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0. 6. 10.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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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는 아래의 설교에 이은 감사절 시리즈 설교입니다>

 

[감사절] 데살로니가후서 1장 3-4절 “성장하는 믿음”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세쿼이아 국립공원은 규모가 작아 크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매우 멋진 공원입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제너럴셔먼트리’(General Sherman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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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철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1927년 사우스 런던(South London)의 시청에서 매우 중요한 대중연설을 하였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사람은 당시 워낙 유명한 사상가였기에 그 연설은 온 유럽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그의 연설은 책으로도 출판되었고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이 읽고 있습니다. 그 연설과 책의 제목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입니다. 그 제목에서부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러셀은 그의 강연과 이 책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습니다. 러셀의 연설과 그의 책이 큰 반향을 일으켰기에 그에 대한 기독교 내의 반응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표적인 영국 복음주의 사상가였던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입니다. 

존 스토트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Why I Am A Christian)라는 책에서 자신의 회심 과정을 소개합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기독교 교육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루터교 교인으로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매우 열심이 있었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존 스토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로 제일 먼저 그의 기독교적 배경을 꼽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존 스토트는 바로 덧붙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신의 기독교적 배경, 곧 자신이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기독교 배경의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하나의 이유는 될 수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존 스토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두 번째 이유로 자신이 회심을 경험했던 어느 날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고, 기독교적 배경의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마음에 확신이 없었던 어느 날 존 스토트는 성서유니온이 주관하는 집회에서 한 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때 설교를 하셨던 배쉬라는 분은 이렇게 선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빌라도처럼 예수님을 거부하든지, 그분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이 선포가 젊은 스토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 집회가 끝나고 존 스토트는 배쉬라는 분을 바로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배쉬는 다시 한번 존 스토트에게 요한계시록의 말씀으로 권면했다고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이 말씀을 들은 존 스토트는 그날 밤 자신의 숙소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에 모시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존 스토트는 자신이 회심을 경험했던 이날의 사건을 서술하면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자신이 배쉬라는 분의 말씀과 그의 권면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했지만, 그날 저녁 들었던 말씀과 권면, 혹은 자신의 결단이 존 스토트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존 스토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존 스토트의 글을 잠시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는, 
궁극적으로 제 부모나 스승의 영향도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저 자신의 결단 때문도 아니라, 
제가 원하는 길로 도망할 때조차
끈질기게 저를 쫓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 되셨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질문한다면, 만일 누군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삶에 믿음을 포기해버릴 만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여러분은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어떻게 믿음을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이렇게 대답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나는 모태신앙이요,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배웠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렇게 대답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저는 친구의 전도를 받아서, 혹은 가족의 전도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아니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으신 분들은 안 계십니까? ‘나는 내 스스로의 결단으로, 그 누구의 권면이나 충고가 아니라 내 스스로 기독교를 선택하였습니다’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다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전도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에 호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러한 분들이 모두 여러분과 같이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므로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과정은 될 수 있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지금까지도 신앙생활을 하는 그 결정적인 이유는 결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존 스토트와 같이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기도 하였고, 물론 친구와 가족의 전도를 받기도 하였고, 물론 나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던 많은 분들이 계셨지만, 그 모든 과정을 되돌아보니 그 모든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요,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요, 곧 나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말입니다. 


나하만 장군

여러분은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 장군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큰 용사’였다고 묘사합니다. 그는 큰 용사였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서기만 하면 승리 소식을 가져오는 당시 아람 나라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그에 대해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묘사할 만큼 그는 왕의 총애를 받으며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권세를 누리게 되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그에게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해결될 것 같지 않았던 문제가 있었으니 곧, 그 자신이 나병 환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나아만 장군이 몸에 질병, 그것도 나병이라는 당시로서는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에 걸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연히 일어난 일입니까? 그저 나아만이 운이 없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전체 이야기를 알기에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아람 나라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람 나라로 잡혀온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지요. 아람 나라에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남달랐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은 아람에 포로로 끌려오면서 이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이미 포기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아만의 집에서 나아만 아내의 심부름을 하던 이스라엘 소녀는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어요. 비록 아람 나라에 끌려와 있지만 그 마음에는 아직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만이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거침없이 주인에게 말하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나아만의 아내가 심부름시키던 종이 이스라엘 소녀였고, 또 그 소녀가 하나님과 엘리사에 대한 믿음이 마음에 확고했던 사람이었던 것도 우연이었을까요? 이번만큼은 나아만이 너무도 운이 좋았기 때문입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성경의 전체 이야기를 알기에 이번에도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아만 장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온 여종의 말을 듣고 나아만이 이스라엘로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 문에 이르렀을 때, 엘리사가 직접 나오지 않고 종을 보내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만 전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아만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선지자가 직접 나온 것도 아니고, 선지자가 자신의 환부를 붙잡고 기도해준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너무 화가 난 나아만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바로 그때 곁을 지키고 있던 나아만의 부하들이 나아만을 말리잖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손해 볼 일 없으니 그저 한 번 해보자고 설득하지요. 
여러분, 이 장면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가는 바로 그 시점에 나아만을 수행했던 부하들이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자신의 지혜를 가지고 장군을 설득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저 장군의 눈치만 보면서 같이 엘리사에게 욕을 해대며 아람으로 돌아올만한 부하들이 그 자리에 얼마든지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때 나아만의 곁에는 지혜로운 부하들, 그래서 장군을 설득하는 부하들이 있었단 말이죠. 여러분,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것도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그저 나아만이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나아만에 대한 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분명히 확신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나아만 장군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결국 나아만은 요단강에 자신의 몸을 7번 씻고 나병에서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고백하지요.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왕하 5:15) 

