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2. 8. 2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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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류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레너드 스윗 교수는 인간이 음식을 먹는 행위를 세 개의 영어 단어로 구분하였습니다. 첫째는 가장 낮은 단계, 가장 열등한 단계의 먹는 행위로 레너드 스윗 교수는 그것을 Feeding이라고 명명했습니다. Feeding이라는 단어는 주로 짐승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가리키지요. 그래서 굳이 한글로 번역하면 ‘사육’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음식을 먹는 모습 속에서도 이와 같은 Feeding의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 먹는 것, 단지 배고픔을 잊어버리기 위해 먹는 것, 흔히 하는 말로 단지 살기 위해 먹는 것. 비워진 나의 위장을 채우기 위해 음식을 몸에 집어넣는 행위. 그것이 Feeding입니다. 
레너드 스윗이 이야기하는 먹는 행위의 두 번째 단계는 Eating입니다. 인간이 음식을 섭취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영어 단어이지요. 레너드 스윗이 Eat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은 음식의 맛을 추구하거나, 더 좋은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단계를 말합니다. 이른바 맛집을 찾아다니는 단계, 한 끼의 식사를 위해서 조금 더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레너드 스윗은 Feeding의 단계를 넘어서, 그리고 Eating의 단계를 넘어선 보다 높은 차원의 먹는 행위도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Dinning입니다. 일반적으로 Dining은 우리말로 ‘정찬’ 혹은 ‘만찬’으로 번역하지요. 매우 잘 차려진 식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레너드 스윗은 Dining을 그 음식의 메뉴보다는 식사하는 사람의 정신적 차원, 무엇보다 영적인 차원으로 이해합니다. 한 끼의 식사를 앞에 두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풍성한 감사의 시간, 한 끼의 식사를 앞에 두고 여러 사람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행복의 시간, 그것이 바로 레너드 스윗이 말하는 Dining이라는 높은 차원의 식사입니다. 

최근 여러분의 식사는 어떠하십니까? 오늘 하루 식사를 하시면서, 혹은 지난 한 주간 음식을 드시면서 여러분의 식사는 혹여 시간에 쫓겨 허기를 달래기 위해 음식을 먹는 바쁜 Feeding의 단계에 머물러 계시지는 않으셨습니까? 혹은 조금이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하고, 조금이라도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마음에 음식 자체에만 관심을 쏟으며 그 무엇인가를 먹는 Eating의 단계에 머물렀던 분들도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음식과 식탁의 의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식사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람들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한 Dinning의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 그리고 오늘날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이 음식을 대하는 방식이 Feeding이나 Eating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행위를 너무도 중요하게 여겼고 여기에는 그들의 신앙이 담겨 있었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 식사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합니다. 일몰, 곧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이 이르기 전에 온 가족이 식탁에 함께 앉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식탁 위에 놓인 양초에 불을 붙이는 것이지요. 온 가족이 식탁에 자리를 잡으면 아버지는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내와 자녀를 축복하며 식사가 시작됩니다. 이 자리에서 이른바 ‘하브루타’라 불리는 성경에 대한 대화가 중심이 됩니다. 식사를 시작하기 위해 켜 두었던 촛불은 스스로 꺼질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가족들은 그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며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한 하나님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죠. 이러한 문화 속에서 유대교의 한 랍비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세 명이 한 식탁에서 먹으며 토라의 말씀을 거론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식탁에서 먹는 것과 같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음식을 먹는 행위는 결코 Feeding이나 Eating의 차원이 아니었고,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는 참으로 고상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식탁에도 인간의 악한 본성은 표출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의 식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큰 한계는 ‘배타성’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식탁을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다 보니, 유대교 종파에 따라 엄격한 규칙을 정하여 지키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엄격한 율법 해석에 동의하고 그것을 준수하는 바리새파 친구들과만 식사를 했습니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엄격한 식사의 규례를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며 그들도 그들끼리만 식사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배타성이죠.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건전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자신의 식탁으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그 넓은 포용성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초대받을 때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어느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입니다. 누가복음 14장 1절은 오늘 본문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새인의 가정에서 열린 식사 자리에 참여하셔서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먼저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사람들을 식사 자리에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시지요. 먼저 초대를 받아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7a절) 

예수님께서 그날 사람들의 행동에서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택하여 그곳에 앉는 모습입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식사를 위해 놓아둔 의자가 일반적으로 영어 알파벳 “U”자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알파벳 “U”의 아랫부분에 주로 주인이 앉고 그 양쪽으로 그날 참석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앉곤 했지요. 주인으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앉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힘과 특권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으셨는데 초대받은 많은 사람들이 누가 보아도 높은 자리, 힘과 특권을 상징하는 그 자리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자리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7b절).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8-9절) 

