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3. 12. 10.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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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지금 나의 삶에 큰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오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참고 인내할 수 있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소망의 인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지금 고단하고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우리는 기쁨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편안하고 크게 부족한 것이 없더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괴로워하여 오늘 하루를 우울하게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니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내일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지요.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소망을 노래하였던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독일의 신학자입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대표적인 저서가 『희망의 신학』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기독교의 희망, 곧 성경이 선포하는 ‘소망’을 ‘낙관’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소망이나 낙관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해 보이지요. 그러나 몰트만은 소망과 낙관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자, 그러면 소망은 낙관과 어떻게 다를까요? 

몰트만이 이야기하는 낙관은 과거나 현재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나타나는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모습이나 우리 사회의 형편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로 내일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를 품게 될 때 우리는 미래가 낙관적이라고 말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 지난 수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준비했습니다. 그 학생은 내신도 좋고 수능성적도 기대 이상으로 좋게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입시 결과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겠지요. 이것이 낙관입니다. 어느 사업가가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상품을 개발하였습니다. 이제 그 상품을 시장에 판매하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업가는 이제 곧 출시할 상품이 크게 히트를 칠 수 있다는 낙관을 할 수 있겠지요. 바로 이것이 낙관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낙관은 존재합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을 읽고 열심히 신앙훈련에 참여한 분들은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나의 믿음과 신앙이 조금씩 성장하겠구나 낙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한 해를 준비하는 지금, 여러분의 새해는 낙관적이신가요?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대로 지속되기만 하면 일 년 뒤, 오 년 뒤, 혹은 십 년 뒤에 마주하게 될 여러분의 미래를 낙관하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그렇다고, 나의 인생은 이대로만 계속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은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희망, 곧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과거나 현재에 내재되어 있는 요소들을 아무리 살펴도 내일에 대한 낙관이 불가능할 때, 지금 나의 모습에만 집중한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을 그때 외부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내일에 대한 긍정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입니다. 이것 역시 예를 들어 볼까요?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미래의 소망을 주십니다.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조금이라도 가능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한 가능성은 “0”에 가까웠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비전을 선포하시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바라보며 십자가에 달린 무기력한 사형수가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리라고 그 누구도 낙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절망의 순간에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영생에 대한 소망을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선물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바로 이 소망이 오늘 우리의 삶을 새롭고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낙관적 전망이 어려운 환경 (1-8절) 

사무엘상이 시작하는 오늘 본문은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불가능한 현실을 묘사합니다. 구약성경에 조금만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사무엘상 앞에 사사기와 룻기가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사기와 룻기가 그려주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두운 사사시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신앙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던 혼돈의 시대였지요. 사무엘상이 시작하는 본문에서도 여전히 시대의 깊은 어두움이 계속되는 사사시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이 그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지요.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3절) 

이 사람, 곧 엘가나가 매년 절기를 맞이하면 하나님의 성소가 있었던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엘가나의 믿음은 순수하고 아름답지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기 위해 올라가는 실로에서 제사장으로 있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경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매우 악한 제사장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사무엘상 2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2장 12절)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실로에 올라가면 무엇합니까? 그곳에서 버젓이 제사장으로 있는 사람들은 행실이 나쁘고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홉니와 비느하스였으니 무슨 내일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가능하겠어요? 

홉니와 비느하스만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였던 그들의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어떻습니까? 엘리 제사장의 특징은 한 마디로 무감각입니다.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이지요.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13절) 

민족의 최고 지도자라는 엘리는 그가 기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술에 취한 것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4장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4장 18b절) 행실이 매우 나쁜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 비대하여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들이 제사장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실로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던 시대이니, 여러분 과연 어디에서 낙관적인 전망이 가능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한나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묘사하는 한나 개인의 처지를 보아도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불가능합니다. 한나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불임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결혼한 여인이 아이를 출산하기를 간절히 원하였지만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닫으셨으니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한나가 살았던 고대 사회에서 자식이 있고 없고는 그들의 삶을 좌우하는 너무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두 가지로 묘사하는데 그 하나가 장수라면 또 하나는 바로 많은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의 유무는 당시 남성보다는 여성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삶의 요소였지요. 그래서 본문은 한나의 남편 엘가나가 한나에게 갑절의 분깃을 주었지만 그것이 한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하였다고 말하지요. 그러니 고대 사회에서 자녀가 없는 여인 한나에게는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불가능합니다. 한나에게 내일에 대한 낙관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본문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6a절) 

