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0. 4. 7.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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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공생애는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히기 직전까지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조금 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하셨던 예수님이었지만 이제는 겟세마네 동산의 땅바닥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꼭 그와 같았기 때문이겠지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33b-34a절) 

이때부터 육신의 고난보다 더욱더 끔찍했던 영혼의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채찍을 맞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급기야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육신의 아픔도 괴로웠지만 온 인류의 죄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성부 하나님의 외면 속에서 죄악의 저주를 받아야 했던 그 길이 우리 주님께는 가장 큰 괴로움이요, 최고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작되었던 영혼의 고난, 바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반드시 겪으셔야 했던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통받으며  번민하였던 예수님의 모습은 기독교의 독특한 진리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리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절규 어린 기도를 깊이 묵상했던 고대 교부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명할 필요가 없다. 정말이지 나는 그의 놀라운 신앙과 위엄을 빼놓고 다른 것을 여기서 도저히 찾을 수 없다. 그가 나의 고통을 견디지 않으셨더라면 그는 나에 대한 그의 메시아적 본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문제로는 아무것도 슬퍼할 일이 없는데도 나 때문에 슬퍼하신 것은 내 죄성의 무거운 짐을 몸소 체험하시려는 뜻이었다. 내가 예수님의 고통을 담대하게 말하는 것은 내가 십자가를 전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성육신은 허깨비가 아니라 실체다. 그가 슬픔을 당하신 것은 슬픔을 정복하기 위함이었다. 상처를 입고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용맹스럽다는 평가를 받을 수 없다."[각주:1]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영혼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지요.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6절)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의 길은 끔찍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의 사명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깊은 영혼의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지만 그 마음의 아픔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 차례에 걸쳐 기도할수록 지금 겪는 영혼의 고난을 받아들이겠다는 결심만 우리 주님께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마침내 모든 기도를 마치신 주님께서는 담담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1-42절) 

땀이 핏방울이 될만큼 간절히 기도했지만(눅 22:44), 예수님께 임한 영혼의 고난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 잔을 예수님에게서 거두어주지 않으셨고, 예수님의 깊은 번민 속에서도 제자들은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께 깊이 기도하셨던 주님은 이제 일어나 영혼의 고난을 간직한 채, 십자가를 지시는 육신의 고난을 향하여 당당히 걸어가십니다. 


인간의 기도 

본문에는 영혼의 고난 속에서도, 당당하게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십자가의 길에 따라가는 데 철저하게 실패하는 제자들의 모습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조금 전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호언장담했던 제자입니다(마 14:31).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에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자랑스럽게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던 제자들입니다(마 10:38-39).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이 그렇게 말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들이 예수님을 떠나고 부인하리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깨어 기도하지 못하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38절)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지난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에서 언제나 넘어질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의 마음이야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예수님을 결코 부인하거나 배신하지 않겠다던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십자가라는 거대한 영혼의 고난이 찾아왔을 때, 그리하여 우리 주님께서도 놀라며 괴로워하셨던 그 장면을 직면했을 때 그들은 주저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인간들의 현존입니다. 그러니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영국의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없이 하나님의 원수됨이 드러나는 곳이요,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그분의 은혜로운 용서의 대상임이 밝혀진 곳이다."[각주:2] 

십자가 앞에 선 우리는 예수님을 못박은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난 우리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다면, 
바로 그 장소는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 바로 그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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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hn Calvin, Commentary, Matthew 26:37. [본문으로]
  2.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서울: IVP, 2007), 16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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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