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4. 21. 07:05

구약의 선지서를 공부하고 묵상하다 보면 선지자들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사람들의 생각과 너무도 달라 충격을 받게 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북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가장 번성했을 때는 여로보암 2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북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이제 발흥하기 시작한 앗수르 제국이 있었고, 북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서쪽에는 전통적인 강대국 애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에, 앗수르 제국과 애굽 제국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여로보암이 다스리는 북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평화를 누렸고, 정치적인 평화 위에 경제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나라 북 이스라엘을 이끌던 여로보암 2세는 앗수르 제국과 애굽 제국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국제 정세를 십분 활용하여 국가의 번영을 이루었던 것이죠.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북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이름은 아모스이고, 호세아입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를 통해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북 이스라엘이 곧 멸망하리라는 것입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북 이스라엘의 풍요로운 삶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통치 아래 국가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가 이 나라는 곧 망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이 그의 예언을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거죠. 

아모스가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하던 시대에, 북이스라엘 벧엘이라는 지역에서 선지자로 있던 아마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아마샤라는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세에게 아모스 선지자의 활동에 대해 보고하는 내용이 성경에 나옵니다. 아모스 7장에 나와 있는 그 보고의 내용을 제가 읽어드립니다.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가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암 7:10-11)

이것이 아마샤 선지자가 여로보암 2세에게 보고한 보고서의 내용입니다. 보고의 내용이 뭡니까? 이 땅, 북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아모스 선지자의 말을 견딜 수 없다는 겁니다. 모든 백성들이 국가의 번영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적인 풍요로움에 도취해 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예언합니까?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나라가 망할 거라는 예언입니다. 그러니 그 땅이 견디지를 못하지요. 


남유다의 선지자들 

하나님께서는 북 이스라엘이 역사상 가장 번영하였던 여로보암 2세의 시대에 아모스와 호세아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를 보내셔서,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남 유다에 선지자를 보내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남 유다에 보내신 선지자들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또 다른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남 유다에 보내신 선자자들 가운데 남유다가 멸망하는 시점에 활동하셨던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 제국의 위협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남 유다의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백성들이 다 인식하고 있습니다. 잘못했다가는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민족을 구해주시고, 우리를 바벨론 제국으로부터 구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어보면 당시 백성들이 열심히 기도했던 기도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예레미야 14장에 나오는 기도의 내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 받기를 기다리나 두려움만 보나이다”(19절) 또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21절) 

제가 읽어드린 기도의 내용이 유대 백성들의 기도인지, 아니면 예레미야 선지자 자신의 기도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백성들도 이와 같이 기도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와 같이 기도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으니 백성들도 간절히 기도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도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들리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예레미야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렘 15:1)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선지자도 백성들의 기도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주시는 말씀이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기도할 필요 없으니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라’는 거예요. 에스겔 선지자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 중에는 남 유다 백성들을 불의 땔감으로 쓰겠다는 말씀도 있어요.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니, 그 나무를 어디에 사용하겠냐는 말씀입니다. 열매를 못 맺는 포도나무는 무엇을 만들기에도 적합하지 않으니 불을 때는 땔감으로나 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국가의 번영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던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시대에 하나님은 아모스와 호세아를 보내셔서 멸망을 선언하십니다. 남 유다가 국가의 위기 속에서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지 않겠냐고, 그래도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겠냐고 백성들이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을 바로 그때,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들의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남 유다의 시드기야 왕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제국으로 끌려갔습니다. 남 유다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그때, 유대 백성들이 더 이상의 희망을 품을 수 없었을 바로 그때,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해 희복의 메시지를 예언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은 예루살렘 성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그 발 강 가에서 듣고 슬퍼하던 에스겔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겔 37장). 이미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의 성전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환상을 보여주십니다(겔 47장). 

