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가장 처음에 위치한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천지장조의 장면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시작은 온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부터 시작합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창세기가 온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출발하였다면,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태복음 1장 1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족보를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 다윗,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었던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온 인류의 언어가 흐트러졌고 모든 민족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창 11장).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선택하시면서 말이죠.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계보가 새롭게 시작되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가 드디어 시작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아브라함이 차지하는 위치입니다.
둘째로 다윗입니다. 다윗으로부터 비로소 이스라엘에 왕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다윗 이전에 사울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정의 진정한 시작점, 1나아가 이스라엘 역사상 왕정의 최고 전성기는 다윗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에 대한 분명한 경계는 다윗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성취됩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온 이스라엘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 시대가 얼마나 좋으셨는지, 이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서 일어나는 많은 왕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다윗과 그의 시대를 그 기준으로 삼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자손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그것이 구약성경입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위대한 것이었지만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져 드디어 완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아니라 온 인류가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는 관점에서 전 세계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마태복음 1장 1절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하나님은 기원전 2천년 경,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천년 경,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중동지역에 펼쳐 보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약 천 년이 흐른 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장에 소개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깊이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어떻게 펼치시는지를 살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짧은 시선으로 평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오해합니다. 우리의 삶에 커다란 시련이 찾아오면 우리는 목회자들을 찾아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교만해지지 않도록 잠시 시련을 주시는 것일까요? 여러분, 그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산은 워낙 스케일이 크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나의 앞에 닦친 단 하나의 시련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 수가 없지요.
그런데 마태복음 1장은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약 2천 동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여줍니다. 이 정도 스케일이 되니,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열심히 묵상하다보면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장자라고 믿음의 계보가 아니다
오늘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족보를 묵상합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족보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2절부터 5절까지 한 목소로리 봉독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족보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이 족보가 장자로만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누구를 낳았습니까?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인가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이삭을 낳기 14년 전,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여자를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계보는 첫째 아들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 이어집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요. 이삭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낳은 아들이고, 이스마엘은 여종 하갈이 낳은 아들이라고요.
그러면 그 뒤에 등장하는 족보는 어떻습니까? 2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이삭의 첫째 아들이 야곱인가요? 아닙니다. 이삭의 첫째 아들은 에서입니다. 야곱은 둘째 아들이죠. 게다가 에서와 야곱은 모두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낳은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계보는 이삭의 첫째 아들 에서가 아닌 둘째 아들 야곱에게 이어집니다. 그 다음의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야곱의 4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은 르우벤이지요.
조금 더 볼까요? 3절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창세기를 조금 공부하신 분들은 다말이 유다의 며느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며느리 다말을 통해 베레스와 세라를 낳기 이전에, 이미 3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곧 엘, 오난, 셀라입니다. 첫째 아들 엘과 둘째 아들 오난은 자식이 없이 죽었지요. 그러면 그 다음 장자의 권한이 누구에게 가야 합니까? 셋째 아들 셀라에게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믿음의 계보는 베레스에게로 이어집니다. 여기에서도 특이한 사실이 눈에 띕니다. 다말이 낳은 베레스와 세라 가운데 누가 형이지요? 세라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계보는 오히려 동생인 베레스에게 이어지죠.
베레스 이후로, 람, 아미나답, 나손, 살몬, 보아스, 오벳, 그리고 이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들이 몇째 아들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아는 또 하나의 예가 등장하네요.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모두 7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가운데 다윗이 몇째 아들입니까? 막내아들입니다. 오히려 막내가 믿음의 계보를 이어갑니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다윗이 왕이었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조금 위로 올라가서 요셉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가장 출세했던 사람은 이집트의 국무 총리였던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 가운데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는 사람은 요셉의 넷째 형 유다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계보는 장자라고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훌륭한 교회의 일꾼이셨다고 그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목회자의 자녀라고 반드시 그 마음에 믿음이 반듯하리라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교회 중직자의 자녀라고 어렸을 때부터 믿음의 뿌리가 깊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그 또한 오산입니다. 제가 청소년부서 담당 교역자로 있을 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신앙 교육이 가장 어려운 학생은 첫째로 목회자 자녀이고, 둘째로 교회 중직자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에게는 교회가 너무도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그 편안함을 뒤집어 말하면 교회에 나오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예배의 감격을 크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지요? 교회는 원래 그런 곳이라는 자신의 생각이 어렸을 때부터 머릿속에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과거의 헌신이 밑받침된 교회는 장자의 권한이 반드시 첫째 아들에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그러한 위기 속에 있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교회는 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신앙인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 교회에서 철야로 기도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였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세대로 넘어오면서 복음의 능력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교회의 건물은 남아 있고, 과거의 화려한 역사도 남아 있지만 교회는 무기력합니다. 그 중요한 하나의 이유를 저는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서 찾게 됩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자녀의 신앙 교육에 너무도 무관심 했던 것입니다. 아니, 목회자 자녀인데, 아니, 장로의 아들과 딸인데, 아니 안수 집사 혹은 권사의 자녀인데 그 믿음이 어디 가겠느냐고 안일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믿음의 계보에서 장자의 이름은 찾아보기기 힘이 들 정도입니다.