내가 자의로 높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나 정도의 권세와 사회적 지위라면 이 정도 자리에는 앉아도 될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는 누가 등장하나요? 그 잔치를 주관하는 주인이 등장합니다. 주인이 와서 자리를 다시 조절하면서 끝자리로 옮기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 되겠느냐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 반대의 경우도 말씀하십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0절) 

이 두 가지의 경우를 모두 말씀하신 뒤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1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본문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처세술을 알려주는 좋은 말씀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요. 내가 스스로 겸손한 태도를 보이면, 사람들이 나를 높여주게 될 것이니 더 큰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만일 교만해져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면 그러한 나를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고 더 부끄러운 곳으로 끌어내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 누구든지 한번 읽기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부터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실천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식사자리에서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낮은 자리에 앉으면 마지막까지 낮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경험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식사 자리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마지막까지 높은 자리에 앉아서 그 모임을 주도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높임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자랑하면서 어떻게든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권세도 누리고 특권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오늘 본문 7절과 같이,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다 높은 자리를 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모임과 비슷하지 않은가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를 높이는 사람이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높아지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한없이 낮추어질 뿐이요, 자기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냉정한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요? 그러한 현실을 알고 있기에,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도 먼저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요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 역시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지금도 밤낮없이 경쟁하고 있잖아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따라갈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7절에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 번만 읽어도 어떠한 말씀을 하고 계신지 쉽게 이해가 되는 듯 하지만, 사실은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을 잘 표현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자, 비유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제 제가 드리는 질문에 마음으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주인이 등장하죠. 처음에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끝자리로 옮기고, 처음에 끝자리에 앉은 사람은 높은 자리로 이동시키는 주인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비유라면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이 주인은 실제로 누구를 가리킬까요?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늘 그렇듯,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현실이 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마음에 자리 잡은 교만을 멀리하고 겸손의 마음을 품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하나님께서 천국 잔치의 주인이 되어 마침내 우리를 가장 적절한 자리로 옮겨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은 교만한 자들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겸손한 사람은 사람들의 무시를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사람을 올려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초대할 때

예수님은 먼저 초대를 받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권면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2절) 

지금 예수님께서 잔치에 초대할 때 하지 말라고 금하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네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 식사 자리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살펴보니 잔치를 주관하여 손님을 초대한 사람이 예수님의 표현대로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만을’ 청했습니다. 그 바리새인이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만’ 초대한 이유는 12절 뒷부분에 나오지요.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너에게 갚음이’ 되도록, 곧 내가 다른 사람을 초대할 때 그 사람들로 말미암아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오늘날 이른바 자기계발서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바가 아닌가요? 여전히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자기 계발서를 읽어보면 나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베풀라고 말하지요.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식사자리에 초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네요. 그러면서 예수님은 식사 자리에 초대해야 할 대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3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니리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14절) 

예수님께서 식사 자리에 초대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한 사람들, 곧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저는 자, 맹인들’은 아무리 식사 자리에 초대하여 정성으로 음식을 대접해도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그들을 우리의 식탁에 초대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이 무엇인지 이제 말씀하시네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가난한 사람, 몸 불편한 사람, 저는 사람, 맹인들에게 아무리 선의를 베풀어도 이 세상에서는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때는 언제입니까? “의인들의 부활 시에” 의인들의 부활하는 그때,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그러면 여러분, 이 말씀에서 여러분의 선행을 갚아주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네, 당연히 하나님이시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을 잘 대접해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주시니, 그 하나님을 믿으며 오늘 가난하고 힘없고 나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그러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낮추어도 이 세상에서 높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되돌려줄 수 없는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어도 이 세상에서 복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겸손하기 위해 노력하고 힘 없는 이들을 섬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상을 기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너를 위한 자리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식사자리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기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초대하셨던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식사했던 사람들은 전혀 달랐지요. 예수님은 세리들, 죄인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같은 바리새인들만 초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식사자리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베푸신 식사 자리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초대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식사 자리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기에, 그들은 사람들에게 멸시받던 죄인과 세리들이 그 자리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식사는 자신들만의 모임, 자신과 동일한 바리새인들만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그들의 식탁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단호합니다. 만일 바리새인들 사이의 잔치에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그리고 죄인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예수님께서 실천하여 보여주셨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들을 위한, 곧 ‘너를 위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식탁에는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삶에는 나만을 위한 자리가 아닌 너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에는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자리를 넘어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을 향한 그들을 위한 자리가 준비되어 있으십니까? 우리가 나를 위한 자리를 넘어 너를 위한 자리를 마련할 때, 비로소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바로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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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