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4. 23.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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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무척 사랑하고, 책을 마음으로 아끼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한 번은 자신이 매우 아끼는 책 한 권을 친구에게 빌려주었습니다. 책을 빌려간 친구가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책을 많이 읽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추천하며 빌려준 그 책은 좋은 내용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 책에는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YBH라는 알파벳이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친구에게 질문했습니다. “자네가 이 책에 그토록 많이 적어 놓았던 Y. B. H. 는 무슨 의미인가?” 

그러자 책을 빌려준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Y. B. H.는 ‘Yes, but how?’의 약자이네. 나는 책을 읽어 가는 동안 저자가 쓴 내용에 기꺼이 동의하지만 그의 생각이 삶 속에서 실제로 구현되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무척 궁금했네. 그래서 ‘Yes, but how?’하는 표시를 한 걸세.” 버논 그라운즈라는 분이 쓰신 <생산적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의 서문에 소개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읽는 수많은 신앙 서적들, 경건 서적들의 내용을 생생한 현실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지금까지 수 없이 들어왔던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는 지금까지 묵상했던 산상보훈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말씀 실천의 장애물 - 거짓 선지자 

예수님은 산상보훈의 마지막 부분에서 실천의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의 실천을 방해하는 요소가 등장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 그 첫 번째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15절) 

예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말씀을 뒤집는 거짓 선지자들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특징을 어떻게 묘사하십니까?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겉모양은 화려하고, 겉모양은 순수해 보이지만 내면의 의도는 추악하다고 위협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오늘의 본문 전체가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조심해야 할 그들의 특징이 22절과 23절에 등장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거짓 선지자들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 성령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는 것,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은사이지요.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 성령의 열매가 없습니다.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라 지칭하십니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성령의 권능, 성령의 은사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제자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 곧 성령의 열매가 없습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을 묵상하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단의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를 사모하기보다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권능을 더욱 사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가득한 삶, 그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요, 그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은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에 관심이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그 대신 성령의 권능, 성령의 은사, 신비한 능력에 더 집중하게 합니다. 이 험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공하며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제자의 삶은 계속해서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내몰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두 명씩 짝을 지어 전도 여행을 떠나도록 하셨지요. 70명의 제자들이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우리 주님께 매우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이름의 능력, 곧 성령의 권능을 경험하고는 너무도 기뻐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우리는 귀신이 우리 앞에 굴복하면 기뻐하고, 귀신이 우리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슬퍼합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을 칭찬하면 기뻐하고,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면 슬퍼합니다.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큰 교회를 목회하며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면 능력의 종인 것처럼 칭찬을 받고,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며 적은 사람들을 상대로 목회를 하면 능력이 적은 종인 것처럼 주눅이 듭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입니다. 권능, 능력, 크기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의 관심을 빼앗는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뒷전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말씀 실천의 장애물 – 내적 변화 없음 

산상보훈의 말씀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 그 첫 번째는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이제 또 하나의 이유가 등장합니다. 곧,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16-18절)

나무는 좋은데 나쁜 열매를 맺는 경우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나무가 나쁜데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가시나무가 아무리 포도 열매를 맺고자 하여도, 가시나무에서 나오는 것은 날카로운 가시뿐입니다. 엉겅퀴가 아무리 무화과 열매를 맺겠다고 결심에 결심을 하여도 엉겅퀴에서 무화과 열매가 나오는 일은 없습니다.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을 때는 잠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지라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때의 결심일 뿐, 나의 속 사람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자의 삶이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가득 차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성령께서 지배하지 않으시는데 어떻게 나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수시로 변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의 기복을 경험하는데 어떻게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줄 수 있겠습니까? 나의 결심은 아침이 다르고 저녁이 다른데 어떻게 우리의 결심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 제자의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누가복음에도 오늘 본문과 동일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오늘 본문의 비유에 이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신 것을 되어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창고로, 인간의 행동이나 언어를 창고에서 꺼낸 물건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휴지통에 온갖 쓰레기를 가득 채워놓았는데, 어떻게 거기에서 맛있고 몸에도 좋은 음식을 꺼낼 수 있겠습니까? 냉장고에 온갖 좋은 음식으로 가득 채워 놓아야 그곳에서 맛 좋은 음식을 꺼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에 비교의식, 열등감이나 우월감, 혹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성령의 열매는 순간적인 결심과 감정적인 헌신으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먼저 나의 마음을 성령께서 바꿔주실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큰 용사여,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의 단어, 하나의 표현에 마음이 집중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하나의 표현은 바로 22절에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 말씀 중에서 제 마음이, 그리고 저의 시선이 고정되었던 하나의 표현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22절의 말씀은 거짓 선지자의 모습을 묘사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한두 명의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성령의 권능, 성령의 역사, 성령의 은사만 강조하지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걸어온 제자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은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그 길로 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습니다. 그러나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은 그 길이 크고 넓어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시대 제자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제외하고라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좁은 문이 아닌, 넓은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가득 채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가기 위하여 성령의 권능,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사 시대와 비슷하지요. 사사시대 율법이 없었나요? 아니요. 율법이 있었어요. 사사시대에 율법이 선포되지 않았나요? 아니요, 율법이 선포되었어요. 사사시대에 선지자들이 없었습니까? 아니요, 사사시대에도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에게 출애굽의 역사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떠나 다른 이방의 우상을 섬기고 있다고 그들의 죄악을 선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백성들이 하나같이 우상이 가져다주는 힘, 우상이 가져다주는 풍성함, 우상이 가져다주는 쾌락을 좇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따르는 삶, 율법의 정신에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은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십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을 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삿 6:15) 

여러분, 이것은 그가 굉장히 겸손해서 했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자신의 조국이 미디안이라는 나라를 섬기고, 모든 백성이 미디안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는 그때, 기드온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삶,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실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미디안을 섬기고 있을 때, 혼자서 미디안과 싸워 승리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분명 힘든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고 선언하는 일 역시 힘에 겨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그때, 홀로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율법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려워요. 힘들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 6:12)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제자의 삶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고 이 땅의 교회가 세상의 논리를 과감히 거부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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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