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강해2018. 2. 22. 07:30

시편 122편은 예루살렘 성전에 오르는 사람들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1)

 

누군가 시편의 저자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곧 이제 정해진 절기가 다가오고 있으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매년 세번씩 정해진 절기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가야합니다. 이것은 명령이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명령하신 계명을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자신에게 큰 기쁨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기쁨이십니까?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행복이신가요? 신앙생활을 처음 할 때,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릴 때는 내가 예배당에 앉아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이 큰 기쁨이었어요. 그때는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이 나에게 풍성한 행복이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교회의 예배와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기쁨이라기보다는 그저 성도의 의무로만 느껴진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점점 더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것을 이토록 기뻐하였던 이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3)

 

3절의 말씀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건설하고 솔로몬이 그 중심에 성전을 건축하였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가능성이 높은 해석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때에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로 건설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웠던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70년이라는 오랜 세월 예루살렘은 그대로 방치되었죠.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도로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나아가 느헤미야의 지도력 아래에 예루살렘 성벽이 건축되었지요.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은 예루살렘에 처음 세워진 성전, 곧 솔로몬이 건축했던 성전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성전의 규모나, 성전의 화려함이나, 성전을 건축하는데 사용된 자재나, 그 어떠한 것도 솔로몬이 세웠던 성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였지만 예루살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옛 영광을 단 한 번도 되찾아 올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70년의 세월 동안 황폐하게 버려졌던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고 그곳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차 오르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1]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4)

 

이스라엘 백성이 절기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율법의 규정을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라고, 그저 규정대로 하는 것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장면을 경험했던 유대인들, 나아가 예루살렘 성읍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는 장면을 목격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여러 지파가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기 위하여 절기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장면은 언제나 거대한 감격의 물결로 몰려왔던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비록 다윗 시대의 강력한 국가는 다시 이룩되지 못했을지라도, 솔로몬이 건축한 화려한 성전은 다시 볼 수 없을 지라도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져있고 자기 민족이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예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돌이켜보면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하고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고 언제라도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면 교회에 출석할 수 없었던 상황, 교회가 평안하지 못하여 성도의 교제를 누리지 못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매주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하는 기쁨,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며 즐거움을 누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 예배할 수 있고, 성도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에게 신앙생활의 기쁨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나 다른 어떠한 조건이나 이유가 없더라도 지금 하나님께 나와 예배할 수 있고 성도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기쁨과 행복의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한 시편 122편은 이제 예루살렘의 평안을 위한 기도로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6)

 

시편의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평안해야 자신의 삶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더욱 간절히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하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오늘도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하고 성도들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점을 기억하며, 함께 찬양하고 함께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교회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의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Mishael Wilcock, The Massage of Psalms 73-150 (England: Inter-Varsity Press, 2001),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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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