모든 사람이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아직은 해볼만 하다고 이야기할 때 하나님은 절망을 선언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나 자신의 믿을만한 구석이 있을 그때에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하고 있을 바로 그때, 나의 힘과 나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그때, 하나님은 드디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린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7절)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향해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문을 열어 달라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구하세요. 찾으세요. 그리고 두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구하는 기도, 찾는 기도, 그리고 두드리는 기도에 대해서 아주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해주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9-11절)

오늘의 본문에서 핵심 구절을 뽑으라면 저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면 얻게 되고, 찾으면 찾게 되고, 두드리면 열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보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지 않을 때가 있더라고요. 언제입니까? 아들이 독립하면 더 이상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지 않습니다. 아들이 장성하여서 독립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아버지가 아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부모님의 필요를 공급하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다 성장하여 독립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염두에 둔 말씀이 아닙니다. 어린 자녀, 그것도 아주 어린아이, 이제 막 태어나 부모의 손길이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어린 아들을 염두에 두고 주시는 말씀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는 어떠한 기도일까요? 마치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배가 고프지만 스스로 먹을 것을 챙겨서 허기를 달랠 수 없기에 그저 ‘앙~~~’하고 아빠와 엄마를 향해 우는 그 울음과 같은 기도입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나에게 철저히 절망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나 자신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한 사람만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루 빨리 스스로에게 절망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 하루빨리 절망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 대해 하루빨리 절망하십시오. 여러분, 우리 교회를 바라보며 하루빨리 절망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면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루빨리 절망하십시오. 그 절망 가운데 피어나는 기도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요.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기도 

여러분, 베드로가 어떻게 기도했을 지 한번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3년 동안은 그다지 열심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는 그 밤에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지만 베드로는 기도하지 못하고 졸고 있었습니다. 사실, 베드로 입장에서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그들을 먹일 음식이 없어도, 베드로는 예수님만 바라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거든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공격을 해와도, 베드로는 자신이 직접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다 대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년의 시간이 흐른 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 그리고 수많은 무리들을 이끌어갈 책임이 누구에게 주어졌지요? 베드로 자신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떠나고 안 계세요.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베드로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공격을 해오면 베드로 자신이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 무거운 책임이 주어졌는데,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아요. 베드로 자신에게는 리더십도 없고, 성경에 대한 지식도 없고, 많은 사람들을 먹일 돈도 양식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물려주신 공동체를 이끌어가야 하는데 그만한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스스로에게 절망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매어 달립니다. 구하고, 또 구하고, 또 구합니다. 찾고, 또 찾고, 또 찾습니다.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또 두드립니다. 그 결과 성령께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강하게 임하시고, 그들이 초대교회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또 어떻게 기도했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바울은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가문 좋죠. 학벌 좋죠. 그가 걸어온 경력은 그 누구도 따라오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이력서는 화려합니다. 그러니 굳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어요.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까지 바울은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여겼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눈에 보이는 모든 조건들을 잃어버립니다. 

유대교에서 열심을 내었던 자신의 과거 화려한 경력이, 이제는 유대교 입장에서는 바울을 배신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믿는 교회도 바울은 경계합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요.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자기 주변에 그 누구도 다가오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절망하는 것이죠. 그 절망 가운데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기도합니다. 바로 그때 자기 스스로에게 철저히 절망했던 바울이 하나님께 어떠한 기도를 드렸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바울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하였고 그 결과 바울 역시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최근 한국 교회에 부흥이 보이지 않는다는 탄식의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한국 교회에 부흥이 없습니다. 몇몇 성장하는 교회가 있기는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분들이 교회를 옮긴 경우, 이른바 수평이동이 대부분입니다. 한국 교회에 더 이상 부흥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현장이 사라졌습니다. 

만일 한국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가 사라졌다면, 그것은 한국 교회가 여전히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기 때문일지로 모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한국 교회가 아직 스스로에게 절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국 교회 역사에 대한 자랑이 사라져야 합니다. 지난 1970년대와 80년대의 놀라운 부흥의 기억을 하루 빨리 잊어야 합니다. 과거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를 선도했던 위대한 역사를 잊어야 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늘의 한국 교회를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아무리 화려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 철저히 절망해야 합니다. 그 절망 가운데 우리는 비로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비로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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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