한나가 임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매정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본문 6절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막으시는데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지금 현재의 모습만 놓고 본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현실도 그리고 한나라는 한 여인의 인생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 곧 낙관이 불가능합니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우리 주변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분들이 참 많으신 듯 합니다. 그런데 나라를 걱정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분들의 걱정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을 자세히 관찰해 볼 때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도 참 많이 들려옵니다. 코로나 이후에 급격히 감소한 예배 출석인원이나 교회의 재정이나, 고령화에 따른 교회학교의 붕괴 등을 이야기하다 보면, 과연 지금의 한국 교회 안에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내어 놓을 수 있는 낙관의 이유가 조금이라도 내재되어 있는지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 개인과 가정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지만 우리가 처한 냉혹한 현실은 우리에게 모든 긍정적인 낙관을 차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나의 모습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지금 우리 안에 있는 긍정적인 전망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불가능할 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실 일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소망과 기쁨 (9-18절) 

모든 낙관이 사라지고 절망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 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선물로 주시는 소망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본문 10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한나가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통곡하며 무엇하지요?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여인과 같이 자녀를 출산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옆에 있던 엘리 제사장이 한나의 기도에 대해 축복해 줍니다. 여러분이 다 기억하시는 것처럼 엘리 제사장은 하나가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술에 취한 것으로 알았잖아요. 그런데 엘리 제사장과 한나가 대화를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엘리 제사장이 한나의 기도에 대해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나와 엘리 제사장의 대화를 아무리 많이 읽어보아도 한나가 자신의 기도 제목을 엘리 제사장에게 이야기해주었다는 힌트가 하나도 없어요. 그도 그럴 것이 한나의 기도는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이 안되잖아요. 그래서 혼자만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니 엘리는 한나가 어떠한 기도의 제목으로 기도하는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축복합니다. “평안히 가라” 그다음에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한나의 대답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를 입기를 원하나이다.

한나의 대답을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어 볼까요? 한나가 “아멘” 한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제가 먼저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 축복을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 “아멘”하시면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마다 평강이 임하시고, 여러분이 어떠한 기도의 제목이 있으시든여러분의 모든 기도 제목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제가 사실 여러분이 어떤 기도 제목이 있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기도제목을 알려주신 분들의 기도 제목은 알지만, 더 많은 성도님들의 가정과 자녀를 위한 기도의 제목은 제가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으로 “아멘”이라고 대답하실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엘리의 축복에 대해 한나가 “아멘”으로 반응했어요. 그러자 한나의 마음에 소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18절 말씀을 우리 함께 한 번 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를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한나가 엘리의 축복에 대해 “아멘”으로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근심빛이 사라졌어요. 아직 아이를 잉태한 것도 아니고, 아직 아이를 낳은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한나는 엘리 제사장의 축복을 믿고 “아멘”으로 반응하자 그 마음에 소망이 생긴거에요. 그래서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잘 먹습니다. 평안히 잠듭니다. 다시는 얼굴에 근심 빛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나가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품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한나의 삶은 그 이전 같았을까요? 브닌나는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한나를 괴롭혔겠지요. 한나의 마음에 소망이 일어나기 전에는 브닌나의 괴롭힘에 마음이 요동하고 분노가 치밀어 일어나곤 했지요. 그런데 한나의 마음에 소망이 생기고 나니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더 이상 한나의 마음이 요동치 않게 되었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록 한나의 품에는 아직 자녀가 없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한나의 삶을 천국으로 바꾼 것은
사무엘이라는 아들이 아닙니다. 
한나의 삶을 천국으로 바꾼 것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소망이라는 값진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다시 말씀드려 볼까요? 

여러분의 삶을 천국으로 바꾸는 것은
지금 당장 내 손에 주어지는 재물도 성공도 기도의 응답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을 천국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삶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일의 희망을 품을 수 없을지라도 아무것도 없는 공허에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소망을 품으십시오. 비록 여러분의 손 안에 움켜잡은 것이 적을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대한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분명한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간직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은 천국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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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