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5. 6.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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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요한의 제자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을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3장 23절부터 25절까지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 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요한복음 3장 본문에는 예배의 참된 내용은 잃어버리고, 형식에만 온통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당시의 무리들, 곧 유대인들입니다. 레위기에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정결 해지는 예식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나 실수로 몸과 마음이 더러워졌을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해질 수 있는지, 그 절차를 유대인들에게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200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는 사람들에게 레위기가 가르쳐주는 정례 예식과는 전혀 다른 형태인 세례를 줍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너도 나도 전통적인 정결 예식을 포기하고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습니다. 

구약 율법이 지시하는 정결예식이나,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에는 형태상의 차이가 존재할 뿐, 그 내용에 있어서는 큰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정결 예식과 세례는 모두 인간의 더러움을 씻어 정결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동일한 내용을 담은 두 가지 형태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결 예식이나 세례가 내포하였던 참된 의미는 잃어버리고, 무엇인가 새로운 형식을 쫒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따라가서 그에게 세례를 받은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요,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고, 오늘 우리들도 그 전통을 따라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눈에 매력적인 새로운 형식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과거의 전통을 쉽게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한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일에 온통 정신을 쏟다가 결국에는 그 안에 담겨 있어야 할 내용에 대해서는 망각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여러분 나병이 어떤 병인지 아시죠? 예전에 문둥병이라고 불렀던 병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14장에는 나병에서 건강해진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깨끗함을 보여주는 예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시고는 구약성경이 지시하는 정결 예식대로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는 세례든, 정결 예식이든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를 행하든, 정결 예식을 행하든 사람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예배의 형식에 너무 얽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의 찬양이 어떤 곡이며, 어떤 분위기냐에 너무 얽매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예수님 시대 많은 사람들은 정통적인 정결예식을 버리고 세례를 따라갔습니다. 또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정결 예식을 고수하면서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통해 명령하신 세례를 거부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자신을 거룩하게,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때로 예배 시간에 함께 부르는 찬양이 내가 좋아하는 곡이 아닐 수 있습니다. 때로 예배의 형태가 내가 원하는 형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예배에 담지 못한다면, 그 일차적인 원인은 예배의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나의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형식에 붙들린 사람들

무리들만 예배의 참된 내용을 잊어버리고, 형식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 역시 형식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베푸는 세례가 구약성경의 정결예식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도 인정하셨고, 구약성경의 정결 예식도 옳다고 인정하셨는데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 세례 요한이 베푸는 세례가 구약의 정결 예식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정결 예식의 핵심도, 세례의 핵심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에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세례가 간직하는 내용보다, 세례라는 형식에 더욱 집중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25절을 보십시오.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우리 성경에는 요한의 제자와 유대인이 논쟁을 한 것처럼 표현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원문을 보면, 논쟁이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요한의 제자들이 유대인에게 논쟁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 스승님이 전하는 세례야 말로 진짜다.” “우리 요한 선생님이 사람들에게 베푸는 세례가 너희들이 행하는 정결 예식보다 우월하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까지 주장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전하는 세례가 너희들이 행하는 정결 예식보다 사람들을 더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사람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은 마치 그들이 전하는 세례에 무엇인가 능력이 있어서 율법의 정결예식보다 더 힘 있게, 더 깨끗하게 사람을 씻긴다고 주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정결 예식에 대해서 논쟁을 일으키는 이 장면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중에서 리더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세례가 구약의 정결 예식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근거가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범한 치명적인 잘못이었습니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여러분 당시의 분위기를 상상해 보십시오. 2000년 동안 율법이 지시한 정결예식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정결 예식 안에는 우리를 깨끗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그 예식이 지루하게만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나타나서 세례라는 새로운 형태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니 이미 20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시행되었던 정결 예식이 따분하게만 느껴졌던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라는 것이 대단히 매력적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정결 예식보다 세례로 막 몰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요한의 제자들이 대단히 오해를 했어요. “야,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우리에게 오는구나. 역시 우리가 전하는 세례가 대단하구나.” 이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야 말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빠질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착각입니다. 

이 위험한 착각으로 인하여 교회의 지도자들이 새로운 형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매력적인 형태를 꾸미려고 모든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여 사람들이 몰려오면, 그것으로 자신이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리더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착각을 하게 됩니다. 어디는 대단히 사람들이 많이 몰리더라, 그런데 알고 보니 거기에는 우리와 다른 화려한 형식이 있더라. 역시 그런 교회는 성공하는 구나. 이런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착각들, 이 모든 현상들이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세례라는 형식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온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와 논쟁을 벌이던 유대인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공격합니다. “너희들의 스승 요한이 세례를 주자 많은 사람들이 너희들에게 몰려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예수라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자, 수많은 무리들이 너희 스승 요한보다 예수라는 그 사람을 찾아가고 있지 않느냐?”라고 공격합니다. 이러한 공격을 받은 요한의 제자들은 아무런 대답도 못합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돌아와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절)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대책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몰려와야 하는데, 지금 다 예수님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을 수 있는 형태를 고안하든 지, 아니면 저 예수라는 사람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이 다시금 자신들에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예배의 형식에만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 그러한 형식에 따라 몰려다니는 사람들에만 집중할 때, 요한의 제자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곧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오도록 하려는 욕망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세례 요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27절부터 보십시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몰려왔던 사람들을 빼앗아서 예수님께로 돌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죄 용서의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아무리 세례를 받고, 아무리 정결 예식을 행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깨끗해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매주일 드리는 예배가 여러분들 개인에게 가장 적절한, 여러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양곡으로, 여러분들이 가장 원하는 형태로 진행되면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것 같아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통하여 여러분들을 만나주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 어떤 형태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매주일 예배 때 부르는 찬양이 여러분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찬양이라고, 여러분들이 잘 모르는 찬양이라고, 예배의 순서나 형태가 여러분들과 잘 맞지 않는다고하여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통하여 여러분을 찾아가신다면 여러분들은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주시는냐? 은혜를 주시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사람이 정결하게 되는 의식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혹은 여러 가지 잘못으로 자신의 몸과 영혼을 더럽혔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레위기의 정결의식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몸과 영혼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눈에 보이는 예식일 뿐이었습니다. 
세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분을 믿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깨끗하게 씻어주신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형태로,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하느냐? 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을 깨끗이 씻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내용이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믿는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 

세례 요한의 제자들, 그리고 많은 무리들의 관심은 형식에 있었습니다. 어떠한 형태인지가 중요했습니다. 어떠한 형식으로, 어떠한 순서와 방식으로 깨끗하게 되는 예식을 진행하는지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어떠한 형식으로 정결 예식을 행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그 형태만을 바라보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은 어떠한 형태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지에 온통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내용은 형식을 통해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예배라는 형식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예배라는 형식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의 형식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형식이 곧 내용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배의 형태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장해 줄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예배의 형태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장해 줄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세례와 성만찬을 행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예배의 형식 속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우리의 예배를 살아있는 예배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함께 부르고 싶은 찬양은 “내가 주인삼은”입니다. 이렇게 시작하지요.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여러분,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형식들, 우리가 불평했던 어떤 형식들은 나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를까? 우리 교회는 장소가 왜 이렇게 작을까? 왜 매주일 모르는 찬양이 많을까? 그것들이 우리의 우상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예배를 통하여 내를 만나주시는 분, 예배를 통하여 내 마음을 만져주시는 분, 예배를 통하여 나의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분, 예배를 통하여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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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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