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학2017. 1.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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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설교에 있어서 3가지 주체를 고려해볼 수 있다. 첫째는 설교자이고, 둘째는 회중이며, 마지막으로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전통적으로 설교의 세가지 요소 가운데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사실이 다른 요소들에 비해 중요하게 부각되었고, 이는 신정통주의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현대 복음주의교회의 전반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성령 하나님이 여러 저자들의 손을 빌어 성경을 기록하였듯,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설교자의 입술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이러한 논거의 뒤에는 설교자의 위치에 대한 전제가 내포되어 있는데, 곧 설교자는 말씀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도구(mere instruments)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을 연구하여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더하거나 빼지 말고 고스란히 회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설교자의 역할에 대한 이와 같은 전통적인 견해와 더불어, 설교자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편에서는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설교자의 역할을 ‘중재자’(mediator)로 소개한다. 곧, 기독교의 진리가 회중들이 처해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주어 기독교의 진리와 현실 사이의 연관성(relevance)을 맺어주는 역할이다.[1] 그런데 설교자가 기독교 진리와 현실 사이에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먼저 하나님의 심정을 그의 마음에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2] 그러므로 나인홀드 니버에게 있어 설교자란 단지 말씀을 전달하는 스피커가 되어서 입력된 신호를 보다 큰 음량으로 출력하는 것을 넘어서, 설교자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 마음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청중들이 처한 현실과의 연관성을 맺어주는 중재자다.


설교자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주장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찰스 피니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설교자를 단순한 “말씀의 도구”로 묘사하는 것을 분명하게 반대한다. “우리는 목회자를 죄인의 회개를 위한 도구라고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분명히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다. 사람은 도구 이상이다.”[3] 찰스 피니는 계속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설교자의 역할을 설명한다. 나이아가랴 폭포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우연히 그를 목격했다면, 그를 향해 ‘멈춰’라고 소리지를 것이다. 찰스 피니는 ‘멈춰’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설교자의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이 비유에서 피니가 강조하는 바는 설교자가 단지 ‘멈춰’라는 말을 불특정 다수에게 이야기한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폭포를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는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고 그 발걸음을 멈출 수 있도록 촉구하지 않는다면 ‘멈춰’라는 말이 실제로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참된 역할은 성경을 연구하여 그 메시지를 잘 짜여진 한편의 설교로 전달하는 ‘말씀의 도구’를 넘어 청중들의 영적인 상태를 분명하게 지적하여 그들로 하여금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의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 – 곧 설교자는 말씀의 도구가 되어서 성경의 메시지를 여과없이 전달해야 한다 – 를 넘어 설교자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받아들인다면, 설교의 준비와 전달에 있어 한가지 중요한 논의점에 다다르게 된다. 곧, 원고 설교와 즉흥설교에 대한 논의다. 파머(H. H. Farmer)는 원고 설교와 즉흥 설교의 장단점을 구분하면서 원고로 작성된 설교는 언제든 다시 꺼내어 볼 수 있는 반면, 즉흥 설교는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관계(I-Thou Encounter)에서 발생하는 능력이 발휘될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4] 그러나 원고 설교와 즉흥 설교에 대한 논의는 설교자의 역할에 대한 이해와 맞물리는 접촉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설교는 말씀의 도구이기에 성경의 메시지를 연구하여 그것을 청중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해야 한다는 견해에서는 당연히 원고 설교가 즉흥설교보다 권장되어 마땅하다. 설교자가 철저히 준비하여 완결된 설교 – 곧 성경의 메시지를 충성스럽게 담아낸 원고 – 를 청중들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설교자의 역할이 단지 ‘멈춰’라는 단어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고 실제로 폭포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멈춰세우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던 찰스 피니는 원고 설교보다 즉흥설교를 선호하였다. “의심의 여지 없이 원고 설교는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원고 설교는 복음에 거대한 능력(great power)를 제공하지는 못한다.”[5] 찰스 피니에 의하면, 설교자의 역할은 회중들의 영혼을 일깨워 회개로 인도하는 것인데, 설교자가 자신이 기록한 원고에 얽매이면 청중의 반응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자신이 설교하는 회중을 바라보고 있다면 설교를 하면서 회중들이 따라오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만일 회중이 어떠한 요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목회자가 확인한다면, 그는 잠시 설교의 진행을 멈추고 그 내용을 다시 설명해줄 수 있다. 회중이 그 설명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면 목회자는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며 설교를 더욱 진행하기에 앞서 회중들의 마음에 그 내용을 분명하게 심어줄 수 있다. 그러나 설교 원고를 작성하여 마치 에세이나 책을 읽는 것처럼 자신이 작성한 원고의 순서대로 설교하는 목회자라면 특정 부분을 반복할 수 없고 청중들고 하여금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시키는 데 실패하고 말 것이다.[6]


설교자는 말씀이라는 내용을 어느 시대, 어느 장소나 변함 없이 보존하는 용기가 아니며, 설교자의 역할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여과 없이 전달하는 도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설교자는 라인홀드 니버가 주장하듯 기독교의 진리[전통]를 오늘을 살아가는 청중들의 삶에 연관시키는 중재자이며, 존 스토트가 묘사하듯 성서의 세계와 청중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하는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목회자로서 설교자는 청중들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를 통해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던 자신의 발걸음을 돌이키는 회개를 촉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는 매주 한 편의 잘짜여진 설교를 작성하여 사람들 앞에 자신의 원고를 실수 없이 읽어내려가는 역할에 머무를 수 없다. 원고 설교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즉흥 설교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존 스토트는 이와 같은 설교자의 역할을 “다리를 놓는 것”(bridge building)이라고 묘사하였다. Cf. John Stott, I Believe in Preaching (London: Hodder & Stoughton, 1982); 계지영, 이 시대를 향한 설교학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4), 42-44.

[2] Ursula M. Niebuhr, introduction to Justice and Mercy, by Reinhold Niebuhr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7).

[3] Charles G. Finney, “How To Preach The Gospel”, 12th Lecture on Revival. http://www.whatsaiththescripture.com/Text.Only/pdfs/Revival_Lectures_Text.pdf (accessed January 19, 2017). 

[4] H. H. Farmer, “The I-Thou Encounter,” Major themes in the Reformed trad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2),126.

[5] Charles G. Finney, “How To Preach The Gospel”.

[6] Ibid. 피니가 원고 설교보다 즉흥 설교를 옹호한다고하여 준비 없는 설교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즉흥 설교를 위한 설교자의 훈련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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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