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4. 4. 2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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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례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신랑 군)과 (신부 양)에게 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기회일까요?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신랑 군)은 (신부 양)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지요. (신부 양)도 (신랑 군)을 남편으로 삼기 위해 이 자리에 섰지요? 그런데 이처럼 인생의 중차대한 일을 결정하면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떠세요? (신부 양)보다 더 좋은 신붓감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별로 반응이 없는 것 같으니 이쪽으로 보면서 이야기해 봐야겠네요.) (신랑 군)보다 더 좋은 신랑감이 설마 이 세상에 설마 한 명도 없을까요? 어때요? 한번 더 생각해 볼 생각이 없으신가요? 지금이 정말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신랑감에 대해, 혹은 신붓감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어요. 재차 강조하지만, 마지막 기회입니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대답해 보십시오. 제가 지금 드리는 이 마지막 기회를 잡으시겠어요? 

아~~ 아쉽군요. 매우 애석하게도, 여기 두 사람은 제가 드린 마지막 기회를 결국 놓치고 말았습니다. 

지금 결혼식의 주례자로 서 있는 제가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제 여기 서 있는 두 사람에게는 배우자를 선택할 기회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나의 배우자가 이런 사람이라면 좋겠다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권리조차 모두 사라졌습니다. 연애할 때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열심히 탐구하고,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잘한 결정인지 백 번을 자문하고 천 번을 생각해봐도 됩니다. 아니, 결혼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앞두고 당연히 수도 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오늘 이 순간부터 그러한 모든 생각을 철저하게 버리셔야 합니다.

 

신랑과 신부 두 분은 한평생 절대 잊지 마십시오. 두 분에게는 배우자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기회와 권리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부부는 언약의 관계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부부의 관계를 묘사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가 무엇일까요?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언어로 바꾸면 ‘약속’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기독교에서 언약이란 약속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은 언약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약속을 묘사할 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약속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점심 식사 약속부터 친구나 동료를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까지,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 없이 약속을 하며 살아가지요.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키지 못해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은 약속은 얼마든지 어길 수 있고, 그러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약속하셨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은 한 번 하신 약속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하나님께서 (신랑 군)과 (신부 양)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아요.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약속이라고 부르지 않고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언약이라는 단어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자, 언약이라는 기독교 용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약속을 의미하기에 사람들 사이의 약속과 달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약속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에서도 언약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딱 두 가지 관계입니다. 무엇일까요? 첫째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언약의 관계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태어나 보니, 지금 저 앞에 앉아 계신 분들이 이들의 부모님이셨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저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외에 다른 누군가가 여러분의 부모님이 될 수는 없지요. 그래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관계에도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두 가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번째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다른 하나는 무엇일까요? 네, 부부 관계입니다. 태어나 보니, 나의 부모님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요. 그리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의 부모님이 바뀌는 경우는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랑 군)과 (신부 양)이 지금 이 시간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결혼은 두 분의 선택이었어요. 그러나 지금부터는 두 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두 분을 부부로 짝지어 주신 언약입니다. 마치 여러분이 부모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리고 여러분이 한 번도 선택하지 않았던 부모님이지만 결코 부모님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이제부터 여러분의 배우자는 여러분이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언약이기에 영원히 이 부부의 관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많은 남녀가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합니다. 그러나 모든 부부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합니다. 행복을 꿈꾸었는데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 안에 결혼이 언약이라는 생각이 사라진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그래서 부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어요. 적극적으로 다른 남자나 다른 여자를 찾고 있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내가 이 사람보다 조금만 더 다정한 사람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보다 수입이 조금만 더 많은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보다 조금만 더 성실한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보다 조금만 더 가정적인 사람이라면, 이 사람보다 조금만 더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이처럼 나의 배우자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계속 생각하다 보면, 결국 자신의 배우자에게 불만이 생기고 그 불만은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의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결혼을 언약의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가능성을 계속 마음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결혼을 언약의 관계로 여기는 부부는 어떨까요? 다른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남편이요 아내입니다. 그러니 성격도 바꿀 수 없고, 외모도 바꿀 수 없고, 수입도 바꿀 수 없고, 습관이나 버릇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 밖에 없네요. 무엇일까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지요. 성격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외모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입이나 소비 형태도 받아들이고, 습관이나 버릇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잖아요. 어디 그뿐인가요? 성격도 마음에 안 들고, 외모도 마음에 안 들고, 습관이나 버릇도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지만. (아~ 이 두 사람에게는 아직 공감이 안되나 보네요. 그래도 이것이 사실이니 저는 계속 말해야겠습니다) 성격도 마음에 안 들고, 외모도 마음에 안 들고, 습관이나 버릇도 마음에 안 들 때가 분명히 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배우자이니 내가 더 사랑하고 내가 더 섬기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혼은 나의 순간적인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짝지어주셔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세 겹 줄