아람 사람 나아만이 나병에서 깨끗하게 된 이 사건의 핵심은 바로 이 한 구절입니다. 병이 나았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아니, 하나님이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면 처음부터 병에 들지 않는 것이 더 좋았겠지요.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나아만은 지금까지 자신이 아람에서 섬겼던 모든 신들은 우상에 불과하다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초라하고 거북한 포장지

하나님의 선물 특별히,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은 때로 초라한 포장지에 싸여 있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포장도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그 위대한 선물을 지금 당장이라도 받을 텐데, 문제는 포장이 초라하단 말이에요. 나아만의 경우가 그렇지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하나님은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선물을 무엇으로 포장하셨습니까? 나병, 한센병으로 포장하셨다고요. 

나아만의 때로부터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나오미와 룻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오미와 룻에게 위대한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위대한 선물이란 그들을 통하여 다윗 가문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그 위대한 선물의 포장지가 뭡니까? 그 위대한 선물을 싸고 있는 포장지는 바로 남편의 죽음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도, 며느리인 룻도 모두 남편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잖아요. 그러니 나오미와 룻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그저 초라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도 거북한 포장지에 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으로부터 다시 한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또다시 요셉이라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도 정말 위대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위대한 선물이란 그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출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을 통하여 7년의 극심한 흉년을 지나는 동안 그 가족의 생명은 물론이요, 이집트 지역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사명,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은 어떠한 포장지에 싸여 있었을까요? 형제들로부터 받은 배신, 그리고 누명과 감옥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었잖아요. 

지금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선물이 초라한 포장지, 아니 너무도 거북한 포장지에 싸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나병이라는 포장지에 쌓여 있을지라도 그 안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담겨 있었던 것처럼, 비록 남편의 죽임이라는 너무도 거북한 포장지 안에 다윗 가문의 탄생이라는 위대한 선물이 담겨 있었던 것처럼, 형들로부터의 배신이라는 결코 받고 싶지 않은 포장지 안에는 자신의 가족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위대한 선물이 담겨 있었던 것처럼. 비록 우리에게 건네시는 선물의 포장지가 너무도 초라하고 때로는 너무도 거북할 지라도 그 안에 감겨 있는 하나님의 선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실패를 바꾸어 성공으로

어느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곤 하셨지요. 선교사님이 후원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지에 도착하였을 때도 동일한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많은 현지 사람들이 그 선교사님을 미워하고 적대감을 표출했습니다. 결국 그분은 선교지에 도착한 지 채 한 달도 못 버티고 쫓겨나고 맙니다. 여러분, 십 년이나 일 년을 제가 한 달이라고 잘못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일 년도 아니고, 육 개월도 아니고, 한 달이 채 되지도 않아서 그 선교사님은 선교지에서 야반도주를 하고 맙니다. 

선교지에서 한 달도 버티지 못하였으니 당연히 결신자도 별로 없었습니다. 결신자가 조금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선교사님에게 복음을 들었던 대부분의 현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선교사님이 한 달도 못 버티고 쫓겨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현지인들이 자신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 전체가 기독교에 대해, 선교사님이 전해준 복음에 대해 아주 강력한 반감이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선교 실패한 거죠? 아니, 선교지에서 한 달도 못 버티고 쫓겨났고 선교사님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도 몇 명 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온 마을에 기독교에 대해, 복음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가 가득해졌으니 그 선교는 당연히 실패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여러분, 이 선교사님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거든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선교지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방문했던 데살로니가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방문했을 때 고작 3주간만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유대인들의 강력한 공격 때문에 깊은 밤 어두움을 틈타 데살로니가를 빠져나와야 베뢰아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철저한 실패 아닌가요? 이 정도면 더 이상 데살로니가에는 성도도 없고, 교회도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라워요. 지난주에 함께 묵상하였던 데살로니가후서 1장 3절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과연 어떻게 데살로니가에 이처럼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과 같이 훌륭한 선교사님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모두가 순종적이고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 어떠한 인간적인 설명도 불가능해요.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함께 모이는 교회가 일어나며,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처럼 그들의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사도 바울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께서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너희를 어떻게 하여 주셨습니까? ‘택하여 주셨습니다.’ 14절을 보시면,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그다음에 ‘너희를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성도로 부른 것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교회로 부른 것도 아닙니다. 탁월한 선교사 바울이 그들을 불렀기에 그들이 응답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어요. 그러니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요,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요, 나아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10개월 동안 어떠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선교처럼 실패를 경험하셨습니까? 나아만 장군처럼 못쓸 질병이 여러분의 발목을 붙잡았나요? 나오미와 룻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셨습니까? 혹 요셉과 같이 가족 간의 관계가 불화를 넘어 비극으로 치닫고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으로 선택하셨고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불러 생명이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 보이는 포장지는 초라하고, 아니 너무도 거북하여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그 안에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담겨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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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