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주셔서, 사명을 위한 인생으로 우리를 바꾸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실함이 하나님의 사명은 아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요한과 야고보 형제입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18절)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21절)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를 제자로 부르시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갈릴리의 어부로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는 거지요. 어떤 분들은 오늘의 본문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의 특징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첫째로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는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특별히 오늘의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5장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절). 지금 베드로는 고기를 잡기 위해서 밤을 꼬박 새우면서 열심히 일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떻다는 겁니까? 성실한 사람이라는 설명입니다. 물고기가 잡히기 않는다고 쉽게 포기하거나 다른 동네로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면서까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그가 베드로와 안드레였고 하나님은 그렇게 성실한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거죠.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부모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과 야고보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누구를 도와서 그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장면을 보시고, 세베대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셨거든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사람은 누구라는 거죠? 부모님을 잘 돕는 사람들이라는 설명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대해서 이와 같은 설명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성실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열정도 없고, 성실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맡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성실한 사람을 들어 사용하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한 설명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오늘 우리의 삶에 오늘 본문을 바르게 적용하는 데에 부족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성실할 사람을 선택하시고, 성실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신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사회는 무한경쟁사회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성실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워요.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았다고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지요. 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우리 시대에 정말 밤을 새우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지만,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어부로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 성실한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보다는 무엇인가 열심히는 살지만 하나님의 사명과는 상관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때로 열심히 사는 것에 만족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지 못했던 제자들의 모습일 뿐입니다. 밤을 새워서 열심히 그물을 던집니다. 성실하지요. 그의 가족들이 바라볼 때 든든한 아버지, 든든한 남편, 든든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없습니다. 마치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무한 경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행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돌이켜볼 때 인간미가 흐르고, 사람의 냄새가 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가정을 세우고, 열심히 일해서 교회에 십일조 하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의 봉사도 열심히 하지만, 그러한 열심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가치,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 하나님의 사명
이제 열심히는 살아가지만, 밤을 새우면서까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없던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의 삶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꾸십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19절)
베드로와 안드레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물고기를 잡는 것이니 그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일하다보면 가족식구들도 먹여 살리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죠. 그 이상의 어떠한 이상이나, 사상이나, 철학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삶의 가치보다는 자신의 삶에 그저 충실한 삶을 살고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여러분, 당시에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 잡아먹고 사는 어부들이 왜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세베대, 이렇게 다섯 명 뿐이었겠습니까? 많은 어부들이 있었겠죠. 그리고 그들 중에는 베드로보더 더 성실하고, 더 많은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데 그러한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엇이 중요하죠? 예수님이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부르셨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일상에 파묻혀 살아가다가 삶을 마무리 할 때 인생의 허무를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따라가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는 고상한 철학과 사상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삶을 던져서,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의 철학과 이상을 실천하기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굽히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보람찬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도 계세요. 그러나 자신의 철학과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달려가는 분들은 결국 그 모든 결과를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가치는 나의 머리에서 나온 이상도 아니고, 나의 경험과 삶에서 나온 꿈도 아니고 나의 가치관에서 나온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가치가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치를 절대 포기할 수도 없고,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지 못할지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따라가는 가치는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당대에 다 성취하지 못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부여하신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씀 속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사명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그리스도인의 가치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분명히 들어갑니다. 그러나 전도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4명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물론 전도도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사명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단지, 주일날 교회에 출석하고 때때로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제자의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소망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일상 속에 파묻혀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 같지만,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르심이 들리고 나아가 우리가 예수님의 그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우리의 삶이 제자의 삶이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선택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4명의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이제 그들이 반응합니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0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2절)
마태복음 4장 20절과 22절은 모두 동일한 두 개의 동사가 등장합니다. 첫번째 동사는 ‘버려두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동사는 ‘따르니라’입니다.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그동안 자신과 가족이 먹고 살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리스도인의 삶, 제자로서의 삶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등바등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오늘 본문과 많이 달라요.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 가운데 두 명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베드로의 형제였던 안드레입니다. 그리고 안드레는 자기의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소개합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처음 보시자마자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네가 장차 게바가 되리라" 반석이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반석, 교회의 든든한 반석이 될 비전을 선언하셨던 겁니다.
이러한 요한복음의 스토리는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4장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이야기 중에 최소한 하나는 거짓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죠. 이 두 가지의 사건은 시간의 차이를 두고 모두 일어난 일입니다. 아마도 요한복음 1장의 사건이 시간적으로 앞서 일어났던 일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 1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 1장에서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그 점이 분명해집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오늘 본문과 동일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기 전에 수많은 무리를 가르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셨는지,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땅에서 조금 떨어지신 상태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그 배가 베드로의 배였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는 고기를 잡는 자신의 일상 속에 살아갑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주시는 '베드로', '게바', 곧 반석이라는 비전이 그의 삶을 움직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때가 되어서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제자로서의 삶,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따르는 삶을 제안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드디어 아무런 비전도 없이 살아가던 예전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따라 사는 삶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도전 하고자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 아직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모르는 분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예수님께 나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은 지 몇 년이 지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꾸준히 비전을 주십니다. 이제는 거기에 응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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