예수님 족보의 여성들
마태복음 1장에 나와 있는 족보를 묵상하다보면 여성들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우리 다 함께 3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를 누구를 통해 낳았습니까? 다말을 통해 낳았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아내가 아니라,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참 이상한 족보입니다. 또 5절을 보십시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살몬은 보아스를 누구를 통해 낳았습니까? 라합니다. 라합이라는 여성 앞에는 어떠한 수식어가 붙지요? ‘기생’이라는 단어가 붙습니다. 그 뒤에 보아스는 오벳을 낳는데 누구를 통해 낳습니까? 룻을 통해 낳습니다. 룻은 사별자입니다. 첫 남편을 자신의 고향 모압에서 먼저 보내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보아스와 결혼을 한 여성이지요. 한 마디로 예수님 족보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하나 같이 가족관계에 있어서 아픔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우리가 살피는 3명의 여성은 단 한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 없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가나안 사람입니다. 보아스의 어머니 라합은 여리고 사람이지요. 그리고 보아스의 아내가 되는 룻은 모압 사람입니다. 다 이방 사람이에요.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입니다. 가정에 아픔과 상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여성들이 믿음의 계보에 포함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겉모습만 보면,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되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방 여인이 의인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포함됩니까? 어떻게 가정의 아픔이 있는 여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포함됩니까? 그런데 포함돼요.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겉모습을 보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출신만 놓고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만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니 복음입니다. 그러니 은혜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행적인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족보를 가장 먼저 기록합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족보를 읽으면서 무엇을 깨달으라는 말씀일까요? 족보만 자랑하다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다말, 라합, 룻과 같이 이방 여인이라도 지금 나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구하면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초대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후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도 이와 같지 않나요?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이야기를 하죠. 우리 로마서의 말씀을 함께 찾아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9장 30절부터 32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이방인들은 의롭지 않아요. 율법도 몰라요. 하나님에 대해서도 깊이 모릅니다. 그러니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유로 겸손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매어달립니다. 그런데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당당합니다. 자신의 행위를 의지합니다. 자신의 족보를 의지합니다. 그러니 자신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신감이 충만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족보,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저는 마태가 참으로 멋있게 느껴집니다. 어떻게 예수님에 대한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멋지게 쓸 수가 있었을까요? 정말이지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서술하면서, 결국에는 족보를 의지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의인의 족보를 서술하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나의 아버지가 누구고, 나의 어머니가 누구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찾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라합과 보아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또 하나의 사실을 더 나누면서 설교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장 5절입니다. 5절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살몬에 대해서는 성경의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합은 여리고에 살던 여인이었거든요. 그러므로 살몬과 라합이 결혼을 하여 보아스를 낳은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한 이후의 사건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도력 아래에서 가나안을 점령할 때에는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자 그들은 사사시대를 맞이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던 시대이죠. 마태복음 1장 5절을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고 합니다. 룻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구약 성경 룻기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사사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라합과 룻은 사사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제 무엇인가 떠오르는 것이 없으신가요?
믿음의 계보에서 라합과 룻이 부각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 그 이름 앞에 ‘기생’이라는 별명이 붙는 라합은 하나님이 두려운 줄 알고 성문을 열어주었던 사람입니다. 모압 여인 룻은 자신의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홀로 남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자신의 고향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주셨지만 자신을 멀리 떠나려고만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 여인이고 가정에 큰 아픔이 있는 여인들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베들레헴까지 시어머니를 찾아온 라합이나 룻 가운데 누구를 더 귀하게 여기시겠습니까? 당연히 라합과 룻이 귀하죠. 그러니 믿음의 계보에 라합과 룻이 들어갑니다.
라합과 룻이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흠이 하나도 없기에 그리스도의 족보와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흠이 있어요, 잘못이 있습니다. 가정의 아픔이 있었죠.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갈 때 그래도 자신은 섬기겠다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나오는 그들의 결심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요즘에는 교회도 여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이때 예수 믿음 지 3대가 되고 예수 믿은 지 4대가 되는 가문에서 꼭 믿음의 영웅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떠하든지 나는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다른 사람들이 어떠하든지 나는 주님을 섬기겠다고 마음먹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 구약학자 기민석은 지파동맹이라는 옛질서에서 벗어나 왕국이라는 새로운 질서로 들어선 것은 다윗으로부터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기민석, <구약의 뒷골목 풍경> (서울: 예책, 2013), 208-213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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