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3. 6. 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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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의 경제력을 평가하기 위해 가장 많이 언급하는 지표는 GDP, 곧 국내총생산이지요.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의 역사도 국내총생산, 특별히 1인당 GDP가 얼마나 급성장하였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던 1953년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67달러에 불과했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가 지나고, 1970년이 되었어도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254달러에 머물렀지요. 그런데 70년대부터 급격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1977년 드디어 1인당 GDP 1000달러가 넘어서더니, 불과 6년 뒤인 1983년에 2000달러를 넘어서고, 1990년에 들어서는 6000달러를 달성합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지요. 1995년에는 1인당 GDP 1만 달러를 돌파하고, IMF 금융위기를 맞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에 2만 달러를 넘어, 현재는 1인당 GDP 3만 달러의 시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GDP가 얼마나 급격히 성장했는지를 보면, 우리나라의 경재와 국민들의 삶의 질이 얼마나 현격하게 나아졌는지를 한눈에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지요. 어느 나라의 GDP는 그 나라의 경제력과 삶의 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척도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국내총생산, 곧 GDP의 한계를 지적하는 주장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GDP 안에는 여가활동의 중요성이 외면된다거나, 시장 밖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봉사 활동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등의 한계점입니다. 그리고 GDP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제시되는 지표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행복지수’입니다. 예를 들어,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 부탄은 국내총생산이 매우 작지만 서구유럽의 부유한 국가들보다 행복지수가 높다라는 사실에 세계인들이 주목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GDP로 나타낼 수 있는 국민총생산, 곧 한 나라의 국민들이 얼마나 많이 생산하고 얼마나 많이 소득을 올리는지가 HPI, 곧 국민총행복지수와 비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어느 국가의 삶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GDP는 매우 중요한 지표이고, 국민총행복지수인 HPI 등의 여러 지수에 대해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를 지켜보며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GDP로 대표되는 생산능력, 곧 국민들의 소득이 반드시 국민들의 행복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전도서 6장도 동일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소유, 곧 나의 손으로 움켜잡고 있는 것이 반드시 나의 삶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전도자는 이 사실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전 6:2)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소원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전도서 6장 2절은 구체적인 목록이 제시되어 있지요. 곧, 재물과 부요와 존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그 사람은 모두 얻었으니 얼마나 복된 인생인지요? 그리고 전도자는 그 모든 축복의 출처가 어디인지 분명히 밝힙니다.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재물도 주시고, 부요도 주시고 존귀도 주신 인생, 곧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네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소유를 허락해 주셨지만, 한 가지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여기에 두 가지 개념이 대조적으로 등장하네요. 첫번째 개념은 소유입니다. 그리고 소유와 대조를 이루는 두 번째 개념은 누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소유는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네요. 우리의 삶 속에도 소유는 했지만 그것을 누릴 수 없는 경우가 있을까요? 네, 얼마든지 있고 우리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그와 같은 경우를 볼 수 있지요.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모두 소유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큰 질병을 맞이할 수도 있고, 심지어 그 모든 것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의의 사고로 단명하여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는 형편도 있잖아요. 어떠한 이유에서든 하나님께서 소유는 허락하셨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시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 계속해서 전도자는 또 다른 예를 제시합니다.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전 6:3) 

이번에는 장수의 복과 자녀의 복을 풍성하게 받은 사람이 등장하네요. 구약성경은 일반적으로 장수의 복과 자녀의 복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매우 크고 귀한 축복으로 노래하거든요. 십계명에서 부모님을 공경할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장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하는 시편 127편은 자녀들을 ‘장사의 수중의 화살’로 비유하잖아요. 이렇듯 성경은 장수의 축복 그리고 자녀의 축복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점에서 3절이 묘사하는 사람은 “백 명의 자녀를 낳고” - 물론 과장법입지요. 그러나 그만큼 많은 자녀를 낳고 -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았으니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반전이 있네요. 그렇게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은 사람이라도 그의 영혼이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앞의 2절에서는 소유와 누림이라는 개념이 서로 대조적으로 등장했지요? 이번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행복과 대조적으로 등장하네요. 많은 것을 소유했어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듯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았을지라도, 성도 여러분, 행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 이제 결론입니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전 6:6) 

여러분, 천년을 살면 뭐합니까? 아니, 천년의 갑절을 살면 뭐 합니까? 그렇게 장수의 축복, 자녀의 축복,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풍성한 축복을 받으면 무엇합니까? 그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래서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다면 전도자의 표현 그대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고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 축복을 소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축복을 받아 소유하는 것을 넘어 또 하나의 단계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유를 지금 이 자리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는 무엇일까요? 큰 축복과 큰 소유가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만일 큰 축복을 받아 많은 것을 소유했더라도 그것을 누릴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주어진 축복이 조금 작아도, 지금 나에게 주어진 소유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조금 부족해 보여도, 지금 나에게 주신 축복과 지금 나에게 있는 소유를 누리면서 지금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진정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소유를 넘어 행복으로 

전도자는 소유와 그것을 누리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행복한 삶은 다를 수 있다고 분명히 가르치지요. 그러면 여러분, 지금 우리가 소유한 재물이나 건강이나 사회적 지위가 크든지 혹은 작든지 지금 내가 소유한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반대로, 과연 무엇 때문에 우리는 크든 작든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살펴본 전도서 6장을 묵상하면서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지금 우리에게 있는 소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경우입니다. 전도서 6장에 이런 구절이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지 못하도록 막으시면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쩔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섭리고 하나님의 주권이니 우리 인간은 거기에 대해 항의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나에게 있는 그 소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우리 인간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만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도자가 지적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지요.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전 6:6) 

비록 천년을 살아도, 심지어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오늘 하루 행복을 누리지 못하면 헛된 인생이 되지 않겠느냐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소유를 늘리기 위해, 더 많이 가지려고 동분서주하지 말고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바로 지금 누리는 것이 참된 지혜라는 권면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지금 나에게 있는 소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매우 중요한 비결 하나를 여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감사하는 인생이지요. 지금 나에게 있는 소유가 부족하다고 불평하기보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보다 비록 작은 것이라도 지금 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에 감사하며 그것을 사랑하는 가족이나 이웃과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생이 복된 인생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사람들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 다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이들은 조금 풍족하게 살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조금 궁핍하게 살아갑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명성을 떨치며 살아가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게 살아가고 또 어떤 분들은 늘 병약한 육신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우리 주변에는 나보다 더 많은 축복을 소유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과연 언제까지 여러분은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더 많은 축복, 더 많은 소유를 얻기 위해 살아가시겠습니까? 그 끝은 헛되고 헛되어 모든 것이 헛되다고 전도자가 분명히 가르쳐 주잖아요. 

물론, 우리 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풍족한 분들도 계시고 또 우리 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궁핍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 중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건강하신 분이 계시고 다른 사람들보다 허약하신 분도 계시지요. 그런데 여러분, 전도자는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비록 소유가 적어도, 비록 하나님께 받은 축복이 적어도 지금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의 지름길이라고 말입니다. 

천년을 살아도, 아니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오늘 하루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헛된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년은 고사하고 앞으로 백 년도 살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들은 오늘 하루 지금 나에게 있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에게 나누고 베푸며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잖아요. 이제 시작된 한 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든 – 그것이 크고 풍성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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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