세운 명분은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에 숨겨진 원래 의도는 무엇일까요? 14절을 다시 보세요. 회당장이 이렇게 말하거든요.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네, 여기까지는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대목입니다.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숨어 있지요? 어떠한 전제입니까? 안식일을 피해서 다른 요일에 회당을 찾아와도 언제든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여인은 18년 동안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매주 회당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나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지 않았기에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없었잖아요. 지금 회당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매주 회당 예배에 참여하면서 그 회당장이나 여러 랍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방문하시기 이전까지 그들은 참으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유독 회당장만큼은 애써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회당을 방문하면 언제라도 병자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애써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회당장은 왜 이토록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 선포와 예수님의 치유 역사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누가 보아도 회당에서 행한 예수님의 사역은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왜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려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회당장이라는 그의 지위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회당장, 곧 그 회당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회당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장 권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셨습니다. 회당장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그날 하루만 예수님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회당장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자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신 뒤에 18년 동안 근육이 수축되어 온 몸이 꼬부라진 여인을 말씀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예수님에게 쏠리게 되었어요. ‘아니, 내가 이 회당의 회당장인데, 이 회당에서는 내가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하는데, 그래서 이 회당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 쏠리니 회당장은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자기 중심성이라는 본성은 얼마나 무서운 영혼의 질병인지요.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내가 여기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자기 중심적 생각은 심지어 회당장조차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를 애써 거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의 시선과 나의 관점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고착되어 있다면,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역사를 일으키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역사를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새로운 관점

회당장이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하여 마침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까지도 거부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자기중심의 관점에서 이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5절) 

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이 기르는 가축에게는 안식일에도 물을 먹이고 안식일에도 풀을 뜯겼던 것이지요. 자, 이제 예수님께서 정작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6절) 

회당장은 예수님의 병을 고치시는 사역에 화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겉으로 내세우는 논리로는 안식일의 규례를 가지고 트집을 잡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의 대답 역시 문자적으로는 안식일에 대해 답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본문 16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운 관점은 18년 동안 큰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이 여인에 대한 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이 아브라함의 딸을” 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시네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자녀’ 혹은 ‘하나님의 딸’ 정도가 되겠네요. 

이 여인이 겪었던 질병은 몸의 근육이 지나치게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다 꼬부라지는 병이었습니다. 여러분, 근육이 수축되지 않더라도 그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근육이 힘을 잃고 탄력을 잃어버리기만 해도 몸의 자태가 초라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몸이잖아요. 그런데 이 여인은 모든 관절이 꼬부라져있었으니 누가 보아도 초라한 모습으로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겉모습에는 만물의 영장,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보기 어려웠겠지요. 자기 중심적 관점으로 가득했던 회당장을 비롯한 그 동네 사람들은 그 초라한 여인을 존귀한 아브라함의 딸로 여겼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날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꿔주십니다.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여인은 그 외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딸’이라고 선언하여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과 관점을 바꾸어주시자,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곧,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예수님의 치유로 말미암아 어떠한 마음이 들었습니까?) 
기뻐하니라 (17절)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눈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으시나요? 그러면 오늘 본문의 회당장처럼, 우리 역시 지독한 자기 중심성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은혜로운 사역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 지를 반드시 돌아보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심령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여 주셔서, 철저한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내 곁에 있는 이웃을 그들의 겉모습과 상관 없이 아브라함의 딸로,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관점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 속에 충만한 하나님의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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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