결혼을 인간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언약으로 받아들이는 부부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전도서 4장의 말씀입니다. 전도서 4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모습과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대조하며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러한 대조는 12절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11-12a절) 

여러분, 한 사람이라면 그 결론이 무엇입니까? 패합니다. 망합니다. 실패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능력이 출중하면 성공하고, 반대로 무능하면 실패한다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근면하고 성실해서 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최선을 다해 일하면 성공하는 것이요, 반대로 게으르고 나태하면 실패한다고 생각하지요. 열심히 공부하여 많은 학식을 갖춘 사람은 성공하고, 반대로 배우기를 싫어하여 지식도 없고 기술도 없으면 실패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이 유능한 사람인지 무능한 사람인지, 많은 배운 사람인지 배우지 못한 사람인지,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인지 게으른 사람인지 구분하지 않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딱 한 가지, “한 사람이면 패합니다.” 아무리 유능해도, 아무리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최선을 다해 뛰어다녀도, 이 세상의 모진 비바람을 혼자만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요.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한 사람이면 반드시 패합니다. 그런데 그 연약한 한 사람 곁에 또 다른 한 사람이 함께 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전도서 4장 12절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상의 풍파가 아무리 모질게 닥쳐와도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모든 시련과 역경을 맞서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한 사람 곁에 어떤 사람이 함께 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니, 나에게 찾아오는 삶의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내 곁에 지혜가 있는 사람이 함께 해야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내 곁에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그 모든 어려움을 앞장서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나와 동일하게 지식도 부족하고 능력이나 경험도 부족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내 곁에 있더라도 도움이 될까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상관 없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경험이 많고 인맥이 넓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는 전혀 상관없어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부부요, 부부는 언약의 관계로 영원히 변함이 없다는 믿음으로 끝까지 서로를 사랑하고 섬긴다면, 그 두 사람은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맞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자, 한 사람이라면 패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면 능히 맞설 수 있지요. 여기에 한 사람이 더해져서 세 사람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전도서 4장 12절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신랑 군)이 제 아무리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도 (신랑 군) 한 사람이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신부 양)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서로를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배우자라는 분명한 믿음으로언약의 관계를 맺고 있다면, 세상의 모든 풍랑을 맞서 이겨낼 수 있겠지요.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의 언약 관계, 자녀가 더해진다면 이 가정은 세 겹 줄과 같이 든든하여 결코 끊어지지 않는 믿음의 가정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강조할 수밖에 없네요.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공부를 잘하는 아이든지 공부에는 전혀 취미가 없는 아이든지 상관이 있을까요? 상관없습니다.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예체능에 탁월한 재능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재능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리더십을 발휘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과 사랑을 받는 아이라면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 자녀로 말미암아 이 가정은 든든한 믿음의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배우자로 믿고 언약의 관계를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면 성경의 이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게 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함께 있어, 
더욱 행복합니다. 

(신랑 군)에게 (신부 양)이 곁에 있으니 그저 행복하고, 
(신부 양)도 (신랑 군)이 곁에 있으니 날마다 행복하고, 
이들 부부에게 자녀들이 태어날수록 더욱 행복해집니다. 

그 조건은 
더 좋은 남편, 더 좋은 아내, 더 좋은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남자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내가 사랑할 남편이다, 
이 여자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내가 사랑할 아내다, 
이 아이들이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내가 사랑할 우리의 자녀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부로, 그리고 우리를 한 식구로 묶어 주셨으니 
나는 그저 사랑하고 섬긴다는 이 언약의 마음만 간직하십시오. 

그러면 두 사람이 함께 있기에 늘 행복하고, 자녀들이 태어날수록 더욱 행복한 믿음의 든든한 가정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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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